우크라이나 고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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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고려인
언어
우크라이나어
종교
민족계통
한민족
기원·발상 한반도

우크라이나 고려인고려인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이후 1956년 소련내 고려인의 복권(реабилитацией корейского)으로 인해 대학 진학, 고본지(Гобонди)의 목적으로 우크라이나 지방에 이주한 한국인 디아스포라를 뜻한다.

1937년부터 1938년까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은 절대다수가 집단 농장 콜호즈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들은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을 떠나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었으나, 1950년대 콜호즈의 생활이 안정화되면서 고려인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타슈켄트알마티의 고등교육기관뿐만 아니라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키예프, 하리코프 등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대도시의 고등교육기관에 입학시키고자 하였다.[1]

1953년 흐루쇼프의 집권은 고려인의 거주지 제한이 해제되는 계기가 되었다. 1956년을 전후하여 고려인들은 붉은 군대에서 복무할 수 있게 되었고, 한국어로 작품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소련의 고등 교육 기관에서 교육받을 기회도 부여되었다.[2] 해당 조치로 극동 지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연해주나 아무르 지역으로 돌아간 고려인은 소수였다.[3] 이러한 배경에서 대도시 중 하나인 키예프를 선택하여 유학을 위해 이주한 이들이 있었고, 키예프의 우크라이나 고려인 사회에서 원로를 형성했다.[4]

북캅카스 일대와 크림 반도에서 오데사에 이르기까지 남부 우크라이나 지역에 형성된 비옥한 흑토 지대는 기회의 땅으로 여겨졌다.[5] 여기에는 크림, 오데사, 헤르손, 하리코프 등이 있다.[6]

1998년 9월 하르키우에는 하르코우 181번 정수리학교가 설립되었다.[7] 2014년 크림 사태 이전까지 우크라이나에는 약 3만 명의 고려인이 거주했으나,[8]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은 우크라이나인들뿐만 아니라 고려인들의 생활에도 영향을 주었다.[9] 교육을 위해 우크라이나로 이주하였던 이들은 유로 마이단,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우크라이나 동부의 내전과 같은 정치적 혼란과, 여기에서 비롯된 경제적 어려움으로 우크라이나인들과 마찬 가지로 폴란드, 체코, 독일 등 서구 국가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계절농업을 위해 이주한 이들은 대한민국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아졌다.[10][11]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우크라이나 난민을 발생시켰으며, 이들 중에는 우크라이나 고려인도 포함되어 있다.[12] 이들의 피란은 생존시설의 붕괴에서 기인한다.[13] 이들 중 일부는 대한민국에 입국하였는데, 여기에는 한국이 그들의 역사적 기원이라는 점이 작용하기도 했다.[14]

각주[편집]

  1. 임영상 2009, 294쪽: "1937~38년 '일본의 스파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들은 절대다수가 집단농장 콜호즈에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법적으로는 거 주 공화국인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을 떠날 수도 없었다. 그러나 1950년대 초반 콜호즈의 생활이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고려인들은 그들 자녀들이 타슈켄트 와 알마티뿐만 아니라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키예프, 하리코프 등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대도시의 고등교육기관에 진학할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2) 1953년 스탈린 사후 고려인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지면서부터는 일시에 많은 이익을 기대할 수 있는 계절농업(고본질)을 위해 중앙아시아를 떠나기도 했다"
  2. Kim 2017, 41쪽: "В 1956 году Н.С. Хрущев осудил культ личности Сталина на 20-м съезде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ой партии СССР. Этот период считается неформальной реабилитацией корейского населения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Вскоре после этого с корейцев были полностью сняты ограничения при выборе места жительства. Более того, советским гражданам корейской национальности отныне разрешалось служить в рядах РККА, выпускать собственную литературу и заниматься наукой при Академии Наук СССР" (1956년 흐루쇼프는 제20차 전소 공산당 회의에서 스탈린을 비난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 시기는 소련 내 고려인에 대한 비공식적 복권(реабилитацией) 시기로 여겨진다. 이 직후 거주지 제한에 있어 고려인에 대한 사안은 완전히 소멸하였다. 이로 인해 고려인은 붉은 군대에서 복무할 수 있게 되었고, 그들의 언어로 문학 활동을 하는 데 있어 제한이 사라졌으며, 소련 과학 아카데미에서 교육받을 수 있게 되었다)
  3. Kim 2017, 42쪽: "Ожидалось, что после принятия таких решений корейское население массово вернется на Дальний Восток, однако вопреки ожиданиям на территорию Приморья и Приамурья вернулось малое количество семей." (이러한 일련의 조치가 고려인들의 집단적인 귀환을 야기할 것이라는, 예상을 했다. 하지만 적은 수의 가구가 극동 지대나 아무르 지대로 귀환했다)
  4. 고가영 2019, 107쪽: "유학 이주를 감행했던 이들은 주로 키예프에 거주하는 원로 고려인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1956년에 거주이전의 자유를 제한한 법이 철폐된 이후, 대도시 중 하나인 키예프를 선택하여 유학이주를 감행한 이들이다. 이들 중 대부분은 우크라이나의 주류사회로의 진입에 성공했다."
  5. 임영상 2009, 294쪽: "러시아의 북카프카즈 일대와 크림반도에서 오뎃싸에 이르는 남부 우크라이나 지역의 비옥한 흑토지대가 바로 고려인들에게 성공하면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실제로 이들 지역에 진출하여 자리를 잡은 고려인들은 성공 스토리를 만든 사람들이 많았다.3)"
  6. 고가영 2019, 107쪽: "이는 주로 남부 러시아 지역과 우크라이나의 동남부 농업지역(크림, 오데사, 헤르손, 하리코프 등)이다."
  7. 임영상 2009, 313쪽: "1998년 9월, 3명의 학생으로 시작하여 '한국어, 한국문학, 한국사'를 필수 교과로 부과하고 있는 하리코프 181번 정수리학교가 2008년 9월 개교 10주년을 맞았다."
  8. 고가영 2019, 107쪽: "2014년 크림 사태가 발발하기 이전까지 우크라이나에는 약 3만 명의 한인 디아스포라, 즉 고려인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9. 고가영 2019, 115쪽: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혼란, 그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은 우크라이나 국민들 개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주민인 고려인들의 삶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쳤다."
  10. 고가영 2019, 135쪽: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로 마이단 사건,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동부 내전 이래 접경지대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혼란, 그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은 우크 라이나 국민들 개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주민인 고려인들의 삶에도 고 스란히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이러한 영향은 고려인들의 경우는 지역별, 계층별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고려인은 두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1956년 거주제한 철폐이후 유학이주를 온 엘리트들로 구성된 올드커머들과 소비에트 시기 고본지를 나오던 지역으로 농경이주를 감행한 뉴커머들이다. 더 나 은 미래를 위해 가장 유럽과 가까운 지역인 우크라이나로 이주해 왔던 이들 고려 인들은 미래의 전망을 상실해 가는 우크라이나에서 또 다시 이주를 감행하고 있다."
  11. 고가영 2019, 136쪽: "고려인 올드커머들이 선택한 이주지는 폴란드, 체코, 독일 등 서구 국가들이다. 우크라이나인들 역시 이 지역들로 대규모로 이주하고 있다. 고려인들이 직면 하고 있는 어려움이 우크라이나인들 대다수가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는 고려인들을 통해 우크라이나 사회를 더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농경이주를 감행했던 뉴커머들의 대부분은 무국적자라는 신분상의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정부와 고려인 협회의 도움으로 무국적자라는 신분상의 문제 가 점차 해결되었지만, 크림 사태이후 새롭게 불어 닥친 경제적 어려움으로 이들 은 새로운 이주 대상지역으로 다수가 한국을 선택하고 있다. 이는 우크라이나인들과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려인들에게는 하나의 선택지가 더 주어져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의 순간을 기회로 삼아 오히려 고려인 디아스포라들의 네트워크를 더욱 강화하여 현재의 위기를 타개해 가는 젊은 기업가들도 있으며, 한국과의 교류를 기회로 삼아 자신들의 입지를 새롭게 구축해 가는 사할린 한인들도 있다."
  12. 김영술 2022, 3쪽: "러시아가 시작한 전쟁에 갈수록 미국과 서방은 우크라이나에 강력한 무기 공급을 지원하고 러시아는 더욱 강하게 이에 대응하면서 우크라이나 민간인의 심각한 살상, 주택과 사회시설이 파괴되고 있으며, 오히려 전쟁은 연장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난민이 발생하고 있으며 우크라이나인들은 세계 각국으로 이산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난민 중에는 고려인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13. 김영술 2022, 5쪽: "이들의 탈출 이유는 전쟁으로 생존 시설의 붕괴이기 때문이다"
  14. 김영술 2022, 5쪽: "특히 이들이 한국으로 입국한 것은 역사적 모국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참고 문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