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귀스트 로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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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년 11월 12일 - 1917년 11월 17일)은 프랑스의 조각가이며, 프랑스 파리 중산층 가정에서 그의 어머니 메리 체퍼와 경찰청 사무원이었던 그의 아버지 진 밥티스트 로댕 사이에서 출생했다. 로댕은 10세 때부터 혼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고 14세부터 17세까지 미술과 수학이 전문화된 프티 에콜(Petite École)이라는 학교에서 드로윙과 페인팅을 공부하였다. 그의 드로윙 선생님이었던 르코크 드 브아도드랑(Horace Lecoq de Boisbaudran)으로부터 교육을 받았다.르코크 드 브아도드랑은 그의 학생들이 그들의 회상을 그리고 두 눈으로 관찰하는 것이 그들의 인격이 첫 번째로 발전되는 계기라고 믿었다. 이러한 사상은 로댕의 조각품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57년 로댕은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에 입학하기 위해서 자신의 동료를 모델로 만든 찰흙작품을 제출하지만 입학하지는 못하였다. 그로부터 두 작품을 더 제출하였으나 거부되었다. 그랜드 에콜에 입학하기 위한 요청사항도 그 당시 높지 않았으므로 로댕은 심히 좌절하게 된다. 그의 작품들이 거부되었던 가장 큰 원인은 판정가들이 로댕의 새로운 감각적인 조각품들보다는 신고전주의적인 작품들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1857년 로댕은 프티 에콜을 떠나게 된다. 그 후 20여년간을 장식품들과 건축장식들을 제출하는 일을 하는 장인으로 살았다.
1862년 그의 누이였던 마리아(Maria)는 수도원에서 복막염으로 사망하게 된다. 그녀에게 믿음직스럽지 않은 구혼자를 소개해 주었던 로댕은 이 일에 죄책감을 느끼고 괴로워한다. 로댕은 결국 조각을 그만두고 카톨리교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신부인 피터 주리안 데이말드(Peter Julian Eymard) 는 로댕이 카롤릭교에있어서 둔각을 발하지 못하는 것을 느끼고는 그가 다시 조각을 하기를 격려한다. 로댕은 다시 장식품들을 조각하는 일을 하게 되고 동물 조각가였던 안토니 루이즈 베리(Antoine-Louis Barye)의 수업에 참여하게 된다. 동물들이 움직일 때의 정교한 근육조직들을 훌륭히 표현했던 안토니 루이즈 베리의 작품들은 의미심장하게 로댕에게 큰 영향을 준다.
1864년 평생의 반려자인 재봉사였던 로즈 뵈레를 만나게 된다. 그들은 아들 오귀스트 외젠 부렛(Auguste-Eugène Beuret)을 낳았다. 그 당시 처음 조각 전시회를 가졌다. 전시회를 계기로 명성 높은 조각가 카리에 벨뢰즈 아틀리에(Albert-Ernest Carrier-Belleuse)의 작업실에서 작업을 하게 되었다. 지붕, 계단, 그리고 출입문 장식들을 도맡아 하였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전쟁으로 인해 로댕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러나 카리에 벨뢰즈 아틀리에의 요청으로 벨기에, 브뤼셀에서 증권 거래소를 건물장식들을 만들며 활동을 하였다.
1875년부터 이탈리아에서 체류했고 1877년에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칼레의 시민》, 《지옥문》, 《생각하는 사람》 등이 있다. 카미유 클로델은 그의 연인이다. 지옥의 문은 로댕이 1880년에 주문받은 평생 작업하게 될 작품이었다. 1881~1882년 자신의 제자이자 동업작가인 카미유 클라로델(작가 콜로델의 누이동생)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클로델은 16년 뒤 그와의 결별 후 정신이상이 되고 로댕은 <칼레의 시민들>, <빅토르 위고>, <발자크> 같은 중요한 여러 작품의 주문을 받는다. 이 중 마지막 두 작품은 거절을 당한다. 1900년에 로댕은 조각가로서 대성공을 거둔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1905년 그의 비서로 활동했으며 1908년에는 현재의 로댕 미술관인 비롱 호텔을 빌리도록 촉구하였다. 1916년 작품과 전시물을 국가에 기증하고 1917년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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