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서씨: 두 판 사이의 차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태그: 되돌려진 기여
편집 요약 없음
태그: 되돌려진 기여
63번째 줄: 63번째 줄:
[[분류:서씨]]
[[분류:서씨]]
[[분류:부여 서씨]]
[[분류:부여 서씨]]
[[분류:이천 서씨]]
[[분류:백제의 가문]]
[[분류:충청남도 소재 성씨]]
[[분류:충청남도 소재 성씨]]
[[분류:부여군]]
[[분류:부여군]]

2020년 10월 15일 (목) 09:33 판

부여 서씨(扶餘 徐氏)
관향충청남도 부여군
시조부여융(扶餘隆)
중시조서존(徐存)
집성촌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광석리
평안남도 개천군
주요 인물서익, 서필원, 서성, 서승진
인구(2015년)17,145명
비고백제의 왕족

부여 서씨(扶餘 徐氏)는 충청남도 부여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扶餘隆)이다.

역사

부여 서씨의 시조는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扶餘隆)이다. 660년(의자왕 20)에 백제가 나당(羅唐) 연합군에 패한 뒤에 멸망되어 의자왕과 태자 등 2,000여명은 당나라에 압송되었다. 당나라 고종은 의자왕에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품계를 내리고, 아들 부여융에게 서씨의 성을 하사하여 본국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 후 세계는 알 수 없었는데 서융의 원손으로 고려 때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태원군(太源君)에 봉해진 서존(徐存)을 1세조로 한다. 서존의 11대손은 서수손(徐秀孫)이다.

인물

  • 서익(徐益, 1542 ~ 1587년) : 자 군수(君受), 호 만죽(萬竹), 만죽헌(萬竹軒). 서수손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진사 서진남(徐震男)이며, 어머니는 광주이씨(廣州李氏)로 직제학 이약해(李若海)의 딸이다. 1554년(명종 9) 13세 때 향시(鄕試)에 장원하고, 1564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1] 병조·이조좌랑, 교리, 사인(舍人)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서천군수·안동부사·의주목사 등을 지냈다. 문장과 도덕, 그리고 기절(氣節)이 뛰어나 이이(李珥)·정철(鄭澈)로부터 지우(志友)로 인정받았다. 의주목사로 있을 때에는 정여립(鄭汝立)으로부터 탄핵을 받은 이이와 정철을 변호하는 소를 올렸다가 파직되기도 하였다. 의주에서는 이이의 영향을 받아 육조방략(六條方略)으로써 북방을 선무(宣撫)하였으며, 돌아와서는 12책(策)을 올리기도 하였다. 충청남도 은진(恩津)의 갈산서원(葛山書院)에 배향되었고, 효암서원을 거쳐 현재 행림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저서로는 『만죽헌집(萬竹軒集)』 1권과 시조 2수가 있다.
  • 서필원(徐必遠, 1614년 ~ 1671) : 1648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69년 형조판서를 거쳐 1671년 병조판서가 되었다. 왕에게 직언을 잘하여 당대의 오직(五直)이라 불렸다. 시호는 정의(貞毅)이다.
  • 서성(徐晟, 1942년 ~ ) : 대법원 대법관
  • 서한범(徐漢範, 1945년 ~ ) : 단국대학교 국악과 교수
  • 서승직(徐承稷, 1949년 ~ ) : 인하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
  • 서승진(徐承鎭, 1953년 ~ ) : 대한민국 제24대 산림청장
  • 서의식(徐毅植, 1956년 ~ ) :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 서희석(徐熙錫, 1968년 ~ ) : 부산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과거 급제자

부여 서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4명을 배출하였다.

문과

서도유(徐道裕) 서익(徐益) 서정훈(徐鼎勳) 서필원(徐必遠)

무과

서경은(徐慶殷) 서귀남(徐貴男) 서내원(徐來遠) 서대인(徐大仁) 서시현(徐時賢) 서인일(徐仁一) 서필후(徐必厚) 서행보(徐行輔) 서행진(徐行進) 서호인(徐好仁)

생원시

서경복(徐景福) 서규훈(徐奎勳) 서내석(徐來碩) 서내익(徐來益) 서병기(徐秉箕) 서상민(徐相民) 서상훈(徐尙勳) 서석록(徐錫祿) 서영로(徐榮老) 서응로(徐應魯) 서익(徐益) 서정민(徐廷民) 서희적(徐希積)

진사시

서경성(徐敬成) 서기도(徐基道) 서병규(徐秉奎) 서병덕(徐秉德) 서병호(徐秉浩) 서복일(徐福一) 서숭수(徐嵩壽) 서승교(徐承敎) 서영택(徐榮宅) 서필원(徐必遠)

율과

서경식(徐慶植) 서병숙(徐秉璹) 서응호(徐應浩) 서종건(徐終健) 서홍선(徐弘選) 서홍수(徐弘遂) 서홍적(徐弘迪) 서홍진(徐弘進)

본관

부여(扶餘)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로 660년(백제 의자왕 20)에 나당(羅唐)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면서 신라에 예속되어 672년(신라 문무왕 12)에 부여도독부가 설치되었으며, 751년(경덕왕 10)에 이르러 부여현(扶餘縣)이라고 개칭되었다. 757년(경덕왕 16)에 부여군으로 고치고 웅주(熊州) 영현에 두었다. 1018년(고려 현종 9) 공주에 예속되었다가, 1172년(명종 2)에 감무(監務)를 두면서 독립하여 부여현으로 조선 말까지 유지되다가 1896년에 충청남도 부여군이 되었다.

집성촌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삼전리에 부여서씨 재실(夫餘徐氏 齋室)이 있다.[2]

같이 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