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부여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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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서씨 이재원 님께서 부여서씨대종회(http://cafe.daum.net/seo-2000) 에 올린 글과 관련해 부여 서씨 대종회에서는 아래와 같이 입장을 밝혔습니다. 요약하면 부여 서씨는 이천 서씨와 시조의 기원을 달리한다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무리하게 이천 서씨와 관련된 내용을 부여 서씨 문서에 삽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부여서씨와 이천서씨는 근원을 달리 출발하였다는 글을 메일로 드리고 삭제하였으나 다시 부여서써와 이천서씨가 근원을 동일시 하는 글을 반복하여 올리었기에 까페를 통하여 부여서씨 족보와 역사서 등을 연관하여 글을 올립니다.

부여서씨는 660년 이후 백제 융태자(의자왕 아드님)를 시조로 하고 있으며 이천서씨는 신라 효공왕(897-912) 때에 아간대부 벼슬을 한 서신일을 시조로 하고 있어 신라에 근원을 두고 있으며 백제는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에 의해 멸망(660년)하였기에 멸망한 백제와 고구려의 왕의 성씨와 씨족들의 성씨가 전해지지 않고 변형되어 오듯이 당시에 멸망한 백제가 신라에 근원을 두고 있는 이천서씨(시조 서신일께서는 당시엔 산라인이었으며 후에 이천 효양산에 은거)와 근원이 같은 성씨가 되어질 수 없다고 사료되며 만약에 이천서씨 논리대로 이천서씨(신라)와 부여서씨(백제)가 근원을 같이 하였다면 서씨(부여.이천)와 백제(의자왕 후손 융태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것 입니다. 관련이 있는것으로 명제를 정하고 논리를 전개하기 위하여 고대 중국의 부여국부터 논하면 현대에서는 맞지 않는 모순이 되지 않을까요?

중국. 한국. 일본의 일부는 한 민족이 되는데 잘못하면 나.당 연합세력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였을 당시에 일본에 머물던 백제왕자가 백강에서 백제회복을 위한 전쟁을 하였듯이 그 후 일본침략(고려.조선시대)을 백제왕손의 피가 섞인 일본천황가의 백제후손이 한을 갖이고 부흥운동을 한것으로 여기는 복잡한 논리에 접하게 되지요.

고려시대 역사적 인물로 남아 있는 분들 가운데 부여서씨와 이천서씨가 같은 종이라는 문헌은 없으며 멸망한 백제의 역사문헌도 거의 전해오지 않는 오늘날 오직 조선시대에 기록된 족보로 1000년전의 씨족 내력을 적은 각 성씨의 족보를 근거로 하고 있는데 이 역시 많은 의문점이 있습니다. (문헌상 최초 족보작성은 조선시대로 1400-1500 안동권씨 문화유씨. 부여서씨1683. 삼국유사 1270년대 전후 삼국사기 고려건국 200년 지난후 1145)

부여씨의 후손들인 일본인들은 백제왕릉제에 참석을 하시여 서신왕래도 있읍니다. 서재원님 생각과 같이 모든 서씨를 통합하고자 하는것은 좋으나 그러할 경우 부여서씨와 이천서씨는 엄청난 혼란이 있기에 통합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이천서씨는 신라. 고려시대에 역사적인물이 많았지요. 그러나 부여서씨는 별로.... 왜 그럴까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 왕권내지 집권한 권력이 그랫듯이 멸망한 왕권(백제)에 연을 두고 있는 부여서씨를 새로운 통일신라와 고려정권에서 인제를 등용할리 없으리라 생각되어집니다.

한편 백제 멸망(600년) 후 고려 중엽 무신시대에 백성의 삶이 힘들자 고려고종 23년 1236년.이연년 형제의 백제부흥운동 잠시 일어났으며(역설적으로 "의자왕이 주지육림에 정치잘못하여 백제가 멸망하였다고 하면 백성들의 백제부흥운동이 없었을것며 민중의 난이라고 역사서에 기술되었으리라"고 개인적으로 생각되어집니다)

특히나 당시대의 고려역사서등에 부여서씨는 문헌상에는 많지 않으며 오로지 족보에만 있읍니다. 사견으로 보건데 고려왕권이 백제왕에 근원을 두고 있는 부여서씨를 고위직에 등용하기를 원하지 안했으리라 보며 백성들이 성씨를 사용하지 않던 시대에 멸망한 부여인들이 부여(백제)씨의 변형인 부여서씨의 성씨를 표기하기엔 무리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족보를 보면 고려중기 후반부터 무관으로 등용하게 되는데 당시는 무신시대라 중앙집권에 들어가기 위해서 생명을 담보하는 무관으로 활동하였다고 사료되며 그러다 보니 조선중기 이후에 기록된 족보(세보내지 가정보)에 이천. 부여서씨가 혼재 기록되어 오고 있는 현실입니다.

*부여서씨를 빛낸인물은 세월이 흐른후 새로운 왕권이 들어선 조선시대에 등장하고 있음을 역사서와 족보등에 읽을 수 있음.

현 상황을 보면 부여서씨 가운데 일부는 무지로 이천서씨에 근원으로 두고 있는 분이 계시듯 이천서씨 역시 백제 마지막 태자인 부여융을 거론하는 것도 문제(부여융이 백제 태자가 아니었다면 거론하지 안했으리라 생각됨)가 있다고 생각하여 재원님께서 올리신 글을 삭제하고자 메일을 보내고 삭제하였으나 다시 올리였기에 국가는 문헌을 근거로 역사서로 두고있듯이 부여서씨 대종회 까페관리자 역시 부여서씨 족보에 근거를 두고 다시 글을 올리며 부여서씨와 이천서씨는 동성동본(同姓同本) 아닌 동성이본(同姓異本)으로 근원을 달리하는 종으로 판단하며 동일시 하는 글을 삭제하고자 하니 의견있으면 글을 남기시기 바랍니다.

<부여서씨 까페지기 배상>

※ 조선시대에 이천서씨는 수차례에 걸쳐 족보를 편찬하였으며 그럼에 불구하고 그 어디에도 부여서씨와 참여하에 연관되어 기록된 족보는 없음

--천지흔들 (토론) 2013년 10월 20일 (일) 04:36 (KST)[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