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저동
현저동
峴底洞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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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동 | 서대문구 천연동 |
설치 | 1946년 10월 1일 |
면적 [1]:10 | |
• 총 면적 | 0.41 km2 (0.16 sq mi) |
인구 | |
• 총 인구 | 5,017 |
현저동(峴底洞, Hyeonjeo-dong)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있는 법정동이다. 행정동으로 천연동에 속해 있으며, 독립근린공원 및 임시정부기념관 등의 역사유적과 안산도시자연공원 등의 자연녹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개요
[편집]조선시대에는 한양도성 밖 성저십리의 서부 반송방 지하계 모화현(慕華峴)이라 이름지어졌던 곳으로, 본래 밤나무와 소나무의 수목이 무성하여 도성 사람들의 활쏘기 등 놀이터로서 모여드는 이가 많은 곳이었다. 현저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게 된 것은 1914년 4월 1일의 일로, 그 때에 조선총독부가 경성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이는 오늘날 무악재라 불리는 안산과 인왕산 사이의 고개에 붙여진 무악현(毋岳峴) 아래에 있다고 하여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6년 4월 1일에는 명칭을 현저정(峴底町)이라고 하였다가, 해방 후 1946년 10월 1일에 다시 현저동으로 개칭되었다. 1975년 10월 1일에는 통일로 윗쪽의 지역을 무악동으로 분리하여 종로구에 편입시키면서 관할 면적이 줄어들었다.[1]:60-67
1975년 무렵 현저동은 난개발로 인해 무악동을 제외하였음에도 인구가 2만명을 넘는 수준의 큰 행정구역이었으나, 여러 차례의 재개발을 거치며 1998년 무렵에는 상주인구가 약 5천명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이에 1998년 10월 7일에는 독자적인 행정동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천연동에 편입되었다.[3]:40
역사
[편집]조선시대의 서부 반송방(盤松坊)은 한양도성의 교외 역할을 할 돈의문 밖 신도시로서 조선초기부터 기획된 공간으로, 의주로를 중심으로 주거와 유통망이 함께 발달하며 인구가 집중된 번화가를 이루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현저동은 중국으로부터의 사신을 접대하는 영빈관인 모화관(慕華館)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의 대중외교의 중심지로, 여러 역참(驛站)을 갖추고 있어 그에 수반된 인구가 다수 거주하는 곳이었다.[4]:109-118
교외 주거지역으로서 현저동의 역할은 1920년대에 경성부의 주택난이 심각해지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1918년 현저동에 서대문형무소가 들어서게 되면서 이축되기 전의 독립문은 경성부를 가로지르는 경성전차 영천선[5]:203의 서북부 종점 역할을 하고 있었다.[6] 이러한 교통시설에 힙임어 현저동은 서울 도심과 외곽 도시를 잇는 상업지대이자 주거지역으로 발전하면서 지가가 8배 이상 급등할 정도로 큰 확장을 이루었다.[7]:146
현저동은 본래 영천동과 구분이 어려운 생활경계를 이루고 있었으나, 1960~70년대 무렵 통일로의 확장, 성산고가차도의 건설 및 독립문·영은문주초의 이축 과정에서 독립적인 구획으로 거듭나게 되었고, 같은 시기에 통일로 건너편 지역이 무악동으로 분리되어 별도의 행정구역이 되었다. 독립된 행정구역으로서 현저동은 1980~90년대 서대문형무소의 폐쇄 이후 독립근린공원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재개발을 겪으면서 오늘날과 같이 독립문 극동아파트, 독립근린공원 및 독립문 등이 주요한 풍경을 이루는 모습으로 재탄생 되었다.[8] 그러나 독립근린공원과 떨어진 현저동의 북쪽은 현재까지도 개발방식에 대한 이견 등으로 인해 재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한성과학고등학교 주변으로 여러 빈집이 늘어서 있다.[9]
시설
[편집]갤러리
[편집]-
무악현(毋岳峴)이 표기된 수선전도
-
현저정(峴底町)이 표기된 대경성정도
각주
[편집]- ↑ 가 나 李在權, 具鶴緖, 李貞歚, 李在崑, 姜薰德 (1978년 12월 31일). 《洞名沿革攷 (西大門區篇)》. 서울: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23년 11월 1일에 확인함.
- ↑ “법정동별(행정동 통반 단위) 성별 주민등록 인구증감”. 행정안전부. 2024년 10월 31일. 2024년 11월 28일에 확인함.
- ↑ 《서대문구의회 의정백서 제8호》 (PDF). 서울. 2023년 12월 4일에 확인함.
- ↑ 이왕무 (2016). “「漢城遠望圖」에 묘사된 19세기 후반 한양 도성 西郊의 풍경”. 《藏書閣》 (한국학중앙연구원) (36): 104-123. doi:10.25024/jsg.2016..36.104. ISSN 1229-7755. 2023년 11월 1일에 확인함.
- ↑ 서울역사박물관장 (2019년 12월). 《서울의 전차》. 서울: 서울역사박물관 전시과. ISBN 979-11-90480-04-8. 2023년 12월 4일에 확인함.
- ↑ 노주석 (2013년 8월 9일).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⑧ 1950~60년대 : 파괴와 재건”. 《서울신문》 (서울: 서울신문사). 2023년 11월 1일에 확인함.
- ↑ 유승희 (2012). “1920~1930년대 경성부 주택문제의 전개와 대책”. 《아태연구》 (경희대학교 국제지역연구원) 19 (2): 131-164. doi:10.18107/japs.2012.19.2.005. ISSN 1225-8539. 2023년 11월 1일에 확인함.
- ↑ “현저동 재개발 내달 착공-4천212가구 97년 완공”. 《중앙일보》 (서울: 중앙일보사). 1994년 2월 22일. 2023년 11월 1일에 확인함.
- ↑ “4대문 안 빈집촌 “이젠 우리도”…재개발 기대감”. 《채널A》 (서울). 2022년 10월 22일. 2023년 11월 1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