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동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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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延禧洞
Yeonhui-dong
Yeonhui-dong Community Service Center Seoul 20140513 164754.jpg
연희동주민센터
Seodaemun-seoul..png
면적3.05 km2
인구 (2012.12.31.)43,419 명
인구 밀도14,200 명/km2
세대18,752가구
법정동연희동
통·리·반57통 473반
동주민센터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로 189
웹사이트연희동 주민센터

연희동(延禧洞)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행정동법정동이다.

동의 명칭은 현재 연세대학교가 있는 자리로 추정되는 연희궁(延禧宮) 터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정자동, 염동, 궁동, 음월리라 부르던 지역으로, 일제시대 때 경기도에 속하다가 다시 경성부에 속하여 연희정(延禧町)이 되었으며 1946년 연희동으로 개명되었다.

역사[편집]

연혁[편집]

지명의 유래[편집]

일제강점기에 존재했던 연희역(延禧驛)은 경성순환노선의 폐역된 역으로 현재의 연세대학교 앞에 위치하고 있었다. 1930년 12월 25일에 개통하고 1939년 10월 31일에 폐역이 되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연희궁(延禧宮)이 고초전(苦草田) 원묘, 의소묘(懿昭墓), 선희묘(宣禧墓)를 설명할 때 연희궁이 좌표역할을 하고 흥덕사(興德寺)의 위치를 서술할 때 동부 연희방(燕喜坊)에 있으니"라는 표현이 나온다.

『해동지도』, 『여지도』, 『광여도』, 『대동여지도』 등의 고지도에도 연희관, 고연희궁 등이 표기되어 있다. 연희궁은 이 마을에 조선 초 정종이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머물렀던 곳이다. 연희동은 여기서 유래하였다.

궁터는 연세대학교가 있는 자리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 이곳은 한성부 북부 연희방에 속하였다. 『호구총수』에는 연희방의 연희궁계가 서술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에는 경성부 연희면(燕禧面) 정자동 · 염동 · 궁동 · 음월리라고 하였다고 전해진다.[1]

지리[편집]

1968년 연희로와 증가로가 개통되면서 1970년대 초부터 주택가로 개발되기 시작하여, 평지에는 고급 주택이, 고지대에는 시민아파트가 세워졌고, 성산로와 연희로 주변에는 상가가 형성되었다. 기독교 계통의 연세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가 인근에 있어 교수, 선교사, 정치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서울시 서대문구의 안산(鞍山)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금화산 자락의 금화터널 위를 지나면 우측에 이화여자대학교가 나오고 우로 연세대와 와우산 자락의 홍익대를 만난다. 연세대학교 인근 주택 밀집지역은 대학생들이 주로 거주하는 하숙촌이 형성되어있다.

주민[편집]

높은 외국인 비율[편집]

서울외국인학교한성화교중고등학교의 소재지로, 외교관을 포함한 많은 외국인 노동자 가족이 연희동에 거주하고 있다. 또한 1970년대 중구 소공동 일대의 재개발 사업으로 터전을 잃어버린 많은 화교들 중 일부가 연희동 일대에 자리잡았다. 이때 함께 생겨난 일부 중국 음식 전문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2] 특히 홍대 상권인 연남동으로부터 이어져오는 카페 밀집지역인 연희맛로 주변에 위치해있다. 연희동은 2015년 발표된 통계 자료 기준 서울시에서 가장 많은 타이완인이 거주하는 단일 법정동이다.[3]

2010년 한 부동산정보업체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외국인이 선호하는 주거지역을 묻는 조사에서 한남동이태원동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선호도를 기록했다.[4]

빈부격차[편집]

연희동은 ‘부자 동네’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고급 주택과 값비싼 승용차가 많이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심각한 빈부 격차가 존재한다. 안산도시자연공원을 중심으로 북서쪽에는 차상위계층 주민이 분포해있다.[5]

유명인사[편집]

대한민국의 두 전직 대통령인 전두환노태우가 퇴임 후 머무른 사저가 있다.[6] 이 가운데 전두환의 사저는 ‘연희궁’이라는 비판적인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7] 이밖에 연희동에 거주했거나 거주 중인 저명한 인물로는 소설가 김영하, 예술가 박서보, 가수 서태지, 가수 오혁, 래퍼 기리보이, 아이돌가수 에닉 다우마 등이 있다.

교육[편집]

초등학교[편집]

중학교[편집]

고등학교[편집]

명소[편집]

연희 104고지는 한국전쟁 당시 주요한 전략적 거점이었다. 1950년 9월 21일 대한민국 국군에 의해 점령된 직후인 다음날 조선인민군 륙군의 반격이 이뤄졌다. 1958년 9월 28일에 이를 기리는 비석이 건립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공동편집, 국토지리정보원(2008년) 참조
  2. 고, 우현. “[극복하자, 젠트리피케이션①] 동네는 뜨고 주민은 울고”. 《스트레이트 뉴스》. 
  3. “서울의 외국인 수, 얼마나 늘었나?”. 《서울연구원》. 2015년 5월 18일. 
  4. 김, 일수 (2011년 6월 10일). “[Rent] 외국인·연예인들, 서울 부촌에 깔세 산다?”. 《매일경제》. 
  5. “연희동 주민센터 새롭게 열.리.다” (PDF). 《서울디자인재단》. 20쪽. 
  6. 이, 용욱. “대통령 사저 논란”. 《경향신문》. 
  7. 배, 성규. “[만물상] 권력자의 사저(私邸)”.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