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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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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시(鄕試)는 종전의 전근대 봉건 성향의 동양 아시아 국가 가운데에서도, 대부분 고려·조선·청나라 시대의 과거(科擧) 시험 제도의 제1차 과정이었다.

원래 향시(鄕試)라는 것은, 송(宋)나라 태조 조광윤(趙匡胤)이 975년(개보 8)에 친히 궁중의 강무전(講武殿)에서 치렀던 전시(殿試)를 시행함으로써 3단계의 향시(鄕試)의 시험 제도가 본격 완성되었는데, 이 향시는 송나라해시(解試)에 속하였으며, 훗날 원(元)·명(明)·청(淸) 시대에 접어들면서 해시(解試)가 향시(鄕試)로 개편되거나 바뀌었다.

그리고 이 향시(鄕試)는,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에는 문과(文科)·무과(武科)·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로써 전국 8도에서 처음 보는 시험으로 매 식년(式年)의 8월 보름 이후에나 실시하였다. 그리고 이 가운데 경기 향시(京畿 鄕試)는 1417년(태종 17년)에 폐지되었다가 1443년(세종 25년)에 부활되었으나, 다시 1603년(선조 36)에 한성시(漢城試)에 전격 편입 조처됨으로써 재차 폐지되었다.

1485년(성종 16) 1월 1일, 편제 조처 시행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기록에 따르면, 식년 문과·생원진사시의 합격 정원은, 경기도가 문과 향시 20명, 생원진사 향시 60명, 강원도가 문과 향시 15명, 생원진사 향시 45명, 황해도가 문과 향시 10명, 생원진사 향시 35명, 충청도가 문과 향시 25명, 생원진사 향시 90명, 경상도가 문과 향시 30명, 생원진사 향시 100명, 전라도가 문과 향시 25명, 생원진사 향시 90명, 평안도가 문과 향시 10명, 생원진사 향시 35명, 함길도가 문과 향시 10명, 생원진사 향시 35명이었다.

향시(鄕試)의 시험관은 흔히 시관(試官)이라 불렀는데, 한반도 전국 8도 각 도의 감사(監司)가 문과 출신의 수령이나 교수 중에서 상시관(上試官) 1명, 참시관(參試官) 2명을 임명하였으나, 사정(私情)의 문제가 발생하였으므로, 오히려 경관(京官)을 파견하게 되었다.

향시(鄕試)의 합격자는, 상시관이 방목(榜目)을 작성하여 관찰사부(觀察使府)·법사(法司)·예조(禮曹)·교서관(校書館)·성균관(成均館)·승문원(承文院)·예문관(藝文館)에 모두 발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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