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 두 판 사이의 차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Bkkorea (토론 | 기여)
121.145.158.57(토론)의 3882433판 편집을 되돌림
Bkkorea(토론)의 3883668판 편집을 되돌림
8번째 줄: 8번째 줄:
|사망원인= 불확실함 (처형or자살설이 있음.)
|사망원인= 불확실함 (처형or자살설이 있음.)
|거주지=
|거주지=
|국적= {{국기나라|대한제국}},{{국기나라|대한민국}},{{국기나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 {{국기나라|대한민국}},{{국기나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별명= 호 약산(若山)
|별명= 호 약산(若山)
|학력= [[경성]] [[중앙고등학교 (서울)|중앙중학교]],[[신흥무관학교]],[[황푸군관학교]]
|학력= [[경성]] [[중앙고등학교 (서울)|중앙중학교]],[[신흥무관학교]],[[황푸군관학교]]
26번째 줄: 26번째 줄:
==생애==
==생애==
=== 의열단 조직 ===
=== 의열단 조직 ===
[[경상남도]] [[밀양시|밀양]] 태생이다. [[김약수]]·[[이여성]] 등과 교류하였으며, [[경성]] [[중앙고등학교 (서울)|중앙중학교]]를 졸업한 뒤 독립 운동에 뜻을 두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에서 수학하고 졸업후 [[1919년]] 요인 암살과 기관 파괴를 위한 무장항일운동 조직 [[의열단]]을 조직하여 의백에 취임, 여러 차례 폭력항쟁 활동을 벌였다.
[[경상남도]] [[밀양시|밀양]] 태생이다. [[김약수]]·[[이여성]] 등과 교류하였으며, [[경성]] [[중앙고등학교 (서울)|중앙중학교]]를 졸업한 뒤 독립 운동에 뜻을 두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에서 수학하고 졸업후 [[1919년]] 요인 암살과 기관 파괴를 위한 무장항일운동 조직 [[의열단]]을 조직하여 의백에 취임, 여러 차례 폭력 투쟁 활동을 벌였다.


이후 조직적인 무장 항일투쟁을 위해 [[1926년]] [[장제스]]가 교장으로 있었고 [[중국 국민당|국민당]]이 만든 [[광저우]] [[황푸군관학교]]에 입교했고<ref name="p142">이우탁《김구, 장보고, 앙드레김》(이우탁, 출판사 동아시아, 2006) 142페이지</ref>, 이곳에서 얻은 지식 및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그뒤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 4기로 졸업하고 그와 그가 이끌던 의열단원들은 중국 국민혁명에도 가담하였다.<ref name="p142"/> 1927년 8월 김원봉은 [[저우언라이]], [[주더]] 등이 지도한 중국공산당의 출범을 이루어낸 [[남창봉기]]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 세력 사이에서 자행된 살육전을 통해 이데올로기의 기만성을 경험할 수 있었던 그는 [[광주봉기]]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후 조직적인 무장 항일투쟁을 위해 [[1926년]] [[장제스]]가 교장으로 있었고 [[중국 국민당|국민당]]이 만든 [[광저우]] [[황푸군관학교]]에 입교했고<ref name="p142">이우탁《김구, 장보고, 앙드레김》(이우탁, 출판사 동아시아, 2006) 142페이지</ref>, 이곳에서 얻은 지식 및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그뒤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 4기로 졸업하고 그와 그가 이끌던 의열단원들은 중국 국민혁명에도 가담하였다.<ref name="p142"/> 1927년 8월 김원봉은 [[저우언라이]], [[주더]] 등이 지도한 중국공산당의 출범을 이루어낸 [[남창봉기]]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 세력 사이에서 자행된 살육전을 통해 이데올로기의 기만성을 경험할 수 있었던 그는 [[광저우 봉기]]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 조선의용대 조직과 독립운동 ===
=== 조선의용대 조직과 독립운동 ===
37번째 줄: 37번째 줄:
[[김성숙 (1898년)|김성숙]]은 김원봉 일파는 김구 일파와 크게 대립했다고 증언하였다. [[김성숙]]에 의하면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의 군벌은 강택파로부터도 지원을 받는다고 하였다. 김성숙은 [[김구]]는 중국 국민당의 진과부-진립부 계열의 지원을 받고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의 군벌은 강택파의 지원을 받는 것도 경쟁관계를 부추긴 것이라고 보았다.<ref name="pp78">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8페이지</ref> 김원봉은 자신이 임시정부에 들어가도 대접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반대하였다. [[김성숙 (1898년)|김성숙]]은 김원봉에게 임시정부에 들어갈 것을 주장하였고, 김원봉은 이를 반대하여 대립하게 되었다. 그뒤 민족혁명당 사람들이 화베이의 연안으로 건너가자 김원봉은 더욱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ref name="pp78"/>
[[김성숙 (1898년)|김성숙]]은 김원봉 일파는 김구 일파와 크게 대립했다고 증언하였다. [[김성숙]]에 의하면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의 군벌은 강택파로부터도 지원을 받는다고 하였다. 김성숙은 [[김구]]는 중국 국민당의 진과부-진립부 계열의 지원을 받고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의 군벌은 강택파의 지원을 받는 것도 경쟁관계를 부추긴 것이라고 보았다.<ref name="pp78">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8페이지</ref> 김원봉은 자신이 임시정부에 들어가도 대접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반대하였다. [[김성숙 (1898년)|김성숙]]은 김원봉에게 임시정부에 들어갈 것을 주장하였고, 김원봉은 이를 반대하여 대립하게 되었다. 그뒤 민족혁명당 사람들이 화베이의 연안으로 건너가자 김원봉은 더욱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ref name="pp78"/>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채택한 후, 〈동지 동포에게 고함〉([[1939년]])이라는 성명서를 [[김구]]와 공동 명의로 발표하였다. 이후 [[한국]] [[광복군]]에 참여하였으며 [[1942년]] [[광복군]] 부사령관이 되었다. 광복군 부사령으로 취임하였으나 이 시점에서도 주석 [[김구]]와 끊임없이 정쟁을 벌였다.<ref name="이우탁">이우탁《김구, 장보고, 앙드레김》(이우탁, 출판사 동아시아, 2006) 143페이지</ref> [[1942년]] [[7월]] 중국 화북에서 조선독립동맹이 창설되자 민족혁명당과 의용대의 대원들 일부는 김원봉의 곁에서 이탈하여 독립동맹으로 건너갔다.<ref>이종석 《조선로동당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7)》 (역사비평사, 2006) 234페이지</ref>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채택한 후, 〈동지 동포에게 고함〉([[1939년]])이라는 성명서를 [[김구]]와 공동 명의로 발표하였다. 이후 [[한국]] [[광복군]]에 참여하였으며 [[1942년]] [[광복군]] 부사령관이 되었다. 광복군 부사령으로 취임하였으나 이 시점에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야당 민족혁명당의 당수로서, 여당 당수인 주석 [[김구]]와 끊임없이 정쟁을 벌였다.<ref name="이우탁">이우탁《김구, 장보고, 앙드레김》(이우탁, 출판사 동아시아, 2006) 143페이지</ref> [[1942년]] [[7월]] 중국 화북에서 조선독립동맹이 창설되자 민족혁명당과 의용대의 대원들 일부는 김원봉의 곁에서 이탈하여 독립동맹으로 건너갔다.<ref>이종석 《조선로동당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7)》 (역사비평사, 2006) 234페이지</ref>


[[1942년]] [[한국 광복군]] 부사령관이 되었고, [[19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선출되었다. [[1944년]] [[중화민국]]군으로 있다가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건너온 [[장준하]] 등을 영입하려 했으나, 장준하는 거절하였다. 뒷날 [[장준하]]는 그가 미인계를 써서 현혹시키려 했다고 비판하였다.<ref>민족주의자의 길(장준하 저, 세계사, 2002.05.02) 140페이지</ref>
[[1942년]] [[한국 광복군]] 부사령관이 되었고, [[19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선출되었다. [[1944년]] [[중화민국]]군으로 있다가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건너온 [[장준하]] 등을 영입하려 했으나, 장준하는 거절하였다. 뒷날 [[장준하]]는 그가 미인계를 써서 현혹시키려 했다고 비판하였다.<ref>민족주의자의 길(장준하 저, 세계사, 2002.05.02) 140페이지</ref>
45번째 줄: 45번째 줄:
이후 임시정부 군사부장을 역임하다가 광복 후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했다. [[1945년]]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내각이 발표되었는데, 김원봉은 군사부장으로 선임되었다.<ref> 1945년 9월~: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60쪽</ref> [[1945년]] [[12월]] 임시정부 귀국때 2진으로 귀국하였다. [[1946년]] [[2월 15일]] [[민족주의민족전선]]의 공동의장에 추대되었다. <ref> {{서적 인용 |저자=[[강준만]] |제목=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8∙15해방부터 6∙25전야까지)|꺾쇠표=예|발행일자=2004-4-3|출판사=인물과사상사|출판위치=서울|id=ISBN 8988410890|장=제2장 좌우(左右) 갈등의 폭발/ 1946년 – 민주의원과 민족전선 출범 |쪽=211}} </ref>
이후 임시정부 군사부장을 역임하다가 광복 후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했다. [[1945년]]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내각이 발표되었는데, 김원봉은 군사부장으로 선임되었다.<ref> 1945년 9월~: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60쪽</ref> [[1945년]] [[12월]] 임시정부 귀국때 2진으로 귀국하였다. [[1946년]] [[2월 15일]] [[민족주의민족전선]]의 공동의장에 추대되었다. <ref> {{서적 인용 |저자=[[강준만]] |제목=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8∙15해방부터 6∙25전야까지)|꺾쇠표=예|발행일자=2004-4-3|출판사=인물과사상사|출판위치=서울|id=ISBN 8988410890|장=제2장 좌우(左右) 갈등의 폭발/ 1946년 – 민주의원과 민족전선 출범 |쪽=211}} </ref>


귀국한 뒤 김원봉은 임시정부 특별정치위원회 중앙위원으로 좌익쪽과 협상을 하다가 좌우익의 대립이 첨예하게 발전하자 그는 임시정부를 탈퇴하였다. 그는 이후 [[민족주의 민주전선]]의 공동의장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ref name="이우탁"/> 그러나 우익과 결별한 후 계속된 시련을 겪게 된다.
귀국한 뒤 김원봉은 조선 임시정부 특별정치위원회 중앙위원으로 좌익쪽과 협상을 하다가 좌우익의 대립이 첨예하게 발전하자 그는 임시정부를 탈퇴하였다. 그는 이후 [[민족주의 민주전선]]의 공동의장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ref name="이우탁"/> 그러나 우익과 결별한 후 계속된 시련을 겪게 된다.


[[1947년]] [[3월]] 남로당이 주동하여 총파업이 발생하자 여기에 연루되어 [[노덕술]]에게 체포되었다. 체포 과정에서 [[노덕술]]에게 뺨을 맞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ref name="p144">이우탁《김구, 장보고, 앙드레김》(이우탁, 출판사 동아시아, 2006) 144페이지</ref> 김원봉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고 한다.
[[1947년]] [[3월]] 남로당이 주동하여 총파업이 발생하자 여기에 연루되어 [[노덕술]]에게 체포되었다. 체포 과정에서 [[노덕술]]에게 뺨을 맞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ref name="p144">이우탁《김구, 장보고, 앙드레김》(이우탁, 출판사 동아시아, 2006) 144페이지</ref> 김원봉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고 한다.
85번째 줄: 85번째 줄:


=== 비판 ===
=== 비판 ===
학도병 출신으로 중국군이 되었다가 광복군에 편입한 [[장준하]]는 김원봉이 학도병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미인계를 썼다고 비판하였다.<ref>민족주의자의 길(장준하 저, 세계사, 2002.05.02) 140페이지</ref>
[[장준하]]는 김원봉이 학도병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미인계를 썼다고 비판하였다.<ref>민족주의자의 길(장준하 저, 세계사, 2002.05.02) 140페이지</ref>
<ref>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박경수 지음, 돌베개 출판사, 2006.11.30) 165 페이지</ref><ref>[http://www.sasangge.com/serial/jang/detail.html?no=20021019141907 (26) 파쟁 속의 망명정부]</ref> 한편 [[김구]]의 측근이었던 [[민필호|석린 민필호]]는 김원봉이 사사건건 김구에게 대드는 것을 거슬리게 생각하였으며, 그를 교활한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였다. <ref name="이우탁"/>
<ref>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박경수 지음, 돌베개 출판사, 2006.11.30) 165 페이지</ref><ref>[http://www.sasangge.com/serial/jang/detail.html?no=20021019141907 (26) 파쟁 속의 망명정부]</ref> 한편 [[김구]]의 측근이었던 [[민필호|석린 민필호]]는 김원봉이 사사건건 김구에게 대드는 것을 거슬리게 생각하였으며, 그를 교활한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였다. <ref name="이우탁"/>



2009년 10월 11일 (일) 20:05 판

김원봉
파일:김원봉.jpg
출생1898년 음력 8월 13일
대한제국의 기 대한제국 경남밀양
사망195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인불확실함 (처형or자살설이 있음.)
성별남성
국적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별칭호 약산(若山)
학력경성 중앙중학교,신흥무관학교,황푸군관학교
직업독립운동가,군인,정치인


김원봉(金元鳳, 1898년 음력 8월 13일1958년?)은 한국독립운동가이며 북한의 정치인이다. 의열단,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광복군 부사령관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 1948년 민족주의민주전선 등에서 활동하였으며 김규식·김구 등과 함께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뒤, 귀환하지 않고 북한에 잔류하여고 정치인으로도 활동하였으며 북한 정권 수립 후 노동상,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호는 약산(若山).

생애

의열단 조직

경상남도 밀양 태생이다. 김약수·이여성 등과 교류하였으며, 경성 중앙중학교를 졸업한 뒤 독립 운동에 뜻을 두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에서 수학하고 졸업후 1919년 요인 암살과 기관 파괴를 위한 무장항일운동 조직 의열단을 조직하여 의백에 취임, 여러 차례 폭력 투쟁 활동을 벌였다.

이후 조직적인 무장 항일투쟁을 위해 1926년 장제스가 교장으로 있었고 국민당이 만든 광저우 황푸군관학교에 입교했고[1], 이곳에서 얻은 지식 및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그뒤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 4기로 졸업하고 그와 그가 이끌던 의열단원들은 중국 국민혁명에도 가담하였다.[1] 1927년 8월 김원봉은 저우언라이, 주더 등이 지도한 중국공산당의 출범을 이루어낸 남창봉기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 세력 사이에서 자행된 살육전을 통해 이데올로기의 기만성을 경험할 수 있었던 그는 광저우 봉기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조선의용대 조직과 독립운동

1932년 장제스의 도움으로 조선혁명간부학교중국 난징외곽에 설치하고 혁명요원 모집과 양성을 하기도 했다.[2] 1937년 김원봉은 일시적으로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의 정탐이 파악한 동향은 일본의 정보기관에 그대로 보고되었는데 당시 보고에 의하면 김원봉은 자신의 자동차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임시정부보다는 장쉐량 일파에게 더 많은 자금을 받고 있었다고 보고하였다.[3][4] 1937년 7월 10일 중화민국 정부의 초청으로 피서지이자 중국 고관들의 회의장소인 난징 서쪽의 루산(蘆山)에 초대되었다. 루산에는 김구 등이 와 있었다. 초대에서 중국 정부측 대표자는 일본을 상대로 통일전선을 결성해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귀환하기 전 중국 정부 대표자로부터 사명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거액의 자금을 지원받았다.[5]

1938년 10월에는 훈련해온 청년들을 규합하여 중국 한커우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 산하에 항일 군사 조직인 조선의용대를 조직, 편성하여 대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3개 지대 중 2개 지대가 중국공산군이 집결하고 있는 중국 서북지역으로 이동하여, 의용대 사령관 김원봉의 지휘하에서 이탈하자 김원봉의 힘은 급속도로 약화되었다.[6]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때문에 우파김구와 대립하였다. 1939년 한국독립당과 통합논의가 나왔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민족혁명당내 일부에서는 기존의 단체를 연대하는 것에는 찬성하나 기존의 조직을 해체하고 새로운 당을 만드는 데는 찬성할수 없다고 반발했던 것이다.[7]

김성숙은 김원봉 일파는 김구 일파와 크게 대립했다고 증언하였다. 김성숙에 의하면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의 군벌은 강택파로부터도 지원을 받는다고 하였다. 김성숙은 김구는 중국 국민당의 진과부-진립부 계열의 지원을 받고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의 군벌은 강택파의 지원을 받는 것도 경쟁관계를 부추긴 것이라고 보았다.[8] 김원봉은 자신이 임시정부에 들어가도 대접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반대하였다. 김성숙은 김원봉에게 임시정부에 들어갈 것을 주장하였고, 김원봉은 이를 반대하여 대립하게 되었다. 그뒤 민족혁명당 사람들이 화베이의 연안으로 건너가자 김원봉은 더욱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8]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채택한 후, 〈동지 동포에게 고함〉(1939년)이라는 성명서를 김구와 공동 명의로 발표하였다. 이후 한국 광복군에 참여하였으며 1942년 광복군 부사령관이 되었다. 광복군 부사령으로 취임하였으나 이 시점에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야당 민족혁명당의 당수로서, 여당 당수인 주석 김구와 끊임없이 정쟁을 벌였다.[9] 1942년 7월 중국 화북에서 조선독립동맹이 창설되자 민족혁명당과 의용대의 대원들 일부는 김원봉의 곁에서 이탈하여 독립동맹으로 건너갔다.[10]

1942년 한국 광복군 부사령관이 되었고, 19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선출되었다. 1944년 중화민국군으로 있다가 충칭대한민국임시정부로 건너온 장준하 등을 영입하려 했으나, 장준하는 거절하였다. 뒷날 장준하는 그가 미인계를 써서 현혹시키려 했다고 비판하였다.[11] [12][13] 일본군을 탈출한 한인을 적극 영입하려 하였는데, 장준하는 그의 책 돌베개에서 그가 일본군 출신 한인들에게 임시정부광복군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이소민 등을 파견하여 인척인 일본소위 출신 황모 등을 끌어들이려 한다고 보았다.[14] 장준하는 그가 계략을 써서 일본군 출신 한인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광복군에 대한 불신임을 조장한다 하여 이소민 등에 대한 자료를 이청천에게 보고하였다.[14] 이청천은 광복군을 직접 사열하였다.

해방 후 정치활동

이후 임시정부 군사부장을 역임하다가 광복 후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했다. 1945년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내각이 발표되었는데, 김원봉은 군사부장으로 선임되었다.[15] 1945년 12월 임시정부 귀국때 2진으로 귀국하였다. 1946년 2월 15일 민족주의민족전선의 공동의장에 추대되었다. [16]

귀국한 뒤 김원봉은 조선 임시정부 특별정치위원회 중앙위원으로 좌익쪽과 협상을 하다가 좌우익의 대립이 첨예하게 발전하자 그는 임시정부를 탈퇴하였다. 그는 이후 민족주의 민주전선의 공동의장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9] 그러나 우익과 결별한 후 계속된 시련을 겪게 된다.

1947년 3월 남로당이 주동하여 총파업이 발생하자 여기에 연루되어 노덕술에게 체포되었다. 체포 과정에서 노덕술에게 뺨을 맞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17] 김원봉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고 한다.

김원봉은 붙잡혀 갈 당시 화장실에 있었는데, 일제 경시 출신 노덕술이 그대로 수갑을 채워 장택상 앞으로 끌고갔다.

이어서 장택상과 노덕술에게 그런수모를 당하고서는 사흘을 꼬박 울었다. 그는 울면서 '여기서는 왜놈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몰라.'했다.

— 의혈단 동지 유석헌의 회고中..

김원봉 체포는 애국지사에 대한 모독이라는 여론이 크게 형성되어 풀려나기는 했지만, 그는 친일파우익의 표적이 되어 있었다.[17] 1947년 7월 여운형이 암살되자 여운형의 죽음에 분노에 찬 애도문을 '광명일보', '노력인민' 등 좌익지 7월 25일자에 게재하여 여운형의 유지를 받들어 공위를 성공시키자고 호소했다.[18]

남북협상 참여

그러나 1948년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김구, 김규식과 함께 북조선을 방문한 뒤 귀환하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월북 인사가 되었고, 그해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내각 국가검열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남한에서 미군정 치하의 경찰에 붙들렸을 때 친일 경찰로 유명한 노덕술에게 고문을 받은 사건을 계기로 친일파들이 미군정이승만정권의 보호를 받으면서 득세하는 잘못된 사회 흐름에 실망한 것이 월북의 한 동기라는 일화가 있다. 실제로, 친일파우익 양측의 표적이 된 그는 거처를 5개를 마련하고 테러를 피해 항상 옮겨다니며 잠을 자야 했다.[17] 한편 김구의 임시정부 계열 역시 그를 경계하였다. [9]

1948년 9월 북조선 정권이 수립되면서 김원봉은 국가검열상에 임명되었다.[19]

1950년 6.25 전쟁 이후로도 김원봉은 북한에서 정치활동을 하였다. 이후 노동상,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내면서 고위직을 거쳤다. 1958년 그의 탄생 60주년을 기념하여 북조선 정권으로부터 노동훈장을 수여받았다.[17]

실각과 최후

연안파가 숙청될 때 실각했다. 이후 강등되어 시골로 내려갔다는 설과 자살설 등이 떠돌아 실각직후 곧바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 사망 시기나 경위는 알 수 없다.[출처 필요]

가족

첫 부인은 유명한 여성 독립운동가로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단장을 지낸 박차정이며, 두번째 부인 역시 조선의용대 출신의 최동선이다. 최동선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 아들은 김철건(1945년~)이고 둘째는 김중건(1954년~)이다.[20]

남쪽에는 여동생 학봉(1932년~)씨와 남동생 봉철씨가 생존해있다.

  • 부:김주익(金周益)
  • 모:이경념(李京念)
    • 누이 : 김학봉
    • 동생 : 김봉철
  • 처:박차정(1909~1944)
  • 처:최동선
    • 아들: 김철건
    • 아들: 김중건[20]

평가 및 비판

평가

김산은 그를 고전적인 유형의 테러리스트로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며 개인주의적인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1] 김산에 의해 묘사된 그의 모습은 웃는 법이 없었고 도서관에서 독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1]

비판

장준하는 김원봉이 학도병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미인계를 썼다고 비판하였다.[21] [22][23] 한편 김구의 측근이었던 석린 민필호는 김원봉이 사사건건 김구에게 대드는 것을 거슬리게 생각하였으며, 그를 교활한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였다. [9]

참고자료

주석

  1. 이우탁《김구, 장보고, 앙드레김》(이우탁, 출판사 동아시아, 2006) 142페이지
  2. 이우탁《김구, 장보고, 앙드레김》(이우탁, 출판사 동아시아, 2006) 142~143페이지
  3.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1페이지
  4. 사상휘보 제14호(1938.3)(조선총독부고등법원사상부, 1938) 219~222페이지
  5.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0페이지
  6.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7페이지
  7.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5페이지
  8.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8페이지
  9. 이우탁《김구, 장보고, 앙드레김》(이우탁, 출판사 동아시아, 2006) 143페이지
  10. 이종석 《조선로동당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7)》 (역사비평사, 2006) 234페이지
  11. 민족주의자의 길(장준하 저, 세계사, 2002.05.02) 140페이지
  12.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박경수 지음, 돌베개 출판사, 2006.11.30) 165 페이지
  13. (26) 파쟁 속의 망명정부
  14. 장준하전집 1 : 돌베개(장준하, 세계사, 2001) 94~95페이지
  15. 1945년 9월~: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60쪽
  16. 강준만. 〈제2장 좌우(左右) 갈등의 폭발/ 1946년 – 민주의원과 민족전선 출범〉.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8∙15해방부터 6∙25전야까지)》. 서울: 인물과사상사. 211쪽. ISBN 8988410890. 
  17. 이우탁《김구, 장보고, 앙드레김》(이우탁, 출판사 동아시아, 2006) 144페이지
  18.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51~52쪽
  19. 이종석 《조선로동당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7)》 (역사비평사, 2006) 206페이지
  20. 의열단장 김원봉 여동생 이산가족상봉 신청 [[연합뉴스] 2001/02/08
  21. 민족주의자의 길(장준하 저, 세계사, 2002.05.02) 140페이지
  22.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박경수 지음, 돌베개 출판사, 2006.11.30) 165 페이지
  23. (26) 파쟁 속의 망명정부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