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월(張越 ? ~ ?)은 초한전쟁기 전한의 군인이다.
한왕 5년(기원전 202년) 기도위로서 동원(東垣)에서 고제를 따랐고, 진희의 반란 진압에 종군하였다. 옹치의 휘하에서 활약하였고, 공을 세워 임후(任侯)에 봉해지고 거기장군이 되었다.
고후 3년(기원전 185년) 죄인을 숨겨준 죄로 주살될 위기에 처하였으나 사면받아 서인(庶人)이 되었고, 작위는 박탈되었다.
선대 (첫 봉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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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의 임후 기원전 201년 ~ 기원전 1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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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 (봉국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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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10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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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20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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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30위 |
- 괴성존후 주설(21 또는 22)[1]
- 도창장후 주진(23)
- 염차후(24) 원경(元頃)|원류(爰類)
- 성경후 동설(25)
- 유구제후 융사(26)
- 고성장후 윤회(26)
- 아릉경후 곽정(27)
- 광엄장후 소구(28)
- 하양장후 진연(29)
- 요이후 공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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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 40위 |
- 비어후 진하(31)
- 평도후(32) 패가(沛嘉)|공사희(工師喜)
- 무강장후 장불식(33)
- 여려[2]애후 주조(34)
- 대정후 대야(35)
- 세제후 여박(36)
- 해양제신후 요무여(37)
- 척구의후 당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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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 50위 |
- 동무정후 곽몽(41)
- 고원제후 병천(41)
- 악성절후 정례(42)
- 선곡제후 정의(43)
- 위기장후 주정(44)
- 창무정신후 선녕(45)
- 강양제후 화무해(46)
- 곡역헌후 진평(47)
- 동모경후 유조(48)
- 균장후 장평(48)
- 복양강후 진서(49)
- 의씨경후 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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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 60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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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 70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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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 80위 |
- 청간후 질중동
- 강간후 유승(留勝)|강어후 유힐(留肹)
- 영릉이후 여신
- 축아효후 고읍(高邑)|고색(高色)
- 자조단후 적|극주
- 오제후 양성연
- 당양애후 손적
- 영장후 위선(魏選)|위속(魏遬)
- 장절후 모택
- 기신광후 진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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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 90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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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 100위 |
- 순경후 온개
- 역간후[5] 정흑(92)
- 고릉어후 왕주(92)
- 무원정후 위거
- 오방장후 양무
- 번장후|평엄후 강첨(彊瞻)|장첨사(張瞻師)
- 분양(장)후 근강(96)
- 심택제후 조장야(趙將夜)|조장석(趙將夕)(98)
- 송자혜후 허치
- 알지절후 풍해감(馮解敢)|풍해산(馮解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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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 110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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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 120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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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 130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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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 137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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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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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호가 없을 때에는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순서가 내려간다. 이름이나 시호, 봉작의 표기가 《사기》와 《한서》가 다를 때에는 (《사기》의 표기)|(《한서》의 표기)로 쓴다. 이탤릭체는 고조 사후 봉해졌으나 위계가 기록된 경우다.
- ↑ 《사기》에서는 21위, 《한서》에서는 22위라 한다.
- ↑ 상제를 피휘해 융려라고도 한다.
- ↑ 《사기》에는 순위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 ↑ 《사기》에서는 '양하제애후'에 이름은 기록이 없고, 《한서》에서는 '양하제후 기석'으로 기록되어 있다.
- ↑ 《사기》에서는 봉읍을 마(磨)라 했으나, 《사기색은》에서는 이를 오류라고 했다.
- ↑ 《사기》에서는 116위, 《한서》에서는 126위라고 한다. 《사기》를 따를 경우, 척새와 순위가 중복된다.
- ↑ 원래는 항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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