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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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직(李明稙, 일본식 이름: 牧野明稙 마키노 메이쇼쿠[*], 1890년 12월 2일 ~ 1973년)은 1890년 경성부 죽첨정 삼정목에서 아버지 이승원(李承源)과 어머니 박계원(朴啓源)사이에서 2남중 장남으로 출생한 한국성결교 목사이다. 본관은 한산, 고려의 학자 이색의 18대손이다[1].

생애[편집]

한성부 출신으로 일찌기 부친을 여의고 주전원 전무과 주사로 근무하던 숙부 이승태(李承泰)에게서 키워졌다. 이명직은 황성기독청년회(서울 Y.M.C.A.)에서 공부하며 집안 문중의 할아버지벌 월남 이상재선생과 또 같은 항열에 같은 이름을 쓰는 구한말과 대한제국시절 탁지부 주사를 지낸 성우 이명직 선생과 직․간접적인 만남과 교류가 있었다. 월남 이상재선생에게서는 개신교 사상을 배웠고 이명직 선생에게서는 해외유학의 필요성을 감화받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 성서학원에서 수학했다. 그의 집안은 전형적인 유교 가문이었으나 월남 이상재선생과 같은 선각자의 인도로 청년 시절 자발적으로 개신교에 입문했다. 1922년 도쿄성서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전도사로 일했고, 1924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33년 조선성결교회 총회가 조직되면서 초대와 이듬해 제2회, 1938년과 1939년 제6회,제7회 등 네차례에 걸쳐 총회장을 역임했다.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에는 신사참배 강요에 협조한 일을 비롯하여 친일 행적이 있다. 이명직은 마태복음의 포도원 비유를 들어 일본의 조선 합병을 정당화하였으며, 1940년 활천에 실은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이상(大理想)〉이라는 글에서는 일본 건국이념인 팔굉일우가 성서의 가르침과 부합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2]

1938년 개신교에서 각 교단 대표들이 솔선해 신사참배를 할 때, 성결교에서는 이명직이 대표로서 감리교양주삼, 장로교홍택기 등과 함께 일본 신사를 방문해 신사참배를 했다. 1943년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이르러 일제는 강압적으로 성결교단을 해산하도록 했는데, 이때 이명직을 필두로 한 성결교 지도자 7인이 성서가 그 기본을 유대 사상에 두어 국체에 반하는 치명적 결함이 있으므로 성서 자체로부터 이탈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내용의 성결교회 해체 선언서를 발표했다.

이명직은 교단 행정 외에도 서울신학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성서학원 교수(1916년)와 원장(1935년), 경성신학교 교장(1940년), 서울신학교 교장(1951년), 서울신학대학 초대학장(1959년), 성결교신학교 명예교장(1962년)을 역임하면서 후진을 많이 양성했다. 1965년 서울신학대학 명예학장에 추대되었다. 뿐만 아니라 1922년부터 교단 기관지인 《활천》 주간을 맡았으며, 성결신학의 핵심인 사중복음과 성결론을 체계화하고 많은 저술도 남겨 성결교단의 신학적 토대를 놓았다는 평을 듣는다.

사후[편집]

이명직은 '성결의 아버지', '성결교회의 사부'로 불릴 만큼 대한민국 성결교회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며 존경을 받고 있다. '성결교회의 사도 바울'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이다.[3]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종교 부문에 포함되어 있다. 2005년 예비 명단이 공개되었을 때 개신교 인물 47명 중 성결교단에서는 이명직과 박현명 두 사람이 선정되어 오랫동안 잠복해 왔던 신사참배 및 친일 문제가 공론화되었다. 이에 대해 교단 측은 국가보다 신을 중심으로 삼는 이명직의 "신중심적 국가관"을 이유로 들거나 그의 내면에 "하나님만 아시는 심적 고통"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 교단을 이끌다 보니 신사참배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동정론 등을 내놓은 적이 있다.

같이 보기[편집]

참고자료[편집]

각주[편집]

  1. 성결교 이명직 목사에 대한 연구
  2. 임종국 (편) (1987년 8월). 《친일논설선집》. 서울: 실천문학사. 
  3. 임운규 (2007년 5월 3일). “한국 성결교회의 사부(師父) 이명직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2008년 1월 27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