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순 (영화 녹음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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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순
李敬淳
출생1921년 5월 17일(1921-05-17)
평안북도 창성[1]
사망2008년 5월 22일(2008-05-22)(87세)
대한민국 대한민국 인천
직업영화인
활동 기간1935년 ~ 1990년
종교개신교(장로회)
학력창성보통학교 졸업
창성고등보통학교 중퇴
경성고등전기공업학교 졸업
배우자손길순
자녀장남 이영길(前 한양스튜디오 대표)
차남 이영용
수상1984년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

이경순(李敬淳[2], 1921년 5월 17일 ~ 2008년 5월 22일)은 대한민국의 영화인이다. 195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한국영화의 80% 이상을 녹음한[3] 한양스튜디오 창립자이자 대한민국의 초대 영화 녹음기사이다. 처남은 가수이자 영화 녹음기사인 손인호이다.

생애[편집]

이경순은 1921년 평안북도 창성에서 태어났다. 1934년 창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큰형이 운영하는 춘일악기점이라는 자전거포 겸 악기점에서 축음기와 유성기판, 라디오 보급과 수리 등의 일을 도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소리와 인연을 맺게 된 이경순은 1935년 서울의 빅터축음기주식회사 레코드부에서 각종 음향시설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4] 1937년에는 빅터축음기주식회사에서 본격적으로 현장연수 생활을 시작했으며, 경성전기학교(京城電氣學校) 야간부에 들어가 1941년에 졸업했다. 이 무렵 스카라극장의 전신인 서울 약초극장(若草劇場)에서 RCA토키장치의 출장서비스를 담당하게 되었고, 빅터축음기주식회사에서 알게 된 최칠복을 따라 사단법인 조선영화주식회사의 영화녹음 현장을 견학하기도 했다고 한다. 해방 후 경성전기회사(京城電氣會社) 통신계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중 최칠복의 소개로 주한미군 502부대 녹음실에서 근무하게 되었으며, 이필우, 이명우, 김학성 등과 뉴스영화 및 문화영화를 제작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주한미국공보원과 함께 진해로 내려가서 활동을 시작했는데, 1951년 당시 국방부가 제작하던 다큐멘터리 <정의의 진격>의 녹음을 위한 시설 대여 요청을 미공보원이 거절한 데 충격을 받아서 퇴직하게 된다. 이때 조백봉, 김형근, 김봉수 등 함께 나온 동료들과 함께 목욕탕을 개조해 영화협동제작소라는 녹음실을 개설했다. 1962년에 설립한 한양녹음실을 1969년 한양스튜디오로 개칭한 후 1990년대 후반까지 왕성하게 영화녹음을 담당했다.[5]

2006년 4월 18일 이경순은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마둔리에 위치한 자신의 '박물관'에 소장, 전시돼오던 영화기자재 500여 점을 안성문화원에 기증하는 약정식을 가졌다.[6][7][8]

이후 안성문화원은 자료를 좀 더 체계적으로 전시하고, 교육적인 가치와 활용도를 높일 목적으로 2008년 4월 동아방송예술대학과 이경순 영화관련 기자재 및 자료기증 약정을 체결하였으며, 동아방송예술대학은 종합촬영소 내에 기념관을 건립하기로 하고 2008년 11월 22일 DIMA종합촬영소[9]이경순 소리박물관[10] 착공식을 갖고, 2009년 11월 11일에 이경순 소리박물관을 개관하였다. 현재 소리박물관에는 녹음기, 편집기, 영사기, 각종 대본, 영화관련 기자재, 상장, 트로피 등 이경순의 유품을 비롯 국내 영화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의미있는 전시품 2,0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11][12][13]

2008년 5월 22일 지병인 폐암으로 별세했다.[14] 슬하에 2남을 두었으며 장남인 아들 이영길도 이경순의 뒤를 이어 한양스튜디오를 운영한 대한민국영화녹음기사이다.

활동[편집]

1951년 [영화협동제작소]라는 녹음실을 개설 후 손전의 <내가 넘은 삼팔선>(1951), 신상옥의 <악야>(1952), 정창화의 <최후의 유혹>(1953) 등 젊은 감독들의 데뷔작 녹음을 담당했다. 이후 이규환의 <춘향전>(1955), 홍성기의 <열애>(1955), <춘향전>(1961), 신상옥의 <지옥화>(1958), 김기영의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 등 중요한 작품들에 참여했으며, 1962년에 한양녹음실을 설립했다. 1969년한양스튜디오로 개칭한 자신의 녹음스튜디오를 통해 1990년대 후반까지 왕성하게 영화녹음을 담당했다. 한국영화에 대한 업적을 인정받아 서울시 문화상, 1984년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 등을 수여받았다.[15]

작품[편집]

동시녹음[편집]

사운드(음향)[편집]

학력[편집]

수상[편집]

기타 수상[16][편집]

  • 제1회 금룡상 녹음부문상 (춘향전)
  • 1959년 사단법인 한국영화제작가협회 공로표창상
  • 1959년 한국영화녹음상
  • 1962년 영화세계녹음상
  • 미국무성 I.F.P.A. 녹음상
  • 1967년 사단법인 한국영화제작가협회 공로표창상
  • 1968년 영화연예사 녹음상
  • 한국영화 50주년 영화의 날 공로표창상
  • 청룡상(7)녹음상
  • 1970년 영화연예사 녹음상

가족관계[편집]

각주[편집]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