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우옌후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꽝쭝제 응우옌후에
꽝쭝제 응우옌후에 동상

꽝쭝제(베트남어: Quang Trung光中 광중) 응우옌후에(베트남어: Nguyễn Huệ阮惠 완혜, 1753년 ~ 1792년)는 베트남의 혁명가이자, 장군, 떠이선 왕조의 군주이다. 완문혜(阮文惠), 구옌 후에 라고 부르기도 한다. 생부의 성은 원래 호(Hồ)씨 였고 응에 안(Nghệ An) 사람으로 온 가족이 떠이 선(Tây Sơn)으로 납치되어 그곳에서 생활하였다. 응우옌냑, 응우옌르 등 다른 형제들과 함께 떠이선 형제로도 부른다. 응우옌 씨가 지배하는 지역에 폭정이 심화되면서 1771년 떠이선 출신의 3형제(완문악, 완문려, 완문혜)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소수의 병력으로 응우옌아인이 끌어들인 태국군과 청나라군을 섬멸하여 베트남의 민족 영웅으로 기록된다. 연호는 광중(베트남어: Quang Trung꽝쭝光中)이고 묘호는 태조(베트남어: Thái Tổ太祖)이며, 시호는 무황제(베트남어: Vũ Hoàng Đế武皇帝)이다.

생애[편집]

농민 봉기[편집]

본래 생부의 성은 원래 호씨(Hồ) 였고 응우옌 씨(阮氏)이기는 하지만 광남 응우옌씨와는 무관한 사람들이었다. 본래 그의 가계는 응에안(Nghệ An)출신이었으나 온 가족과 함께 떠이선(Tây Sơn, 西山)으로 끌려와 떠이선에서 성장하였다. 응우옌후에(Nguyễn Huệ)는 7남매, 3남 4녀 중 셋째 아들이자 막내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칭찬을 받았고 스승으로 부터 문무를 전수받았다.

18세기의 베트남에는 후 레 왕조(後黎朝)의 황제가 명목상의 황제로 전락되어, 북부는 찐씨(鄭氏), 남부는 응우옌 씨(광남 완씨)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베트남 남부를 지배하고 있던 응우옌씨가 지배하는 지역에 폭정이 심화되면서, 1771년 떠이선 출신의 3형제(완문악, 완문려, 완문혜)가 반란을 일으켰다. 응우옌 일가의 전횡에 맞서, 1771년 두 형과 함께 당시 남부를 지배하고 있던 응웬((Nguyễn)씨 일가의 전횡에 맞서 의병을 조직하여 권문 세도가의 재물을 빼앗아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토지와 가솔을 잃은 농민들이 그의 군에 가담하면서 그 세력이 날로 강해져 갔다. 그리하여 뀌이년(Qui Nhơn)을 점령하였으며 그들의 의병에 꽝응아이(Quảng Ngãi)까지 세력이 확장되었다.

베트남 통일 전쟁[편집]

타이손 3형제
(좌로부터 응우옌후에, 응우옌냑, 응우옌르)

이들 형제는 처음에는 후 레 왕조의 복권을 주창했고, 후 레 왕조는 이것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군사를 이끌고 대거 남하하여 광남 완씨의 수도 부춘(현재의 후에)을 공략했다.

1776년 응우옌후에는 군사를 이끌고 빈 투언(Bình Thuận)을 공략하여 점령하고, 형 응우옌르(Lữ)와 함께 자딘(Gia Định)등을 점령하였다. 떠이선의 세력들은 후 레 왕조에게 항복하는 형태로 전투를 계속하여, 1777년쟈딘(현 호치민시)에서 광남 응우옌 왕조를 멸망시켰다. 1778년 형 응우옌냑(Nhạc)이 투언호아(Thuận Hóa)를 본거지로 삼아 중부 지역의 황제에 올랐다. 그 뒤에 형 응우옌냑의 휘하에서 군권을 장악하였으나, 북방을 정벌하는 문제로 형과 갈등하게 된다.

타이손 형제가 쓰던 총과 검

1782년에는 형 응우옌냑과 함께 남쪽으로 군사를 몰아 응우옌아인(Nguyễn Anh, 1802년 응우옌 왕조를 세운 가륭제)을 치자 응우옌아인은 사이공을 포기하고 푸꾸옥(Phú Quốc)섬으로 달아났고, 아인의 가족은 꼰 다오 섬으로 도주하였다. 그러나 이들을 추격하여 몰살시켰고 광남 응우옌씨 일족 중 응우옌푹아인(완복영)만은 겨우 살아남아 시암으로 도망쳤다.

응우옌아인(Nguyễn Anh)은 태국으로 건너가서 태국에 원병을 요청, 태국 군사를 데리고 왔고, 사 덱(Sa Đéc)을 공격하였다. 전승한 후에 꾸이년으로 되돌아 갔던 응우옌 후에는 군사를 모으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군사를 재배치하여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전투를 벌여, 소수의 군사로 태국군 2만 여명을 전멸시키는 전공을 거둔다.

태국 군 격퇴[편집]

태국군과의 전쟁 승리를 기념하여 세운 동상

전투에서 겨우 살아 남은 응우옌아인(Nguyễn Anh)과 태국군 패잔병은 다시금 태국으로 패주하였고 응우옌후에는 뀌년으로 귀환 한다. 꾸이년으로 돌아와 북부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찐씨(Trịnh, 鄭氏) 세력을 점차 몰아내 찐씨 세력의 점령지를 차지하고 결국 멸망시켰다. 1786년에는 꽝빈 이남은 물론 북부 지역 전체가 타이손 형제 세력의 수중에 들어 오게 된다. 탕롱(Thăng Long)을 접수하고 당시 유명무실하였던 후 레(Lê)왕조를 구하자 하니, 레 현종(Lê Hiển Tông, 黎顯宗)은 응우옌후에를 원수로 봉하고 공주와 결혼시켰다.

2008년 8월의 꽝쭝 황제 즉위식 재현행사

1786년에 응우옌후에는 후 레 왕조 내부의 불화를 이용해 북벌을 감행하게 했고, 이것으로 후 레 왕조가 붕괴되었다. 동시에 이 일로 형 응우옌냑과 갈등하게 된다. 응우옌후에는 후 레 왕조의 황제를 폐위하지 않고 자신은 섭정자리에 머물러 왕조를 존속시켰지만 불안을 느낀 레 민종(Lê Chiêu Thống, 黎愍宗, 소통제)은 청나라로 망명했다. 민종 소통제는 청나라를 끌어들였는데 1789년 응우옌후에는 내정에 개입한 청나라군을 격퇴하고, 후 레 왕조를 멸망시켰다.

꽝쭝 황제는 하노이에서 축제를 거행하여 베트남을 점령하고 있던 중국 군대를 안심시킨 후, 그들을 기습하여 자신의 땅에서 몰아냈다. 베트남인들이 여러 세기 동안 대내외적인 혼란을 겪으면서 적에게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는 데 능숙해졌음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1]

황제 즉위와 최후[편집]

조카 응우옌광히엔청나라의 평화 협정 (1789년)

1788년 청나라가 침입해오자 응우옌후에(Nguyễn Huệ)는 제위에 올라 연호를 광중(꽝쭝)이라 하였다. 그해 11월 25일 후 레 왕조의 복위를 명분으로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침입해 오는 청나라 군사를 소수의 병력으로 산악지대에서 물리쳤다.

그는 근대 베트남사에서 외적을 물리친 걸출한 민족 영웅이며 신출귀몰한 용병술로 적을 섬멸한 용장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황제위에 오른지 4년만인 1792년에 39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가족들은 1802년 응우옌 왕조를 건국한 쟈롱 황제에 의해 후에(Huế)에서 참살당했다.

사후[편집]

타이손조는 중흥 군주였던 꽝쭝 황제의 죽음으로 지속적인 성장을 하지 못하고 결국 불안정한 사회기반 속에서 점차 흔들리고 1802년 베트남의 마지막 전통왕조인 응우엔조에 의해 물러나게 된다.[2]

그러나 꽝쭝은 소수의 군사로 태국군과 청나라군을 연이어 격퇴하여 베트남의 민족 영웅, 국난을 극복한 전사로 칭송받고 있다.

평가[편집]

응우옌후에의 동상

그는 베트남 역사상 외적을 물리친 걸출한 민족 영웅이며 신출귀몰한 용병술로 적을 섬멸한 용장으로 평가된다.

관련 항목[편집]

관련 서적[편집]

  • 정혜영, 《IT S 베트남》 (미다스북스, 2009)
  • 김영애 외 지음, 《아시아 아프리카 문학》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2003)

주석[편집]

  1. 스콧 데일림플, 존 K. 클레멘스 공저「타임 마스터리」(김은정 역, 비전코리아, 2006) 31페이지
  2. 김영애 외, 《아시아 아프리카 문학》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2003) 319

바깥 링크[편집]

전 임
후 레 왕조
소통제(昭統帝)
제1대 떠이선 왕조의 황제(부춘 조정)
1788년 ~ 1792년
후 임
경성제 완광찬(景盛帝 阮光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