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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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1세
Otto I HRR.jpg
신성로마황제
독일왕
이탈리아 왕
작센 공
재위 962년 - 973년(신성로마황제)
936년 - 973년 (독일왕)
955년 - 973년(이탈리아왕)
황후 잉글랜드의 이디스
이탈리아의 아델라이데
부왕 하인리히 1세
모비 링엘하임의 마틸데
이전 황제 베렝가리오 1세(924년까지)
다음 황제 오토 2세
베렝가리오 2세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오토 1세

오토 1세(독일어: Otto I[1], 912년 11월 23일 ~ 973년 5월 7일) 또는 오토 대제(독일어: Otto der Große)는, 하인리히 1세링엘하임의 마틸데의 아들로, 작센 공작이자 독일이탈리아의 왕이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첫 황제로 인정받고 있다. [2]

카롤링거 왕조 붕괴 이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위에 올랐으나 그의 영토는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에만 한정되는 것이었다.

생애[편집]

독일왕이 되다[편집]

그는 하인리히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되어 그가 죽기 1개월 전인 936년 8월 7일 아헨에서 공작들에 의해 왕으로 선출되었고 마인츠와 쾰른의 대주교들에 의해 왕관을 썼다. 하인리히 1세가 자기 수하의 공작들을 다루는 데 애를 먹은 반면 새 왕은 그들에 대한 종주권을 확실하게 주장했다. 그 때문에 바로 전쟁이 벌어졌는데 특히 프랑켄의 에버하르트와, 같은 이름인 바이에른의 에버하르트를 상대로 벌어진 전쟁에서는 불만을 품은 작센의 귀족들이 오토의 이복형 탕크마르의 지도 아래 상대편에 합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탕크마르는 패배해 살해되었으며 프랑켄의 에버하르트는 왕에게 항복했고 바이에른의 에버하르트는 직위에서 쫓겨나 모든 권리를 박탈당했다. 그러나 939년에 오토의 동생 하인리히가 반란을 일으켰으며 프랑스 왕 루이 4세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오토는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41년에 하인리히는 다시 국왕을 살해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 이 음모는 이내 발각되었고 다른 가담자들은 처벌받았지만 하인리히는 또다시 용서받았다. 그 이후로 그는 형에게 충성을 바쳤으며 947년에 바이에른 공작작위를 받았다.

이와 같은 내부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오토는 시간을 내어 왕국의 변경을 강화하고 확대하는 데 힘을 쏟았다. 동쪽에서는 변경백인 게로와 헤르만 빌룽이 슬라브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들의 전과는 937년 마크데부르크에 장크트모리츠 수도원을 건립하고 948년에는 2곳의 주교관구를 창설함으로써 공고해졌다. 북쪽에는 기독교 선교를 덴마크로 확대하기 위해 3곳에 주교관구가 창설되었다. 그러나 오토의 제1차 보헤미아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보헤미아 군주 볼레슬라프 1세는 계속 버티다가 950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 난 뒤 오토는 프랑스로렌 영유권 주장을 물리치고 나아가서 프랑스 내분의 중재자 역할까지 할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하게 그는 부르고뉴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했다. 게다가 홀로 된 이탈리아의 왕후 이탈리아의 아델라이데(아델하이트)가 이브레아의 베렝가리오 변경백에게 포로가 되어 그에게 지원을 요청해오자 오토는 951년 이탈리아로 진군해 롬바르디아 왕을 자칭하고 아델하이트와 결혼했다. 952년 베렝가리오는 이탈리아 왕국을 다스리는 그의 봉신으로서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독일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오토는 첫 번째 이탈리아 원정을 중단해야 했다. 에디트에게서 난 아들 리우돌프가 몇몇 유력자들의 지원을 얻어 그에게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오토는 형세가 불리해 작센으로 퇴각해야 했으나 954년 마자르족이 독일을 침공하면서 반군의 입장이 불리해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 상황에서 반군은 독일의 적들과 공모한다는 비난을 받기 쉬웠던 것이다. 장기간의 전투 끝에 955년 리우돌프는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 그 덕분에 오토는 955년 8월 아우크스부르크 부근에서 벌어진 레히펠트 전투(Battle of Lechfeld)에서 마자르족을 결정적으로 격파할 수 있었다. 마자르족의 지휘관들이 처형당했다. (→헝가리의 역사, 헝가리의 대외 관계)

이후 오토는 여러 차례의 전투를 치른 뒤 960년에 이르러 엘베 강 중류와 오데르 강 중류 사이의 지역에 거주하던 슬라브족을 모두 복속시켰다. 968년에는 마크데부르크 대주교관구가 3곳의 주교관구와 더불어 창설되었다. 폴란드의 미에슈코까지도 독일 왕에게 조공을 바쳤다. 950년말 독살당한 로타리오 2세의 미망인 아델라이드로부터 도움을 청하는 연락이 왔다. 오토는 군사를 이끌고 롬바르디아로 건너가 베렝가리오 2세아달베르토를 격파하고 되돌아왔다. 그러나 오토가 되돌아간 틈을 타 베렝가리오 부자는 다시 이탈리아반도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황제로[편집]

맏사위 콘라드 와 장남 리우돌프의 사망(957년)으로 961년 5월 오토는 아델하이트에게서 난 큰아들인 6세된 오토 2세가 독일 왕으로 대관식을 갖도록 주선했다. 또한 자신의 영지였던 작센 공작위는 빌룽 가문 출신 헤르만을 작센공작에 임명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이브레아의 베렝가리오에게 심한 핍박을 받고 있던 교황 요한 12세의 호소에 응해 2번째로 이탈리아 원정을 떠났다. 962년 2월 2일 로마에 당도한 오토는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11일 후에 황제와 교황 간의 관계를 조성하기 위한 ' 오토의 특권'(라틴어: Privilegium Ottonianum 파비니루눔 오톤니안눔[*])이라는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교황청의 세속적인 권한을 확인하고 확대한 것이었는데 황제가 교황선출을 인준할 수 있게 만든 단서조항이 처음부터 있었는지, 아니면 963년 12월 오토가 요한 12세를 베렝가리오와 내통한 혐의로 폐위시키고 레오를 교황으로 앉혔을 때 추가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베렝가리오는 생포되어 독일로 압송당했으며 964년에는 레오 8세에 반대하는 로마인들의 반란이 일어났으나 진압되었다.

그러나 그의 '제국'은 오스트리아스위스를 포함한 독일과, 이탈리아에만 한정된 것이었다.[3]

말년[편집]

황제 즉위 이후 샤를마뉴가 그러했던 것처럼 학자들을 장려하고 학당을 설립하고 시인과 작가들을 지원하여 문예부흥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를 오토왕가의 르네상스라 부른다.

965년 교황 레오 8세가 죽자 오토는 요한네스를 교황으로 선택했으나 로마인들에 의해 축출되었다. 그래서 오토는 3번째로 이탈리아 원정을 떠나 966년~972년에 그곳에서 머물렀다. 비잔티움 제국샤를마뉴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그를 황제로 인정하기를 거부했고, 그는 급기야 남이탈리아의 비잔티움 제국령까지 진격해 들어갔고, 비잔티움 제국과 오랜 협상 끝에 972년 오토 2세와 비잔티움 공주 테오파노의 결혼이 이루어졌다. 독일로 돌아온 황제는 973년 3월 멤레벤에서 죽었고 첫 번째 부인 유디트의 무덤 옆에 묻혔다.

가계[편집]

주석[편집]

  1. 작센 공작으로는 오토 2세
  2. 밀라노의 아르눌프가 쓴 《라틴어: Liber gestorum recentium 리베르 제스또룸 리키노티눔[*]》 1.7에 따르면, 오토 1세는 “이탈리아 황제로 호칭된 첫 독일인”이었다. 800년에 카롤루스 대제가 황제로 대관했지만 그 왕국은 손자들에게 분할되었고, 924년 베렝가리오 1세의 암살 이후 황제 자리는 거의 40년 동안 비어 있었다.
  3. 카롤링거 왕가의 제국 개념(프랑스와 로렌 등을 모두 포함한)에 비하여 협의적인 의미였다.
  4. 잘리어 왕가의 콘라트 2세의 조부

바깥고리[편집]

전 임
베렝가리오 1세(924년까지)
베렝가리오 2세(명목상)
신성로마황제
962년 - 973년
후 임
오토 2세
전 임
하인리히 1세
독일 왕
936년 - 973년
후 임
오토 2세
전 임
기셀베르트
로트링겐 공
936년 - 944년
후 임
콘라트 적왕
전 임
베렝가리오 2세
아달베르토
이탈리아 왕
(베렝가리오 2세아달베르토와 대립(955 - 963))
955년 - 973년
후 임
오토 2세
전 임
하인리히 1세
작센 공작
936년 - 961년
후 임
빌룽의 헤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