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Sorrow4468/연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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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 국가 정리(이미지 펼치기)

이다지선생님 강의 한 편에 해당하는 분량을 작성하기로 한다.

총 30강을 한 달 간, 하루 두 편 씩 15일, 세 편 씩 10일, 25일간 진행한다.

하루의 기준은 날짜를 기준으로 한다. 1일에 2강, 2일에 4강 ... 그 날짜의 24시간 안에 두 강을 듣는 것으로 정한다.

최태성선생님 강의는 40강이니까 이다지선생님 강의랑 진도 맞춰서 끊어준다.

2월 초에 한국사 시험이 있으므로 1월안에 데이터베이스화를 마친다.

2월부터는 신정철선생님과 연미정선생님 강의를 들으며 빈출개념과 문제유형을 파악한다.

동시에 기출문제를 풀면서 시험에 대비한다.

[한국사 정리 요령]

아는 내용, 지엽적인 내용 다 무시한다.

모르는 개념들만 모아서 정리한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서 최단루트로 가라.

시공간좌표를 정확하게 찍는다.ex)고대-고구려-장수왕-충주-중원고구려비:설명)

설명은 위키문서나 검색을 통해 알아본 내용을 간단명료하게 압축시켜서 한두 줄로 적는다.

그 내용이 정확하게 뭔지, 그래서 역사적으로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신정철 강의 1회독 마치고나서, 2회독 할 때 빈출문제 모음 문단 작성하기(1회독때 빈출문제까지 작성하려니까 왔다갔다 하는게 효율이 너무 구져)

빈출문제 모음[편집]

광해군 시기에 전후 복구를 위해 동의보감을 편찬함

구석기[편집]

신석기[편집]

청동기[편집]

고조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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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편집]

철기[편집]

연맹왕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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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편집]

고구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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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편집]

백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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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편집]

신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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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편집]

가야[편집]

통일신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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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편집]

발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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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편집]

후고구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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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편집]

후백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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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편집]

고려 호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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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877~943, 재위 918~943) : 후삼국을 통일하여 고려를 세운 왕[편집]

세금감면 : 나라가 바뀌면서 혼란스러운 상황을 일단 정리함

흑창 : 춘대추납의 백성 구휼기구를 설립

거란 적대 :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 -> 고구려의 유민이 건립한 발해 ->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 -> 발해의 원수는 고려의 원수 -> 거란 적대

호족 통합 : 왕건 자신도 호족 출신이니 호족으로부터 만만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호족의 딸과 결혼하는 정책으로, 같은 가족이 되어 유대감을 형성함

사심관 : 대토지를 소유한 호족에게 그 지역의 관리직을 주고, 그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사고에 책임을 지게 하여 왕과 호족의 격차를 확실히 함

훈요 10조 : 왕건이 백성에게 명심하도록 전하는 10가지 메시지(불교, 풍수지리, 문화적 자주성, 평양중시를 통한 고구려 계승의식)

광종(925~975, 재위 949~975) : 500년 고려왕조의 기틀을 세운 왕[편집]

한반도 최초의 과거제 시행

수성군주 : 개국이후 5대 왕조 이내에 국가의 기틀을 다진 군주

왕실 내 족내혼을 통해 왕권강화

칭제건원 :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세워 원년을 시작함

연호 : 광덕

쌍기 : 광종 7년에 중국 후주에 보낸 사신 설문우와 함께 고려에 들어와 광종의 마음에 들어 귀화하고 한림학사 관직을 하사받은 중국계 한국인 // 광종에게 과거제 시행을 건의한 사람

공신시대 : 건국 초기 개국공신들의 위상과 권력이 지배하던 시대 // 광종의 과거제 시행으로 고려의 공신시대는 끝나게 됨

공복(公服) : 관료들의 복장을 보라, 빨강, 연두, 자주 네 가지 색으로 규정하여 왕을 왕답게 함 // 강한 왕권을 바탕으로 호족세력의 반발을 견뎌낼 수 있었음

개경의 이름을 황도로, 서경의 이름을 서도로 바꿈 // 왕으로서의 자부심 표출

권신이 개국공신세력의 대표인 준홍을 반란을 꾀한 죄로 참소한 것을 계기로 광종은 의심병에 걸려 피의 군주가 되어 내외적으로 반발자는 모두 숙청하였음 // 왕이 참소에 휘둘리니 고려사회 전체가 대참소파티의 모습으로 변함

노비안검법(광종 7년, 956) : 불법노비를 풀어 귀족의 권력을 약화, 노비가 백성이 되면서 왕권 강화

그 외[편집]

벽란도 : 황해도에 위치함, 고려의 무역 정치 교류등 다방면으로 이용되었음,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와서 무역을 하는데 이때 해외로 코리아라는 이름이 퍼지게 됨, 고려의 국제 무역항

고려 귀족 : 문벌귀족, 무신, 권문세족 등, 음서(관리직 세습)와 공음전(관리니까 주는 땅)의 특권을 누림

향리, 잡류, 남반, 군반 : 고려 지배계급의 중류층 신분, 말단 행정직을 담당, 자식이 아버지의 직역을 세습함 // 향리는 힘이 좀 쎄서 관리가 되기도 했음

백정 : 일반 농민

향 부곡 소 : 특수 행정구역, 차별 지역, 세금을 추가로 냄, 과거시험에 응시 불가, 거주 이전의 자유 없음

천민 : 대부분이 노비였음, 일천즉천, 부모 중 하나만 천민이어도 자식은 천민이다

향도 : 불교 동아리(초기), 매향활동(미륵신앙의 일종, 땅에 향을 묻으며 기도함), 석탑 사원등을 건립 // 농민 공동체(후기)

고려의 석탑 : ㅇ각ㅇ층ㅇ탑 ex) 월정사 8각 9층 석탑, 다각다층탑이 자주 나옴, 전부 다는 아님

고려의 불상 : 비율이 요상하거나, 못생기면 고려불상, 전부 다는 아님

제위보(광종 14년, 963) : 빈민의 구호 및 질병 치료를 담당하는 기관, 기금을 모아서 활동하였음

전시과(경종 1년, 976) : 관리들에게 전지(밭)와 시지(땔감)를 지급 // 고려시대의 수조권, 역분전(태조, 개국공신 대상)->시정 전시과(경종, 976, 인품 기준)->개정 전시과(목종, 998)->경정 전시과(문종, 1076, 현직 기준)

의창(성종 5년, 986) : 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게 갚도록 함, 고구려의 진대법과 같은 맥락, 고려 초 태조가 만든 흑창을 이름을 의창으로 바꾸고 그 규모도 확장시켰다

도병마사(성종 8년, 989) : 처음엔 국방위주의 임시국회 // 몽골의 지배 이후 도평의사사로 개칭, 상설기관화, 국정개입, 고려 귀족 정치의 특징

서희의 외교 담판(성종 12년, 993) :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켜서 고려와 사이가 좋지 못해, 고려가 송나라하고만 사이좋게 지내가 지리적 고립을 느낀 거란은 송나라보다 고려먼저 정리하자고 쳐들어왔는데, 이를 서희가 강동6주때문이다 라고 구라뻥쓰를 까면서 강동6주 얻고, 거란의 1차 침입도 돌려보냈다

강조의 정변(목종 12년, 1009) : 강조가 군사력을 동원해서 목종을 밀어내고 현종을 옹립(임금으로 받들어 모심)하여 정권을 장악하였음

거란의 2차 침입(현종 1년, 1010) : 강조의 정변으로 현종이 즉위하고 거란이 이를 문제삼아 침입함, 현종을 왕으로 즉위시킨 강조에게 현종은 북방 양계에 자리를 주는데 거란의 침입에 강조의 지휘부대는 대패하고 현종과 신하들이 전라도 나주까지 밀려나며 망하기 일보직전까지 감 // 그 외에도 여러 사건들과 정서들이 얽혀있는데 매우 복잡하므로 건너뜀

양규의 활약(현종 1년, 1010) : 거란의 2차 침입 막바지에 현종이 거란에 화해하자 하고 거란이 알았다 하면서 퇴각을 하는 거란군을 양규가 이끄는 부대가 공격하여 1만여명의 백성을 구했다

거란의 3차 침입(현종 9년, 1018) : 고려의 강동6주 반환 거부를 이유로 거란 소배압장군의 10만대군이 침입했는데, 고려가 이에 20만 대군으로 대응한다. 강감찬의 귀주대첩에서 거란군을 격퇴하였다.

거란침입의 결과 : 고려-송-거란의 세력균형 // 호국불교에 따라 나라를 지키고자 초조대장경을 조판함 // 천리장성(압록강~도련포:함경남도 정평)을 쌓음

고려 문벌귀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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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편집]

문벌귀족 : 끝까지 살아남은 명문 호족

음서 : 5품 이상 관료의 아들, 손자, 사위, 동생, 조카를 관리로 등용 // 일가 전체가 귀족이 되는 문벌귀족 형성의 원인

공음전 : 5품 이상의 관료들에게 지급한 땅 // 문벌귀족의 경제력 그 자체이며, 음서와 함께 문벌귀족의 권력 상승의 원인

통혼 : 결혼의 다른 표현 // 고려 중기 문벌귀족들이 권력을 지키기 위해 혼인의 형태가 폐쇄 통혼(근친혼)의 형태를 띄게 됨

9재학당(문종) : 최충이 인재양성을 위해 세운 사립 교육기관

사학 12도(문종) : 십이공도 라고도 함, 공교육에 국자감, 사교육에 사학 12도가 있었다, 최충의 문헌공도, 정배걸의 흥문공도 등이 있다, 사교육 과열 방지를 위해 관학진흥책을 펼치고, 국자감에 7재(전문 강좌)를 설치하고, 양현고(장학 재단)을 설치하였다.

의천 : 문종 시기의 승려, 문종의 넷째 아들, 천태종을 세우고 교장을 간행하여 당시 교종선종 불교 대립구도에서 교종 중심의 선종 통합을 실시한다. 왕가의 사람이라 교종쪽에서 시작하였다. 교관겸수 사상을 강조하였다.

교관겸수 : 의천 승려의 불교적 사상으로 가르침과 실천을 함께 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건원중보, 삼한통보, 해동통보, 활구(숙종 6년, 1101) : 숙종이 왕권강화와 상업진흥을 도모하기 위해 발행한 화폐들 // 활구는 은으로 된 호리병으로서 고액의 화폐를 담당함, 만들긴 했지만 활발히 유통되지는 못함, 최초로 활발히 유통된 화폐는 조선 후기 상평통보

별무반(숙종 9년, 1104) : 윤관이 건의하여 여진족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군대 // 발해 속국이던 여진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여겼는데, 내부 집권자가 바뀌면서 고려와 충돌하기 시작했고 이를 막기 위했던 별무반 // 여진을 토벌하고 동북 9성을 쌓음

금의 사대 관계 요구(예종 8년, 1113) : 여진의 금나라 건국, 거란 멸망, 금나라가 항복하고 사대 관계로 들어올 것을 요구, 이자겸이 이를 수용함 // 거대한 금나라와의 전쟁을 합리적으로 피했기도 하고, 싸워보지도 않고 굴복해서 비굴했기도 하고, 수용 사대 개경파, 강경 전투 서경파의 대립이 시작된다.

삼국사기(인종 23년, 1145) : 김부식이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삼국시대의 정치사, 유교적인 성향, 합리주의적인 성향 // 고려 중기 문벌귀족들의 파벌싸움이 배경이 되어 후세에 역사에 교훈을 남기기 위해 편찬되었다고 보여짐

이자겸의 난(인종 4년, 1126) : 문벌귀족 이자겸이 인종에게 자기 딸들을 시집보내 강화된 권력을 통해서 일으킨 반란을 인종이 진압함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인종 13년, 1135) : 신진 관료의 문벌귀족 견제 // 1. 북쪽에서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우고 세력이 커지니 이에 대항하기 위해 서경(평양)으로 수도를 옮겨 막아야 함(명분), 2. 개경에 집중된 문벌귀족들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함(진짜 의도)

고려 무신정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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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편집]

중방 : 무신정권 시대 최고위(最高位) 정치기구 // 기존의 중서성, 상서성, 6부 같은 기구들을 무신은 그런거 잘 못해서 그냥 하나로 때려박은 정치스타일

교정도감 : 무신정권 시대에 최충헌이 집권했을 당시 최고 정치기구 // 같은 무신정권이지만 최충헌을 시작으로 하는 무신정권 최씨 집권기의 시작

무신정변(의종 24년, 1170) : 의종이 정치를 개판으로 하고, 무신이 차별받던 시대에, 권력층인 문벌귀족이 분열한 틈을 타서 무신들에 의해서 보현원에서 일어난 반란 // 정권을 잡고 100년간 지속됨

망이 망소이의 난(명종 4년, 1174) : 향 부곡 소 행정시스템의 차별과 무신정권에 반대하는 농민봉기

요세(명종 4년, 1174) : 고려 후기의 승려, 의천승려의 천태종을 다시 부활, 중흥시켰음, 백련결사운동을 전개함

백련결사 : 요세승려가 백련사에서 세운 결사

도방(명종 9년, 1179) : 경대승이 조직한 사병집단 // 최충헌이 강화하여 군사기구로 만듦

지눌(명종 12년, 1182) : 선종불교 중심의 교종 통합을 주장한 승려, 정혜쌍수와 돈오점수를 강조하였음, 지눌의 절 수선사를 중심으로 무신정권 시기의 타락한 불교를 정화한다는 목적으로 수선사 결사운동을 시행하였음

정혜쌍수 : 지눌승려가 강조한 불교사상, 사물의 본질이나 이치등을 탐구해야 한다는 주장

돈오점수 : 돈오는 깨달음 이라고도 한다. 깨달음에 이르기까지가 계단식, 혹은 점진적이라는 주장

만적의 난(신종 1년, 1198) : 만적이 중심이 되어 일으키려다 미수에 그친 노비해방운동 //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 출생이 노비인 사람들의 신분제 타파 운동, 고작 12세기 말에 일어난 대단한 인간평등사상

혜심(희종 6년, 1204) : 지눌승려의 제자, 유교와 불교가 그 본질이 다르지 않다는 유불(仏)일치설을 주장함, 불교에서 성리학으로, 넘어가는 사상적 기반을 마련함

해동고승전(고종 2년, 1215) 외 동명왕편(무신정권), 삼국유사(원 간섭기), 제왕운기(원 간섭기) : 고려의 시대별 역사서이며 네 책 다 외침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는 자주적인 성격의 책이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는 단군조선을 기록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삼국유사(충렬왕 7년, 1281) : 일연승려가 쓴 역사서, 불교적 신화적(단군)특징을 보임, 유사(遊史)라는 제목 답게 흥미로운 내용들이 있음

삼별초(고종 6년, 1219) : 무신정권에서 최충헌 다음인 최우가 치안유지 목적으로 만든 병사집단 야별초의 숫자가 증가하자 이를 좌별초 우별초로 나누고 몽골에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병사들로 신의군을 조직하고, 좌+우+신의군으로 삼별초를 만들었다.

향약 구급방(고종 23년, 1236) : 우리나라에 전해져 오는 가장 오래된 의방서, 조선의 향약집성방과 헷갈릴 수 있음

고려 권문세족, 신진 사대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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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1330~1374, 재위 1351~1374) : 고려 재건을 위해 개혁을 단행한 왕[편집]

당시 배경 : 원나라의 쇠퇴, 홍건적의 명나라 건국 시도 등 고려 주변이 정신이 없었음, 그 틈을 이용해서 반원정책으로 개혁을 꾀함

반원 자주 정책 : 쌍성총관부 탈환, 정동행성 폐지, 기철을 필두로 친원파를 숙청

왕권 강화 정책 : 권문세족을 견제하기 위함, 신돈을 등용하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 신진 사대부를 등용

신돈 : 승려, 대내외적으로 온갖 침략에 연인이자 파트너 정치가이던 노국대장공주까지 잃고 현타가 왔을 때 공민왕 앞에 나타나 왕의 신임을 얻어 개혁정치를 실시함, 당시 유례없던 초고위관직을 하사받자 왕을 꾀어낸 유승이 아니냐는 소리도 들었다, 공민왕이 권문세족들이랑 도저히 뭘 못하겠다, 세상을 객관적으로 볼 줄 아는 동업자가 필요하다 하여 신돈을 등용하였다, 불법적으로 빼앗긴 땅(田)과 백성(民)을 복구하는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였다.

신진 사대부(新進士大夫) : 지방의 중간급 지주(地主), 새로이 약진하는 선비 관료, 만물의 본질을 탐구하는 성리학을 공부하여 과거제를 통과한 관료들 // 각종 개혁안을 제시함, 조선 건국까지 이어지는 세력

그 외[편집]

몽골의 1차 침입(고종 19년, 1231) : 몽골 사신 저고여가 피살된 것이 원인, 살리타가 침입, 몽골이 강화(화해)를 맺을 것을 요구, 서북지역에 72명의 다루가치(통치기구) 설치 // 몽골(원나라)의 간섭이 시작됨

몽골의 2차 침입(고종 20년, 1232) : 당시 무신정권이던 최우정권이 몽골이 해전(海戰)에 약하다 하여 강화도로 수도를 옮김, 원나라에게 얘기도 없이 천도한 것을 문제삼아 2차침략, 무신정권은 수도만 옮겼고 사실상 백성들이 힘을모아 버텨냄, 김윤후의 처인성 전투 승리, 살리타 사살, 팔만대장경(호국불교)을 만듦

쌍성총관부(고종 45년, 1258) : 몽골(원나라)이 함경도 화주(동쪽 끝)을 점령하고 세운 통치기관, 98년동안 운영되면서 원간섭기 통치기구의 핵심

개경 환도(원종 2년, 1270) : 무신정권 종료, 강화도를 수도로 삼아 원나라에 항쟁하는 것을 종료, 원나라에 굴복한다는 의미, 120년간 원간섭기 시작, 삼별초의 항쟁, 삼별초는 강화도-진도-제주도로 밀려나면서 끝까지 원에 맞서 싸움 // 삼별초는 무신정권 최우 소속이라 무신이 종료된 시점에서 싸우다 죽으나 돌아가서 죽으나 마찬가지였다.

강동 6주 : 거란

동북 9성 : 여진

농상집요(원종 4년, 1273) : 유목문화의 원나라가 농사를 진흥하기 위해 쓴 책, 이암 이라는 사람이 소개함

성리학(충렬왕) : 안향의 소개로 기존의 유학과 다른 성리학이 고려에 들어옴

정동행성(충렬왕 6년, 1280) : 동쪽(일본)을 정벌하겠다며 원나라가 세운 기구, 하지만 일본 정벌에 실패, 이후 정동행성은 내정 간섭 기구로 변함

관제 격하 : 2성 6부 -> 1부 4사, 묘호(조, 종) -> 충_왕 // 원에 충성하라는 뜻

원나라의 공녀 선발 : 인적 물적 수탈, 공녀로 원에 끌려갔다가 원나라의 황후 기황후가 됨, 원간섭기에 여자들이 공녀로 팔려가지 않기 위해 시집을 일찍 갔음

권문세족 : 친원파의 등장 // 마지막 집권세력

몽골문화 유행 : 변발, 호족, 족두리, 연지곤지, 소주, 족발

만권당(충숙왕 1년, 1314) : 학문과 예술을 좋아하던 충선왕이 아들에게 물려주고 원나라에세운 독서당, 학자들과 성리학을 연구하였음

(공양왕 3년, 1392) : 위화도회군한 이후 고려 말 반란을 일으켜 권문세족의 토지를 몰수하고 이를 신진 사대부의 경제적 기반으로 삼음, 경기도 한정, 수신전이나 휼양전이라는 형식을 통해 자식에게 세습

고려의 백정 : 일반 백성을 말함(조선의 백정은 천민을 말함)

조선 전기[편집]

건국과정[편집]

명나라와 갈등 -> 요동 정벌 단행 ->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 과전법 -> 선죽교에서 정몽주(온건개혁파) 제거 -> 조선 건국(한양 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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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1367~1422, 재위 1400~1418) : 확고한 결단력으로 조선의 질서를 잡고, 다음 왕 세종의 무대를 위한 기반을 만들어준 군주[편집]

6조 직계제 : 왕권 위주의 선택

사병 혁파(없앰) : 왕권강화, 귀족의 사병제도 폐지

호패법 실시 : 조선시대의 주민등록증

계미자 주조 : 10만여자의 금속활자를 만듦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 현존하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 지도

세종(1397~1450, 재위 1418~1450) : 조선에서 태어나 조선의 왕이 된 최초의 왕, 킹 세종[편집]

의정부 서사제 : 소통중심적인 행보

훈민정음 창제

집현전 : 현자들을 모아놓은 기관, 학문연구 목적, 매일같이 학자들과 토론(경연 이라고도 함)을 나눔

농사직설 : 우리 풍토에 맞는 농법서

갑인자 주조 : 기존의 경자자가 너무 가늘고 뻑뻑하여 가독성이 떨어져 좀 더 큰 활자가 필요해져서 만듦, 금속활자

공법 : 전분6등법, 연분9등법, 땅을 6등급으로 나누고 수확량을 9등급으로 나눠서 알맞은 양의 세금을 효율적으로 수거할 수 있도록 한 제도

삼강행실도 편찬 : 충신 열녀 효자 등 백성의 모범을 담은 책

칠정산 : 한양을 기준으로 한 역법서(달력), 기술적으로 발전한 면과, 중국이 아닌 조선이 주체적으로 편찬했다는 면이 있다

향약집성방 : 우리 고유의 약재와 치료 방법

측우기 :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해 제작, 인류역사상 최초로 강우량을 측정한 시도, 권력자가 백성들의 생활에 도움이 되고자 만들었다는 의도가 시대를 뛰어넘은 발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음

세조(1417~1468, 재위 1455~1468) : 문종의 사망, 단종의 즉위, 조카인 단종을 밀어내고 즉위한 왕[편집]

6조 직계제

계유정난(1453 계유년) : 세조가 되기 전 수양대군일때 단종을 몰아내고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서, 세종과 문종의 신하인 김종서와 황보인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

집현전 폐지 : 집현전 내 경연(토론)도 중단시킴

경국대전 편찬 시작 : 조선 최고위 법전

직전법 실시 : 기존의 과전법을 개선, 전직관리는 제외하고 현직관리에게만 줌, 수신전 휼양전 등으로 세습하던 악용을 폐지시킴

성종(1457~1495, 재위 1469~1495) : 일찍 죽은 직전왕 예종 때문에 얼떨결에 즉위함, 욕심없이 왕이 된 조화를 중시한 왕[편집]

홍문관 설치 : 없애버린 집현전을 다시 만들기 좀 눈치 보여서, 계승하는 의미로 같은 개념의 홍문관을 만듦 // 다시 경연(토론)을 활성화함

경국대전 완성 : 세조때 편찬 시작하여 성종때 완성함 // 통치 체제의 완성

조화와 소통을 중시한 왕이지만 의정부 서사제를 채택하지는 않음 // 의정부 서사제로 나온 문제는 세종으로 풀면 됨

관수관급 : 국가가 수조권을 대행함, 수조권이라는 개념이 희미해짐

악학궤범 : 다양한 음악 이론 및 법식 등 소개

동국통감 : 서거정이 편년체(시간순서)로 편찬, 고조선~고려 말까지 역사 정리

조선왕조실록 :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중인명선광인효현숙경영정순헌철까지 472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 사조와 시정기 등을 바탕으로 실록청에서 편찬, 임진왜란 이전에 4대 사고에 보관, 작성할 자료를 수집 -> 해당 왕이 자리에 있는 동안은 사관들이 각자의 담당을 맡아 일단 사초(초안)를 계속 줄줄이 쓰다가 그 왕이 자리에서 내려오면 해당 왕의 실록을 편찬하여, 다 작성하면 사고에 보관하였음

실록청 : 조선왕조실록 편찬을 위해 설치된 기구

국조오례의 : 국가 여러 행사에 필요한 의례 정비, 길(기쁠 때) 가(풍요로울 때) 빈(가난할 때) 군(군사) 흉(안좋은 일이 있을 때) 다섯가지 내용을 다루고 있음

그 외[편집]

신진 사대부의 분열 : 고려의 틀을 유지하며 천천히 하자는 온건개혁파(이색, 정몽주)와, 고려를 실패한 역사로 보고 다 새로 쓰자는 급진개혁파(정도전)으로 나뉘게 됨

신흥 무인 세력 : 고려 말 왜구, 홍건적을 무찌르며 성장, 신진 사대부 중 급진개혁파와 협력관계(이성계)

하여가 - 이방원(태종) :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단심가 - 정몽주(온건개혁파) :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조선 건국 이전에 고려 공양왕때 과전법이 이미 실시 되었음

한양 "천도" 를 통해 건국 후 천도한 것을 확인할 수 있음, 조선 건국은 개성에서 하였고 이후 한양으로 천도함

정도전 : 조선경국전 저술, 불씨잡변 저술

조선경국전(태조 3년, 1394) : 정도전이 작성하여 태조에게 바침, 재상(임금을 돕고 모든 관원을 지휘감독하는 관리) 중심의 정치를 강조함(본인 얘기), 경국대전과는 다르다, 경국대전과는!!

불씨잡변 : 정도전이 저술한 책으로, 불교에서 성리학으로 넘어가던 과도기적 배경에서 불교를 비판한 책

의정부 : 조선 최고위 통치기관, 고려의 도평의사사와 상서성을 합쳐 만들어졌다. 6조 -> 의정부 -> 왕 순서로 보고와 명령이 상달 하달 되는데, 6조에서 의정부를 거쳐서 왕에게 전달하는 것을 의정부 서사제 라고 한다. // 서사제는 모두가 소통하는 성향을 띄므로 세종같은 소통중심 왕이 의정부 서사제를 채택했다. 성종은 소통을 중시하는 왕이었지만 의정부 서사제를 채택하지는 않았으니 주의

6조 : 국가의 행정적인 업무 총괄,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6조가 직접 왕에게 전달하는 것을 6조 직계제 라고 한다. // 보다 신속히 속전속결로 판단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태종과 세조 같은 왕권위주 왕이 6조 직계제를 채택했다.

조선3사 : 사헌부(관리의 비리 감찰), 사간원(간쟁 : 임금의 잘못을 고치도록 요구함), 홍문관(경연 주관 및 자문 기관) // 왕권의 견제와 균형, 언론적인 부분을 담당함, 조선3사는 고려3사와 다르다, 고려3사는 곡식 회계 및 출납을 담당했었고, 오히려 고려 대간과 역할이 비슷하다

왕권 강화기구 : 의금부(국왕 직속 사법 기관), 승정원(왕의 비서 기관)

관찰사 : 조선을 8도로 나누고 나서 각 도마다 파견한 지방직 관리총괄

부 목 군 현 : 당시의 행정 세분화 단위, 지금으로 치면 시 군 구 읍 면 동 등등 // 조선에 들어와서 모든 군현에 수령(사또)를 파견하였음 -> 수령의 권력이 강해지는 반동으로 향리의 권력이 약화됨, 그저 보좌역할에 그치게 됨, 고려 향리와 천지차이, 같은 이름 다른 직급, 고려때는 수령을 일부 군현에만 파견하였음, 때문에 수령이 없는 지방에선 향리가 실세를 담당할 수 있었음

유향소 : 조선에 들어와 신설된 부서, 지방 사족으로 구성, 수령을 보좌하면서도 감시하는 역할도 맡고 있었음 // 수령(교사) - 향리(반장) - 유향소(학부모)

경재소 : 유향소의 힘이 쎄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서울에 설치한 기관

고려때는 무과 과거시험을 시행하지 않았다. 워낙에 외침이 많았고 전쟁터가 시험장이었다. 조선에 와서는 무과 과거시험을 시행하였다, 고려때는 불교를 장려하는 만큼 승려를 뽑는 승과 시험이 있었다

과거-잡과 : 역과, 율과, 의과, 음양과 : 잡 이라는 글자가 어감이 안좋지만, 전문직을 뽑는 시험이었다

소과 : 작은 과거시험, 지금의 9급 공무원, 합격하면 바로 하급관리가 되거나, 소과 합격증을 들고 성균관에 들어가 햇수를 채워서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천거 : 추천인제도

취재 : 하급 실무직을 간단하게 면접을 통해 채용

음서 : 고려때 문벌귀족에게 있던 그 음서가 맞다, 조선때는 그 기준이 높아져 2품 이상 관료의 자제에게 음서혜택이 있었다

관립 : 지금의 국립, 각종 행정기구나 교육기관등

성균관 : 최고위 관립 교육기관

4부 학당 : 서울의 중등 교육기관

향교 : 지방, 부 목 군 현 의 중등 교육기관(명륜동 향교 같은 것들), 교수나 훈도 파견

교수, 훈도 : 지금의 공립학교 선생님들

서원 : 사립 지방 교육기관, 지방의 사림들이 설치함, 최초의 서원은 주세붕의 백운동 서원, 교육은 물론이고, 제사를 지내는 기능도 있었음, 사림세력의 아지트기능도 했었음, 사립학교지만 국가로부터 인증받은 서원은 사액서원이 되고, 최초의 사액서원은 최초의 서원이던 백운동서원이 사액서원이 되면서 이름이 소수 서원으로 바뀐다

사림(士林) : 선비들의 무리, 집단

서당 : 사립 초등 교육기관

양인 개병제 : 양인은 모두 군대에 간다

농병 일치제 : 농민이 곧 병사다, 전쟁나면 들고 싸워라

잡색군 : 노비는 기본적으로 군대에 가지 않으나 예비군의 형식으로 노비도 군대를 편성하기도 하였음

훈구 : 고려말 조선초 신진 사대부가 갈라져 온건파와 급진파로 나뉘고, 그 중 급진파의 뜻을 계승한 세력을 훈구 라고 함, 중앙 집권, 부국 강병을 주장, 대단한 왕들과 함께 15세기 조선의 기반을 다잡음

사림 : 온건파 신진사대부의 뜻을 계승함, 향촌(지방)중심 자치, 왕도는 정치만 할 것을 주장함, 16세기 조선의 성리학메타를 주도함, 15세기를 훈구세력이 주도하고 훈구가 쇠퇴함에 따라 사림파가 등장하게 됨, 성종 때 김종직 등 사림이 조선3사 언론관리직을 차지하며 중앙 정계로 진출함

사화 : 훈구와 사림의 대립

무오사화(연산군 4년, 1498) : 김일손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 중심의 훈구파에게 화를 입은 사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기록한 김일손의 사초(史草)가 발단이 되어 일어난 사화, 조선 4대사화 중 첫 번째, 사림들을 정계에서 축출함

조의제문 : 김종직(사림)이 수양대군(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계유정난으로 왕위를 찬탈(강제로 빼앗음)한 것을 비판한 글

갑자사화(연산군 10년, 1504) :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복위문제에 반대한 선비들을 처형하고 가족들도 처벌하여 어머니의 원수를 갚음과 선비들의 세력을 압박함 // 갑자사화에서도 사람을 죽이고 연산군이 너무 많은 사람들을 죽여서 중종 반정으로 쫒겨나게 됨, 쫒겨난 왕은 묘호가 없고 ~군 으로 불리게 됨, 이후 중종이 즉위함, 예성연중인명선

조광조의 개혁 : 중종 시기의 조선 문신, 소격서 폐지(도교 행사기관, 재정을 낭비했다는 이유), 현량과 실시(면접을 통한 사림 추천 등용 제도)실시, 소학(성리학 초등 교과서) 보급, 위훈(거짓된 중종 반정에 공을 세훈 훈구 명단)삭제 주장으로 훈구세력이 반발함

향약 : 향촌에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약속, 조광조에 의해 첫 시행

기묘사화(중종 14년, 1519) : 조광조의 개혁에 반발하여 조광조와 신진 사림을 제거함, 나뭇잎에 꿀을 바른 뭇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해 글씨를 새긴 나뭇잎을 왕에게 바쳐 조(趙)씨가 반란을 꾸미고 있다고 음해하여 일어났다. 중종시기 정치의 핵심인 조광조를 제거시킨 4대 사화중 핵심

을사사화(명종 1년, 1545) : 외척(친척이 아닌 외척, 외가 라고도 함)간의 권력 다툼(대윤vs소윤) -> 일부 사림도 피해를 입음

무오 갑자 기묘 을사 네 사화를 통해 피해를 입은 것은 사림이지만, 결과적으로 향촌자치를 주장하던 사림이 중앙 정계를 장악해버리는, 사림들의 말과 행동이 불일치하는 결과를 낳게됨, 이후 공론 정치(여럿이 회의식으로 논해서 정치를 함)가 확장됨

붕당 : 중앙을 장악한 사림들이 만든 신 정치 집단(학문적 입장이 강한 지금의 정당과 같은 기능)

이조 전랑 임명 문제 : 붕당 형성 원인 중 하나, 이조 전랑이 언론기관의 장이니 만큼 임명 자체가 정치적 갈림길로 들어서게 되므로 신중해지게 된다

이조 전랑 : 언론기관인 조선3사의 장(長)

척신 정치 청산 문제 : 사림(붕당)이 정권을 잡기는 했으나, 남아있는 척신(친척 외척 신하)이나 훈구 세력들을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

심의겸의 이조 전랑 임명 문제 : 척신인 심이경이 이조 전랑을 해도 되는가, 자신(붕당)들이 집권했고 이조전랑(언론기관 3사)까지 먹고 싶은데, 어떻게 외척 훈구인 심의겸을 이조 전랑에 앉힐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

심의겸 : 외척이고 훈구세력이지만 그동안 사림세력을 지원하고 도와준 애매한 세력이다, 여태 사림을 도왔는데 이조 전랑 자리를 놓고 사림들은 그제서야, "아무리 우리 의겸찡이래도 본래 외척훈구인데 이조전랑에 앉혀도 되겠느냐" 이에 앉혀도 된다, 찬성한 것이 서인(기성 사림), 앉히면 안된다, 반대한 것이 동인(신진 사림)이다.

동인 : 김효원 중심의 신진 사림, 이황 조식 서경덕의 학문(영남 지방)을 계승함, 영남 학파 라고도 함

서인 :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기성 사림, 심의겸의 집이 궁궐의 서쪽에 있었던데서 서인이라는 이름이 나왔고 이에 반대세력은 자연스레 동인이라 불렀다, 이이와 성혼의 문인을 중심으로 함, 경기도(기)와 충청도(호) 중심이라 기호학파 라고도 함

정여립 모반 사건 : 동인인 정여립이 반란을 꾀했다고 전해지는 사건, 정여립은 이미 죽어있었음, 이 사건을 맡은 사람이 서인세력의 정철, 정여립은 동인이 맞지만 정여립이 이미 죽어서 확인의 여지가 없는 반란을 이유로 애꿎은 동인세력까지 함께 처벌함, 이를 기축옥사라고 부름, 이를 통해 서인이 권력을 잡게 됨

정철의 세자 책봉 : 정철이 있는 서인이 권력이 강했는데, 정철이 세자 책봉을 선조에게 건의하면서 선을 씨게 넘는다, 이를 계기로 권력이 동인쪽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렇게 권력이 넘어간 동인에서 서인의 처벌을 놓고 온건하게(남인 : 이황의 제자)와 강경하게(북인 : 조식의 제자)으로 갈라짐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모두 선조때 발생한 일

붕당정치의 의의 : 학문적 견해를 바탕으로 비판과 견제의 기능을 함, 공존과 견제의 시스템

사대교린 : 명나라에게의 사대정책과 여진에게의 교린정책

사대 : 조공을 바치며 나보다 조선이 약자고 명나라가 강자라 하고, 강자를 섬겼음, 당시 동아시아의 관례적인 모습, 실리를 추구함, 조공을 바치면 명나라가 책봉 해주는 식

교린 : 이웃나라와 사귐, 상하가 아닌 수평적 관계, 무역소를 설치하는 회유책과, 세종대왕 때는 4군 6진을 설치하여 너무 깝치는 여진족을 토벌하기도 하였음

대마도 정벌(세종 1년, 1419) : 이종무를 쓰시마(대마도)에 파견하여 왜적을 정벌함

계해약조(세종 25년, 1443) : 너무 일본과 관계를 닫을 수 없어서 조금 풀어서 무역교류등을 실시한 정책

3포왜란(중종 5년, 1510) : 부산포, 내이포, 염포에 들어와 살던 일본인들이 대마도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난, 무역량이 부족하다 떼를 쓰고 침범함, 이를 막기 위해 비변사가 설치됨

비변사(중종 12년, 1517) : 변란에 대비하는 관사, 군국기무를 관장하는 조선시대의 국방부, 중종당시 왜적이 미쳐 날뛰어서 이를 진압하기 위해 설치함, 3포왜란 이후에 임시기구로 설치되었음, 을묘왜변 이후 상설기구화 되었고, 임진왜란 이후에 기능이 확대 되어 국정을 장악함.

직전법 폐지(명종) : 성종때 관수관급을 통해 수조권을 국가가 대행하면서 수조권의 의미가 희미해지고 명종에 이르러서 직전법을 폐지하여 녹봉(월급)만 지급함

을묘왜변(명종 10년, 1555) : 불만이 끊이지 않는 일본인들이 전남 지방을 습격함

임진왜란(선조 25년, 1592) :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함 -> 더 크게 대륙까지 진출하고 싶은 야망에 한반도를 침공함, 임진왜란은 6년간 있었는데, 임진년에 발발해서 임진왜란, 중간에 휴전기가 한번 있었고, 정유년에 다시 발발한 것을 정유재란이라 함, 임진왜란 안에 전쟁들이 여러가지가 있어서 순서 묻는 문제가 잘 출제됨

한산도 대첩 : 처음에 일본군이 쳐들어 오자 속수무책으로 뚫림 ->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퇴하며 전라도 곡창지대를 수호함, 의병의 활약도 있었음 -> 시간을 벌은 사이에 명나라의 지원을 통해 평양성을 탈환하였음 -> 전라도 순찰사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치며 한성(서울)지역을 탈환함

휴전 협상기 : 우리 땅에서 난 전쟁인데 아이러니하게도 휴전협상은 명나라와 일본간에 체결이 진행됨, 국력이 매우 낮음을 보여줌, 이 시기에 훈련도감이나 속오군 같은 제도정비를 진행함

훈련도감 : 임진왜란 휴전협상기에 정비된 제도중 하나로, 해전에 대비하여 병력을 포수(대포), 사수(활), 살수(근접병)으로 분류하여 상시준비 시킴

속오군 : 임진왜란 휴전협상기에 정비된 제도중 하나로, 평민은 이미 군인이고, 군대를 안가는 양반과 노비까지 예비군으로 편성시킴

정유재란 : 불만족스러웠던 일본이 정유년에 휴전을 종료하고 다시 쳐들어옴, 명량대첩과 노량대첩으로 격퇴함

3대 대첩 : 일본군을 크게 격퇴한 한산도 대첩, 행주 대첩, 진주 대첩을 말함

임진왜란 시간순서 : 한산도 대첩(선조 25년, 1592, 7월) -> 진주 대첩(선조 25년, 1592, 10월) -> 행주 대첩(선조 26년, 1593, 2월) -> 훈련도감 설치(선조 26년, 1593, 12월) -> 속오군 편성(선조 27년, 1594) -> 명량 대첩(선조 30년, 1597) -> 노량 대첩(선조 31년, 1598), 임진왜란은 조선의 전기 후기를 구분함

임진왜란의 결과 : 전쟁으로 다 불타고 난리가 났기 때문에 대내적으로는 신분제가 동요되고 혼란스러워짐, 대외적으로는 임진왜란을 진행시킨 도요토미가 쫓겨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가 성립이 되는데, 이에야스가 자신들은 히데요시와 관련이 없다 다시 친하게 지내자며 기유약조를 체결하고, 통신사를 파견함

기유약조(광해군 1년, 1609) : 기유년에 맺은, 임진왜란의 도요토미 막부 이후 도쿠가와가 이끄는 에도막부와의 친하게 지내자는 의미로 맺은 조약, 쓰시마와 관련된 내용의 조약

통신사 : 임진왜란 이후 도쿠가와 막부의 동향을 살피는 목적도 있어서 회답겸쇄환사 라고도 함, 파견경로는, 한성 -> 충주 -> 동래(부산) -> 이즈하라(쓰시마) -> 시모노세키 ->가미노세키(세토내해) -> 아카시(히메지) -> 오사카 -> 교토 -> 나고야 -> 하마마쓰(시즈오카의 왼쪽) -> 시즈오카 -> 에도(도쿄)

일본과의 조약 순서 : 해약조 -> 진왜란 -> 유약조(일본이 게임기가 유명하니까)

방납의 폐단 : 세금 중 공납(호에 따른 특산물)을 납부함에 있어서 중간 브로커 역할로 실리를 챙기던 것을 방납이라 함. 매우 부패하여 백성들이 피해를 많이 입었고, 광해군이 특산물 조항을 없애고 쌀로 통일하면서 방납의 폐단이 사라지게 됨

서얼 : 양반(남자)과 그 외 신분간의 자식을 말함, 과거시험의 문과 응시를 금지시켰음

신량역천 : 신분은 양인인데 역할은 천민

장례원 : 노비를 관리하던 기관

조선의 백정 : 천민(도축업 등)을 말함(고려의 백정은 일반 백성을 말함)

성리학 : 유교의 한 유파 또는 철학, 송나라 주희가 집대성 하여 주자학 이라고도 함, 인간의 본성과 우주 자연의 원리 연구

이기론 : 성리학의 중요한 바탕, 이 세상을 이(모든 사물의 생성과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원리)와 기("이"의 원리가 현실로 구체화되는 데 필요한 현상적 요소)로 설명함, 영혼은 이고 육체는 기로 설명

이황 : 성리학의 이기론 중 이를 중시함(주리론), 영남에서 활동하여 영남학파라고도 함, 근본적 이상주의적 성향(성학십도)

이이 : 성리학의 이기론 중 기를 중시함(주기론), 경기도에서 활동하여 기호학파 라고도 함, 현실적 개혁적 성향(성학집요)

조선 후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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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1575~1641, 재위 1608~1623) : 선조가 아들이 없어, 왕이 될 줄 본인도 몰랐다가 시켜서 했는데 신하들이 말 안듣고, 정치 못한다고 욕먹고 쫓겨난 왕[편집]

임진왜란 전후 복구 : 불타 없어진 양안(토지 문서), 호적(신분 문서) 다시 작성, 대동법 실시, 동의보감 편찬

중립 외교 : 쇠퇴하는 명vs신흥세력 후금(누르하치) 사이에서 강홍립(약 12,000명)을 파병함, 광해군은 무조건 다 죽을 것이다 생각하여 당시 신하들의 등살에 밀려 명분상 파병하면서 죽기전에 모두 투항하고 조선을 떠나 살아남아라 라고 전달

흥선대원군(1821~1898, 재임 1864~1873) : 19세기 후반 정치의 주도

세도정치의 폐단 및 삼정의 문란 심화 -> 삼정문란 개혁

전정의 문란 -> 양전 사업 실시

군정의 문란 -> 호포제 실시(양반에게도 군포 부과)

환곡의 문란 -> 사창제 실시(개인에게 창고를 맡김)

세도 정치 타파 -> 비변사 폐지 ->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 부활

서원 정리 -> 47개만 남기고 전국의 서원 철폐

경복궁 중건 -> 원납전(원하면 납부하는 세금) 강제 징수 -> 당백전 발행 -> 물가 폭등

병인박해(프랑스 신부 및 수 천명의 천주교도 처형) -> 병인양요(프랑스 군의 강화도 공격) -> 외규장각 의궤 약탈(프랑스는 침략하면 그 나라 문화재 훔치는거 전문이지)

제너럴 셔먼호 사건(평양에서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통사 요구 -> 박규수의 지휘 아래 불태워 버림) -> 신미양요(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미국의 강화도 공격 -> 어재연의 항전, 수자기 뺏김) -> 이후 전국에 척화비 설치

오페르트 도굴 미수 사건(독일 상인 오페르트의 통상 요구 -> 조선 정부의 거절 -> 남연군 묘 도굴 시도 -> 실패)

병인박해 -> 제너럴 셔먼호 사건 -> 병인양요 -> 오페르트 도굴 미수 사건 -> 신미양요 -> 척화비 설치

그 외[편집]

폐모살제 : 광해군이 인목대비(모)를 폐하고, 영창대군(동생)을 죽인 것을 이름, 인조반정의 명분

인조반정(광해군 15년, 1623) : 인조가 광해군을 쫓아내고 왕위를 뺏음, 조선의 3대 쿠데타 중 하나, 결과적으로 인조가 즉위하고 서인과 남인세력이 집권함, 이후 인조정권은 명나라와 친하게 금나라를 멀리, 친명배금 정책을 추진함

호란 : 호인(만주 사람, 당시 금나라 여진족을 가리킴)들이 일으킨 난

이괄의 난(인조 2년, 1624) : 인조반정에 공을 세웠지만 자신이 세운 공에 합당하지 못한 보상밖에 받지 못했다 생각하여 일으킨 난 -> 정묘호란의 계기가 됨

정묘호란(인조 5년, 1627) : 친명배금 정책으로 후금이 꼴받음, 이괄의 난을 계기로 침략 -> 인조의 강화도 피난 -> 화의(화해)체결 -> 형제 관계로 변화함

영정법(인조 13년, 1635) : 전세 징수법, 기존의 등급별 전세를 없애고 균일하게 징수함

병자호란(인조 14년, 1637) : 후금(여진)의 국력이 더 강해져 명청전쟁(당시까지만도 후금)에서 승리하여 후금이 명나라를 정복하여 청나라를 세운다, 이 청에서 정묘호란 당시 형제관계로 끝난 것에서 더 나아가 군신관계를 요구한다. 이에 화해를 주장한 최명길 등 주화파, 전쟁을 주장한 윤집등 주전론으로 나뉜다, 이후 청나라가 침입하여 남한산성에서 맞서 싸운다 -> 패배 -> 삼전도의 굴욕 -> 군신관계 // 나라이름만 바뀌었고 후금과 청은 같은 여진이다. 한족 거란족 여진족 지금은 다 같은 중국이다

예송논쟁(효종 10년, 1659) : 현종 때 인조의 계비(임금이 다시 장가를 가서 맞은 아내)인 조대비의 상례문제를 둘러싸고 남인과 서인이 두 차례에 걸쳐 대립한 사건. 1차예송과 2차예송이 있음, 서인은 신하의 권력 위주, 남인은 왕권 위주, 그래서 서인은 효종을 왕이 아닌 차남으로 봤고, 남인은 효종을 왕으로 봤다. 북인은? 광해군과 함께 사라졌다, 진짜 예송논쟁의 가치는 사상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점, 붕당(당을 나눠 정치함)의 본래 의도를 바람직하게 실현한 경우

1차 기해예송 : 인조의 아들 효종이 사망함, 인조의 계비, 효종의 새엄마인 조대비는 상복을 몇년 입어야 하는가, 서인 : 효종은 차남이니 1년만 입으면 된다, 동인 : 효종은 둘째여도 왕이기 때문에 3년을 입어야 한다, 서인 승리

2차 갑인예송 : 효종의 아내가 사망함, 여전히 조대비(효종비의 시어머니)는 살아있음, 서인 : 효종은 차남이고 차남의 왕비이니 조대비는 상복을 9개월만 입으면 된다, 동인 : 차남이어도 왕이다, 조대비는 상복을 1년 입어야 한다. 남인 승리

환국 : 숙종 때의 정치적 상황, 정치판이 손바닥 뒤집듯 홱홱 바뀌는 모습, 경신환국(숙종 6년), 기사환국(숙종 15년), 갑술환국(숙종 20년) 세 번 있었다, 붕당의 공존원칙을 깨고 일당 전제화

경신환국 서인 승, 기사환국 남인 승, 갑술환국 서인 승

영조의 탕평책 : 붕당을 인정하지 않음, 완론 탕평(노론 온건파 위주 등용), 산림 존재 부정, 이조 전랑 권한(붕당 싸움의 원인) 약화, 서원(붕당 정치의 아지트) 정리, 탕평비(너네 붕당 만들면 D진다) 건립

노론 : 남인 처벌을 문제로 서인에서 갈라져나온 당파

산림 : 붕당의 대장

균역법 : 영조의 세금제도, 군포내고 군대 안가는 걸 군포 두 포 에서 한 포로 줄이고 나머지는 다른 물건들로 충당하게 함, 균역법을 통해 걷는 세금이 크게 줄어드는 만큼 다른 방도로 세금을 충당하도록 함

속대전 : 영조때 만든 경국대전의 업데이트버전

정조의 탕평책 : 준론 탕평(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 서얼까지 등용), 규장각(도서관) 설치, 초계문신제(인재를 초계를 통해 새로 뽑아 재교육해서 왕의 직속에 둠) 실시, 장용영(왕의 호위부대) 설치, 수원화성 건설(정약용의 거중기 활용)

소론 : 남인 처벌을 문제로 서인에서 노론소론으로 갈라져 나옴

북벌론(17세기) : 호란 이후 효종, 송시열을 중심으로 청나라 정벌 추진 // 청나라를 정벌할 목적이었는데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후에 남하하는 나선을 정벌하는데 힘을 합침

나선 : 당시 러시아를 의미함

북학론(18세기) : 실학자(박지원, 박제가 등)의 뿌리, 지피지기, 적을 아는 과정에서 청나라를 공부하다보니 배울 점이 참 많더라

정묘호란-후금-형제 관계 // 병자호란-청-군신 관계

5군영 : 군사제도, 5위였었던 조선전기에서 후기로 들어오면서 5군영으로 변화함, 금위영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훈련도감 5개

어영청 : 인조 때 설치, 효종 때 북벌 추진 핵심 부대

지방군 군사제도 : 진관 체제 -> 제승방략 체제 -> 진관 체제 복귀, 속오군 체제

진관 체제 : 군현 단위 지역 방어, 촘촘하게 진을 쳐서 국지전에서 강력

제승방략 체제 : 도 단위 거점 체제 방어, 흩어져 있다가 콜이 들어오면 해당 지역으로 병력을 모으는 방식, 임진왜란때 제승방략을 취했다가 다 뚫려버리고 진관 체제로 복귀함

세도 정치 : 정조가 자신만 할 수 있는 정치틀을 짜버리고 죽은 바람에 그 이후 순조(안동 김씨), 헌종(풍양 조씨), 철종(안동 김씨)때 외척가문들에 휘둘리던 시기, 비변사와 5군영에 권력이 집중됨, 매관매직 성행, 삼정의 문란 발생(매관매직이 원인이 되어 본전 뽑으려는 악질사또들 때문)

삼정의 문란 : 전정(전세에 각종 부가세 징수), 군정(갓난아기에게, 죽은 조상에게 병역의무를 부가), 환곡(쌀에 모래를 섞어 강제로 빌려주고 고리대를 취함)

방군수포제 : 군포를 내고 군대를 빼던, 처음엔 불법이다가 나중에 제도화 됨

대동법 : 공납에 있어서 방납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지역 특산물이 아닌 쌀로 통일시킨 것, 실시는 광해군이고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건 숙종이다, 100년 걸렸다

선혜청 : 대동법에 의한 대동미를 징수하던 기관

모내기법(이앙법)의 확대 -> 광작 유행 -> 부농층의 등장 -> 상품작물의 재배(담배, 면화, 이삼, 고추), 이앙법 실시는 고려 후기, 전국적 확대가 조선 후기

조선후기 상인들 : 만상(의주), 송상(개성), 경강 상인(한성), 내상(동래 : 부산)

송상 : 개성 상인, 전국에 송방(체인점) 설치, 인삼 판매

보부상 : 장시를 돌아다니며 하나의 유통망 형성, 봇짐장수 라고도 함

객주와 여각 : 포구(인구 이동이 교차하는 곳)에 자리를 잡아 숙박업을 하였음

상평통보 : 화폐가 진짜 필요해지면서 실질적으로 유통된 최초의 화폐

후시 : 조선 후기 국경간 밀무역, 책문후시, 중강개시후시

선대제 수공업 : 미리 재료를 수공업자에게 주고, 업자는 지정 물품을 만들어주는 것

덕대 : 전문 광산 경영자, 채굴업자와 노동자를 고용하여 광산을 경영함 -> 경영희 전문화(CEO) 및 노동의 분업화를 나타냄

신분제의 동요 : 양난(왜란 호란)으로 토지 대장(양안)과 호적 소실, 국가 재정 감소 -> 공명첩(이름란이 없는 양반족보) 발급, 납속책 시행, 상민층의 성장

양반층의 분화 : 권반(소수의 권세 가문), 향반(지방에서 세력 유지), 잔반(몰락 양반), 신향(공명첩 매관매직 등 신흥 양반세력)

서얼 : 정조 때 규장각 검서관 등용(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철종 때 서얼 차별 철폐

기술직 중인 : 대규모 소청 운동 전개(실패), 시사를 결성하여 문학 활동, 외래 문화 수용에 주도적 역할

농민층의 분화 : 광작, 상품작물 재배 -> (일부)부농 : 공명첩 구입, 족보 위조 -> (다수)소작농, 임노동자 전락

임노동자 : 임금을 받는 노동자, 돈 받고 농사 지어주는 사람

노비의 신분 상승 : 노비종모법(영조) : 어머니가 노비여야만 노비, 공노비 해봉(순조) : 중앙 관서의 노비 해방

향전의 발생 : 향촌의 지배권을 놓고 구향(기존 양반)과 신향(신흥 양반)의 충돌, 구향도 신향도 이기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수령의 권한이 강화되는 반사이익을 낳는다

예언 사상의 대두 : 지배 체제 동요 -> 수령의 수탈 심화 -> 자연 재해 빈발 -> 이양선 침몰 -> 정감록 유행

정감록 : 이씨 왕조가 끝나고 정씨가 왕조가 된다

천주교의 전개 : 중국에서 서학으로 전래 -> 남인 일부가 신앙으로 수용, 평등 사상, 내세 신앙으로 여러 계층에게 확산, 신유박해(1801)

동학의 전개 : 경주 지역 몰락 양반 최제우가 창시, 서학에 대응한다는 의미, 코리안 천주교, 유교+불교+도교+민간 신앙, 인내천 사상, 후천개벽 사상 -> 최제우 처형 -> 2대 교주 최시형이 교단 정비하여 교세 확장

인내천 : 사람은 곧 하늘이다, 누구나 자신의 하늘을 가지고 있다, 평등 사상이라 정부탄압을 받게 됨

후천개벽 : 지금 하늘이 끝나고 새 하늘이 온다

홍경래의 난(1811) : 평안도 서북끝, 지배층의 수탈 -> 세도 정치 불만, 서북지역(평안도)에 대한 차별 -> 몰락 양반 홍경래의 주도 + 영세농민, 중소상인, 광산노동자 등 합세 -> 정주성 및 청천강 이북 지역 점령 -> 관군에게 진압

임술 농민 봉기(1862) : 진주 농민 봉기 라고도 함, 기본적으로 삼정의 문란(진주 목사 백낙신의 과도한 수탈) -> 몰락 양반(유계춘) 중심으로 진주 농민 봉기 발생 -> 전국적 확대 ->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기 위해 삼정이정청 설치 -> 안핵사(박교수)파견 -> 사건 수습

삼정이정청 : 임술 농민 봉기의 결과로 설치된 기구이며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기 위함이었는데, 큰 효과는 없었음

호락논쟁 : 조선 후기 성리학에서 인성과 물성(物性)이 같은 가 혹은 다른 가에 대한 논쟁(윤휴, 박세당)

양명학 : 명나라를 밝히는 학문, 송나라 주자학(성리학)에 반대하여 명나라 왕양명이 주장한 학문, 성리학처럼 그저 탁상공론만 하며 옳고 그름들 따지기만 하지 않고, 지행합일(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본디 하나)을 강조하며, 실천적인 학문, 정제두의 강화학파 형성

실학 : 개혁적인 성리학, 실천적인 태도를 강조, 경세치용, 이용후생의 태도를 강조하는 실용적 학문, 중농(重農)학파와 중상(重商)학파로 구분

경세치용 : 공부한 것을 세상을 위해 써라

이용후생 : 풍요로운 경제와 행복한 의식주 생활

중농학파 : 요형원(반계수록 : 문벌 노비제 비판, 균전론 : 땅을 고루 나누기 위함), 이익(성호사설 : 나라를 좀먹는 6가지 폐단, 한전론), 정약용(목민심서, 여전론->정전론)

한전론 : 영업전(소유 및 세습 인정, 매매 불가)과 매매가능 토지를 따로 두자

정전론 : 井자 모양으로 땅을 잘라서, 가운데 땅은 세금용으로 공동경작하자

중상학파 : 유수원(우서, 사농공상의 직업적 평등 주장), 홍대용(의산문답 : 중국 중심의 세계관 극복), 박지원(양반전 : 양반 풍자, 열하일기 : 청나라 견문록, 수레와 선박 이용, 화폐 유통 강조), 박제가(북학의, 소비 촉진 권장, 청과의 통상 확대 주장)

국학의 발달 : 실학의 발달 -> 우리 역사, 지리, 언어 등에 대한 관심 확대, 동국문헌비고(백과사전, 역대 문물 정리), 금석과안록(역사, 진흥왕 순수비 고증), 동의수세보원(의학, 사상 의학의 확립)

탈춤 유행 : 주로 양반의 위선을 풍자

한글 소설 유행 : 한글이 만들어 진 것은 세종 조선전기이나 소설의 유행은 조선 후기

사설 시조 : 서민들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

박지원의 한문소설 : 양반전, 허생전, 호질 -> 양반 사회의 허구성 비판

진경산수화 : 인왕제색도(현실, 조선 후기)

몽유도원도 : 안견이 그린 산수화, 상상도(현실 아님)

민화 : 까치와 호랑이

풍속화 : 씨름도(김홍도), 서민들의 일상 모습 묘사 // 단오풍정(신윤복), 양반들의 풍류 묘사, 남녀 간의 애정 묘사

독도 : 신라 지증왕 때 우산국 복속, 조선 죽종 때 안용복이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 영토임을 확인 받음, 대한 제국 칙령 제 41호 공포(1900) : 독도에 대한 영유권 확인 -> 러일전쟁 중 시마네 현 고시 제 40호로 불법 편입(1905), 태정관지령문(울릉도 독도의 조선 영토 확인)

간도 : 귀속 분쟁, 조선과 청 사이에 국경 분쟁 발생, 백두산 정계비(1712) -> 대한제국의 정책, 고종황제가 간도 관리사 이범윤 파견 -> 간도 협약, 일제가 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대가로 간도를 청의 영토로 인정함

대한 제국 칙령 41호 공포 : 독도

한능검에서의 근대 : 자본주의, 시민 사회

초기의 미흡한 자본주의 -> 식민지의 필요

개항권유 -> 개항 -> 경제 침탈 -> 거부 -> 식민지

개항권유 -> 거절 -> 식민지

개화기 : 일본 청 러시아 미국 프랑스 독일 영국의 침략 vs 조선의 근대화

열강의 목적 : 개항 -> 경제적 침탈 -> 식민지

우리의 목적 : 개항 -> 개화 -> 근대화

강화도조약 : 1관(조선을 자주국으로 인정한다 -> 청의 간섭 배제 의도), 5관(부산 외 2개 항구 개항 : 원산, 인천), 7관(해안 측량권 허용 -> 불평등, 영도 주권 침해), 10관(치외법권 인정 -> 조선의 사법권 침해, 일본 상인 보호), 최초의 근대적 조약, 일본에 유리한 조약, 강화도 조약은 최혜국 대우가 없다, 최초의 최혜국 대우는 미국과의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이다

조일 수호 조교 부록(1876) : 거류지(조계 : 거래가 가능한 지역) 무역 허용, 일본 화폐 유통

조일 무역 규칙(1876) : 양곡(품질이 좋은 곡식)의 무제한 유출, 일본 상품에 대한 무관세 허용

조일통상장정(1883) : 방곡령(양곡 무제한 유출을 저지) 시행, 관세 부과(무관세 저지)

조미 수호 통상 조약(1882) : 황쭌셴의 조선책략(러시아를 막기 위해 중국 일본 미국과 수교해야 한다) 유포, 1조 : 거중조정 원칙(어려울 때 서로 돕는다), 14조 : 최혜국대우(최고 혜택 국가의 대우를 미국에게도 해줘라) -> 서양과 맺은 최초의 조약, 미국이 공사를 부임하자 답례로 보빙사 파견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1882) : 청 상인의 내지 통상권 허용(청나라 상인의 내륙 장사 허용) -> 거류지 무역 붕괴 -> 타국 최혜국대우에 따라 여러 국가들이 내지로 상권 침탈

북학파 :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통상 개화론자 :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이 외국과의 통상 및 서양 과학 수용 주장

개화파 : 급진 개화파(반청, 친일), 온건 개화파(동도서기, 친청 사대 정책)

동도서기 : 동쪽의 도덕, 서쪽의 기술(온건 개화파)

통리기무아문 설치 : 개화 총괄 기구

별기군 신설 : 신식 군대(교련병대 라고도 함)

기기창 : 근대식 무기 공장

박문국 : 신문 발행(한성순보)

전환국 : 근대식 화폐 발행

일본 시찰단 : 수신사 -> 1차:김기수의 근대 문물 시찰 -> 2차:김홍집이 조선책략 들여옴, 조사시찰단:박정양, 어윤중 등이 비밀리에 파견

청 시찰단 : 영선사 -> 근대식 무기제조기술 -> 귀국 후, 기기창 설치

미국 시찰단 : 보빙사 -> 조미수호통상조약체결 이후 파견

개화파의 분화 배경 : 임오군란 이후 청의 간섭 심화

조선책략 -> 조미 수호 통상 조약 -> 보빙사 파견

위정척사 : 바른 것(성리학)을 지키고 사악한 것을 몰아내자, 1860년대(척화 주전론 이항로, 기정진 : 화해하지 말고 전쟁하자고 주장함) 1870년대(왜양일체론 최익현 : 강화도 조약 반대) 1880년대(영남 만인소 이만손 : 조선 책략, 미국 수교에 반대)로 나눠서 구분

임오군란 : 별기군 우대, 구식 군인들 차별 대우 -> 구식 군인 불만, 일본의 경제 침탈 심화 -> 도시민 불만 -> 구식 군인의 봉기, 도시민들 가담 -> 고관 살해 및 일본 공사관 습격 -> 흥선 대원군 재집권 -> 청의 진압(개입), 흥선 대원군 납치 -> 청의 내정 간섭 심화 ->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조선은 청의 속국, 청 상인의 내지 무역 보장 -> 조미통상에 최혜국 대우로 길을 열어주게 됨) -> 제물포 조약(일본 군대의 조선 주둔 허용)

갑신정변 : 급진 개화파가 느린 개혁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정변, 청의 내정 간섭에 대한 불만, 정부의 느린 개화 정책 -> 청프 전쟁 및 일본의 지원 약속 -> 우정총국 축하연에서 정변 -> 14개조 개혁 정강 발표 -> 청군 개입, 일본군 철수로 3일만에 실패(삼일 천하) -> 청의 내정 간섭 심화 -> 조약 체결(한성 조약, 텐진 조약)

14조 개혁 정강 : 대원군을 조속히 귀국하게 하고 청에 조공하는 허례의 행사를 폐지한다(청에 대한 사대 관계 청산),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제정하고, 능력에 따라 관리를 등용한다(신분제 폐지)

지조법 : 갑신정변 급진개혁파가 제안한 법

한성 조약(조선-일본) : 일본에 배상금 지급, 공사관 신축 비용 부담

텐진 조약(청-일본) : 조선에 대한 청일 양국 군대의 공동 파병, 철수 합의

갑신정변 이후 -> 청일 대립 격화 -> 조선 정부의 친러 정책 추진 -> 영국이 거문도 불법 점령(러시아 견제 의도) -> 부들러, 유길준 : 중립화론 제기

동학의 성립(최제우) : 인내천, 후천개벽 사상 으로 많은 지지를 얻음 -> 최제우 처형 -> 2대 교주 최시형이 교세 확장 -> 교조 신원 운동(삼례 집회 : 동학을 인정해주세요, 보은 집회 : 탐관오리 숙청, 서양세력 축출 -> 동학의 정치적 성격 강화)

동학 농민 운동 순서 : 고부 농민 봉기 -> 1차 농민 봉기 -> 전주 화약 -> 2차 농민 봉기

고부 농민 봉기 : 탐관오리 조병갑의 횡포 -> 녹두장군 전봉준이 사발통문으로 동지 규합 -> 관아 습격, 만석보(물세를 받던 저수지) 파괴 -> 신임 군수의 회유로 자진 해산 -> 하지만 완전히 해결되지 않아서 1차 봉기가 일어남

1차 농민 봉기 : 안핵사(파견 관리) 이용태의 탄압 -> 탐관오리 처벌보다 농민 봉기 주도자를 처벌함 -> 백산에서 4대 강령과 격문 발표(보국안민, 제폭구민 : 나라를 지키고 폭정을 제거하고 백성을 구하라) -> 황토현 전투, 황룡촌 전투 승리 -> 전주성 점령

전주화약 : 동학군의 전주성 점령 -> 고종과 명성황후가 청군의 도움 요구 -> 청군의 조선 상륙 -> 텐진 조약에 의해 일본군도 조선 상륙 -> 폐정 개혁안 제시(반봉건, 반외세) -> 집강소 설치

2차 농민 봉기 : 일본의 경복궁 무력 점령 및 내정 간섭 -> 전봉준의 남접과 손병희의 북접 합세 ->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

남접, 북접 : 동학의 종파 종류

백낙신의 횡포 -> 진주 농민 봉기

조병갑의 횡포 -> 고부 농민 봉기

이용태의 탄압 -> 1차 동학 농민 운동

갑오 을미개혁 : 갑신정변, 동학 송민 운동 등의 개혁 요구 -> 일본의 강제

1차 농민 봉기 -> 경복궁 점령 -> 청일 전쟁 -> 1차 갑오개혁 -> 2차 농민 봉기 -> 2차 갑오개혁 -> 삼국 간섭 -> 을미 개혁

1차 갑오개혁 : 군국기무처 설치, 개국기년 사용, 과거제 폐지, 도량형 통일, 은 본위제 실시, 신분제 폐지, 조혼 연좌제 폐지(청일 전쟁 중이라 간섭을 덜 받으면서 나름 자주적인 개혁 시행)

2차 갑오개혁 : 청일 전쟁의 마무리 시점(일본 우세) -> 군국기무처 폐지, 홍범 14조 반포, 교육입국 조서 반포, 한성 사범 학교 설립

갑오개혁 이후 : 청일 전쟁에서 일본 승리 ->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요동반도는 일본 꺼, 한반도에서 청은 손을 뗀다) -> 삼국 간섭(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발생 -> 일본의 요동 반도 반환 -> 고종, 명성황후 친러 내각 수립(일본에 대응) ->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일본의 명성황후 친러정책 견제, 을미사변) -> 을미개혁

을미개혁 : 연호 "건양" 사용, 단발령 실시(고종), 태양력 사용, 우편 사무 재개, 종두법 실시(천연두 예방주사) ->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면서 중단(아관파천)

독립 협회 : 아관 파천, 열강의 이권 침탈 심화 -> 열강의 각종 이권 침탈 저지, 민중 계몽 위해 의회 설립 -> 각종 토론회, 강연회 개최 -> 독립문 건립 -> 만민 공동회 개최(독립 협회가 열었던 집회 :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 저지) -> 자유 민권 운동(관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헌의 6조 결의 : 입헌 군주제 지향) -> 중추원을 통한 의회 설립 도모 -> 보수 세력과 고종의 견제로 강제 해산

계몽의 의의 : 정치권이 잘나봤자 소용이 없고, 국민을 깨우처야 한다

입헌 군주제 : 왕은 있지만 통치는 법이 하는 제도

대한 제국 : 고종의 경운궁 환궁 ->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 거행 -> 대한 제국 선포(연호 : 광무, 대한 제국의 자주성을 강조) -> 광무 개혁의 실시(본인의 연호를 땀)

동학 농민 운동+갑오개혁 -> 을미개혁 -> 독립 협회 -> 광무 개혁

광무 개혁 : 구본신참(옛 것을 근본으로 삼고 새 것을 참고한다)의 원칙, 대한국 국제 반포(전제 황권 명시) -> 원수부 설치(황제의 군사권 장악) -> 양전 사업 실시(지계 발급)

지계 : 근대 토지 문서

교정청 : 정부의 개혁 기구(나중에 없어지고 군국기무처가 세워짐)

러일 전쟁 -> 1차 한일 협약 -> 침략 묵인 -> 을사늑약 -> 한일 신협약 -> 기유각서 -> 한일 병합 조약(1910 국권 강탈)

한일 의정서 : 러일 전쟁의 발발 -> 고종의 국외 중립 선언 -> 일본이 무시 -> 한일 의정서 체결(일본이 조선의 영토를 전략적 요충지로 사용)

1차 한일 협약 : 러일 전쟁에서 일본 우세 -> 고문정치 실시(고문을 파견하여 실질적인 내정 간섭, 재정고문-메가타, 외교 고문-스티븐스)

열강의 묵인 : "조선은 너희 일본꺼 해!", 가쓰라-태프트 밀약(미국의 지지) -> 제2차 영일 동맹(영국의 지지) -> 포츠머스 강화 조약(러시아의 인정)

2차 한일 협약(을사늑약) : 대한 제국의 외교권 박탈 -> 통감부 설치(이토 히로부미 임명) -> 고종, 네덜란드 만국평화회의 헤이그에 특사 파견 ->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 게재 -> 민영환의 자결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 : 각 부서에 일본인 차관 임명 -> 내정 간섭 심화 -> 통감의 권한 강화 -> 추가 조약으로 군대 해산

기유각서 : 사법권 박탈

한일 병합 조약 : 대한제국 국권 피탈

통감의 설치 -> 을사 늑약, 통감의 강화 -> 한일 신협약

애국 계몽 운동 : 을사늑약 체결 전후로 국권 회복을 위해 전개된 실력 양성 운동(보안회, 헌정 연구회, 대한 자강회, 신민회)

보안회(1904) :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저지

헌정 연구회(1905) : 독립 협회 계승 -> 입헌 군주제 주장 -> 대한 자강회로 계승

대한 자강회(1906) : 헌정 연구회 계승, 입헌 군주제 지향, 전국에 지회 설치, 월보 발행, 고종 강제 퇴위 반대 운동 전개 -> 강제 해산

신민회 : 안창호 양기탁 이동휘 등이 주도한 비밀 결사 -> 국권 회복 및 공화 정체의 국민 국가 건설, 각종 강연회, 학회 활동, 교육(대성 학교, 오산 학교) 설립, 산업(자기 회사-도자기, 태극 서관-출판사) 설립, 군사(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 : 신한민촌, 신흥 강습소 등), 해산 : 105인 사건(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조작하여 105명의 독립운동가 처벌) 으로 와해(1911)

황성신문 :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게재

대한매일신보 : 베델, 양기탁이 창간, 국채 보상 운동 지원

신입생들이 공대에 오면 자태(자퇴)를 오지게 한다 : 신민회 -> 공화정, 대성 학교, 자기 회사, 태극 서관, 오산 학교

애국 계몽 운동의 응어리 : 사회 진화론(강한 자가 약한 자를 먹는 건 당연)에 입각한 운동 -> 의병에 대한 비판적 시각 -> 일부 세력이 친일로 변질

을미의병 :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원인 -> 양반 유생층 중심+일부 농민 세력 가담 -> 고종의 해산 권고로 자진 해산

을사의병 : 을사늑약의 체결이 원인 -> 최익현 등 양반 유생층 주도 -> 신돌석 등 평민 의병장 등장

정미의병 : 고종의 강제 퇴위, 군대의 강제 해산(정미 7조약)이 원인 -> 해산된 군인들의 합류로 전투력 강화 -> 다양한 계층 참여 -> 의병 운동보다 큰 의병 전쟁으로 발전 -> 13도 창의군 결성(총대장 이인영) -> 각국 영사관에 의병을 국제법상 교전 단체로 승인해줄 것 요청 -> 서울 진공 작전 전개 -> 실패 -> 일본의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의병 활동 위축 -> 간도 이동

의열투쟁 : 민영환의 자결(을사늑약 체결에 항거), 전명운 장인환의 스티븐스 저격(샌프란시스코 에서),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하얼빈)

동양 척식 주식 회사 : 일본의 조선 토지 수탈기구

국채 보상 운동(1907) : 일본의 차관 강요 -> 대한 제국의 경제적 예속 심화 -> 대구에서 서상돈이 주도하여 시작 -> 국채 보상 기성회를 조직하여 전국적 모금 운동 전개 ->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의 지지로 확산 -> 일제 통감부의 방해로 실패

일본으로의 곡물 유출 -> 방곡령 선포

일본의 차관 강요 -> 국채 보상 운동 전개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 보안회의 저지 운동

외국 상인들의 상권 침탈 -> 시전 상인들의 철시 투쟁

황국 협회 : 보부상 단체, 독립 협회 해산과 관련

황국 중앙 총상회 : 시전상인 단체

현대[편집]

[편집]

그 외[편집]

1월 6일 이전, 모든 강의 전부 다 조사해서 필기노트 작성하려고 했던 때[편집]

[한국사 정리 요령]

  1. 사건의 시간 순서대로 정리해서 하나의 스토리 만들기
  2. 한자 표기하기
  3. 사건들의 인과관계에 대한 내 생각을 같이 넣어서 작성하기(사실:생각=50:50)

예고편

[1강-예고편1]

서울경기, 강원, 충청, 전라, 경상은 알고, 북한에는 3개의 도가 있다. 맨 위에서 반을 가른 오른쪽이 함경도(함흥+경성) 추우면서 척박한 산간지대와 선사 상고시대에 옥저가 위치해 있었고, 반을 가른 왼쪽이 평안도(평양+안주) 여기도 춥고 서울로부터 멀어서 차별을 많이 받아왔으며 그 차별때문에 홍경래의 난 등이 발생하기도 했었다. 같은 나라안에 있으면서도 지리적으로 멀 뿐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받는 게, 인정하기는 싫지만 인간으로서 당연한 심리와 현상이고, 대학은 제천이면서 다들 서울 사람에, 나 혼자 원주라는 이유로 가스라이팅 당하는거만 봐도 지리적 고립은 차별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홍경래의 난이 차별때문에 발생한 난이라는데, 마음이 이해는 간다. 평안도 밑에 있는 서울경기 위쪽이 황해도(황주+해주) 근처까지 가면 북한이 바로 보인다. 북한과 교류가 있는 개성공단이 위치해 있다. 경기도는 도시의 이름을 따지 않았다. 한양이 수도(京)였고 경의 주변이라는 이름으로 경기도라 칭했다. 한강이 흘러서 살기 좋고 전성기의 중심이 되었다. 충청도는 충주+청주이다. 1540년(중종 35)에는 충주가 예성으로 강등되면서 다시 '청공도'(淸公道)가 되었으나 중종이 "무익"하다고 여겨 다음해 다시 복귀하였다. 1550년(명종 5)에는 충주의 역모로 청홍도(淸洪道)라고 했고, 다시 선조 때 충청도로 회복하였다. 전라도는 대표적인 곡창지대이다. 전주+나주 이며, 당시 광주는 지금처럼 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상도도 전라도만큼은 아니지만 훌륭한 곡창지대중 하나다. 경주+상주 이다.

한반도의 지형은 태백산맥이 있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아서 강은 다 서쪽으로 흐르지만, 단 하나 유일하게 동쪽으로 흐르는 강이 백두산 동쪽의 두만강이다. 두만강의 수심이 얕은 곳은 1m도 안되는 곳도 있어서, 과거 만주로 이전하던 일도 있었다. 다른 모든 강들과 다르게 높이 치솟은 백두산의 동쪽에 있는 두만강이라서 혼자 동쪽으로 흐른다. 백두산의 서쪽으로는 한반도에서 가장 긴 압록강이 흐른다. 겨울에 강이 얼면 건널 수 있다고 한다. 평양을 가로지르는 대동강이 있어서, 과거 평양을 많이 수도로 삼은 이유다. 통일 글짓기(?) 할 때 많이 가는, 북한까지 흐르는 임진강이 한강 위쪽에 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곳을 양수리라고 한다. 전라도의 중추가 되는 금강이 있다.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낙동강이 있다. 6.25전쟁때 북한이 파죽지세로 남침할 때 낙동강에 진을 치고 최후의 저항을 했었다. 대동강의 평양, 임진강의 개성, 한강의 한양을 한반도 삼경(三京)으로 꼽는다.

한자

왕은 살아있을때와 죽을때가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특히나 나보다 손윗사람을 쉽사리 이름으로 부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왕은 살아있을때 전하(殿下)라고 불렀다. 궁궐(殿)안(下)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왕이 죽고 나면 살아있었을때의 업적등을 고려해서 호칭을 정한다. 그래서 죽고나서 칭해진 이름을 들으면 대충 그 왕의 업적이나 행실을 알 수 있다. 법흥왕은 불교를 부흥시킨 왕이고, 광개토대왕은 영토를 매우 넓힌 왕이다. 법흥과 광개토 같은 이름을 시호라고 한다. 시호 말고도 묘호도 있다. 왕이 죽었을 때 제사지낼 때 부르는 이름을 묘호라고 한다. ~조, ~종 등이 그에 해당한다. 태조, 태종, 세종 등이 있다. 태조는 나라(고려, 조선 등)를 세운 왕을 말한다. 왕에게 절대 붙여서는 안되는 글자가 충(忠)이다. 왕은 충성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충성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외가 있는데, 역사에서 반 식민지 상태였던 고려 원나라간섭기에 있던 왕은 시호에 충이 들어간다. 왕의 말을 나타내는 어(御)라는 한자도 있다. 어명(御命), 암행어사(暗行御使)등이 있다. 궁녀, 후궁, 황후, 왕후는 각각, 궁에서 일하는 여자, 왕의 첩, 황제의 정부인, 왕의 정부인이다. 대부분 왕국이었지만 대한제국은 제국이었고, 왕이 아닌 고종황제였다. 그래서 부인은 명성황후가 된다. 그 외 왕자관련 어휘를 보면, 첩, 후궁의 아들은 ~군, 왕후, 정실의 아들은 대군이라 불렀다. 지금처럼 자식이 한 두명이 아니기 때문에, 왕위를 잇는 단 한명의 자식을 세자(世子)라고 불렀다. 세자는 왕위를 잇는 자식, 또는 왕위를 이을 예정이었는데 그러지 못하고 죽은 사람(사도세자)등에도 붙인다. 세자는 왕후(정실)의 맏아들이다. 궁에서 일하는 관리(官理)나 모시는 사람들은 시가 붙는다. 시녀, 내시 등. 관(館)이 붙은 건 건물을 의미한다. 리(吏)가 붙은 건 지방의 낮은 관리를 의미한다. 전 이라는 글자는 田도 있고 典도 있다. 수도라는 의미는 경(京)과 도(都)가 있다. 도감(都監)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재난, 전쟁 등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수도(都)로부터 나온 감시(監)기관을 말한다.

[2강-예고편2]

한자

세금

조세(組稅), 세금을 걷는 것을 말한다. 시대에 따라 세금을 내는 방식이 달랐는데,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국가가 생겼고, 국가가 생기기 이전엔 세금을 내지 않았고, 세금을 내기 시작하고나서는 농사를 다 짓고 있기 때문에 밭에서 난 곡식의 양 만큼 낸 세금을 전세(田稅)라고 한다. 전세는 개인이 내는 세금이고, 지역의 특산물을 바치는 것을 공납, 개인의 노동력을 바치는 것을 역(役) 이라고 한다. 남자들은 이때도 군대를 갔다. 주로 성을 쌓는데와 전쟁병력으로 동원이 되었다.

토지

수조권은 과거 공무원이 월급을 받던 방식인데, 지금이야 돈으로 받지만 그때는 화폐가 없던 시절이다. 그래서 밭에서 난 쌀을 받았는데, 쌀의 이동을 최소화 하면서 관료가 직접 수조권을 지닌 밭에 가서 쌀을 수금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은 세금을 냈었다. 방식은 이러한데, 이 수조권을 시대와 나라에 따라 부르는 이름들이 달라진다. 관료전은 일반적인 수조권을 의미하고, 역분전은 전쟁이 끝나거나 무언가에 공헌한 역할의 정도에 따라 차등지급한 수조권을 의미하고, 전시과는 고려의 관료의 과(등급)에 따라 차등지급한 수조권을 의미하고, 과전법은 조선시대의 전시과(수조권)이다. 수조권은 소유권과는 다르다. 땅을 소유한 주인이 농사를 짓고 그 땅에서 수확한 일부를 녹으로서 직접 수령할 수 있는 권한을 수조권이라 한다. 녹(祿)은 월급을 의미한다. 나라의 녹은 공무원을 의미한다.

상업

상(商)이 들어간 단어는 동네에서 자리잡고 파는 상인을 내상, 돌아다니며 파는 상인을 행상이라 한다. 시비법(施肥法)은 땅에 비료를 주어 휴경지를 단축시키는 방법을 말한다.

농업

이앙법은 기존에 땅에 직접 벼를 심던 직파법에서 발전된 방식으로, 벼를 모판에 심어 일정수준이랑 자란 것을 논에 심는 방식으로, 기존 직파법과 다르게 벼와 잡초의 구분이 쉬워서 버리는 벼 없이 생산력이 크게 올라갔고 동시에, 벼를 모판에 심어서 키우는 동안 논에 물을 빼 밭으로 만들고 거기다 보리를 심어서 수확한 후에 물을 들이고 모판에서 자란 모를 옮겨심어 이모작이 가능해졌다. 이앙법 자체만으로 기억하지 말고 이앙법을 통해서 어떻게 이모작이 가능해졌는지까지 알 필요가 있다. 소작농은 작게 농사짔는다는 의미인데, 농사 짓는 면적이 작다는 의미보다는 주로 남의 땅에서 농사를 대신 지어주는 농노동자의 의미가 크다. 그렇게 해서 일년 농사 지어주고 받은 곡식이 적으니 작게 농사 짓는다는 의미다.

신분

마가 우가 구가 저가 등에 쓰이는 가(加)는 가(家)와 다르다. 제사장의 의미를 지닌다. 종친은 친척, 척신은 외가를 말한다. 척신은 역사속 인물과 성씨가 다른, 다른 집안의 사람이다. 호족(豪族)은 대토지를 소지한 사람을 말한다. 문벌귀족은 귀족가문을 말한다. 권문세족도 문벌귀족과 비슷한 말이지만 권문세족은 친원파 매국노로 더 많이 쓴다. 중인(中人)은 과거의 의사나 전문 기술직등을 말한다. 귀족은 아니지만 능력이 있고 상노비는 아니기 때문에 중인으로 부른다. 서얼은 서자+얼자 로, 양인과 천민을 통틀어서 정부가 아닌 첩의 자식을 서얼이라 불렀다. 평민과 서민과 상민은 같다. 노비는 노+비 다. 노는 사내, 비는 계집이다. 노비는 나라소속의 공노비, 개인소속의 사노비가 있다. 조선후기 전까지는 일천즉천이라 해서, 아빠쪽이든 엄마쪽이든 어느 한 쪽이 노비면 자식은 다 노비였다. 그런데 양반은 세금을 내지 않는 점과 조선 후기에 양반이 너무 많아진 것이 맞물려, 나라에 세금이 동나자, 일천즉천에서 노비종모법이라는 엄마가 노비일때만 자식이 노비인 법으로 바꾸어 노비 수를 줄여서 세금을 거두는 일도 있었다.

사건

봉기(蜂起)는 형세가 벌처럼 순식간에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정변(政變)은 정치적 변동이라는 의미로 쿠데타비슷한 행위를 의미한다. 사변(事變)은 사태가 변했다는 의미로 의도성이 담기지는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판국이 바뀌어 힘으로 눌러 진압이 필요한 사태를 의미한다.

구휼

휼(恤)은 한자도 구휼할 휼 이다. 힘들게 사는 백성을 보니 마음에서 피가 난다는 뜻으로, 봄에 쌀이 없어 궁핍한 춘궁기에 백성을 구한다는 뜻이다. 구휼제도로서 진대법이 있는데, 춘궁기에 쌀을 빌려주고 가을에 수확하면 돌려받으면서, 춘궁기에 쌀이 없어 노비가 될 뻔한 사람들을 구한 제도이다.

종교

제정일치는 제사장과 정치세력이 동일세력이라는 뜻이다. 선사 상고시대에 아무것도 없던 시절 뭉쳐야 힘이 되던 시절에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던 것은 제사(종교)였다. 그렇게 사람을 모으는 제사장이 정치까지 하는 것을 제정일치라 하며, 고조선 단군(제사장)이 있다. 불교는 조선의 유교 이전까지 한반도에 주로 상주하던 종교이다. 불교는 간단히 말해서 깨달음을 얻어서 죽어 극락을 가는 것이 불교의 이념이다. 대승불교와 소승(상좌부)불교로 나뉘는데, 대승불교는 부처(신)의 깨달음을 전수받아 부처의 수레를 타고(승乘) 극락에 가는 것을 말하고, 소승(상좌부)불교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자신의 수레에 깨달음을 싣고 극락으로 가는 것이다. 문화유산으로는 대승불교는 부처의 시각화를 위해 부처상을 만들고, 소승불교에서는 상징적인 의미로 탑을 많이 세운다. 우리나라 불교는 호국불교로서 나라를 지키는 불교를 말하고, 실제로 과거 발생한 전투들에서 승려들은 많이 참전하였다. 고려시대 원나라의 침공을 지키기 위해 부처의 가르침으로 나라를 지키고자(호국) 만든 팔만대장경도 호국불교의 문화유산 유형이다. 처음에는 전쟁통에 뭔 책을 쓰나 싶었는데, 불교에 여러 유형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고려시절 호국불교였다는 것을 아니까 팔만대장경을 만든 이유가 이해가 간다. 팔만대장경은 8만장 분량의 불경이고, 한 장에 450자 정도가 새겨져 있고, 한 글자를 찍을때마다 세 번 씩 부처에게 절을 올렸고, 한 장에 1350번 절을 했고, 대략 1억8백만번 절을 올려 완성한 문화유산이다. 만드는데 15년이 걸렸고, 지극정성을 다한 결과 오탈자도 거의 없다. 불교가 국교이던 고려시대까지 사람들이 자신의 태어난 신분에 불만을 크게 표출하지 않고 살아간 이유를 불교에서는 업(業)으로 설명한다. 전생-환생-이승-극락-내생을 믿는데, 전생이 지은 업이 많아 이번생은 천민이다, 노비다 등으로 설명하고 다들 이에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정말 청렴결백한 사람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적으니, 왕과 귀족의 수가 적은 것도 이해가 간다. 부도는 승탑(승려의 탑)이라고도 하며, 절 내부 한켠에 있는 작은 등(燈)처럼 생긴 것을 말한다. 내부에는 승려가 죽고 남은 사리가 보관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유교는 선비 유 자 를 써서 선비의 가르침이라는 의미이다. 경전이 다섯개가 있으며, 다섯개의 경전 전부 통달한 사람을 오경박사라고 한다. 유교는 이치와 기운으로 이루어졌다는 이기론이 그 이념이다. 이치는 사상 이론 신념 등 추상적인 대상이고, 기운은 육체 세상 현물 등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대상이다. 동학은 동양의 학문이다. 서학이 먼저 있고 그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서학 이후에 생겨났다.

고분

고분은 무덤이며 총(塚)으로 쓴다.

한자, 사자성어

  1. 파죽지세 : 막 밀고 쳐들어 오는 형태나 모습

전근대 정치

[3강-전근대 정치1 : 선사시대의 문화]

미리보기

선사시대 :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

선사(先史)시대는 역사로 기록되기 이전의 역사다. 선사시대를 관통하는 것은 먹고 사는 것 이다. 구석기는 사냥, 채집, 낚시 등 먹을 것을 자연으로부터 획득하고, 구해서 나눠먹고 땡이다. 보존이 불가능해 남는건 다 버리기 때문에 다같이 평등했다. 신석기는 농사를 시작했다. 아직은 생산량이 많지 않아, 다같이 먹을 정도만 생산되기 때문에 여전히 평등사회다. 청동기는 기술이 발전해서 생산량이 올라가고, 잉여생산물이 생기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차이가 생기고 불평등이 생겨나고, 계급이 생기고, 국가가 생긴다. 철기도 청동기와 같다.

본강

구석기

경제는 사냥과 채집과 낚시였다. 이동이 생존이었기 때문에, 딱히 주거는 필요하지 않았다. 주로 이동하며 동굴이 보이면 들어가 자는 식이었고, 혹은 뚝딱 지을 수 있는 막집을 지어서 잠깐잠깐 살았다. 도구는 뗀석기를 이용했다. 주먹도끼등이 있다. 사냥을 해야 하기 때문에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사회였으며, 서로 협력하는 관계하에 다같이 평등했다. 예술은 언제나 그 시대 사람들의 원초적인 욕망을 표현하는데, 구석기의 욕망은 생존이었고 이를 표현한 벽화가 다산 비너스상 벽화 등이다. 구석기 시대의 사람들은 이동을 주로 하기 때문에, 우리 민족이 아니라고 본다. 누구든 한반도에 정착하고부터를 우리 민족으로 삼는다. 구석기에는 무리지어서 이동도 했지만, 누군가 죽기도 하고, 떠밀려온 생존자가 합류하기도 하면서 가족이라는 개념없이 번식활동을 통해 생존한다.

신석기

농사가 시작된다. 이는 가히 혁명적이라 부를만 해서 신석기혁명이라고도 부른다. 벼농사는 아니다. 목축업을 주로 삼는 단계다. 하지만 정착하기 시작하였으므로 우리 민족으로 칭하고, 정착지역은 주로 물을 구하기 쉬운 강가, 바닷가로 정한다. 강가 바닷가는 기후특징으로 굉장히 물기를 머금은 바람이 차다. 그래서 움집을 짓고 정착생활은 한 것은 맞는데, 춥기 때문에 1m나 땅을 파고 들어갔다. 근데 강가 바닷가 주변의 땅을 파고 들어가면 땅이 축축하다. 그런 점토느낌의 땅에 팍 파묻고 사용할 수 있게 끝이 뾰족한 모양의 빗살무니토기를 만들어 사용한다. 도구는 간석기를 사용한다. 무기나 생활에 필요한 도구들을 갈아서 만드는데, 가락바퀴로 실을 뽑고 뼈바늘로 옷을 꿰메 만들어 입기 시작한다. 목축업뿐이고 크게 생산량이 변화하지 않아 아직은 평등한 사회다. 구석기와는 다르게 뭉쳐살고 정착해 살다보니 혈연의 개념이 생겨나고 씨족이 생겨난다. 서로 다른 씨족의 자식들이 결혼해서 씨족이 합쳐지면서 세력이 확장되는 형식을 띈다. 신석기의 예술은 정착생활에 따른 비 땅 자연등을 표현한다. 농사에 가장 필요하기 때문이다. 생존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자연을, 이 시대의 사람들은 두려워하기 시작하고, 두려움이 존경이 되고, 존경은 종교가 된다. 이렇게 자연신앙이 생겨난다. 온갖 자연적인 요소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 애니미즘이다. 동식물의 신은 토테미즘, 하늘과 땅의 신은 샤머니즘이다. 이 종교들을 표현하는 예술을 주로 한다.

청동기, 초기철기

초기 철기라는 이름은, 지금이 후기철기이기 때문이다.

청동기와 초기철기에는 벼농사를 시작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움집보다 더 좋은 집을 지을 수 있게 되고 정착지의 선택폭이 넓어져서, 완전 바닷가나 완전 강가 주변에 살면 추웠던 것을 피해서, 뒤로는 산이 있고 앞으로는 강이 있는 지역을 찾아 집을 짓는다. 추위를 피했기 때문에 집이 땅을 파고 들어갈 필요가 없어져서 지상 위로 집을 짓는다. 따라서 그릇도 뾰족한 빗살무늬토기에서 끝이 뭉툭한 민무늬토기로 바뀐다. 청동기는 청동을 사용했는데 청동이 만들기가 어렵다. 구리 아연 주석의 합금인 청동을 각각의 부족으로부터 힘을 모아서 만들어야 하고, 그 양이 매우 희소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 청동은 과거 명품으로 통하고 권위의 상징이 된다. 이를 지니고 다니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며 더욱 위엄을 뽐내기 위해 비파형 동검처럼 칼로 만들었다. 청동은 희소해서 청동기지만 농기구는 돌을 썼다. 다만 청동이 처음 등장해서 청동기일 뿐이다. 이때 사용한 농기구 중 하나가 반달돌칼인데, 이것이 신석기와 헷갈리기가 쉽다. 반달돌칼은 신석기 시대의 간석기처럼 생겼지만 청동기에 청동이 희소해서 여전에 돌로 도구를 만들면서 나온 반달돌칼이다. 청동기부터 잉여생산물에 따른 불평등이 시작되고 계급이 생기고 최초의 국가 고조선이 생겨난다. 국가에는 지배자가 있고 이 지배력을 기리는 의미로 고인돌을 만들었다. 초기 철기에는 철이 생기는데 이 또한 엄청나게 비약적인 문화발전이 이루어진다. 돌로 된 대부분의 도구들이 철로 대체된다. 무기와 농기구 등이 다 철로 업그레이드 되고 생산량이 올라가고 군사력도 올라간다. 그렇다고 철기에 청동을 안 쓴 것은 아니다. 이미 얻은 문물을 버리는 세대는 없다. 특이한 것은 청동을 만드는 기술도 발달해서 기존의 비파형동검에서 발전하여, 거푸집 기술을 이용해서 더 얇게 이쁘게 뽑아낸 세형동검이 철기시대에 나온다. 세형동검도 여전히 청동이다. 초기 철기의 특징은 교류가 활발했다는 것이다. 중국은 과거 매우 강국이었으며 중국에서 붓과 한자를 들여온 기록이 있다. 이 시대의 예술은 부족국가사회에 필요한 것이 주를 이룬다. 과거의 평등했던 시대에서 불평등으로 바뀌었는데, 이를 납득이 가게 설명할 것이 있어야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온게 선민사상이다. 우리 민족이 특별해서, 하늘신 한웅에게 선택받아서 다른 민족을 지배할 수 있다는 논리다.

[4강-전근대 정치2 : 고조선의 성립과 여러 나라의 성장]

하이라이트

고조선의 건국은 단군이야기로 설명된다. 첫번째는 하늘의 아들 환웅이 내려온, 두번째는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한다, 세번째는 풍백 우사 운사, 네번째는 곰과 호랑이, 환웅과 웅녀의 혼인, 단군왕검. 각각 하늘로 부터 선택받았다는 선민사상, 홍익인간, 농경사회의 제천문화, 토테미즘, 부족+부족으로 세력확장, 제정일치를 나타낸다.

단군조선시기에는 부왕에서 준왕으로 왕위세습이 바뀌고, 관직체계를 정비하고, 중국의 연나라와 대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철기시대가 진행됨에 따라 남쪽의 진나라와 중국의 한나라의 철 중계무역을 하였다.

위만조선은 중국에서 위만이 발달된 보급철기를 가지고 들어와 새로 지은 나라다. 당시 고조선의 왕인 준왕의 마음에 들은 위만은 변방을 지키면서 연(燕)의 망명한 무리들을 규합하여 세력을 키웠으며 기원전 194년 무렵에 수도인 왕검성을 공격하여 준왕을 쫓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 위만의 손자가 우거왕이다.

한나라의 전한 무제가 침입하였고, 한사군을 설치하여 감시하였으며, 고조선의 8조법을 60개나 늘려서 사회가 혼란스러워지고 살기 힘들어진다. 이후 기원전 108년 전한 무제의 공격을 받아 왕검성이 함락됨으로써 고조선이 멸망했다. 왕검성이 있던 곳에는 낙랑군이 설치되어 이후 수세기 동안 중국과 한반도의 중계무역 기지의 역할을 했다.

부여

정치는 5부족연맹체이다. 왕, 마, 우, 저, 구의 형태를 띄고 있고, 왕을 사방으로 둘러싼 형태로 사출도 라고 부른다. 경제는 아직 완벽한 철기가 아니고 농사짓기도 척박한 땅이기 때문에, 반 농사 반 목축의 형태를 띈다. 이 시대이 고대국가들은 다 제천행사를 지냈는데, 부여의 제천행사는 영고이다. 12월에 추운지역에 눈이 잔뜩 내리면 사냥하기 좋았고, 다른지역의 농사가 이들은 사냥이었기 때문에 12월에 제천행사 영고를 실시했다. 부여의 풍속에는 순장이 있다. 높은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주변까지 다 묻어버리는 개념이다. 물귀신처럼 같이 데려가는 개념이 아니고, 당시에는 죽음에 대한 개념이 지금과 달라서, 이승에서 저승으로 이동할 뿐, 삶은 계속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쓰던 물건, 쓰던 노비들, 주변 사람들을 같이 데리고 가서 그곳에서 생활하는, 저승으로 이사하는 개념으로 순장을 치뤘다.

부여에서 나고 자란 주몽이 후에 고구려를 만들기 때문에, 부여와 고구려는 비슷하다. 1책12법과 형사취수제(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맞는 풍습)등이 그렇다.

고구려

5부족연맹체인 것은 부여와 같다. 뿌리가 같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제가회의를 통해 정사를 정했다. 경제는 약탈경제다. 지형이 험난해서 애초에 사람이 강하고, 당시에 인도적인 개념이 없어서 무력을 통해 뺐어왔다. 이 문화가 지금의 북한이 아닐까. 살기 힘들고 사람은 강해서 자꾸 우리한테 쌀 내놓으라 하는 그런 느낌이 든다. 제천행사는 10월에 동맹이라는 제천행사를 지낸다. 약탈국의 풍요를 비는(?) 의미도 있었다. 서옥제라는 풍속이 있었다. 여자가 시집오는 지금과 다르게, 남자가 장가를 가는 문화였다. 여자 집의 뒤켠에 서옥이라는 작은 집을 지어서 노동력을 제공받았다. 그렇게 서옥에서 생활하면서 낳은 아이가 자라면 아이와 함께 독립시켰다.

옥저

부여 고구려와 다르게, 왕이 없었고, 군장이 다스리는 사회였다. 경제는 소금과 어물 같은 특산물위주였다. 약탈당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제천행사는 딱히 없었다. 어차피 뺏기기 때문. 민며느리제라는 풍속이 있었다. 고대시대에는 하나같이 여성의 출산력이 생존에 직결되기 때문에 고구려의 서옥제와 비슷하게 다들 나름의 결혼제도가 있었다. 민며느리제는 며느리구실을 아직 못하는, 여자가 10세이하일때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데려와, 남자의 집에서 키우면서 생활하는 제도이다. 후에 출산력이 감소하면 친정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골장제라는 풍속도 있다. 가족공동무덤이라고도 한다. 군장이 다스리던 사회인 만큼, 가족단위나 부족단위 소규모의 공동체의식을 중요시 했다고 볼 수 있다.

동예

동예도 왕이 없고 군장사회였다. 옥저와 마찬가지로 특산물경제였다. 단궁(활의 일종), 과하마(조랑말), 반어피(바다표범)등이 주를 이뤘다. 태백산맥지역인 동예의 특성상 크고 다리가 긴 말은 산맥을 오르내리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때문에 과일나무 밑을 지나갈 정도로 작은 말이 주를 이룰 수 있었다. 과하마 진짜 엄청 작다. 망아지 같다. 동예는 제천행사를 지냈다. 옥저보다는 약탈이 덜했나보다. 무천이라는 제천행사를 지냈다. 책화라는 풍속이 있었다. 태백산맥지역인 동예에서는, 산골짜기마다 마을이 생성되기 마련이었는데, 이 경계를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침입하는 자는 소와 말로 배상하도록 한 것이 책화였다. 부족 씨족사회의 당시의 당연하던 개념이었다. 지금도 뭐, 누가 내 영역에 막 들어오려 하는 것은 결코 달갑지만은 않다.

삼한(마,진,변)

경상도 전라도지역으로 곡창지대다. 왕은 없고 군장이 지배를 했고, 다만 제사장과 군장이 따로 있었다. 고조선과 다르게 제정분리 사회였다. 천군이라 불리는 제사장소도라는 성역의 지배권을 독립적으로 가졌다. 곡창지대라 벼농사를 지었다. 예외적으로 변한은 후에 가야가 위치하게 되는데, 이 지역은 철이 풍부해서 변한은 일찍이 철을 많이 생산했다. 쇠 뭉태기인 덩이쇠 등을 일본지역과 고대 고구려 낙랑지역등에 무역을 했다. 농경국가답게 제천행사는 역시 있었다. 두번 있었는데, 5월에 씨를 뿌리는 수릿날에 한 번, 10월에 거두면서 한 번, 10월의 제천행사는 계절제라고도 불린다. 5월 수릿날은 지금의 단오, 10월 계절제는 지금의 추석과 비슷하다.

사료중에 "대군장이 없다"는 문장이 가끔 나오는데, 군장중의 군장이라는 의미로 왕으로 해석이 가능하고, 왕이 없는 나라인 옥저 동예 삼한이 해당된다.

[5강-전근대 정치3 : 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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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백제 신라 등이 이 시대에 해당한다.

고대국가는 전반적으로 선사시대의 반대적인 성향을 띈다. 왕을 부족장에서 선출하던 방식에서, 왕권강화를 위해 왕위세습으로 바뀐다. 통일된 법이 없던 선사시대와 다르게, 율령을 반포해서 공통된 법을 만들어 통치하였다. 지금의 법과 같은 개념이다. 통일되지 않았던 애니미즘 토테미즘등에서, 불교를 수용해서 종교를 통일시킨다. 그렇게 강화된 왕권과 백성을 통일해서 선사시대와 다르게 영토를 크게 넓힌다. 한강을 차지하는 나라가 그 나라의 전성기 시대를 맞이했다. 4세기 백제전생기, 5세기 고구려전성기, 6세기 신라전성기를 각각 맞이 했다.

백제 전성기(4C)

한강에서 출발한 백제는 아래쪽 마한을 점령하고, 위쪽으로 황해도부근까지 점령을 한다. 이후 고구려 평양성까지 함락한다. 이때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사망하게 된다. 당시 백제의 왕은 근초고왕이었다. 이로 인해 고구려는 힘들어지고, 후에 장수왕이 고국원왕의 원한을 갚기에 이른다. 전성기를 맞이한 백제는 요서지방, 산둥(동진)지방, 일본큐슈지방, 가야국 등 다양한 나라와 교류를 하였다. 내부적으로는 왕위를 자식에게 세습하는 제도를 취했다. 같은 시기에 고국원왕이 근초고왕에게 죽음을 당하고 이후 소수림왕에 이르러서 고구려는 혼란해진 사회를 정비하고, 율령을 반포하였고, 태학을 세워 백성을 교육하고, 불교를 통해 백성을 하나로 모아 후에 고구려 전성기의 기반을 다진다.

고구려 전성기(5C)

소수림왕이 다져놓은 기반을 토대4세기말 광개토대왕, 5세기 장수왕이 고구려전성기를 누린다. 고국원왕을 죽이고 고구려를 쇠퇴시킨 백제에게 한 방 먹이려고 벼르고 있었다. 이때 백제는 최전성기 이후 조금씩 내리막길을 가던 중, 고구려는 좀 빡세고 신라를 침공하기로 하는데, 혼자 가지 않고 백제는 일본과 가야를 편먹고 신라를 공격한다. 이때의 신라는 아직 고구려와 백제만큼의 체재와 국력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여서 이 공격을 버티기 위해 고구려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때 44살 먹은 내물왕이 10대 광개토대왕에게 도와달라고 구구절절 편지를 보낸다. 이에 광개토대왕이 신라에 군을 파견하여 침공한 백제세력을 몰아내고, 신라의 경주에 침공한 일본군을 김해(가야)까지 쫓아가서 몰아내며 동시에 가야까지 쇠퇴하게 된다. 이렇게 신라에게 힘을 써준 고구려는 그 대가로 신라를 간섭하기 시작했다. 이 증거로 신라지역의 호우총무덤에서 광개토대왕에게 감사를 표하는 호우총그릇이 출토된다. 동시다발적으로 한반도 내에서 백제 쇠퇴, 가야 쇠퇴, 신라 간섭이 동시에 이루어진 것과 중국대륙이 통일되지 못하고 남북으로 나뉘어져 힘이 분산되있던 것과 맞물려 고구려는 5세기 최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남쪽으로는 이런 일들이 있었고, 동시에 만주쪽으로도 영토를 넓힌 광개토대왕이었다. 동시에 광개토대왕은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다음 아들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의 북진과 반대로, 남진정책을 추진한다. 이를 위해서 수도를 국내성의 남쪽인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다. 이를 백제와 신라가 압박을 느낀다. 본격적으로 한강을 차지하기 위해 백제의 한성을 공격한다. 위협을 느낀 백제는 신라와 동맹을 맺는다(나제동맹). 신라도 당시에 고구려의 힘을 빌렸었기 때문에 받게된 간섭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이 나제동맹은 백제가 고구려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맺은 동맹이지만 후에 백제의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백제 참 자기네들이 공격해놓고 위험해지니 동맹맺자고 하는 전라도도 대단하다. 후에 이를 배신때리는 진흥왕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경상도 전라도 지역감정이 사실상 이때 생겨난게 아닐까. 한성이 함락당한 백제는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다. 한강을 차지한 장수왕은 남한강이 있던 충주(당시 중원)지역에 비석을 세운다. 예전에 들었던 중원고구려비가 이것이다. 같은 시대에 신라의 지증왕은 우경을 통해 소로 농사짓는법을 확산시켜 농산물 생산량이 크게 증가하고, 우산국을 점령하여 한반도의 영토로 들여온다.

신라 전성기(6C)

고구려가 소수림왕의 발전을 토대로 광개토대왕이 5세기에 전성기를 이룩했듯, 신라는 5세기에 지증왕이 이룬 체재확립과 발전을 토대로 6세기에 진흥왕이 신라의 전성기를 이룩한다. 고구려가 내부분열과 여러 위기들로 쇠퇴하고 있었고, 백제는 웅진천도 등으로 왕권약화와 내부 상황이 좋지 않은 것들이 합쳐져 신라의 전성기에 영향을 미친다. 6세기 당시 백제의 왕이 둘이 있는데, 무령왕과 성왕이다. 내외부적으로 나누어 보면, 백제 무령왕은 수도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된 당시 상황에서 외적으로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 교류를 활발히 하였다. 무령왕릉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벽돌을 쌓아올린 중국식 무덤임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내부적으로는 22담로를 백제 내에 설치하여 귀족들을 감시했다. 이런 방법들을 통해서 백제는 꽤나 회복을 하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무령왕 다음 성왕은, 방어에는 좋았으나 좁았던 웅진에서 사비(지금의 부여시)로 수도를 옮긴다. 아직 나제동맹이 유효한 당시에 신라 진흥왕과 함께 연합하여 한강유역을 되찾아오기로 한다. 한강유역을 되찾고 나서 신라의 진흥왕이 이를 배신하고 백제에 등을 돌린다. 어찌보면 앞서 일어났던 백제의 신라공격등으로 당연히 일어난 결과이고, 이를 통해 백제는 신라에게 한강을 내어준 꼴이 되고 다시 쇠퇴하게 된다. 이에 분노한 성왕이 다시금 신라와 전쟁을 하려고 하나, 이미 혼란해진 사회와 쇠퇴한 국력이 이를 불가능하게 했다. 어쩔 수 없이 물러서고 성왕은 자신의 아들만 전쟁에 보내게 되는데, 왜인지 신라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게 된다. 이를 기특하게 여긴 성왕이 관산성전투때 아들을 위문차 방문하던 중 매복중이던 신라군에 잡히게 되고, 신라의 노비의 손에 죽음을 맞게 된다. 신라는 그 성왕의 시체를 거두어 궁궐의 돌계단 밑에 뭍고, 궁에 있는 사람들이 다닐 때 마다 성왕의 시체를 밟도록 한다. 이 일 이후로 백제의 원수는 위에서 침공해 내려오는 고구려가 아닌 성왕을 모독한 신라로 바뀌게 된다. 근데 지들이 먼저 때려놓고, 진짜 전라도 웃긴새끼들이다. 어찌됐든 한강을 차지한 진흥왕은 외적으로는 중국과의 교역이 용이해져, 당항성을 통해서 중국과 직교역을 한다. 내적으로는 화랑도를 정비한다. 화랑도는 화랑+낭도 이고, 화랑은 진골출신의 간부, 낭도는 그 밑의 병사들이다. 화랑도가 특이한 점은 낭도가 화랑(지도자)를 선택한다는 점이다. 동시대에 중국은 수나라에서 당나라로 정권이 바뀌던 시기이다.

삼국 당나라 항쟁기(7C)

이후 7세기에 성왕 이후에 백제 의자왕이 신라에 성왕의 복수를 한다며 신라를 계속해서 공격한다. 이를 버티기 힘든 신라의 김춘추가 고구려, 당시 연개소문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연개소문은 한강을 요구한다. 한강은 도저히 주지 못하겠는 신라는 당나라에 팔을 뻗는다. 이때 고구려에 부탁을 하러 갔었다가 붙잡히고, 감옥에서 간수가 들려준 얘기가 용궁전(토끼간)이고, 이를 잘 해석하여 "잠시 신라에 돌아가서 한강을 주는 것을 의논해 보겠다"는 이유로 구속이 풀려난다. 그리고 신라에 가서 당나라와 손을 잡을 것을 고려한다. 당시 당나라는 고구려의 대당강경정책을 탐탁치 못하게 보고 있었고, 옳다구나 싶어 신라와 손을 잡고 나당동맹을 맺고, 고구려와 맞서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고구려는 과거 침공했었던 나라지만 지금은 신라를 더 미워하는 백제와 손을 잡고 북쪽으로는 돌궐과도 손을 잡으며, 이 세력의 모양이 한강을 놓고 십자모양을 띄었다. 결과적으로 백제 고구려 순서로 멸망한다. 그렇게 한반도에 각 나라의 유민들과 신라만 남았을 때, 당나라가 나당동맹을 깨며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통수를 치는데, 이건 또 유민들과 신라가 하나로 뭉쳐서 기가막히게 당나라를 막아내는데 이것이 매소성, 기벌포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당나라를 몰아내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된다. 그래서 백제고구려멸망과 삼국통일 사이에 텀이 존재한다. 당시 한반도의 7세기이다.

[6강-전근대 정치4 : 남북국시대]

미리보기

남북국시대(발해+통일신라)에 대해 설명하며, 통일신라의 90%이상이 신문왕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 통일신라는 상대 중대 하대 3개의 시대로 나뉜다. 시간이 이른 순으로 상 중 하 이다. 상대는 백제 고구려 멸망 직후 대당항쟁기 이므로 큰 사안들이 없다. 각각의 시대에 왕의 권력과 귀족의 권력이 대립하면서 그 힘을 맞추는데, 중대는 왕권의 강화, 하대는 귀족권의 강화로 정리가 가능하다. 귀족권이 강화된 하대에 신라가 멸망했으니 귀족들은 자기 밥그릇 불릴 뿐인 녀석들이라는 말도 된다.

발해가 우리 역사인 이유가 여럿 있다. 첫째는 발해 건국자인 대조영이 우리민족이다. 하지만 발해의 백성은 말갈인들이 대부분이어서 이를 중국에서 우기는데, 다만 발해를 지배하는 지배층이 고구려인이라는 것이 발해가 우리역사인 증거가 된다. 그리고 생활 전반에 온돌 등 고구려문화가 많이 들어와있다.

통일신라

통일신라 중대는 신문왕으로 대부분 귀결된다.

정치

통일신라의 개국공신, 귀족of귀족, 동시에 본인의 장인어른인 김흠돌을, 신문왕은 왕권강화를 위해 반역죄를 빌어 죽이게 된다. 그나마 김흠돌이 혈연적으로도 업적으로도 신문왕과 필적할만했는데, 신문왕이 이를 죽이면서 왕권이 하늘을 치솟게 된다. 왕의 직속기구인 집사부의 권력이 강해지고, 자연스레 하대때 집사부의 권력은 약해진다. 신문왕때 지역을 재편성해서 9주5소경으로 나눈다. 9서당 10정으로 9개의 중앙군과 10개의 지방군으로 재편성 해서 국력을 강화한다. 이러한 노력에 신라사람만 넣지 않고, 고구려와 백제 유민을 모두 포함시켜 민족융합을 도모한다. 하대에는 혜공왕이 8살이 왕위에 오르면서 진골귀족들의 권력싸움이 더 심해진다. 왕위를 잇지 못해 분개한 김헌창이 난을 일으킨다. 내부 세력다툼이 심해지고 나라가 말도 안되게 돌아가니 한반도 최초로 농민봉기가 일어난다. 원종 애노의 난이 그것이다. 혼란스러운 신라 하대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진골귀족의 권력이 계속 상승하고 화백회의의 영향력이 더욱 커진다.

경제

통일신라 중대를 신문왕만 기억하면 되는 이유는, 왕권을 미치게 강하게 만들었는데 그게 신문왕이고, 그렇게 강화된 왕권을 혼자 누렸으니 신문왕의 내용이 주를 이루는게 자연스럽다. 수조권의 개념으로 국가에 세금을 냈다. 이 당시의 수조권은 관료전이라고 한다. (고려-전시과, 조선-과전법) 신문왕은 관료전만 지급하고 기존에 있던 녹읍을 폐지한다. 귀족들이 수조권을 악용해서 노동력을 갈취해서 군사력을 올리는 것을 차단하여 왕권강화를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하대에는 강화된 귀족권을 이용해서 중대때 폐지되었던 녹읍을 부활시킨다. 관료들이 과전법으로 얻은 수조권을 악용해서 수조권에 해당하는 곡식뿐만이 아니라 그 땅의 백성의 노동력까지 갈취한다. 이는 귀족의 군사력으로 이어진다.

사회

왕과 진골과 6두품 세 세력이 있었다. 왕은 진골을 견제하고, 6두품은 진골과 한끗차이인게 밉고,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왕과 6두품이 결탁하는 모습이 중대 사회의 전반적인 모습이다. 진골이 다구리 당하니 귀족권은 더욱 하락하고, 반비례하여 왕권은 더욱 올라간다. 이때 6두품은 왕과 함께 정치에 참여한다. 설총이 대표적이다.

하대에도 왕과 진골의 대립관계는 바뀌지 않는다. 진골과 6두품도 마찬가지다. 중대까지만 해도 큰 기대와 희망을 품었던 6두품들은 하대에 와서 그 기대와 희망만큼의 실망을 떠안게 된다. 최치원이 대표적이다. 명석한 두뇌로 일찍이 통일신라에서의 6두품의 한계를 느끼고 당으로 넘어가 공부하여 관료직을 취득하나 신라가 위험해졌다는 얘기를 듣고 애국심에 돌아와 개혁안 등을 내보지만 들어쳐먹을리가 없는 꼰대 진골들에 좌절하고 산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보낸다. 나도 아직 한국이 살만한 나라다 여겨서 공부도 하고 생활하고 있지만, 사회문제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지고 못살겠다 싶으면 이민을 가지, 애국심에 나라를 살리지는 않을 것 같다. 실망만 남은 6두품은 대토지를 소유한 호족으로 눈을 돌린다. 왕과 진골은 실권만 쥐고 있을 뿐 아무 실없는 껍데기라는 생각과, 땅을 소유한 데에서 힘이 나온다는 생각이었다. 대표 호족은 장보고다. 후에 이 6두품과 호족들이 고려를 건국하는 세력이 된다.

문화

불교에는 교종불교와 선종불교가 있는데, 중대에는 귀족들을 중심으로 교종불교가 뻗어나간다. 불교가 사실 평등에 기반한 종교인데, 신라는 골품제에 의한 아주 확실한 불평등 국가이기 때문에, 불교의 본질보다는 종교적인 목적으로만 남아있게 된다. 교종불교는 부처의 말만 잔뜩 모아놓은 경전중심으로,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진골귀족들 사이에서 성행한다. 불교가 종교적인 면으로만 빠져버리고 정치자리에는 유교가 들어온다. 유교를 통해 왕에게 효와 충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 국학을 설립하는게 통일신라 중대이다. 하대의 불교는 선종불교로서 교리나 경전등이 아닌 실천과 마음수행으로 가르침을 얻는다는 이념이다. 배운 이념을 몸소 실천하며 풍수지리설을 근거로 수도를 경주에서 송악으로 옮긴다.

반란

김흠돌의 난

신라의 개국공신이며 왕과 그 권력을 나란히 하던 김흠돌이 꾀하였다고 전해지는 반란이나, 사실상 신문왕이 왕권강화를 위해 김흠돌을 죽이기 위한 구실이라는 의견이 유력하다.

김헌창의 난

김헌창의 아버지 주원이 신라 하대 시기에 왕권약화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분개하여 난을 일으켰다.

원종 애노의 난

신라 하대 시기에 윗대가리들은 싸우고 나라운영이 개판이 되어 백성들이 살기 힘들어져서 일어난 농민봉기 이다. 원종과 애노등이 일으킨 난이다.

발해

무왕

발해 무왕 시기에 잦은 전쟁이 발발한다. 무왕은 광개토대왕처럼 연호를 썼고, 그 연호가 인안 이다. 발해는 건국무렵부터 신라와 당나라 양쪽 다 하고 사이가 좋지 않았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인데 두 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발해의 백성은 말갈족이 대부분이었는데, 이 말갈족들 중 흑수말갈이라는 말갈족만큼은 끝까지 발해에 순종하지 않았다. 이를 당나라가 간섭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자, 발해가 방어하는 차원에서 당나라 산둥지방을 공격한다. 이를 버티려고 당나라가 신라에 도움을 청하여 신라가 발해를 공격한다. 발해의 전력은 당나라를 공격하는데에 가있어서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공격을 막기위해 일본에 외교문서를 보내 도움을 청한다. 이 문서상에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증거가 남아 있어서 발해는 한반도의 역사인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문왕

무왕때 이렇게 줘터지게 싸우고, 문왕에 들어서서는 다시 교류를 한다. 과거 산둥반도를 공격했으면서 화해하고나서는 산둥반도에 문화교류의 장이 열린다. 발해의 사신들이 머무를 수 있는 숙소, 발해관이 생긴다. 신라와도 화해를 해서 동해안을 따라서 신라와 교류할 수 있는 신라도가 트인다. 발해가 처음 건국된 곳은 동모산(東牟山)이었다. 이곳은 구국(舊國)이라 불렸다. 그런데 문왕은 742년 무렵 중경현덕부(中京縣德府)를 건설하고 수도를 옮겼다. 중경현덕부는 현재 길림성 연변자치주 화룡현 서고성자성이다. 이 주변은 철과 베(布), 쌀 생산이 많은 곳이었다. 그런데 다시 755년 무렵 수도를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옮겼다. 이곳은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진(東京城鎭) 일대다. 문왕이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 이유는 북쪽에 위치한 말갈족 등을 보다 적극적으로 통치하기 위함이 아닌가 한다.

선왕

선왕은 발해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는데, 이때 발해의 영토는 남으로 신라와 접하고, 서로는 요동을 차지하였으며, 고구려부여의 옛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였다. 또한 북쪽의 흑수말갈 등 발해에 대항하던 모든 말갈의 부족들도 복속시켰다. 선왕은 발해 중흥의 대업을 이룬 중흥군주(中興君主)로서 당나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당과 밀접한 외교를 하여 문화를 발달시켰으며, 당나라 문물을 받아들여 행정구역을 5경(京) 15부(府) 62주(州)로 개편하고 학술을 진흥시키는 등 발해의 최전성기를 이루었다. 해동성국은 당나라를 기준으로 바다 동쪽에 있는 나라로 발해를 가리킨다. 선왕시기에 연호를 건흥으로 정한다.

멸망

선왕 사후 약 100여 년간에 걸친 발해 역사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일부 학자는 비슷한 시기에 분화한 백두산의 화산 폭발이 발해의 멸망 원인으로 주장되었지만 명확하게 입증되지 못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발해 귀족들의 지도층 내분을 발해 멸망의 원인으로 꼽는다.

유득공의 발해고

고려가 발해사를 짓지 않았으니, 고려의 국력이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략) 부여씨 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것이 남북국이라 부르는 것으로 마땅히 남북국사(南北國史)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무릇 대씨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으로 동쪽과 서쪽과 북쪽을 개척하여 이보다 더 넓혔던 것이다.

김씨는 신라왕조, 대씨는 발해왕조, 왕씨는 고려왕조를 나타낸다. 발해 역사가 한반도의 역사라는 것을 입증하는 객관적인 자료로 쓰인다.

[7강-전근대 정치5 : 고려의 건국~무신정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