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향 장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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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향 장기수(非轉向 長期囚)는 사회주의 사상이나 공산주의 사상을 포기하지 않고 대한민국감옥에서 장기간 생활한 자생적 게릴라, 조선인민군 포로와 남파 간첩을 지칭하는 말이다. 또 다른 명칭으로는 ‘미전향 장기수’(未轉向 長期囚)가 있는데 이는 '아직 전향하지 않은 장기수'라는 의미로 비전향 장기수를 곧 전향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전향을 강요하거나 유인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어서 현재는 ‘비전향 장기수’라는 명칭이 주로 사용된다. 비전향 장기수를 다룬 매체로 영화 《송환》과 《선택》이 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1973년부터 법무부와 중앙정보부가 조직적으로 비전향 장기수에 대한 옥중 전향공작을 펼쳤으며 이 과정에서 폭력전과자를 활용한 상습폭력으로 장기수들이 사망했다"고 2002년 8월 29일 발표했다. 진상규명위원회는 1955년 국가보안법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대전교도소에 복역중이던 최석기 박융서 손윤규 사건 등 비전향 장기수 전향공작과 옥중사망 의문사 사건 중간발표에서 법무부와 중정은 교도소 내에 좌익수전향공작전담반을 설치하고 비전향 장기수에 대한 조직적 전향공작과 고문,폭력을 행사해 이 과정에서 이들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특히 최석기는 "격리사동에서 입에 수건이 물리고 바닥에 뉘어진 상태에서 폭력전과자 조모씨의 극심한 폭행으로 숨졌다"는 사실을 공개하면서 “당시 교도소 보안과장은 최씨의 유족에게 ‘잠만 자는 병에 걸려 사망했다’고 말하는 등 사실을 은폐했으며 최씨를 폭행했던 조씨는 전향공작의 공적을 인정받아 교도소에서 결혼하고 만기보다 4년 일찍 출소하는 등의 특혜를 받았다”고 말했다.[1]

역사[편집]

2000년 송환된 63명 명단[편집]

석방된 장기수[편집]

(체포된 연월일 ~ 석방된 연월일)

기타[편집]

남파간첩이라는 이유로 29년동안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서옥력는 출소뒤 북한에 있는 아내와 두 아들에게 가려했으나 정부가 전향수라며 북송을 제한했다. 이에 대해 서옥력은 "박정희 정권 말기 정보기관이 깡패들을 동원해 준서약서에 직인을 찍게 했다"며 억울해 했다.

전남 신안군 안좌면에서 5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고려대 경제학과에 수학 중이던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북한 인민군에 편입돼 참전했다가 정전협정으로 그해 11월 제대했다. 이후 북한 내 강원도의 중학교에서 교원생활을 하며 여성 교원과 결혼하고 19955년 12월부터 김일성종합대학교 정치경제학과에 수학했다. 졸업 후 평양의 간부양성소에서 일했다.그러다 1961년 8월 남쪽의 고향으로 홀로 내려왔다가 월북할 때 동생들을 포섭하고 정보 수집 등 첩보 활동을 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구속돼 1심에서 사형, 2심에서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1990년까지 29년 동안 복역했다.


이후 노무현 정부 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강압과 고문에 의한 전향은 무효’라는 판단을 내리고 2017년 7월 25일‘장기구금양심수 서옥렬 선생 송환추진위원회’를 결성됐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국민일보 국제>유럽_EU | 국제>미국_북미 | 국제>아시아] 2002-08-30
  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