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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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보(1917년 10월 10일[1] ~ 2015년 3월)는 대한민국비전향 장기수이다. 윤희보는 빈농이 아닌 너더리(판교) 대지주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단지 성장과정에서 가계가 기울었다. 6.25 전 박헌영 밑에서 남로당 영등포 지부장을지냈고 여동생들은 경기여고,숙명여전등을 나온 엘리트 였고 전쟁중 이들을이끌고 월북 여동생은 군 최고위직을 지냈다. 아이젠하워 살해 명령 을 띤 간첩으로 남파된 이후 체포되었고 출옥후 결혼(북에 결혼한부인이 있었슴)한 아내와 사이에 난 딸은 건국대(?)에서 학생회간부로 활동하며 가족 모두가 철저하게 김일성사상에 젖어 있었다. 친척 일가를 찾아다니며 서울대 시위 때 정부에서 헬기를 띄워 휘발유를 공중살포 하였다는 둥 말도 안되는 뻔한 거짓말로 선동을 일삼았고 비전향장기수로 입북때까지 철저하게 빨갱이었다.

생애[편집]

경기도 광주군의 빈농 가정 출신이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어린 나이부터 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리게 되었다.

군정기좌익 계열에 합류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택해 월북하였다. 한국 전쟁 중인 1952년에 공작원으로 남파[2] 되었다가 체포되었으며, 10년 동안 형기를 치르고 출감하여 새로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1974년에 다시 구금되었다. 이때 조선인민유격대 출신이었던 부인도 사회안전법에 의해 함께 구금되었기 때문에, 어린 딸은 친척 집에서 자라고 성도 이모부의 성을 물려받게 되었다.[3] 수감 중에 전향을 요구받으며 심하게 구타당하여 어깨가 빠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4]

1989년에 다시 출감하여 총 수감 기간은 약 25년이다. 부부가 모두 전향하지 않은 좌익수로서 출감 후 통일 운동에 함께 적극적으로 나섰고, 한총련 학생들과도 가까이 지냈다. 《해마중 가세》라는 저서를 내기도 했다.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에 의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되었다. 부인과 딸은 동행하지 못했다. 송환 후 북조선에 남겨둔 가족과 다시 만났고, 조국통일상을 수여받았다.

아내의 사망과 방남[편집]

그의 아내 박선애가 사망하자 장례위원회는 북에 있는 그의 남편 윤희보의 장례식 참석을 위한 방남 허가를 요청했다. [5]

참고자료[편집]

각주[편집]

  1. “비전향장기수 윤희보에게 90살 생일상”. 조선중앙통신. 2007년 10월 11일. 
  2. 김창희 (2006년 3월 8일). “정 추기경의 부친 '정원모'는 누구인가? - [현대사 발굴] 일제하 전형적인 행동가형의 투사”. 프레시안. 2008년 8월 19일에 확인함.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26) (도움말)
  3. 홍미용 (2003년 3월 2일). “만나고 헤어지고, 또다시 이별하고 : 노무현 대통령이 만나야 할 대통령 6 - 이산가족”. 오마이뉴스. 2008년 8월 19일에 확인함. 
  4. 서승; 김경자 (옮긴이) (1999년 3월 1일). 《옥중 19년》. 역사비평사. 178쪽쪽. ISBN 89-7696-240-0. 
  5. "장례식에 '북한 남편' 참석할 수 있게 해달라",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