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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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만 박희광
相萬 朴喜光
기본 정보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출생 1901년 2월 15일
대한제국 대한제국 경상북도 선산군 상고면 봉곡리
(現 경상북도 구미시 봉곡동)
사망 1970년 1월 22일 (68세)
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 보훈병원
학력 중화민국 중화민국 만저우 지방 펑톈 성 펑톈 남성자중학교 졸업(1919년)
대한민국 대한민국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1기(1956년)
직업 독립운동가, 정치가, 기업가
종교 무종교천주교(세례명: 시메온)
본관 밀양(密陽)
부모 아버지 박윤하(항일 의병장)
배우자 유문기
자녀 박근용(장남)
박정용(차남)
박정희(딸)
박선용(삼남)
박수용(사남)
경력 前 의열단 참모실 실장
前 통의부 판의단 단장
前 참의부 참모실 실장
국민의 당 상임고문
국민의 당 전임고문
1963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

의원 선수 無선 의원
정당 무소속
웹사이트 공식 사이트

박희광[1] (朴喜光, 1901년 2월 15일 ~ 1970년 1월 22일)은 일제 강점기 시절, 만주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예명(혹은 아호)은 상만(相萬)이다.

이력[편집]

그는 무장 독립운동단체 의열단(義烈團),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계열 판의단(判義團)에서 활동하였으며, 임시정부와 함께 조직된 참의부(參議府)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주요 활동으로는 만주에 있는 펑톈(奉天, 봉천, 지금의 선양) 총영사관 습격, 친일파 및 고관(高官) 암살, 임시정부와 항일독립운동단체에 군자금 및 무기 조달, 만철연선 일본 군경 기습작전 등에 참가하였다.

생애[편집]

출생과 성장[편집]

출생과 유년기(1901~1913)[편집]

박희광의 예명은 상만(相萬)으로 경상북도 선산에서 (현,경상북도 구미시 봉곡동)에서 태어났으며, 밀양박씨 가문으로 경주 부윤 수홍공(慶州府尹 守弘公)의 10세 손이며, 항일 의병운동가인 윤하공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제가 강제로 국권을 침탈한 1910년 한일병탄(倂呑) 이후 부친인 박윤하[2] 의 항일 의병 활동으로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자 1912년4월 부친을 따라 만주 봉천성 청원현으로 건너갔다.

청소년기(1913~1919)[편집]

만주로 건너간 청소년기 시절, 봉천성(奉天省)에 있는 남성자학교를 졸업하고, 조선독립에 기여하겠다는 뜻을 품게 된다.

18세 되던 해인 1919년 박희광은 만주 지린성[吉林省]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 의열단에 자진 입대하여 활동하게 된다. [3]

구미 금오산 박희광선생 동상

항일 의거와 비밀 암살 대원으로의 활약[편집]

일본군이 파악한 박희광(박상만)의 인적사항

의열단 통의부 판의단 활동 (1919~1923)[편집]

박희광은 대한통의부에서 군사훈련을 마쳤다고 보도 되었으나 훗날, 구속후 공판 과정을 보도한 동아일보 大正14年9月1日(1925년 9월 1일)자 기사내용와 행적을 고려하면 1919년에 결성된 의열단(영화 암살의 배경이된 조직)에서 훈련을 마친 것으로 보여진다. 의열단은 공약 10조, 5파괴, 7가살의 행동 목표가 있었다.

의열단(義烈團)과 통의부에 가담하여 만철연선(滿鐵沿線)과 한만 국경 지대에 잠복하여 중국, 만주, 러시아 등지의 10여개 군사단체가 벌인 관동군(關東軍) 진로 봉쇄작전 등에 참여했다.

당시 만주는 국외로 망명한 독립투사들이 주로 활동하는 무대였으며, 통의부 계열 판의단에서는 하얼빈 의거에 참가한 우덕순과 함께 활동했었다. 박희광은 상만(相萬)이라는 예명을 사용하였는데 이당시 의열단, 통의부 등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신분을 감추기위해 예명을 사용하였다.

1922년 8월에는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가 확대 조직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가담하여 오동진, 의용군 제 5중대장 김명봉과 함께 활동하였다. 대한통군부는 1922년 대한독립단·서로군정서·보합단·광한단·광복군총영 등 여러 독립군 단체 대표들이 남만한족통일회를 통해 조직된 통합 조직체이다. 이 대한통군부가 몇 개월 되지 않아 더욱 확대된 조직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이다.

통의부, 참의부 활동(1923~1924)[편집]

박희광은 통의부 3인조 암살단으로 활동하던 중 1923년 1월 홍경현 홍묘자(紅廟子) 방면에서 제5중대장 김명봉(金鳴鳳)과 부대장 조태현(趙泰賢)의 피살과 제5중대의 무기가 타 중대에 의하여 강제로 압수되는 불상사를 계기로

통의부에서 참의부로 활동하게 된다.

참의부의 출범 배경에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의 이념문제로 통의부와 의군부(義軍府)로 분열되었을 때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던 통의부 의용군내 제1,2,3,5 중대가 1923년 8월 결성한 단체로 정식 명칭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이다.

1924년 6월1일에 윤영기 동지의 안내로 무순방면의 고등계 첩자이며 여순조선인회(旅順朝鮮人會)서기인 악질 친일파 정갑주(鄭甲周)와 가족을 현장에서 사살하며 사형 선고문을 붙였다.

이 사건으로 다음날 뤼순(여순:旅順)시내가 발칵 뒤집히게 되며, 이로인해 추후 재판과정에서 사형 선고문을 누가 붙였는가에 대해 논란 거리가 되었었다.

"정갑주, 조국을 배신한 첩자! 우리는 조선독립을 위해 싸우는 투사다. 너를 조국의 이름으로 처단하겠다" 1924년 6월 1일 여순 암살현장 사형선고문

대련(大連)에서 이등박문(일본식이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수양녀이자 '흑치마'라는 별명으로 독립운동가들의 체포를 위해 활동한 스파이 배정자(裵貞子, 일본식 이름: 田山貞子(다야마 사다코))를 암살 시도 하였으나 실패했으며, 대표적인 친일단체인 일진회 회장 이용구도 암살 시도 하였으나, 부상을 입힌채 암살에는 실패하였다. 이런 위압감으로 배정자는 은퇴하게 된다.

1924년 6월 7일는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은 중대장 김명봉(金鳴鳳)으로 부터 정갑주, 최정규와 기타 친일파들을 죽이라고 명을 받고 봉천성에 나왔다고 한다. 봉천(奉天: 현 심양(瀋陽))에서 이용구(李容九)와 함께 열성 일진회(一進會) 회원인 친일파 최정규(崔晶奎) (일본식 이름: 山本正夫, 1888년 음력 8월 25일 ~ 1940년 양력 8월 21일, 일제 강점기의 직업적 친일파로 만주 지역에서 밀정 단체를 운영했으며, 국권침탈에 앞장 섰던 인물로 다른 이름으로 최창규(崔昌圭)가 있다)를 총살하려 하였으나 최정규가 미리 피신하여 실패하였다.

당시 일가족이 이불 속에 숨어 있었던 상황으로 여러 발의 총격으로 그의 장모 이씨는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처 허균(허윤, 원식(元植)이라는 자료도 있음)은 총상 몇 일 뒤 사망하였다. 이때 최정규는 2층 책상 밑에 숨어서 화를 피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거사후 김광추가 중국여관에서 작성한 사형 선고문을 대문에 붙였다.

1924년 6월 7일 만주에 있는 펑톈(奉天, 봉천) 일본총영사관(總領事館)을 습격,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불발로 실패했다. [4]

이 날 저녁 중국인이 운영하는 대남관동흥려관이라는 여관에 자리를 잡은뒤, 일본 고관들이 출입하는 고급 요정인 금정관(金井館)에 침입, 군자금 삼백엔(약 4천만원)의 거금을 탈취하는 과정에서 중국,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김광추는 현장에서 총에 맞아 순국하였고, 김병현과 함께 체포되었다. [5]

일본 경찰은 그날 현장에서 증거물로 권총 세자루, 실탄 106발, 폭탄 한 개, 이들이 작성한 사형 선고문 여러장을 압수했으며, 체포된 박희광과 김병현은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조직과 조직원 및 그간 활동상 등의 비밀을 지켰냈다고 전해진다.[5]

이때 거사의 공범으로 조직원 윤영기조선일보 봉천성 기자인 신명구가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고 한다.

“모든 책임은 우리 세 사람에게 있소. 오직 조국을 위한 일념으로 그 일을 했을 뿐 배후는 없소.”

박희광과 이들은 일본 고관과 친일파 5명을 살해한 혐의로 일본 군경에 수배중이던 상황이었다

1924년 동아일보 공판 과정에서 박희광, 김병현, 김병추는 만주 지린성에서 민족주의 노선(路線)을 지향하는 항일비밀결사(抗日秘密結社) 단체인 의열단, 통의부 판의단과 지속적으로 활동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1924년 7월26일(토)자 독립신문은 ‘삼장사(三壯士)의 용감(勇敢)'이라는 제목하의 기사에서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김광추(金光秋) 김병현(金炳賢) 박상만(朴相萬`박희광의 예명) 삼장사(三壯士)가 백주(白晝)에 용감(勇敢)히 봉천신시가정정(奉天新市街錠町), 즉 왜경찰서접근(倭警察署接近)에 은복(隱伏)한 전 보민회 괴수(保民會魁首) 최정규(崔晶圭)의 가족을 토벌(討伐)했다.’

박희광은 임시정부로 부터 만철연선(萬鐵沿線)의 친일파를 토벌 하라는 특명을 받고, 김광추(金光秋), 김병현(金炳賢)등과 3인조 암살 특공대를 결성하여 이들의 숙청작업을 하였다.[6]

뤼순감옥 수감생활 (1924~1943)[편집]

박희광은 1924년 대련지방법원에서 1심에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1927년 뤼순(旅順)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이 확정되어 뤼순감옥에서 신채호와 함께 옥고를 치르다가,[7] 신채호는 1936년2월21일 감옥에서 순국하고, 박희광은 일본천황(裕仁) 즉위와 황태자 출생 때 두 차례 감형되어 18년 간의 형기를 마치고 1943년 3월 출옥하였다.[8]

김구 선생과의 만남과 이별 (1943~1949)[편집]

김구 선생의 죽음으로 업적 묻힐 뻔[편집]

1943년 출옥 후, 대련에서 동지 이성갑, 유하도와 함께 중국 충칭으로 옮겨간 임시정부에 합류하기로 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주목과 감시를 피해 다니다 임시정부에 합류하지 못한채 1945년 만주에서 광복을 맞았다.

박희광은 경교장(별칭: 죽첨장(竹添莊))으로 백범(白凡) 김구(金九)를 찾아가 그간의 경과를 보고했다. 김구는 그의 손을 잡은채 한 동안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 하며, 대업을 위해 힘 써 달라고 한 뒤 비서를 통해 위로금을 전달하고 정부 수립에 힘을 모아달라고 했다. 박희광은 한동안 김구 선생과 그 측근들의 경호를 맡기도 하였다.

당시 독립운동은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들과 민족주의계 독립운동가, 무정부주의자 등으로 분열된 이념 및 파벌 대립으로 인해 내부적 갈등이 많았다. 좌•우파의 갈등이 고조된 1943년에는 민혁당이 김구(金九) 암살을 모의하였으나 미수로 끝났다

말년기 (1949~1970)[편집]

1949년 6월, 김구는 자택인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갑작스런 총격을 당하면서 박희광을 비롯하여 김구의 일부 측근들은 흩어지거나 정치적인 희생양이 된다. 이당시는 너도나도 애국자이던 시절로, 박희광의 독립운동 업적을 증명할 방법이 쉽지 않았다.

박희광은 요양과 안정을 위해 44세의 만혼으로 문화 유씨(文化柳氏)를 맞아 고향으로 이주후 가정을 꾸렸으며, 1968년 3월 1일까지 독립운동활동 업적에 대한 빛을 보지 못한채 형무소에서 배운 기술로 양복점을 경영하게 된다.

이 시기 김구 선생에게 받은 위로금으로 대구시 칠성동(대구역 주변)에 정착하였으며, 짐수레(손수레) 10여 대와 설비를 구입하여 고아들에게 국화빵(풀빵)과 아이스크림 등을 만들어 생활 할 수 있게끔 자립을 지원 하였으나, 옥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쉬는 날이 많아 지면서 경제적으로도 힘든 생활을 겪어야 했다. 독립운동 업적 증명의 경우, 가족이 없거나, 비밀 작전, 소규모 전투에 참여한 경우 전투로 인한 총상, 동료의 증언, 당시 기사에 이름이 언급 되었거나 다른 개관적인 증거 자료가 남아 있지 않으면, 증명할 방법이 쉽지 않아 업적이 묻히는 경우가 많았다.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경우, 옥살이로 인해 오히려 범죄자로 오해받기도 하여 경제적 자립이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반면, 친일파와 그 후손들은 축척된 부와 인적 네트워크 등을 통해 오히려 기득권층에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9][10]

박희광의 업적은 정부와 학계, 후손들의 노력으로 재판 기록이 게재된 동아일보, 독립신문 등의 신문기사 자료들이 모아지면서 그의 행적이 증명 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 3월1일 삼일절 행사 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70년1월22일 71세의 일기로 서울 보훈병원에서 타계 하였으며,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정부에서는 매년 독립운동을 한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을 찾거나 이들의 업적을 제보받고 있다.

상훈[편집]

추모[편집]

박정희는 박희광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애국지사 박희광선생지상(愛國志士朴喜光先生之像)"이라는 친필휘호와 지원금을 내렸으며, 1983년 구미문화원 추진위원회와 구미시, 각계 인사들의 힘으로 경북 구미시 금오산도립공원에 백운교 옆 자리에 동상이 세워졌으며, 대구광역시 두류공원내에 조각 공원에 흉상이 세워졌다.[11]

국립현충원 박희광선생의 묘소 (2)

뤼순감옥에 수감된 독립운동가[편집]

[12]

가족 관계[편집]

  • 아버지 : 박윤하, 의병운동가, 일제가 작성한‘독립운동 자금모집사건’에 대한 첩보 자료에 김동삼과 함께 관련자로 거론 됨[5]
  • 부인  : 유문기
    • 아들 : 박근용(광복회 대구수성구지회장), 박정용(박희광선생 기념사업회 사무처장)[13], 박선용, 박수용
    • 딸  : 박정희
      • 손자 : 박정일, 박정훈, 박한얼, 박준호, 박규태, 박상언
      • 손녀 : 박소라
대구두류공원 인물동산에 있는 박희광 흉상

독립운동가, 그 후대의 비극[편집]

사회의 무관심과 가난의 대물림 [14][편집]

일제치하 독립운동을 한 독립운동가와 그들의 후손은 사회의 관심부족과 교육등의 부족으로 아직도 가난이 대물림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을 역임(1925~26)한 이상룡선생의 집안은 경북 안동에 살던 당대 최고의 명문가 집안으로 3대에 걸쳐 독립운동을 하여, 건국훈장을 포상한 인물이 9명이 되나, 정작 그 후손들은 보육원에서 중학교를 다녀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2006년 6월말 국가 보훈처에서 발표한 조사자료에 따르면 총 5,834명의 독립 유공자 유족 중 학력이 중졸 이하인 유족이 3,259명으로 전체의 55.9%에 달하며, 직업이 없는 유족이 3,784명(64.9%)인 반면, 고정적인 수입이 있는 봉급 생활자는 804명(13.8%)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관련 항목[편집]

박희광을 연기한 배우들[편집]

연극 영화[편집]

참고 자료[편집]

  •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국가보훈처, 1997) 307쪽
  •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김후경, 광복출판사, 1983) 973쪽
  • 독립운동사자료집 1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8) 761쪽
  • 동아일보(東亞日報) 1924년 9월 1일자 공판
  • 독립신문(獨立新聞) 1924년 7월26일자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55면
  • 동아일보(東亞日報) 1926년 9월 1일자, 9월2일자, 9월8일자
  • 개정판 서박사 육군 여군부사관 한방에 끝내기 2017(서영학, 2017) 127쪽
  • 중앙일보 1968년 2월20일자 광복 반평생, 건국훈장받는 103명의 얼굴 종합 6면

각주[편집]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