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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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태(金道泰, 1891년 9월 11일 ~ 1956년 12월 26일)는 한국의 교육인이다. 일제 강점기 초기의 독립운동 공적과 말기의 친일 논설 기고 행적이 공존한다. 본관은 경주.

생애[편집]

평안북도 정주군 출생이다. 정주의 오산학교를 거친 뒤 일본에 유학하여 정칙영어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지리와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가 되어 1912년 만주신흥무관학교재령군기독교 계열 학교인 명신학교에서 근무했다.

1919년 3·1 운동에는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으로 참가했다. 김도태는 기획 단계에서 기독교 측과의 교섭을 원하는 최남선과 오산학교 설립자인 이승훈 사이의 연락책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지만 이듬해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1921년휘문고등보통학교 교사가 되었다. 일제 당국에 따르면 배일사상을 갖고 있고 이를 선전할 우려가 있는 자로 기록되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 말기의 전쟁 시국에서는 친일 논설을 다수 발표해 사상적으로 전향했다.

1945년 경성여자상업학교(現 서울여상)교장을 비롯해 대한민국 건국 후 문영여자중학교와 휘문중학교 교장을 지냈고, 조선지리학회(現대한지리학회) 회장도 역임했다.

1949년 공군사관학교 교수가 되었다가 얼마 후 다시 경성여상 교장에 재임용되었다.

1956년 향년 66세로 사망했다.

사후[편집]

관련 항목[편집]

참고자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