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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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文廟)는 문선왕묘(文宣王廟)의 약자로 공자묘(孔子廟)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묘(廟, 사당 묘)는 무덤(墓, 무덤 묘)이 아니라 위패를 모시고 제사드리는 곳이란 뜻이며, 특히 공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가리켜 문묘(文廟)라고 한다. 동아시아 전반에 분포해 있으며 공자를 중심으로 제자들의 위패까지 함께 모신다. 다른 말로 선사묘(先師廟)ㆍ성묘(聖廟)ㆍ공자묘(孔子廟) 등으로 부른다.

연혁[편집]

우리나라 문묘의 설립 과정 및 보존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717년 (신라 성덕왕 16년)에 당나라 조정에 들어갔던 왕자 김수충(金守忠)이 귀국하여 바친 공자10철ㆍ72제자의 화상을 국학에 안치시켰다.
  • 983년 (고려 성종 2년)에 박사 임노성(任老成)이 송(宋)에서 돌아와 바친 <태묘당도(太廟堂圖)>ㆍ<사직당도(社稷堂圖)>와 그 기록, <문성왕묘도(文聖王廟圖)>ㆍ<제기도(祭器圖)>ㆍ<72현찬기(七二賢贊記)> 등 도서를 국자감에 안치했다.
  • 1021년 (고려 현종 12년) 최치원(崔致遠)을 종사(從祀)하였다.
  • 1022년 (고려 현종 13년) 설총(薛聰)을 종사(從祀)하였다.
  • 1303년 (고려 충렬왕 5년) 안유가 문묘 황폐를 개탄해 국학 대성전을 신축하고 박사 김문정(金文鼎)을 원나라 보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및 제기ㆍ악기ㆍ경서 등을 가져와 비치했다.
  • 1319년 (고려 충숙왕 6년) 안유(安珦/安裕)를 종사(從祀) 하였다.
  • 1398년 (조선 태조 7년) 한양에 문묘가 낙성됐으며, 연산군 때 공자의 위패 이하 모두 태평관으로 옮겨져 문묘가 한동안 기능을 상실했다가 중종반정 후 복구됐다. 이때부터 고려의 정몽주 등 많은 선유(先儒)를 합사해, 공자ㆍ사성ㆍ공문십철ㆍ송조 6현ㆍ공자의 70제자를 포함한 당ㆍ송등 중국의 역대 유현 94인과 동국 18현등 한중 양국의 133위를 봉안하였다.[1][2][3]
  • 1949년 광복 후 전국 유림 대회를 개최하여 공자를 비롯한 안자ㆍ증자ㆍ자사ㆍ맹자 4대 성인과 정호ㆍ주희 송조 2현을 제외한, 공문십철과 동ㆍ서 양무에 중국 유현 94위를 매안하고, 동ㆍ서 양무에 봉안하고 있던 동방 18현을 대성전에 승봉키로 결의하고 전국 향교에도 시행하도록 하였으나, 이 개혁안에 대해 보수 유림들의 반발로 일제히 시행되지 못하였다.
  • 1961년 2월 23일 전국 유림대회를 다시 개최하여 매안한 공문십철과 송조 4현을 복위키로 결의하여, 현재 성균관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안자증자자사맹자 4대 성인과 공자의 뛰어난 제자들인 공문십철 및 송조 6현(주돈이ㆍ정호ㆍ정이ㆍ소옹ㆍ장재ㆍ주희)과 우리나라 동방 18현의 위패를 봉향하고 있다.

고려의 문묘[편집]

신라조 설총최치원과 고려조 안유 3인의 신위를 고려시대 배향하였다

조선의 문묘[편집]

고려조 정몽주, 조선조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김인후이이성혼김장생조헌김집송시열송준길박세채등 15인의 신위를 조선시대 배향하였다.[4]

배향 및 향사[편집]

  • 조선조 문묘 관장은 성균관에서 하였다. 성균관의 이런 건물들을 묘우(廟宇)라고 한다. 묘우의 주요 건물은 대성전으로서 좌우에 동무·서무라는 부속 행랑을 두어 예배 대상자를 봉안한다. 그리고 향사때의 헌관과 집사들의 재계소이자 향축을 봉안하기 위한 곳으로 향관청이 있다.
  • 문묘 배향의 서차는 먼저 〈대성지성 문선왕〉(大成至聖 文宣王)을 정위(正位)로 남쪽을 바라보게 하고, 그 앞에 안자증자자사맹자의 4대 성위를 동서로 나누어 배향하였다. 공문 10철과 송조 6현과 우리나라 동방 18현을 종향 하였다.
  • 향사 일자는 중춘(仲春)과 중추(仲秋)으로 나누어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을 석전일(釋奠日)로 정하였으며, 그 밖에 서원에서 춘추 음력 3월과 9월 상정일(上丁日)이나 중정일(中丁日)로 정하여 성균관향교의 석전일과 겹치지 않도록 조절하였다.
  • 그리고 향사일이 국기(國忌)와 상치되면 그 다음의 정일(丁日)로 잡았고, 국상(國喪)이 나서 인산(因山)이 마쳐지지 않으면 신위(神位)에 고유(告由)하고 향사를 행하지 않았다. 또한 삭망 분향일(朔望 焚香日)이라 하여 매월 초하룻날과 보름날에 성균관의 대사성(大司成)ㆍ관관(館官)ㆍ유생들이 문묘에 나아가 분향 의식을 올리는 행사일이 있었다. 이 밖에 공자(孔子) 탄강일(誕降日)인 음력 8월 27일에 올리는 향사는 가장 컸으며, 왕이나 세자가 직접 향사에 참례하는 친림석전(親臨釋奠)·친림작헌·왕세자석전 등이 있고 고유제(告由祭)·위안제(慰安祭)가 있다.
  • 문묘는 성균관 대사성을 헌관으로 초헌관(初獻官])ㆍ아헌관(亞獻官)ㆍ종헌관(終獻官)과 축(祝)ㆍ찬자(贊者)ㆍ알자(謁者)ㆍ찬인(贊引)ㆍ사존(司尊)ㆍ봉향(奉香)ㆍ봉작(奉爵)ㆍ전작(奠爵) 등의 여러 집사들이 선임되어 향사 3일 전에 재계(齋戒)에 들어간다. 제복을 착용하고 제물을 차린 뒤 전폐례(奠幣禮)ㆍ초헌례(初獻禮)ㆍ아헌례(亞獻禮)ㆍ종헌례(終獻禮)ㆍ음복례(飮福禮) 및 망예례(望瘞禮)의 단계로 진행한다. 서원으로 내려오면 더욱 간략하지만 대동소이하다. 의식이 끝나면 음희례(飮禧禮)를 하고 강론(講論)함이 보통이다.
  • 문묘 배향 인물을 정하는 일을 문묘 종사(從祀))라 하는데 학통ㆍ당파ㆍ정치 정세 등에 따라 당쟁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점향(點享)되거나 복향(復享) 되기도 하였으며, 위차(位次)가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중종 12년에 정몽주 종사 문제, 광해군인조 년간 5현(五賢. 김굉필ㆍ정여창ㆍ조광조ㆍ이언적ㆍ이황) 종사 문제, 숙종 때의 이이성혼의 출학(黜學) 문제, 영조 때의 송시열송준길박세채 등의 종사 문제 등이 그랬다.
  • 성리학 외에 노장 사상이나 양명학 등 이단 논쟁을 일으킬 소지가 있는 인물은 철저히 배격됐다. 서경덕이 그 대표적 예였다.[5]

문묘 배향 현인(賢人)[편집]

문묘 배향 동방 18현 (東方 十八賢)은 다음과 같다.

의의와 평가[편집]

문묘는 신라ㆍ고려ㆍ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나라에서 공인한 최고의 정신적 지주에 오른 성현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따라서 문묘 배향은 유학자로서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이자 이상이며, 최고의 명예로운 자리이다. 정공신(正功臣)이나 종묘 배향(宗廟 配享) 공신들 보다 더 높은 명예를 누리며, 만인의 칭송을 받는 가장 존귀한 위치에 있다. 그래서 옛말에 "정승(政丞) 10명이 죽은 대제학(大提學) 1명에 미치지 못하고, 대제학(大提學) 10명이 문묘 배향(文廟 配享) 현인(賢人) 1명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그리하여 문묘 배향 인물을 배출한 각 가문은 어느 권문세가를 뛰어넘는 국반(國班)으로서 대대손손 더 없는 영예로 알았다.

기타 사항[편집]

문묘가 있었던 교육기관은 다음과 같다.

세계의 공자묘[편집]

중국 대륙[편집]

타이완[편집]

한국[편집]

일본[편집]

타이[편집]

  • 송크라나칼린 대학 공자 학원
  • 마에 파 루앙 대학 공자 학원

함께 보기[편집]

각주[편집]

  1. 4성 : 안자증자자사맹자를 말한다.
  2. 공문 10철 : 안연(顔淵), 민자건(閔子騫), 염백우(冉伯牛), 중궁(仲弓), 재아(宰我), 자공(子貢), 염유(冉有), 계로(季路), 자유(子游), 자하(子夏)를 말한다.
  3. 송조 6현 : 주돈이(周惇頤), 정호(程顥), 정이(程頤), 소옹(邵雍), 장재(張載), 주희(朱熹)를 말한다.
  4. 이들 종사된 명현들은 정치 정세에 따라서 점향(點享)되거나 복향(復享) 되기도 하였는데 반드시 중국의 예와 일치하지는 않았다.
  5. '조선 유학에 오늘을 묻다; 담일청허(湛一淸虛)의 기(氣)로 조선에 학자가 있음을 알려라!' 주간조선 2013년 6월 10일 백민정 성균관대 교수 칼럼 게재 중 -'광해군 6년(1614년) 문묘종사 논의에서도 이항복(李恒福)의 청원이 있었지만, 화담은 기수(氣數)에 치우쳐 이(理)를 몰랐다고 본 전대 사림의 부정적 평가로 인해 제대로 논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화담집'중 연보)

참고 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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