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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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서현(巨黍縣)은 지금의 용인시 수지구와 기흥구 일대에 신라시대에 있던 옛 행정구역의 명칭으로 이후, 고구려 때 용인의 지명은 구성(駒城)이었고, 멸오라는 별칭이 있었다. 신라 경덕왕 때 전국 군현을 정비하면서 그 명칭을 거서로 바꾸고 한주(漢州)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구성은 본래 큰 성 또는 높은 성이란 뜻을 지니고 있는데, 거서도 크다는 뜻이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는 그 개칭 시기에 대해서 757년(경덕왕 16)이라고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1]
유래
[편집]거서현은 원래 백제의 멸오(滅烏)이다. 멸오는 말아로 읽히는데 현대어 마루(宗)과 어휘상 관련이 있다 여겨지고 크다는 의미이다. "거서"는 이의 한자표기이다. 고구려 이름인 구성(駒城)이라는 이름은 "말아"를 말(馬, 駒)로 훈차한 것이다.
멸오란 이름은 그 뜻 때문에 장수왕 대에 이 근방에서 고구려군이 백제군을 섬멸해 그 시신이 까마귀떼를 이룬 것 같다 하여 "滅烏"라 지었다는 설이 있지만 신빙성은 없다.[1]
연혁
[편집]- 백제의 영역으로 멸오현(滅烏縣)이었다.
개명하고 현의 치소를 구성에 두었다. 수원진관(水原鎭管) 소속으로 종 5품의 현령이 파견되었다.
- 조선 후기에 면리제에 의해 16면으로 구획되었다.
수여면 소학동(巢鶴洞)으로 치소가 옮겨졌다.
지금의 용인시와 비슷한 관할이 완성되었다. 군청도 수여면 김량장리로 옮겨졌다.
행정구역 (조선후기 이후기준, 위치는 현재의 행정구역명칭)
[편집]現 기흥구
-1914년이후 읍삼면, 1931년 이후 구성면-
- 읍내면(邑內面);옛 용구현의 치소,-구성동, 마북동
- 동변면(東邊面)-세기말의 어정동
- 서변면(西邊面)-보정동
-1914년이후 기흥면-
- 구흥면(駒興面)-구갈동, 신갈동
現 수지구
- 수진면(水眞面)-수지구 대부분 지역
現 처인구
- 수여면(水餘面)-구 용인읍, 현재 동지역중에 동부동을 제외한 전역. 동부동은 옛 양지군에 속함
現 이동읍(처인구)
- 상동촌면(上東村面)
- 하동촌면(下東村面)
- 현내면(縣內面)-방아리 북부, 창리, 아곡리(衙谷), 완장리
- 도촌면(道村面)-봉명리 동부, 북리, 봉무리
- 서촌면(西村面)-봉명리 서부, 통삼리
- 남촌면(南村面)-방아리 남부{=아리실(牙谷)}, 원암리, 전궁리, 진목리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가 나 《향토문화대전》, 거서현 Archived 2014년 2월 2일 - 웨이백 머신 (巨黍縣, 용인 법령과 제도) 내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