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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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규영 (토론 | 기여)님의 2014년 3월 15일 (토) 09:25 판
김우중
金宇中
출생1936년 12월 19일(1936-12-19)(87세)
경상북도 대구부
(현.대구광역시)
국적대한민국 대한민국
직업전.기업인
종교개신교[1]
배우자정희자
자녀김선정(현 교수,이수그룹회장 김상범의 아내

김선재(1990년 미국 유학도중 교통사고로 사망) 김선협(반트리 골프장소유)

김선용(영화 배급사 빅하우스 사장)

김우중(金宇中, 1936년 12월 19일 ~ )은 대한민국의 경제인이다. 전 대우그룹회장이다. 아버지는 박정희 대통령의 대구사범학교 시절 은사였다.

대구 출신이며, 경기중학교,경기 고등학교를 거쳐, 1960년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60년부터 1966년까지 한성실업에 근무했다가, 1967년 서울 중구 충무로에서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자본금은 500만원이었지만, 동남아시아, 미국 시장에서 성공해, 1970년대에 대우건설, 대우증권, 대우전자, 대우조선 등을 창설, 신흥 재벌이 되었다.1974년 대우그룹이 1억불의 수출탑 달성에 성공하였다. 1981년, (주)대우를 창립하고,스스로 회장에 올랐다. 1983년 대우는 새한 자동차를 인수하고,재계 4위에 올랐다.(자산기준)1989년에 펴낸 자서전인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1992년 제 14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출마하려 했으나 김영삼의 협박으로 불발되었다. 1993년 대우그룹은 세계경영을 선포하고, 매출 2000억불의 대우제국을 설립하려 했다. 또한 1987년부터 1993년까지 대한축구협회의 회장 이었다. 그러나 1998년IMF 구제금융사건으로 한국경제가 큰 타격을 받았고, 그로 인한 여파로 부채비율이 400%이상이었던 대우그룹은 쌍용을 인수하는등 확장정책을 이어나가나,일본 노무라 증권이 1998년 10월 25일에 발표한 '대우에 비상벨이 울린다'는 보고서 한장으로 사실상 그룹이 위기를 맞는다.이후 계열사를 41개에서 4개업종 10개 회사로 구조조정 단행과 삼성과의 빅딜도 추진하나 둘다 실패했다. 1999년 8월 26일, 이미 구조조정으로 회사 41개중 16개가 매각되었고 남은 25개 회사중 12개가 워크아웃을 신청하였다. 당시 부채는 500억 달러였다. 당시 대우그룹은 금융부문을 중점으로두고 사업확장을 하여 내부적으로 부채가 많았다.사실상의 그룹 해체였다. 1999년 11월 1일, 김우중은 13명의 대우그룹 사장단들과 함께 경영포기및 회장단 사퇴를 하였다.검찰청에서의 수사를 피하기 위해 출국한 후 도피생활을 하였으며, 중국 등지에서 호화롭게 생활을 했다는 얘기와, 반대로 유럽 등지의 3류 호텔에서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며 어렵게 생활했다는 얘기가 있다. 현재 대우그룹은 당시김대중정부의 정치적으로 탄압했다는설과 단순한 구조조정 실패라는 의혹들이 난무하다. 5년 8개월 간의 해외도피 생활을 지속하다가, 2005년 6월 14일 대한민국에 입국하여 검찰의 조사를 받았으며, [1] 2006년 11월 3일 서울고등법원 항소심에서 분식회계 및 사기대출, 횡령 및 국외 재산도피 혐의로 징역 8년 6개월, 벌금 1천만원, 추징금 17조9천253억원의 형을 구형받았고, 항소를 포기하여 형이 확정되었다. 2007년 12월 31일 대통령특별사면으로 사면되었다. 2013년 기준으로 전체 추징금의 0.5%정도인 약 887억원을 납부하였다. 2013년, 김우중 법에대해 논란이 일고있고, 여전히 17조 8000여억에 달하는 추징금을 미납하였다. 최근 베트남에서 박근혜정부의 도움을받아 후진양성 사업을 하고있다.

주석

전임
(창업)
대우그룹 회장
1982년 1월 ~ 1998년
후임
(폐지)
(주)대우 대표이사 회장
1998년 3월 ~ 1999년 11월
대우자동차(주) 대표이사 회장
1998년 ~ 1999년 11월
대우중공업(주) 대표이사 회장
1998년 3월 ~ 1999년 11월
전임
최종현 (SK 회장)
제25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1998년 ~ 1999년
후임
김각중 (경방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