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만 (19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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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만(1924년 11월 15일 ~ )은 대한민국비전향 장기수이다.

생애

전라남도 구례군 출생이다. 아버지가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에서 지주 가문의 머슴으로 일하여 어릴 때부터 노동하면서 고생스럽게 자랐다.[1] 일본 후쿠오카 현의 탄광에서 소년 광부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군정기좌익 활동에 뛰어들어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하였고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때는 14연대 하사관으로 복무 중이었다. 1948년에 반란이 일어나자 참여하였고 조선인민유격대에 입대하여 게릴라 활동을 벌였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지하였다. 고향 구례에서 인민의용군 병사를 모집하는 활동을 하였고 조선인민군이 후퇴한 뒤에는 1950년 9월에 지리산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벌였다.

1952년 겨울에 유격대 활동 중 체포되었다. 이때 동상으로 발가락을 여러 개 잃어서 혼자 서 있기 힘든 불구가 되었다. 김영만은 처음 체포되었을 때 광주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되기도 했으나 전쟁포로 대우받지 못했고 신념을 꺾을 수 없다면서 전향을 거부하고 비전향 장기수가 되었다. 한 차례 형기를 마치고 1967년에 출옥했다가, 유신체제에서 새로 제정된 사회안전법으로 재수감되어 총 복역 기간은 약 30년이다.

출옥 후 2001년여순 14연대 반란사건을 다룬 영화 《애기섬》에 사건 관련자로서 출연하였다.[2]월간조선》과 한나라당이 이 영화 제작 과정에 군 부대가 지원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좌익 영화라고 비판하여 논란이 일었다. 이때 보수주의 세력 측은 김영만이 《애기섬》에 출연한 사실을 함께 문제 삼았다.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에 의거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되고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김영만은 대한민국에 부인과 딸을 비롯한 가족이 있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택했다. 수기 《경애하는 장군님 받드는 길에 여생을 바치리》 발표를 위시해 김정일 지지를 표명했다.

같이 보기

참고자료

  • 김동기 외 14인 (2003). 〈내 신념의 동지 공화국기발 (김영만)〉. 《신념과 의지의 강자들 - 비전향 장기수들의 수기 5》. 평양: 평양출판사. 

각주

  1. “김정일총비서 비전향장기수 김영만에게 생일 여든돐상”. 조선중앙통신. 2004년 11월 15일. 
  2. 조호진 (2001년 9월 19일). “월간조선의 영화 '사전검열' - "그런 식 악용할 줄 정말 몰랐다". 오마이뉴스. 2008년 9월 5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