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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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봉
姜文奉
육군 중장 시절의 강문봉
육군 중장 시절의 강문봉
별명 호(號)는 남헌(南軒)
출생지 일제 강점기 함경북도 부령군
사망지 미국 텍사스 주 댈러스
부모 강윤철(부), 김해란(모)
배우자 도재은
자녀 슬하 1남 3녀
친척 강태봉(아우), 강수봉(아우)
종교 불교
복무 대한민국 육군
복무기간 1945년 ~ 1957년
근무 육군 제2군사령부
최종계급 만주군 소위
대한민국 육군 중장
지휘 육군 제2군사령관
주요 참전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기타 이력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외래교수

강문봉(姜文奉, 1923년 10월 26일 ~ 1988년 2월 26일)은 대한민국군인, 외교관, 정치가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호는 남헌(南軒)이다. 함경북도 부령군 출생이며 어렸을 때 만주 지린 성 룽징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대한민국 국군 창군 주역의 한 사람이었다.

가족 관계

학력

생애

함경북도 부령 출생이며 만주지린 성 룽징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인 강윤철이 만주국에서 은행장을 지낸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1941년 3월 만주국 신경 제1중학교(5년제)를 졸업하고, 1942년 4월부터 신경군관학교에서 2년간의 교육을 받고 제5기로 수석 입학, 수석졸업하였다.(1944년) 이로서 박정희에게는 3기 후배가 된다. 그는 성적이 우수한 학생으로 뽑혀 일본육군사관학교에 편입할 수 있었으며, 일본육사를 제59기로 졸업하고(1945년 6월) 만주군 소위(견습사관)로 임관한 직후 일본군 23부대에서 복무하다가 태평양 전쟁이 종전되면서 해방을 맞았다.

종전 후 미군정 지역으로 들어와 군사영어학교를 마친 뒤(1946년 1월 15일) 육군 소위로 임관되어 대한민국 국군 창건에 참여하였다. 국방경비대 부관, 제1연대 부연대장, 조선경비대 총사령부 작전처장을 역임하고, 1949년 6월 이전부터[1] 한국 전쟁 발발 1주일 전까지 그는 육군본부 작전교육국장으로 있었다. 1948년경, 공군작전부장이던 장지량이 강문봉을 찾아와 비행장마다 경비병력 10명 무전기 자동차 각 1대와 무전병 운전병을 파견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강문봉은 이를 거절했다.[2] 작전교육국장 재직 시, 매일 적정(敵情)판단보고서를 읽었는데 이 보고서에 북한군의 병력이동상황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었고 병력집결이 완료되면 남침할 것이라는 분석자료도 있었다. 이러한 정보를 그의 상사(신성모 국방장관,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에게 보고했고 미극동군사령부에도 제보, 무력증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미국 측은 "공산군의 남침은 없다"고 단언하면서 한국군의 정보는 군사원조를 얻기 위한 것으로 경시하는 일이 빈번했다.[3] 강문봉은 육군 제1사단장, 육군 제2사단장, 육군 제1군단 부군단장을 역임했다. 휴전직전인 1953년 5월부터 강문봉 소장이 이끄는 3군단창설요원들은 북한강에서 펀치볼에 이르는 중동부전선을 담당한 관대리의 미 10군단 사령부에 들어가 군단 창설준비 및 소요의 교육을 받고 53년 10월 미10군단의 임무를 인계받았다.[4] 이 과정에서 미국 제10군단 부군단장을 맡았고, 임무 인수 후, 육군 제3군단장을 역임하고, 1954년에는 육군 제2군사령관까지 올랐다.

1974년경

그러나 강문봉은 김창룡 암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국방대학 학생이던 1956년[5], 사형 선고까지 받은 끝에 1957년에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김창룡 암살 당시 허태영 대령이 사형선고를 받자, 허태영 대령의 부인이 이 사건의 배후에 헌병사령관을 지낸 공국진 준장과 강문봉 중장을 지목하여 수사를 받았으며 재판끝에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4·19 혁명 성공으로 풀려난 뒤에 국회의원과 외교관을 지냈다. 최경록, 강문봉, 전규홍, 이철승, 양일동 및 전 주미 대사관 참사관 부인들은 1963년 3월 21일, 미국 대통령 관저 앞에서 "군대는 정치에 간섭하지 말라", "박정희군사독재타도", "한국인은 군부정치를 원치 않는다", "한국인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지지한다"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박정희의 군정연장제안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6] 1963년 ~ 1967년까지 제6대 국회의원 (민정당)을 지냈고, 1967년 9월 16일, 주스웨덴 대사에 임명되었다.[7]덴마크·노르웨이·아이슬란드·스위스교황청 대사도 지냈다. 1973년 ~ 1979년 : 제9대 국회의원 (유신정우회)을에 지명되었다. 제20차 유엔 총회 대한민국 대표도 지냈다. 기타, 민정당 당무위원이었다.

저서로는 '나는 왜 사형수가 되었나'가 있다.

같이 보기

참고자료

각주

  1. “嗚咽悲曲의 坩堝”. 경향신문. 1949년 6월 7일. 
  2. “군 어제와 오늘<75> 창군 비화(9) 미 전투기지원 외면 「날개 없는 공군」 창설”. 경향신문. 1994년 3월 31일. 
  3. “6.25스물세돌특집 1950년6월25일 새벽4시…당시 일선지휘관들의 증언”. 경향신문. 1973년 6월 22일. 
  4. 백선엽 (1989년 3월 2일). “군과 나(34) 마침내 전쟁은 끝나다”. 경향신문. 
  5. “軍裁의 起訴狀 全文 ①”. 경향신문. 1956년 12월 9일. 
  6. “백악관앞에서데모”. 경향신문. 1963년 3월 22일. 
  7. “12國大使任命의결”. 동아일보. 1967년 9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