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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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인(韓國華人)은 한국화교(韓國華僑)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서 생활하고 있는 화교 혹은 화인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한국에 유학이나 업무 파견 등으로 온 중국인이나 대만인과 다르다. 한국을 고향으로 두고 있으며 이들의 가족은 한국에 이민온 지 최소한 3세가 넘었다. 1970년에는 화인 인구가 12만명에 달했으나, 현재는 약 2만 4천명의 화인이 거주하고 있다. 한국화인의 대부분은 중화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고, 주로 부산, 인천, 서울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출신지는 대부분 중국 대륙 산둥 성이다.

역사[편집]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나라는 군대를 조선에 들여보냈고, 이때 청나라 상인들이 제물포에 들어와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1] 1884년에는 중국인의 거주를 위한 땅을 제공한다는 협약이 맺어졌다. 현재 북성동과 선린동 일대의 만5천여 평방미터가 이때 중국인에게 제공되었다. 한때 인천에 거주하는 중국인이 1만명에 달하였다. 이주초기에 이들은 이발사, 요리사, 재단사로 일하였으나, 근래에는 여행가이드가 가장 많고, 한약방, 무역업, 잡화상, 식재료상을 하고 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중화민국 정부는 전쟁 발발 초기부터 국공내전에서의 패배를 한국전쟁 파병으로 만회한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이 계획은 중공군 참전을 우려한 미국의 반대로 좌절됐지만 결국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하게 되면서 심리전 요원을 파견하는 형태로 전쟁에 개입했다. 대부분이 한국에 거주하던 화교학교 교원과 학생들 심리전 요원들은 중공군을 상대로 투항을 권유하는 일을 맡았다. [2]

인구[편집]

2002년 통계 한국 화인 인구
지역 화인 인구
서울 약 8000명
인천 약 3200명
부산, 대구, 대전, 전주 총 8800명

2011년 기준으로 인천의 차이나타운에는 150~200여 가구에 695명의 화교가, 인천에는 약 3천명의 화교가 거주하고 있다. [3]

국적 문제[편집]

대한민국[편집]

지금 한국에서 살고 있는 한국화인 1세들의 대부분은 중국 대륙에서 대한민국으로 이민왔으며, 당시 중국 대륙은 중화민국 정부가 통치하고 있었다. 1949년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패하여 중화민국 정부는 타이완으로 옮기고 중국 대륙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한국화인 2세는 물론이고 3세, 4세 또한 모두 대한민국에서 태어났지만, 대한민국의 국적법이 속인주의(屬人主義)인 관계로 이들은 모두 중화민국 국적이다. 따라서 중국 대륙 출신의 후예인 한국화인들은 중화민국 국적을 가지고 출생지인 대한민국에서 외국인으로 3세대가 넘도록 생활한 것이다. 대한민국에는 40년 가까이 영주권 제도가 없었으므로 한국화인들은 그들이 태어난 고향인 대한민국에서 F2 장기 거주 사증을 취득하여 5년마다 갱신하는 불편을 겪으며 생활하다가, 1990년대에 F5 영주 사증 제도가 생기면서 불편을 많이 줄이게 되었다. 대한민국 국적으로 귀화를 원하는 사람도 일부 있으나, 까다로운 귀화절차로 인해 어려움이 있었지만 최근 많이 간소화 되었다. [4]

중화민국[편집]

한국에서 태어나서 고향이 한국에 있는 한국화인은 중화민국에 호적이 없다. 그러므로 국적상의 조국인 중화민국으로 입국시 별도로 입국 사증이 필요하다. 한국화인은, 중화민국 국민에게 사증을 면제하는 국가에 대부분 사증 없이 입국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중화민국 본국으로부터 받은 여권이 아니므로 그 효력은 크게 제한되기 때문에 호주, 일본 등을 방문하려는 중화민국 국민은 사증이 별도로 필요하다. 참고로 대한민국의 국적을 소지하고 있는 한국인은 대만 방문시 30일간 사증이 면제된다.

중화인민공화국[편집]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중화민국 국적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중화민국 여권을 소지하고 있는 한국화교는 중국 대륙으로 입국시 여권 대신 중국 대사관에서 화교를 대상으로 발급하는 여행증을 여권 대신 사용한다. 단, 마카오는 사증 없이도 30일간 방문할 수 있다.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박상순, 〈在韓中國人의 法的地位에 관한 硏究 : 臺灣系中國人을 中心으로인천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학위논문(2001) v쪽. “재한중국인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청국인이 본격적으로 국내에 유입된 것은 1882년 임오군란이후의 일이다.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당시 종주국을 자처하던 청국이 일본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하여 청국군인을 파견하였다. 이때 청국군인을 따라온 청국상인이 국내에 거주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재한중국인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2. "[2010 연중기획] ‘전쟁의 진실’ 성찰의 눈으로 보다", 《경향신문사》, 2010년 6월 22일 작성. "대만 국민당 정부는 전쟁 발발 초기부터 국공내전에서의 패배를 파병을 통해 만회한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이 계획은 중국군 참전을 우려한 미국의 반대로 좌절됐지만 결국 중국군이 참전하게 되면서 심리전 요원을 파견하는 형태로 전쟁에 개입했다. 심리전 요원들은 중국군을 상대로 투항을 권유하는 일을 맡았다. 왕옌메이 교수는 이들 가운데 대부분이 한국에 거주하던 화교학교 교원과 학생들이라고 말한다."
  3. 강경표. "중국피 6.25% 한국피 93.75%… 이 아이는 중국인입니까 한국인입니까", 《조선일보》. "한때 1만명에 이른 적도 있지만, 현재 차이나타운 화교 인구는 150~200여 가구에 695명, 인천 전역에는 약 3000명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4. 귀화, 출입국/외국인 정책본부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