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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대한민국 국가보훈처|보훈처]]가 입수한(공중파TV 뉴스로 방송됨), 일본이 외무성 사료관에 마이크로필름으로 보관했던 문서인 `만주지역 한인 독립운동 동정보고 자료`를 보면 편강렬의사와 의성단은 특별하게 자료가 많다. 편강렬은 의병장 이후로 일제의 중요 감시대상이었다. 편강렬은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편 (성씨)|편갈송]]의 후손이며, 일제는 전국에 있던 [[편 (성씨)|편갈송]]의 승전비를 모두 뽑아 버릴 정도로 대대로 악연이다.(출처는 중앙일보 1982.7.24 기사 5면.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http://www.gb.go.kr/open_content/about_gb/index.jsp?LARGE_CODE=10&LARGE_NAME=&MEDIUM_CODE=10&MEDIUM_NAME=&SMALL_CODE=5&SMALL_NAME=&SMALL_CODE2=40&SMALL_NAME2=&SMALL_CODE3=&SMALL_NAME3=&target=main&URL=/open_content/about_gb/gb_summary/history_vision_hero_view.jsp?cpage=72&person_no=5015 경북도청].한국족보박물관.[http://www.hanauction.com/htm/off_auction_read.htm?id=51849&off_id=132&page=1&ac_num=277 <nowiki>[동원기략(東援記略) 3卷 2冊]</nowiki>]. <의성단장 편강열의 처분에 관한 보고의 건>40권<의성단장 편강열의 체포후에 있어서의 동단의 근황에 관한 건 정보>40권<의성단장 편강열의 체포에 관한 보고의 건>40권<의성단 잔당의 동정>40권<의성단 잔당의 동정에 대하여>40권<의성단의 동정>40권<의성단의 상황에 관한 건>40권 (출처는 [https://books.google.co.kr/books?id=0NPrBQAAQBAJ&pg=PT754&lpg=PT754&dq=%EC%9D%98%EC%84%B1%EB%8B%A8%EC%9E%A5+%ED%8E%B8%EA%B0%95%EC%97%B4%EC%9D%98+%EC%B2%98%EB%B6%84%EC%97%90+%EA%B4%80%ED%95%9C+%EB%B3%B4%EA%B3%A0%EC%9D%98+%EA%B1%B4%3E40%EA%B6%8C&source=bl&ots=_2OQnGH_bf&sig=rsw_p6e7f_nrHBJuB_EuklfC_NA&hl=ko&sa=X&ved=0ahUKEwivotaHqtPPAhWMuY8KHbqOB-kQ6AEIHDAA#v=onepage&q&f=false `만주지역 한인민족운동의 재발견`] 박환). 의성단원들은 국내에 파견되어 경상도와 평안도 등에서도 일경들과 직접 교전交戰을 했다. 1924년 6월9일 김홍진金洪鎭과 김창진金昌鎭이 盈德영덕 [http://www.815gb.or.kr/shop_contents/myboard_read.htm?load_type=&page_idx=0&tag_on=&h_search_c=0&h_search_v=&me_popup=&myboard_code=Aca3_2&page_limit=7&idx=20824&page=7&category_idx= 長沙장사리 일경주재소에서] 교전으로 순국, 의성단원으로 애국장 추서.(출처는 공훈전자사료관) 1923년 6월 박일훈朴日勳이 의주義州 영산적경주재소永山敵警駐在所에서 4곳의 총상을 입고도 주재소를 파괴하고, 또 다른 교전으로 총9곳 총상으로 순국, 의성단원으로 애국장 추서.(출처는 공훈전자사료관). 서울 등에도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한 정황이 당시 신문에도 보도되었다.(출처는1924년10월1일.1924년07월05일.1924년05월25일.동아일보)
2008년 12월 [[대한민국 국가보훈처|보훈처]]가 입수한(공중파TV 뉴스로 방송됨), 일본이 외무성 사료관에 마이크로필름으로 보관했던 문서인 `만주지역 한인 독립운동 동정보고 자료`를 보면 편강렬의사와 의성단은 특별하게 자료가 많다. 편강렬은 의병장 이후로 일제의 중요 감시대상이었다. 편강렬은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편 (성씨)|편갈송]]의 후손이며, 일제는 전국에 있던 [[편 (성씨)|편갈송]]의 승전비를 모두 뽑아 버릴 정도로 대대로 악연이다.(출처는 중앙일보 1982.7.24 기사 5면.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http://www.gb.go.kr/open_content/about_gb/index.jsp?LARGE_CODE=10&LARGE_NAME=&MEDIUM_CODE=10&MEDIUM_NAME=&SMALL_CODE=5&SMALL_NAME=&SMALL_CODE2=40&SMALL_NAME2=&SMALL_CODE3=&SMALL_NAME3=&target=main&URL=/open_content/about_gb/gb_summary/history_vision_hero_view.jsp?cpage=72&person_no=5015 경북도청].한국족보박물관.[http://www.hanauction.com/htm/off_auction_read.htm?id=51849&off_id=132&page=1&ac_num=277 <nowiki>[동원기략(東援記略) 3卷 2冊]</nowiki>]. <의성단장 편강열의 처분에 관한 보고의 건>40권<의성단장 편강열의 체포후에 있어서의 동단의 근황에 관한 건 정보>40권<의성단장 편강열의 체포에 관한 보고의 건>40권<의성단 잔당의 동정>40권<의성단 잔당의 동정에 대하여>40권<의성단의 동정>40권<의성단의 상황에 관한 건>40권 (출처는 [https://books.google.co.kr/books?id=0NPrBQAAQBAJ&pg=PT754&lpg=PT754&dq=%EC%9D%98%EC%84%B1%EB%8B%A8%EC%9E%A5+%ED%8E%B8%EA%B0%95%EC%97%B4%EC%9D%98+%EC%B2%98%EB%B6%84%EC%97%90+%EA%B4%80%ED%95%9C+%EB%B3%B4%EA%B3%A0%EC%9D%98+%EA%B1%B4%3E40%EA%B6%8C&source=bl&ots=_2OQnGH_bf&sig=rsw_p6e7f_nrHBJuB_EuklfC_NA&hl=ko&sa=X&ved=0ahUKEwivotaHqtPPAhWMuY8KHbqOB-kQ6AEIHDAA#v=onepage&q&f=false `만주지역 한인민족운동의 재발견`] 박환). 의성단원들은 국내에 파견되어 경상도와 평안도 등에서도 일경들과 직접 교전交戰을 했다. 1924년 6월9일 김홍진金洪鎭과 김창진金昌鎭이 盈德영덕 [http://www.815gb.or.kr/shop_contents/myboard_read.htm?load_type=&page_idx=0&tag_on=&h_search_c=0&h_search_v=&me_popup=&myboard_code=Aca3_2&page_limit=7&idx=20824&page=7&category_idx= 長沙장사리 일경주재소에서] 교전으로 순국, 의성단원으로 애국장 추서.(출처는 공훈전자사료관) 1923년 6월 박일훈朴日勳이 의주義州 영산적경주재소永山敵警駐在所에서 4곳의 총상을 입고도 주재소를 파괴하고, 또 다른 교전으로 총9곳 총상으로 순국, 의성단원으로 애국장 추서.(출처는 공훈전자사료관). 서울 등에도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한 정황이 당시 신문에도 보도되었다.(출처는1924년10월1일.1924년07월05일.1924년05월25일.동아일보)


의성단이 만철滿鐵을 공격한 이유>>만철은 일제의 거대한 정보수집기관. 당시 불태우지 못한 문서( 비밀, 기밀, 극비로 구분함) 상당수가 남아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생생하게 입증하는 증거가 되고 있다. 관동도독부,관동군,만철滿鐵을 세워 식민통치를 위한 3대 기구로 삼았다. 만철滿鐵은 노점상, 의사 등으로 위장해 활동했고 전화·전신 감청을 통해 각종 정보를 빼냈다. 만철滿鐵 산하 조직은 중국과 일본에 널리 퍼져 있었고 핵심 조사원은 2천500여명이었다. 만철滿鐵 수석이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는 [[이토 히로부미]]를 수행하다가 [[하얼빈 시|하얼빈]] 역에서 안중근의사에게 왼쪽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던 인물이다. 만철滿鐵병원은 저격당한 이토를 입관하였다. (출처는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4/05/05/0200000000AKR20140505024400097.HTML 2014/05/05 연합신문]. [http://www.ytn.co.kr/_ln/0104_201405051236012180 YTN].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2375016&plink=SEARCH&cooper=SBSNEWSSEARCH SBS뉴스]. [http://www.ajunews.com/view/20140505113837840 아주경제]. [http://203.241.185.12/asd/read.cgi?board=News&y_number=4124&nnew=1 칭다오도서관]). 중국 각지의 일본군 병원에서는 ‘수술 연습’이라고 하면서 중국군,독립군 등에게 마취를 하여 생체 해부를 하고 살해하는 일이 행해졌습니다.(출처는 [http://avic.doc-net.or.jp/siryou/4kakokupael140720.pdf WAR AND MEDICAL ETHICS<전쟁과 의사의 윤리>Editor編者Redakteur NISHIYAMA Katsuo, 西山勝夫]). 호주군 일본어 통역자 프레드릭 아르블래스터가 여성들이 누구냐가 묻자, 일본군 장교가 적십자 간호사라고 둘러댔다. 일본군은 [[위안부]]들에게 적십자 완장을 나눠줬다.(출처는 코리아Korea헤럴드Herald 2016-02-17).일본군은 적십자병원을 점령하고 포로 부상병들에게 음식제공을 중지하였으며,대부분의 포로 부상병들을 처형하였다.일본군은 커다란 적십자가 지붕에 그려진 난징 중앙병원에 천파운드 폭탄 2개를 투하했다.(출처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 저자 아이리스 장) 일본은 제네바협약에 결코 동의한 적이 없다고 하면서 국제표준인 적십자 사용을 거부했다. 그러나 일본 군수품`군인들은 적십자(녹십자)마크를 사용해서 보호했다.(미디어오늘 2004-01-05). 세균`독가스`생체실험을 자행한 일본군대<731,100,1644,1855,8604부대>사진에도 [http://kr.xinhuanet.com/2014-06/08/c_133391491_5.htm ‘적십자’ 표식이 있는 대량의 물자]와 [http://kr.xinhuanet.com/2014-06/08/c_133391491_9.htm 안에는 일본 군복을 입고 밖에는 흰 가운을 걸친 남자들]이 등장한다.(출처:[http://kr.xinhuanet.com/2014-06/08/c_133391491_7.htm 인민망 한국어판/중국광파망 2014-06-08 번역`감수:조미경]) 의성단의 일본군 전용 만철병원 습격을 적십자 병원이라고 표기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의성단이 만철滿鐵을 공격한 이유>>만철은 일제의 거대한 정보수집기관. 당시 불태우지 못한 문서( 비밀, 기밀, 극비로 구분함) 상당수가 남아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생생하게 입증하는 증거가 되고 있다. 관동도독부,관동군,만철滿鐵을 세워 식민통치를 위한 3대 기구로 삼았다. 만철滿鐵은 노점상, 의사 등으로 위장해 활동했고 전화·전신 감청을 통해 각종 정보를 빼냈다. 만철滿鐵 산하 조직은 중국과 일본에 널리 퍼져 있었고 핵심 조사원은 2천500여명이었다. 만철滿鐵 수석이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는 [[이토 히로부미]]를 수행하다가 [[하얼빈 시|하얼빈]] 역에서 안중근의사에게 왼쪽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던 인물이다. 만철滿鐵병원은 저격당한 이토를 입관하였다. (출처는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4/05/05/0200000000AKR20140505024400097.HTML 2014/05/05 연합신문]. [http://www.ytn.co.kr/_ln/0104_201405051236012180 YTN].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2375016&plink=SEARCH&cooper=SBSNEWSSEARCH SBS뉴스]. [http://203.241.185.12/asd/read.cgi?board=News&y_number=4124&nnew=1 아주경제. 칭다오도서관]). 중국 각지의 일본군 병원에서는 ‘수술 연습’이라고 하면서 중국군,독립군 등에게 마취를 하여 생체 해부를 하고 살해하는 일이 행해졌습니다.(출처는 [http://avic.doc-net.or.jp/siryou/4kakokupael140720.pdf WAR AND MEDICAL ETHICS<전쟁과 의사의 윤리>Editor編者Redakteur NISHIYAMA Katsuo, 西山勝夫]). 호주군 일본어 통역자 프레드릭 아르블래스터가 여성들이 누구냐가 묻자, 일본군 장교가 적십자 간호사라고 둘러댔다. 일본군은 [[위안부]]들에게 적십자 완장을 나눠줬다.(출처는 코리아Korea헤럴드Herald 2016-02-17).일본군은 적십자병원을 점령하고 포로 부상병들에게 음식제공을 중지하였으며,대부분의 포로 부상병들을 처형하였다.일본군은 커다란 적십자가 지붕에 그려진 난징 중앙병원에 천파운드 폭탄 2개를 투하했다.(출처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 저자 아이리스 장) 일본은 제네바협약에 결코 동의한 적이 없다고 하면서 국제표준인 적십자 사용을 거부했다. 그러나 일본 군수품`군인들은 적십자(녹십자)마크를 사용해서 보호했다.(미디어오늘 2004-01-05). 세균`독가스`생체실험을 자행한 일본군대<731,100,1644,1855,8604부대>사진에도 [http://kr.xinhuanet.com/2014-06/08/c_133391491_5.htm ‘적십자’ 표식이 있는 대량의 물자]와 [http://kr.xinhuanet.com/2014-06/08/c_133391491_9.htm 안에는 일본 군복을 입고 밖에는 흰 가운을 걸친 남자들]이 등장한다.(출처:[http://kr.xinhuanet.com/2014-06/08/c_133391491_7.htm 인민망 한국어판/중국광파망 2014-06-08 번역`감수:조미경]) 의성단의 일본군 전용 만철병원 습격을 적십자 병원이라고 표기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의성단이 영사관을 공격한 이유>> 일제의 영사관은 [[조선총독부]]에 배속되어 있었고,직원들과 경찰들 모두 총독부 파견이었으며,치외법권을 악의적으로 이용하여,한국인은 일본의 국민이 되었으니 자기들이 관리한다면서,무자비한 탄압(감금`고문`감시)을 자행하였다. [[안중근|안중근`]][[김동삼]]`[[남자현]] 등의 수많은 애국지사가 투옥되어 고문을 받던 곳이다.(출처는 만주지역 한인유적 답사기` 대륙으로 간 혁명가들` 저자:박 환) 애국지사들은 고문당해서 중병을 얻고, 회생 불가능 상태에서 석방되어 객사하는 분들도 있었다.(출처 Korea Daily 2016.09.17)
의성단이 영사관을 공격한 이유>> 일제의 영사관은 [[조선총독부]]에 배속되어 있었고,직원들과 경찰들 모두 총독부 파견이었으며,치외법권을 악의적으로 이용하여,한국인은 일본의 국민이 되었으니 자기들이 관리한다면서,무자비한 탄압(감금`고문`감시)을 자행하였다. [[안중근|안중근`]][[김동삼]]`[[남자현]] 등의 수많은 애국지사가 투옥되어 고문을 받던 곳이다.(출처는 만주지역 한인유적 답사기` 대륙으로 간 혁명가들` 저자:박 환) 애국지사들은 고문당해서 중병을 얻고, 회생 불가능 상태에서 석방되어 객사하는 분들도 있었다.(출처 Korea Daily 2016.09.17)

2016년 10월 14일 (금) 02:25 판

편강렬

편강렬(片康烈, 1892년 ~ 1928년)은 한국의 항일운동가이다. 아호는 애사(愛史).[1]

생애

황해도 연백군에서 출생했다. 을사조약 체결 후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1907년 영남 지역 의병장으로 당시 강원도를 거점으로 하고 있던 이강년의 부대에 입대했다. 굉장한 거구이며 힘이 장사였다고 전해지는 편강렬은 16세로 어린 나이였으나 능력과 기백을 보여 이강년에 의해 발탁되었고, 참전하여 경상․충청도 일대에서 큰 공적을 세웠다. 1908년 한성부 진격을 위해 이강년과 허위, 신돌석의 의병 부대가 집결한 양주 전투에서 의병들은, 3일간 잠도 못 자고 결사항전 했지만 일본군 대군의 공격에 중과부적 패퇴했다.

1910년 평양의 기독교 계열 학교인 숭실학교에 입학했다. 숭실학교 재학 중 안명근을 중심으로 황해도 및 평안도 지역 항일 인사들이 대거 체포된 105인 사건(1911년)에 연루되어 서대문감옥에서 3년간 복역했고, 1919년 3·1운동 무렵에는 황해도 지역에 항일유격대를 건설하려한 구월산주비대 사건으로 또다시 1년여 기간 동안 복역했다.

이후 만주로 피신하여 창춘(長春)의 일본군 전용 만철병원(滿鐵病院)을 습격하고 펑톈에서는 시가전을 감행하고 지린(吉林)의 일본기관을 습격하였다. 화이더현(懷德縣)의 우자쯔(五家子)에서 항일 무장 단체인 의성단(義成團)을 양기탁, 남정과 함께 조직해 단장을 맡았다. 약 250명의 회원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 의성단은 훈련 기관까지 갖추고 주요 기관에 폭탄을 던지는 테러 행위와 함께 일본군과 직접 시가전을 벌이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당시 만주 지역에는 여러 무장 항쟁 조직이 산재하고 있었으므로, 이들 조직의 통합을 위해 전만통일의회주비회가 구성되었다. 편강렬은 이와 관련된 업무로 1925년 하얼빈에서 주요 업무를 마치고 지린에 갔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징역 7년형을 선고 받고 신의주 감옥에서 복역 중 고문으로 병을 얻어 가출옥한 뒤 만주 안둥에서 병사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할아버지대까지 살았던 김천 남산공원에 순국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힘으로는 싸우는 두 마리 소 사이에 들어가 소를 떼어 말렸고, 민첩하고 가볍기로는 초가지붕을 뛰어넘었으며, 초인적인 최강전사로 용맹 강직했다는 편강렬. 한학(漢學)을 공부하다가, 14세에 침략당한 조국과 민족의 고통을 전해 듣고는, 식사도 하지 않고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왜놈들을 자기들 섬나라로 돌려보내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너무 어린 나이라서, 16세에 부모님 허락받고 의병 선봉장이 되며, 일당백으로 선두에서 싸우다가 몸에 여러 군데 총상을 입고 독립운동으로 혹독한 옥고를 치러서 병든 몸이 되어 돌아왔지만, 가족과 친척들은 일제의 탄압으로 죽거나 흩어져서 생사를 모르고, 가문의 모든 재산은 빼앗긴 상태였다. 국권 회복운동에 몸 받치기로 하여, 선친이 경영하던 양진의숙에서 교편을 잡아 청소년들을 규합하여 독립사상을 가르치고, 국권회복을 위하여 조직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활동한다. 1919년 황해도 연백군에서 3.1운동을 주도했다. 황해도 軍事籌備團(군사주비단)은 안악군(편강렬) 해주군(이승준) 장연군(장규황) 은율군(백상순) 서흥군(권순옥) 재령군(윤응념)의 대표들과 함께 한국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자금 모집과 독립신문을 비롯한 항일문서 배포와 독립군의 국내 진입시 지원을 목표로 하는 단체였다. 영남일대의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인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하여 활동 하였으며, 교육 계몽등의 평화적 방법으로는 국권을 회복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장춘에서 단원 7명으로 일본 영사관 습격, 군경 200여 명과 7시간여 동안 시가전을 벌여서 일본 군경 60여 명을 사상하고(일본측에 의하면 17명 사망 나머지는 부상) 모두 무사 귀환, 장춘선(長春線) 일본군 군수품 조달 열차를 공격하는 등의 활약을 한 의성단(義成團)을 지휘한다. 공판계류 중 왜경은 기병대를 동원해서 공판장을 철통같이 경호하며 강렬을 회유하기를 독립운동에서 손 떼면 도지사 벼슬을 주겠느니 했지만, 차라리 "단두대의 이슬이 될망정 항복하여 왜놈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고 물리쳤다. 강화도 평화전망대에는 그의 뜻을 기리며 이북 실향민들이 주축이 되어 세운 편강렬의사 추모비가 있다. 의성단의 활약 근거지는 봉천성 회덕현·장춘현 외 27개소가 있었습니다. 단원으로 하여금 농민이 편안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돕고, 부정분자(마적패들)의 망동을 저지하여 불의의 변고를 방지하도록 하였습니다. <片康烈의 국권 회복운동과 의열투쟁 National Rights Recovery Movement and Heroic Struggle of Pyun Kang­ryul>이라는 박사 논문을 보면 그의 영웅적 일생이 연구되고 있다. 편강렬의사(義士)는 독립운동 단체들이 그 실행방법과 활동방법이 다르고, 일반 동포들이 곤란을 겪게 될 뿐 아니라, 독립운동 전선이 약화됨을 깨닫고, 통합운동에 나서게 된다. 1924년 7월 吉林(길림)에서 全滿統一議會籌備會(전만통일의회주비회)를 주도하여 서로군정서` 길림주민회` 대한광정단` 대한독립단` 대한통의부` 노동민족회`의 대표들과 독립군 통합을 논의하고, 하얼빈에서 각 독립단체의 대표들과 만나 統一會(통일회)로 하나로 뭉칠것을 의논하다가, 앞잡이의 밀고로 장시간 총격전 끝에 체포된다. 독립운동사에 막대한 손실을 초래한 밀고자는 이범석 광복군장의 추적으로 사살된다. 편강렬은 만주지역에 거주하는 이주 한인들의 생활 개선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전개했으며(검거 당시에 신문에 보도된 내용), 1925년 남만주지역을 통합하는 독립운동단체인 正義府(정의부)가 조직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여 년 그의 독립운동을 돌아보았을 때, 편강렬은 의병활동,애국계몽운동,무장투쟁,의열투쟁,독립운동단체의 통합운동 등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독립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출처는1980년8월25일 경향신문.보훈처 발간 대한 영웅전.독립기념관.독립공훈 사료관.민족문화대백과 사전.문화콘텐츠닷컴.경북도청.네이버뉴스.네이버캐스트.박사과정 논문.공식출판 서적.일본 외무성기록.임시정부자료집.한국사연구휘보.한민족 독립운동사.국사관논총. 동아일보`시대일보`신한민보`자유신문`중외일보`<1923년~1925년>) 독립운동사는 편 열사를 ‘일제의 고문과 잦은 투옥으로 병마에 시달려 죽음에 직면하고서도 독립과 자유에 대한 열망을 잃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출처는 2016년3월24일 세계일보 류영현기자). "편강렬 선생의 위대한 행적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민족정기를 높이는 일이 시급하다면 아직도 허술한 항일운동사 정립에 힘을 쏟아야.."(출처는 오마이뉴스 02.06.03 14:14 발췌) 김규식,김좌진,지청천,편강렬 4명의 수령들이 듕아령<中俄領:만주`러시아극동>동포들의 군사통일을 적극적으로 의논하다.(신한민보1923년6월21일) 러시아'중국독립군의 대표들<김규식,김좌진,지청천,편강렬>통일을 논의하다.(동아일보1923-05-25)

2008년 12월 보훈처가 입수한(공중파TV 뉴스로 방송됨), 일본이 외무성 사료관에 마이크로필름으로 보관했던 문서인 `만주지역 한인 독립운동 동정보고 자료`를 보면 편강렬의사와 의성단은 특별하게 자료가 많다. 편강렬은 의병장 이후로 일제의 중요 감시대상이었다. 편강렬은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편갈송의 후손이며, 일제는 전국에 있던 편갈송의 승전비를 모두 뽑아 버릴 정도로 대대로 악연이다.(출처는 중앙일보 1982.7.24 기사 5면.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경북도청.한국족보박물관.[동원기략(東援記略) 3卷 2冊]. <의성단장 편강열의 처분에 관한 보고의 건>40권<의성단장 편강열의 체포후에 있어서의 동단의 근황에 관한 건 정보>40권<의성단장 편강열의 체포에 관한 보고의 건>40권<의성단 잔당의 동정>40권<의성단 잔당의 동정에 대하여>40권<의성단의 동정>40권<의성단의 상황에 관한 건>40권 (출처는 `만주지역 한인민족운동의 재발견` 박환). 의성단원들은 국내에 파견되어 경상도와 평안도 등에서도 일경들과 직접 교전交戰을 했다. 1924년 6월9일 김홍진金洪鎭과 김창진金昌鎭이 盈德영덕 長沙장사리 일경주재소에서 교전으로 순국, 의성단원으로 애국장 추서.(출처는 공훈전자사료관) 1923년 6월 박일훈朴日勳이 의주義州 영산적경주재소永山敵警駐在所에서 4곳의 총상을 입고도 주재소를 파괴하고, 또 다른 교전으로 총9곳 총상으로 순국, 의성단원으로 애국장 추서.(출처는 공훈전자사료관). 서울 등에도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한 정황이 당시 신문에도 보도되었다.(출처는1924년10월1일.1924년07월05일.1924년05월25일.동아일보)

의성단이 만철滿鐵을 공격한 이유>>만철은 일제의 거대한 정보수집기관. 당시 불태우지 못한 문서( 비밀, 기밀, 극비로 구분함) 상당수가 남아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생생하게 입증하는 증거가 되고 있다. 관동도독부,관동군,만철滿鐵을 세워 식민통치를 위한 3대 기구로 삼았다. 만철滿鐵은 노점상, 의사 등으로 위장해 활동했고 전화·전신 감청을 통해 각종 정보를 빼냈다. 만철滿鐵 산하 조직은 중국과 일본에 널리 퍼져 있었고 핵심 조사원은 2천500여명이었다. 만철滿鐵 수석이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는 이토 히로부미를 수행하다가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의사에게 왼쪽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던 인물이다. 만철滿鐵병원은 저격당한 이토를 입관하였다. (출처는 2014/05/05 연합신문. YTN. SBS뉴스. 아주경제. 칭다오도서관). 중국 각지의 일본군 병원에서는 ‘수술 연습’이라고 하면서 중국군,독립군 등에게 마취를 하여 생체 해부를 하고 살해하는 일이 행해졌습니다.(출처는 WAR AND MEDICAL ETHICS<전쟁과 의사의 윤리>Editor編者Redakteur NISHIYAMA Katsuo, 西山勝夫). 호주군 일본어 통역자 프레드릭 아르블래스터가 여성들이 누구냐가 묻자, 일본군 장교가 적십자 간호사라고 둘러댔다. 일본군은 위안부들에게 적십자 완장을 나눠줬다.(출처는 코리아Korea헤럴드Herald 2016-02-17).일본군은 적십자병원을 점령하고 포로 부상병들에게 음식제공을 중지하였으며,대부분의 포로 부상병들을 처형하였다.일본군은 커다란 적십자가 지붕에 그려진 난징 중앙병원에 천파운드 폭탄 2개를 투하했다.(출처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 저자 아이리스 장) 일본은 제네바협약에 결코 동의한 적이 없다고 하면서 국제표준인 적십자 사용을 거부했다. 그러나 일본 군수품`군인들은 적십자(녹십자)마크를 사용해서 보호했다.(미디어오늘 2004-01-05). 세균`독가스`생체실험을 자행한 일본군대<731,100,1644,1855,8604부대>사진에도 ‘적십자’ 표식이 있는 대량의 물자안에는 일본 군복을 입고 밖에는 흰 가운을 걸친 남자들이 등장한다.(출처:인민망 한국어판/중국광파망 2014-06-08 번역`감수:조미경) 의성단의 일본군 전용 만철병원 습격을 적십자 병원이라고 표기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의성단이 영사관을 공격한 이유>> 일제의 영사관은 조선총독부에 배속되어 있었고,직원들과 경찰들 모두 총독부 파견이었으며,치외법권을 악의적으로 이용하여,한국인은 일본의 국민이 되었으니 자기들이 관리한다면서,무자비한 탄압(감금`고문`감시)을 자행하였다. 안중근`김동삼`남자현 등의 수많은 애국지사가 투옥되어 고문을 받던 곳이다.(출처는 만주지역 한인유적 답사기` 대륙으로 간 혁명가들` 저자:박 환) 애국지사들은 고문당해서 중병을 얻고, 회생 불가능 상태에서 석방되어 객사하는 분들도 있었다.(출처 Korea Daily 2016.09.17)

임진왜란 승전비와 함께 있는 편강렬의사 추모비 오른쪽은 적을 제압한다는 제적봉
평화전망대 편강렬의사 추모비

[2]

가족

  • 부친 : 편상훈(片相薰)

참고자료

각주

틀:1992년-이 달의 독립 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