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 샤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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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 샤넬

출생 1883년 8월 19일(1883-08-19)
프랑스 프랑스 소뮈르
사망 1971년 1월 10일 (87세)
프랑스 프랑스 파리
매장지 스위스 스위스 로잔
국적 프랑스 프랑스
직업 패션 디자이너
부모 아버지 : 알베르 샤넬
어머니 : 잔 드볼

코코 샤넬(프랑스어: Coco chanel, 본명: 프랑스어: Gabrielle Bonheur Chanel, 1883년 8월 19일 ~ 1971년 1월 10일)은 하우스 오브 샤넬의 설립자이다. 1883년 프랑스소뮈르에서 출생하였다. 불행한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세기의 연인들에 둘러싸여 독립적이면서 창조적인 삶을 살았다.

개요[편집]

성장기[편집]

프랑스 남서부의 오벨뉴 지방의 소뮈르에서 태어난 샤넬은 12세에 모친이 별세하는 바람에 아버지에게 버려져 고아원과 수도원을 전전하면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코코>는 애칭으로 시골마을인 물랑에서 바느질하는 노동자로 고아원을 나온 샤넬은 당시 그녀를 후원한 한 장교에 의해 예능계에 재능을 각성하게 되었다.

가수를 지망하면서 카바레에서 노래하던 그녀는 <Ko Ko Ri Ko> 와 <Qui qu'a vu Coco dans le Trocadero>라는 노래의 가사에서 자신의 예명인 <코코>를 이름 앞에 붙여 사용했다. 그 후 예능계의 길을 잠시 접고 당시 교제중이던 장교인 에튀엥느 발장에 의해 파리근교로 이주하여 사교계로 이용되던 발장의 목장에서 머물렀다.

여기서 따분한 시간을 보내던 샤넬은 모자디자인에 영감을 받아 발장의 후원으로 1909년에 마르젤브 거리 160번지에 모자가게를 개업했다. 1910년에 파리의 캉봉거리 21번지에 <샤넬 모드>라는 모자 전문점을 개업한 샤넬은 이때 발장과 헤어져 평생 연인으로 지낸 영국의 청년사업가인 아서 카펠과 교제를 시작했다. 샤넬 모드의 개업자금은 카펠의 후원이었다.

패션디자이너 시절[편집]

1913년에 드뷜에 2호점을 개설한 샤넬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후인 1915년에 <메종 드 꾸뛰르>를 오픈했다. 1916년 콜렉션을 발표해 대성공을 거둔 샤넬은 새로운 디자인과 소재로 화제가 되었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카펠과 얼마동안 결혼했던 샤넬은 1919년에 카펠이 사고로 사망하자 다시 혼자가 되었다.

1921년, 본점을 캉봉 31번지로 확장한 샤넬은 조향사 에른스트 보와 함께 샤넬의 첫 향수인 <No.5>, <No. 22>를 발표했다. 이 때 극작가였던 장 콕토, 화가피카소, 작곡가인 스트라빈스키 등이 주최한 살롱에 출연한 샤넬은 사교계의 거물이 되었다. 당시 화가였던 마리 로랑생이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샤넬은 이 초상화를 입수하지 못했다. 현재 초상화는 파리의 올랑쥴리 미술관에서 전시 중이다.

1924년 이후 6년간 교제하던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공작과 만난 샤넬은 공작의 보석애호 취미로부터 영향을 받아 모조 보석을 사용한 쥬얼리를 발표했다. 이때 샤넬 슈트도 발표해 1934년부터 양산되기 시작했다. 이후 샤넬은 공작과 헤어져 여러 디자이너 및 유력자들과 사귀었는데 그녀와 사귄 남자들은 모두 급사하거나 파산했다. 이에 샤넬은 불행한 사자자리의 숙명을 가진 여자라 불리기도 했다.

1934년에 기업가로 순탄한 성장을 한 샤넬 브랜드는 액세서리 부문의 공장도 개설했다. 이듬해엔 양장 전문점도 오픈했다. 1939년엔 약 4천 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했으나, 노동인권이 존중되지 않는 노동조건에 항의한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벌였다. 샤넬은 이 충격으로 일부 점포를 제외하고는 사업을 접기로 해 일시 은퇴했다. 이후 15년간 샤넬은 프랑스의 패션계를 떠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1940년에 프랑스가 독일군에게 점령당하자 패전국 프랑스에선 친독계열의 비시 괴뢰정부가 들어섰다. 당시 프랑스인들 중에는 독일군에 대항해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며 고문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는 자가 부지기수였는데 샤넬은 독일군 장교와 애인관계로 지내면서 그의 비호아래 타락적인 생활을 보냈다.

1944년 샤를르 드골이 이끄는 자유프랑스군과 연합군이 프랑스를 해방하자, 샤넬은 나치독일에 협력했다는 비난에 직면해 고국을 탈출해 애인과 함께 전후 수년간 스위스의 로잔에서 망명생활을 보냈다. 이러한 경위로 현재도 샤넬은 <나치스에 혼을 팔아넘긴 매국노>라는 혐오감이 프랑스에선 강하다.

1954년에 스위스 망명생활을 접고 파리로 돌아온 샤넬은 방도므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릿츠 호텔에 거주하면서 패션계로의 복귀를 꾀했다. 샤넬의 2차대전 당시 언동에 강한 혐오감이 팽배해 있던 당시 유럽에선 <매국노>라는 경멸과 나치독일에 대한 혐오감이 전쟁이 끝난 후 10여년간 샤넬의 발목을 잡아 위상이 약했다. 이와 반대로 미국에서는 여성들의 사회진출과 맞물려 그녀의 참신한 패션은 열광적인 선풍을 끌었다.

1955년 샤넬은 울 소재의 새로운 샤넬 슈트를 발표했는데 미국에선 <과거 50여년간 큰 영향력을 가진 패션디자이너>로서 모드 오스카 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1971년, 거주하던 파리의 릿츠 호텔에서 콜렉션을 준비하던 샤넬은 87세로 사망했다. 그녀의 유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에 협력한 혐의와 조국 프랑스를 배신한 행위에 의해 프랑스의 고급묘지에 묻히는 것을 거부당하여 어쩔 수 없이 망명생활을 했던 스위스의 로잔에 매장되었다.

참고 문헌[편집]

  • 야마구치 마사코 - 《샤넬의 진실》 2008년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