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푸트니크 계획
스푸트니크(러시아어: Спутник →동반자)는 소비에트 연방이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띄우는 일련의 우주 개발 계획을 말한다. 최초의 스푸트니크 1호는 1957년 10월 4일에 발사됐다. 스푸트니크 2호는 1957년 11월 3일에 발사되었으며, 스푸트니크 3호는 1958년 5월 15일에 발사됐다.
스푸트니크는 모두 R-7 로켓에 의해 궤도에 발사되었다. 이것은 원래 탄도 미사일 발사용으로 개발된 것이다. 스푸트니크의 성공적인 발사는 소련 국민에게 용기를 불어넣은 반면, 냉전의 상대였던 미국 국민에게 충격을 주고 우주 경쟁의 포문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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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푸트니크 시리즈의 발사 [편집]
스푸트니크 1호 [편집]
스푸트니크 1호는 1957년 10월 4일 19시 28분 34초 바이코누르 우주 기지에서 발사되었다. 이것은 러시아 우주계획의 선구자인 콘스탄틴 치올콥스키의 탄생 100주년과 국제 지구 관측년(1957년 7월 1일∼1958년 12월 31일까지의 18개월간의 기간)의 기간에 맞추어 발사되었다.
발사에 사용된 로켓은 《R-7 로켓》이다.[1] 위성의 궤도는 원지점 약 950km, 근지점 약 230km, 궤도 경사각 65°의 타원 궤도이며, 궤도 주기는 96.2분이었다.
위성의 외형은, 직경 58cm의 알루미늄제 구이며 거기에 4개의 안테나가 한 방향으로 붙어 있는 것이었다. 중량은 83.6kg이다. 20.05MHz와 40.02MHz 짜리 2개의 송신기(출력 1W)를 탑재하고 있어, 위성의 온도 정보를 0.3초마다 발신했다. 이 전파는 세계 각국에서 수신되었다. 전파의 발신으로 전리층을 관측하기도 했다.
스푸트니크 1호는 발사 57일 후 대기권에 재돌입하여 사라졌다.
스푸트니크 쇼크 [편집]
인공위성 발사에서 소련에게 추월당한 미국에서는 스푸트니크 쇼크가 일어났다. 미국이 과학기술분야에서 최첨단을 달리고 있다는 의식이 소련의 인공위성 발사로 뒤집어졌기 때문이다.
그 영향으로 교육, 군사, 과학기술부문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이 인식되었고,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설립되어 아폴로 계획으로 이어졌다. 또한 미국 육군은 스푸트니크에 대항하여 1958년 1월 31일에 익스플로러 1호를 발사했다.
스푸트니크 2호 [편집]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한 1개월 후인 1957년 11월 3일에 스푸트니크 2호가 발사되었다. 스푸트니크 2호는 생물을 우주로 데리고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밀폐된 탑승실이 제공되었다. 따라서 본체의 무게는 1호와 비교하여 약 6배, 미국의 《익스플로러 1호》에 비해 36배나 무거운 508kg이나 되었다. 라이카라는 이름의 암컷 강아지가 탑승되어, 인류에 앞서 우주를 여행한 최초의 생물이 되었다.[2] 그러나 라이카는 우주 여행 중 사망했다.
스푸트니크 3호 [편집]
스푸트니크 3호는 1958년 2월 3일 발사를 시도하였으나 실패를 하였고, 3개월 후인 5월 15일 발사를 하여 성공하였다. 이 3호 위성체의 무게는 약 1327kg였다. 지구 물리학 연구를 위한 계측기를 탑재하였으나, 녹음기 고장으로 밴 앨런대 측정은 실패로 끝났다.
스푸트니크 4호 ~ 10호 [편집]
- 스푸트니크 5호는 1960년 8월 19일 발사되었다. 이 기체에는 개 2마리와 생쥐 40마리, 들쥐 2마리, 기타 여러 식물을 실려 보냈다. 우주선은 다음날 철수하였고 동물들은 모두 무사히 귀환했다.
- 스푸트니크 10호는 1961년 3월 25일 발사되었다. 이것에는 개 한마리와 TV 시스템과 여러 과학 장비들이 실려있었다. 한 궤도를 돈 이후에 무사히 귀환하였다. 이것이 선구 비행의 마지막이었으며, 이후로 유인우주선이 발사되게 된다. 1961년 4월 12일 《보스톡 1호》를 타고 유리 가가린이 최초로 탑승하게 된다.
1962년의 금성 임무 [편집]
- 스푸트니크 19호: 발사실패
- 스푸트니크 20호: 발사실패
- 스푸트니크 21호: 발사실패
1962년의 화성 임무 [편집]
- 스푸트니크 22호: 발사실패
- 스푸트니크 23호: 화성 탐사선 마스 1호 발사 성공
- 스푸트니크 24호: 발사실패
달 임무 [편집]
- 스푸트니크 24호: 발사실패
스푸트니크 충격 [편집]
소련 위성의 발사 성공은 당시 장거리 미사일과 같은 무기체계와 과학기술 전반에 걸쳐서 당연히 자신들이 앞서 있다고 평가하고 있던 미국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하여 이것을 미국에서는 "스푸트니크 쇼크"라고 불렀고, 미국은 그 영향으로 교육, 군사, 과학 기술 부문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1958년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설립되었고, 자존심 만회를 위해 1958년 1월 31일 주노 1호 로켓을 이용하여 무게 14kg(소련의 1/6 수준)의 《익스플로러 1호》를 발사하였다.
또한 1961년 《아폴로 계획》을 시작하여 체계적인 우주계발에 나섰으며, 1969년 인터넷의 모태가 된 《아르파넷》 구축으로 이어졌다.
플라즈마 스텔스 [편집]
스푸트니크 호의 발사는 플라즈마 스텔스 기술의 발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함께 보기 [편집]
바깥 고리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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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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