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Panzerkatz/베를린 공방전 작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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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공방전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날짜1945년 4월 16일 ~ 1945년 5월 2일
장소
결과 소련 승리 및 나치 독일 항복
교전국
소련
폴란드
나치 독일
지휘관
게오르기 주코프
이반 코네프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
바실리 추이코프
고트하르트 하인리키
헬무트 바이들링
헬무트 라이만
빌헬름 몽케
병력
2,500,000명
전투 차량 6,250량
항공기 7,500대
야포 41,600문
1,000,000명(현역병 25만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국민돌격대와 히틀러 청소년단),
전투 차량 700량,
항공기 500대
피해 규모
전사자 및 실종자 81,000명 (폴란드 병사 2,800명 포함),
부상자 280,000명,
장갑 차량 2,108량 손괴,
항공기 917대 격추
전사자 150,000~173,000명,
부상자 200,000명,
포로 134,000명,
시민 사망자 152,000명

베를린 공방전제2차 세계 대전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전투 중 하나이다. 막대한 규모를 지닌 소련의 두 전선군이 베를린을 동쪽과 남쪽에서 동시에 공략했다. 이 전투는 1945년 4월 16일에 시작되어 1945년 5월 8일까지 계속되었으며, 이 전투가 끝나기 전인 4월 30일에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했다. 5월 2일 베를린은 항복했지만, 도처에서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고, 독일의 공식적인 항복은 5월 8일에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5월 8일은 독일이 서부 연합국 3개국(미국, 영국, 프랑스)에 항복한 날짜이며, 소련에는 5월 9일에 항복했다. 이는 소련이 서부 연합국에게 항복한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경[편집]

1945년 초, 동부 전선은 소련군의 바그라티온 작전이 벌어진 1944년 8월 이후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루마니아불가리아는 항복은 물론이고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독일은 부다페스트를 비롯해 헝가리 대부분을 잃은 상황이었다. 소련군은 무인지경으로 폴란드 평원을 통과할 수 있었다.

바르샤바 봉기를 잠자코 지켜보기만 했던 소련군 수뇌부는 1945년 1월 바르샤바를 점거했다. 3일 후, 4개의 전선군으로 구성된 소련군이 바르샤바를 기점으로 나레브 강을 건너며 공세에 들어갔다. 4일 후 독일군 전선을 돌파하며 소련군은 하루에 30에서 40킬로미터를 서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발틱 연안 국가들, 단치히, 동프로이센, 포즈난을 확보한 소련군은 마침내 베를린이 60킬로미터 정도 남은 오데르 강을 따라 전선을 구축했다.

하인리히 히믈러 지휘 아래 새롭게 편성된 비스툴라 집단군의 반격은 2월 24일 무위로 끝났고 말았고, 그에 따라 폼메른에 진입한 소련군은 슐레지엔 지방은 물론이고 오데르 강 우안(右岸)을 완벽히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남쪽에서 포위된 부다페스트를 구원하기 위한 독일군의 구원 기도가 세 번에 걸쳐 이루어졌지만 전부 실패했고, 2월 13일 도시는 소련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다뉴브 강 유역을 탈환하라는 말도 안 되는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또 다시 독일군의 반격이 시작되었지만, 3월 16일 반격 작전은 실패했고, 같은 날 소련군의 역공세가 개시되었다. 3월 30일, 오스트리아에 진입한 소련군은 4월 13일에는 비엔나를 점령했다.

이 시점에서 독일의 패망은 기정 사실화되어 있었으며, 패망까지 이제 겨우 몇 주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국방군은 작전에 필요한 연료를 거의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전투기 및 전차 생산량 또한 현저하게 줄어들어 있었다. 더욱이 생산된 전투기 및 전차의 질은 1944년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수준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어느 때보다 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는 격전뿐이었다. 국가적 자존심,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하는 연합군 그리고 소련군이 도착하기 전에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병사를 서쪽으로 탈출시키기 위한 시간 벌기가 독일이 이처럼 처절한 저항을 하게 된 이유였다.

아돌프 히틀러는 주위의 만류에도 볼구하고 베를린에 남기로 결정했다.

서부 연합군 최고 수뇌인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전후 소련의 세력 하에 들어갈 베를린을 공격하는 일을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또한 아이젠하워는 같은 연합국인 소련을 상대로 "자중지란"을 일으키길 원하지 않았다. 전후 예상되는 국제 정세에 대해서는 정치적 감각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던 아이젠하워는 다 끝나가는 전쟁에 미국 젊은이들의 목숨을 더 이상 잃게 하고 싶지 않았다는 해석이 주류를 이루었다. 당시 서부 연합군의 진격 속도나 독일군의 방어 태세 등을 고려했을때 서부 연합군이 소련군보다 먼저 베를린에 입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명령은 병사들의 사기를 고려하여 일부 고위 지휘관들에게만 하달되었다. 덕분에 이 명령을 뒤늦게 받은 미국 2 기갑사단은 엘베 강을 건너갔다가 클라우제비츠 기갑사단에 일격을 당하고 다시 강을 건너 철수했는데, 이것이 유일한 연합군의 독일 동부에 대한 공격이 되었다.

소련의 공격[편집]

준비[편집]

후에 동독이 된 중부 독일을 공격한 소련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첫째, 전후 소련 세력 하에 들어올 지역을 서부 연합군이 손 댈리 없다고 판단한 스탈린은 가능한 빠른 속도로 더 넓은 지역을 손에 넣은 상황에서 서부 연합군 측과 조우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하지만 최우선 목표는 베를린이었다. 베를린을 확보하지 않고는 주변 지역을 효율적으로 확보하기 어렵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히틀러의 신변과 원자 폭탄 개발 계획 확보는 물론이거니와 베를린 자체가 전후 중요한 전략 거점이었다는 점이다.

1945년 4월 9일, 동프로이센에 위치한 쾨니히스베르크가 마침내 소련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로 인해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 원수의 제2 벨로루시 전선군은 오데르 강 우안(右岸)에서 서안으로 진격할 수 있게 되었다. 4월 첫째 주와 둘째 주 동안 소련군은 가장 빠른 전선 구축 능력을 보여주었다.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는 발틱 지역 남쪽에 위치한 프랑크푸르트에서 오데르 강을 따라 배치된 자신의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을 베를린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젤로 전면에 집중시켰다. 2 벨로루시 전선군으로부터 전선을 인계받은 1 벨로루시 전선군은 젤로 고지 북쪽에 포진했다.

이렇게 재배치가 이루어지던 중 전선에 구멍이 생겼고, 이를 틈타 단치히 근방에서 형성된 포위망에 빠져있던 독일 2 군 잔존 병력들이 오데르 강을 건너 탈출했다. 남쪽에서는 이반 코네프 원수의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 주력 부대가 고지 슐레지엔 북서 지역에서 나이세 강으로 위치를 옮겼다. 세 전선군의 병력은 총 250만명에 달했으며(78,566명으로 구성된 폴란드 제1 군을 포함해), 전차 6,250량, 항공기 7,500대, 박격포 및 야포 41,600문, 스탈린의 오르간이라는 별명이 붙은 3,255문의 카츄사 다연장 로켓포 그리고 대부분 미군에게 공여받은 95,383량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3월 20일, 비스툴라 집단군 사령관이 하인리히 히믈러에서 고트하르트 하인리키로 교체되었다. 독일군 내에서 내선 전문가로 정평이 난 하인리키는 즉시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는 소련 주력 부대가 오데르 강을 도하해 동서를 가로지르는 간선 아우토반을 따라 진격해 올 것을 정확히 예측했다. 그는 엷은 전초 방위선을 제외하곤 어떠한 수비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오데르 강 기슭을 비워두기로 결정했다. 대신 아우토반이 관통하고 있는 오데르 강 일대를 굽어 볼 수 있는 지점인 젤로 고지에 공병을 동원해 강력한 방위선을 구축했다. 오데르 강 및 베를린에서 동쪽으로 각각 17 킬로미터 그리고 90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이었다.

그는 고지 수비선을 보강하기 위해 여타 수비선이 약화되는 것을 개의치 않고 다른 곳에서 병력을 차출했다. 독일군 공병들은 해빙으로 인해 물이 불대로 불은 저수지를 방류해 오데르 강 일대를 늪지대로 만들었다. 베를린 외곽과 맞닿는 후방 지역에는 세 겹으로 된 방위선을 구축했다. 이 방위선은 대전차호, 대전차 진지 그리고 거미줄처럼 광범위하게 연결된 참호와 벙커로 구성되었다.

오데르-나이세 전투[편집]

4월 16일 새벽, 며칠 동안 이어지게 되는 수천문의 대포와 카츄사 다연장 로켓으로 이루어진 엄청난 포격와 함께 공세가 개시되었다. 얼마 후, 새벽이 가기도 전에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이 오데르 강을 도하하기 시작했다.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 또한 같은 날 새벽 나이세 강을 도하하기 시작했다.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이 더 강력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독일군 주력과 조우한 탓에 진격에 더욱 어려움을 겪었다.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의 초기 공격은 문자 그대로 재난이었다. 공격을 예측한 하인리키는 소련군의 포격이 휘하 병력들을 쓸어버리기 바로 전에 제1 선에 위치한 수비 병력 철수시켰다. 수비 측의 눈을 가릴려고 했던 143개의 탐조등은 이른 아침의 안개로 쓸모가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격하는 소련군 병사들의 그림자만을 만들어냈다. 늪지로 화한 땅은 소련군에게 커다란 장애물이 되었고, 빗발치는 독일군의 공격에 소련군은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느린 진격 속도에 짜증이 난 건지 아니면 스탈린의 닥달이 있었는지 주코프는 돌파가 이루어진 후에야 투입이 될 예정이었던 예비 병력을 투입했다. 저녁 무렵, 일부 지역에서 약 6 킬로미터를 진격하는 데 성공한 소련군이었지만 여전히 독일의 수비선은 건재했다.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에 의한 공격이 계획에 따라 남쪽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주코프는 젤로 고지 전투가 예정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스탈린은 주코프를 자극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계속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남쪽에 있는 코네프에게 베를린을 먼저 공격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라고.

둘째 날, 제1 벨로루시 전선군 참모들은 전투에 투입할 병력을 차출하기 위해 후방 지역을 이잡듯이 뒤져야 하는 상황에 빠졌다. 소련군의 인해 전술이 평소 때보다 더 많은 희생을 낳고 있었던 탓이었다. 4월 17일 해질녘, 여전히 독일 전선은 건재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남쪽에 위치한 페르디난트 쇠르너 원수 휘하 중부집단군은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중앙 집단군의 우익을 맡은 제4 기갑군은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압도적인 공격에 짓눌려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쇠르너는 예비 전력으로 보유하고 있던 2개의 기갑사단을 붕괴 중인 제4 기갑군을 지원하는 데 이용하지 않고, 중앙 지역을 보강한다는 명목 아래 그대로 놀려두었다. 이것이 전투의 전환점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로 인해 저녁 무렵 비스툴라 집단군 및 중앙 집단군은 남쪽 지역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포위당하지 않기 위해 제4 기갑군을 포함해 양 집단군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젤로 고지 남쪽에서의 전투가 쇠르너의 어설픈 수비를 상대로 코네프의 공격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하인리키의 훌륭한 방어는 무의미하게 되고 말았다.

4월 18일, 양 전선군들은 꾸준히 진격했지만 그에 따른 손실도 여전히 막대했다. 해질녘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세 번째이자 마지막인 독일 수비선에 이르렀다. 포르스트를 점거한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독일 수도를 향한 진공을 준비했다.

4월 19일, 나흘째를 맞이한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이 젤로 고원 최종 방위선을 돌파했다. 이제 베를린으로 통하는 길은 탄탄대로였다. 그래도 막는 게 있다고 한다면 패잔병 무리뿐이었다. 여전히 고지를 수비하고 있었던 제9 군 잔존병들 및 여전히 북익에 남아있던 제4 기갑군은 자신들을 돌파하고 본대와 함께 베를린을 향해 북쪽으로 기수를 돌릴 제3 근위군, 제3 및 제4 근위 전차군으로 구성된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 일부 부대에게 포위될 위험에 빠졌다.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 소속 여타 야전군들은 미군이 위치한 서쪽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4월 19일을 끝으로 독일의 동부 전선은 완전히 침묵했다. 남은 거라곤 포위망에 빠져 절망적인 저항을 계속하는 패잔병들뿐이었다. 하지만 4월 1일부터 4월 19일까지 소련군이 입은 피해는 실로 막대한 지경이었다. 전차만 무려 2,807량을 손실했던 것이다. 같은 기간 서부 연합군이 잃은 전차 손실은 1,079량에 지나지 않았다.

베를린 포위[편집]

히틀러의 생일이기도 했던 4월 20일,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의 포격이 베를린 중심부를 강타하기 시작했다. 이 포격은 베를린이 항복할 때까지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종전 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소련군이 베를린에 퍼부은 포탄량이 서부 연합군이 폭격한 양보다 훨씬 더 많았다고 전해진다.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은 베를린 동 및 북동 방면에서 진격해 들어갔다.

소련군 병사들이 베를린 시로 쏟아져 들어갔다.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중앙 집단군 북익을 구성하는 마지막 수비 부대를 밀어내고 엘베 강 유역의 마그데부르크에 위치한 미군 전선에서 중간 거리에 위치한 유터복 북쪽을 돌파했다. 슈테틴슈베트 사이에서 제2 벨로루시 전선군이 제3 기갑군이 위치한 비스툴라 집단군 북익을 공격했다.

4월 21일, 제2 근위군이 베를린 북방 50 킬로미터 근방까지 진격해 들어와 베르노이헨 남동쪽을 공격했다. 여타 소련군 부대들도 베를린의 외곽 방어선에 도달했다. 소련군의 계획은 일단 베를린을 포위하고, 그 후에 제9 군을 포위한다는 것이었다.

제4 기갑군에서 제9 군으로 전속된 제5 군단 지휘부는 포르스트에서 제9 군과 함께 포위망에 빠졌다. 제5 군단은 아직 코트부스에 머물러 있었다. 제4 기갑군의 본래 남익 부대가 북쪽을 공격해 들어오는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을 상대로 국지적인 성공을 거두자, 히틀러는 브란덴부르크 왕가의 기적을 바라는 듯한 명령을 하달했다.

제9 군에 코트부스를 사수하고, 서쪽을 향해 방위선을 구축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그 후 제9 군은 북쪽에서 진격해 들어오는 소련군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렇게 된다면 남쪽에서 올라오는 제4 기갑군과 합류하여 제9 군이 괴멸되기 전에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을 포위해 북쪽에서 협공을 가할 수 있을 터였다. 또한 제3 기갑군의 공격이 남쪽에서 이루어질 것이라 예측하고, 베를린 북쪽에서 진격 중인 펠릭스 슈타이너 SS대장 휘하 11 SS기갑군에 의해 이루어질 남쪽에서 협공으로 포위당한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을 괴멸시킬 수 있을 거라고 보았다.

그 날, 슈타이너는 자신의 휘하에는 그만한 전력이 없다고 통보했고, 하인리키는 히틀러의 참모들에게 제9 군이 그 즉시 후퇴하지 않으면 소련군에 의해 포위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경고했다. 또한 그는 베를린의 북서 방면으로 이동하기는 이미 늦었다고 강변하며, 남은 길은 서쪽으로 후퇴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하인리키는 히틀러에게 9군이 서쪽으로 후퇴하는 걸 허가해 주지 않으면 지휘권을 내놓겠다고 말했다.

4월 22일, 오후 상황 보고에서 자신의 작전 계획이 실행 불가능하는 보고를 접한 히틀러는 눈물까지 흘리며 분노를 표출했다. 전쟁에 졌다고 선언한 그는 장군들을 비난했고, 종말이 올 때까지 베를린에 머물겠으며 종말이 오면 그때는 자살하겠다고 밝혔다. 분노한 히틀러를 달래기 위해 알프레트 요들 상급대장은 미군이 엘베 강 이동(以東)으로는 더 이상 진군할 수 없기 때문에 미군과 대치 중인 제12 군을 베를린으로 불러들일 수 있다고 말했다. 히틀러는 즉시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한 시간도 채 안 돼 발터 벵크 기갑대장에게 미군과 교전하지 말고 베를린 구원을 위해 제12 군을 북동쪽으로 이동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만 된다면 제9 군이 서쪽으로 이동해 제12 군과 조우가 가능해지는 상황이었다. 그 날 저녁 하인리키는 제9 군과 제12 군의 조우를 승인했다.

베를린에 위치한 총통 벙커 상황실에서는 존재하지도 않는 사단들이 가상으로 공격을 하는 동안, 소련군은 승리를 굳혀나가고 있었다. 제2 벨로루시 전선군이 오데르 강 동안(東岸)에 15 킬로미터가 넘는 깊은 교두보를 구축했고, 교두보를 분쇄할려는 독일 3 기갑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독일 9 군은 코트부스를 잃고 서쪽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소련 전차군 선봉대가 하펠 강을 따라 베를린 동쪽에 도달했고, 같은 시각 다른 부대가 베를린 외곽 방어선을 통과했다.

4월 23일, 제1 벨로루시 전선군 및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베를린과 독일 9 군을 잇는 최후의 연결 고리를 압박하며 포위망을 계속해서 죄여들어 갔다.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 일부 병력이 서쪽으로 이동을 계속해 베를린을 향해 이동 중이던 독일 12군과 교전에 들어갔다. 4월 24일 제1 벨로루시 전선군 및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도시를 완벽히 포위했다.

다음 날인 4월 25일 제2 벨로루시 전선군이 슈테틴 남쪽의 교두보 근방에 위치한 독일 제3 기갑군을 돌파하고 란도 습지대를 가로질렀다. 이제 제2 벨로루시 전선군은 영국 21 군집단과 조우하기 위해 서쪽으로든 슈트랄준트에 위치한 발틱 연안의 항을 확보하기 위해 북쪽으로든 어느 쪽으로 진격해도 되는 상황이었다. 제5 근위군 소속 제58 근위 사단은 엘베 강 유역에 위치한 토르가우 근방에서 미국 1 군 소속 69 보병사단과 조우했다.

베를린 전투[편집]

독일이 도시를 방어하는 데 투입할 수 있었던 병력은 소모가 극심한 몇 개 국방군 사단과 경찰 병력이 보충된 무장친위대 사단, 히틀러 청소년단의 소년들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경력이 있는 일부 사람을 포함해 대부분 젊은 시절 군에 복무한 경험이 있는 중장년층 남성들로 구성된 국민돌격대뿐이었다.

서쪽에 제20 차량화 보병사단, 북쪽에 제9 공수사단, 북동쪽에 뮌헤베르크 기갑사단, 남동쪽(템펠호프 비행장 동쪽)에 11 SS의용기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 그리고 시내 중앙에 예비 전력으로 제18 기갑척탄병사단이 배치되었다.

베를린의 운명은 절망적이었지만 저항은 계속되었다. 소련군은 다음에 언급하는 4개 방면으로 시내로 진격해 들어왔다. 남동쪽에서 프랑크푸르트 가로수길을 따라 알렉산더 광장으로, 남쪽에서는 존넨 가로수길을 따라 여성 동맹 광장으로, 남쪽에서는 포츠다머 광장 근방으로 그리고 북쪽에서는 국회의사당 근방으로 진격해 들어왔다. 국회의사당, 몰트케 다리, 알렉산더 광장 그리고 슈판다우에 위치한 하펠 다리에서는 건물 사이사이에서 총알이 빗발치고 백병전이 벌어지는 등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맹렬한 반공주의자들이었던 무장친위대 소속 외국인 의용병들은 특히 분투했다. 포로가 된다 하더라도 살아날 가망이 없었던 탓이었다. 노르트란트 소속 티이거와 쾨니히스 티이거(노르트란트에 임시 배속된 SS 503 중전차대대)들은 그 수백배에 달하는 소련 제1 근위 전차군 및 제8 근위 전차군 전차들을 상대하기 위해 베를린 시가지를 정신없이 내달렸다. 자신들이 소련에 저지른 만행을 기억하고 있던 여타 베를린 수비 부대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병력의 태반을 잃은 9 공수사단은 소련 3 충격군을 상대로 악전고투했다. 이미 기갑사단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상태였던 뮌헤베르크 기갑사단은 소련 5 충격군을 상대로 천천히 분쇄되었다.

4월 28일, 하인리키 상급대장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베를린을 지켜내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했다. 다음 날, 베를린 방어 사령관은 쿠르트 슈투덴트 공군 상급대장으로 교체되었다. 4월 30일, 소련군이 베를린 시내 중앙에 진입하자, 아돌프 히틀러는 에바 브라운과 결혼한 후 청산가리를 먹고 권총으로 함께 자살했다. 5월 2일, 베를린 방어 사령관 바이들링 포병 대장은 항복을 선언했다.

하지만 여전히 항복을 원하지 않은 많은 수의 독일인들이 도시 내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빌헬름 몽케가 이끄는 부대를 포함한 마지막 독일군 부대는 5월 8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항복했다.

할베 전투[편집]

베를린에서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베를린 남쪽에서도 전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제9 군은 포위망은 뚫고 위해 소련군을 상대로 절망적인 전투를 계속했다. 제12 군과 조우, 엘베 강을 도하한 후 미군에게 항복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미군에게 항복할 수 있었던 9군 소속 병사는 극소수였다.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은 대부분의 병사들은 추격해온 소련군과의 전투 중에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결말[편집]

전투는 독일의 인적 자원 고갈과 물자 부족으로 인해 일주일만에 종결되었다. 독일 측 보급 창고가 외곽 방위선 바깥에 위치해 있었던 탓에 전투 초기에 소련군에게 점거되었다. 시가전에서 소련군은 약 2,000량의 차량을 잃었는데 그 대부분이 판저 파우스트(PanzerFaust)로 알려진 유효한 개인 휴대용 무반동 대전차포에 의한 것이었다. 장갑 차량에 대한 대항 수단으로 그런 휴대용 대전차 병기가 시민들에게 대량으로 지급되었다. 당시 독일군에게는 한 줌의 전차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도시 여러 지역에서 복수심에 불타는 소련군 병사들에 의해 다수의 약탈 및 강간이 자행되었고, 수많은 베를린 시민들이 살해당했다(마르타 힐러 및 소련군의 잔학 행위 항목을 참조하라). 초기에는 이런 잔학 행위들이 장교들에 의해 묵인되었지만 침략이 아니라 점령으로 목적이 바뀌었다고 판단한 소련 내무인민위원회(NKVD)는 그런 행위들을 중지시켰다.

소련군은 시가전에서 20,000~25,000명을 손실했고, 작전을 통틀어 81,000명을 손실했다. 작전 기간 동안 280,000명이 부상을 입거나 질병에 걸렸다는 자료 또한 존재한다. 독일 측 피해는 군인 및 민간인 모두 포함해 450,000명이 죽거나 부상 혹은 실종되었다.

히틀러의 뜻과 유언에 따라 사후 칼 되니츠 제독이 새롭게 총통에 그리고 요제프 괴벨스가 수상에 임명되었다. 단, 괴벨스가 1945년 5월 1 자살하면서 항복 후 종전 협상을 총통이 된 되니츠 혼자 떠맡게 되었다. 독일군 최고 사령부와 대부분의 독일군은 "유럽 승리의 날"이라 알려진 1945년 5월 8일 무조건적으로 연합군에게 항복했다. 되니츠는 동부 지역의 독일군과 독일 시민이 서쪽 지역을 탈출할 수 있는 시간을 벌이기 위해 항복 협상을 질질 끌려고 하였으나,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무조건 항복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항복 후에도 일부 독일군 부대가 며칠 동안 더 저항을 계속했지만 유럽에서 전쟁은 이미 끝이 난 상황이었다. 제3 제국의 종말과 함께 말이다.

참고 문헌[편집]

  • Beevor, Antony. Berlin: The Downfall 1945, Penguin Books, 2002, ISBN 0-670-88695-5
  • Krivosheev, G. F., Soviet Casual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ieth Century, Greenhill Books, 1997.
  • Read, Anthony, The Fall of Berlin, London: Pimlico, 1993. ISBN 0-7126-0695-5
  • Ryan, Cornelius, The Last Battle, ISBN 0-684-80329-1
  • Ziemke, Earl F., Battle For Berlin: End Of The Third Reich, NY:Ballantine Books, London:Macdomald & Co, 1969.
  • Marta Hillers, A Woman in Berlin: Six Weeks in the Conquered City Translated by Anthes Bell, ISBN 0-8050-7540-2
  • Hastings, Max, Armageddon: The Battle for Germany, 1944-1945, Macmillan, 2004, ISBN 0-333-90836-8

바깥 고리[편집]

--- 재벌 해석본-장갑냐옹이 2006년 9월 2일 (일) 20:34 (K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