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Joo99416/연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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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세계 대전

풀다의 M1 에이브람스 전차
날짜1989년 5월 9일 ~ 1990년 1월 20일
장소
유럽, 태평양, 대서양
결과

NATO의 승리

  • 소련의 붕괴
  • 공산주의의 붕괴
  • 미국과 중국 사이의 신냉전으로 치닫게 됨
  • 그 외 결과
교전국
NATO
미국의 기 미국
서독의 기 서독
영국의 기 영국
프랑스의 기 프랑스
이탈리아의 기 이탈리아
네덜란드의 기 네덜란드
벨기에의 기 벨기에
그리스의 기 그리스
튀르키예의 기 튀르키예
덴마크의 기 덴마크
노르웨이의 기 노르웨이
스페인의 기 스페인
포르투갈의 기 포르투갈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오스트레일리아의 기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의 기 뉴질랜드
일본의 기 일본
예멘 아랍 공화국의 기 북예멘
바르샤바 조약
소련의 기 소련
중국의 기 중국
동독의 기 동독
폴란드의 기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의 기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의 기 헝가리
루마니아의 기 루마니아
불가리아의 기 불가리아
알바니아의 기 알바니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한
남예멘의 기 남예멘
지휘관
만프레드 뵈르너
미국 조지 H. W. 부시
미국 윌리엄 J. 크로우
미국 콜린 파월
독일 헬무트 콜
독일 디터 벨러쇼프
프랑스 프랑시스 미테랑
프랑스 모리스 슈미트
영국 마가렛 대처
영국 데이비드 크레익
그 외...
소련 빅토르 쿨리코프
소련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블라디미르 크류츠코프
소련 예브게니 이바노프스키
동독 에리히 호네커
동독 하인츠 케슬러
폴란드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폴란드 유제프 우주스키
그 외...
피해 규모
군인 사망
약 143,200명
민간인 사망
약 24,000명
총 167,200 명 이상 사망
그 외 자료...
군인 사망
약 190,200명
민간인 사망
약 12,000명
총 212,200 명 이상 사망
그 외 자료...

제3차 세계 대전(한자: 第三次世界大戰, 영어: Third World War 또는 World War III)은 인류 역사상 마지막으로 벌어진 세계 대전이다. 통상적으로 전쟁이 시작된 때는 1989년 5월 9일 새벽 3시 27분 소련군이 서독의 국경을 침공하고, 호프 근경에서 교전을 개시한 때로 본다. 그러나, 또 다른 편에서는 1979년 12월 24일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1981년 12월 폴란드의 계엄령 선포일 등을 개전일로 보기도 한다. 1989년 12월 25일 소련미국평화 협상을 체결하면서 사실상 끝이 났으며, 소련이 종전 협정에 서명한 1990년 1월 20일에 공식적으로 끝났다. 이 결과로 소련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공산주의와 소련의 붕괴를 가져왔다.

전쟁은 크게 북부 독일 전선, 남부 독일 전선한반도 전선으로 구분할 수 있다.

연표[편집]

일반적으로 개전일은 1989년 5월 9일 소련의 서독 침공의 시점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개전일의 또 다른 해석으로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시작인 1979년 12월 24일로 보기도 한다.

기타 다른 개전일으로는, 미국의 역사학자인 폴 F. 팝2차 한국 전쟁이 시작되는 1989년 6월 6일로 보기도 한다. 때로는, 1차 1989년 쿠데타가 시작된 1989년 5월 8일을 개전일로 보기도 한다. 이 문서에서는 기존의 학설인 1989년 5월 9일을 개전일로 정한다.

종전일의 정확한 날짜도 합의되지 않았다. 이는 미국과 소련의 공식적인 휴전 협정일인 1989년 12월 25일보다는 종전 협정을 체결한 1990년 1월 20일을 종전일로 보기 때문이고, 일각에서는 북예멘남예멘과의 내전에서 승리한 1994년 7월 7일로 보기도 한다.

배경[편집]

1989년 숙청 계획[편집]

1985년 정권을 잡아 소비에트 연방의 서기장 직위에 오른 미하일 고르바초프글라디노스트, 페레스트로이카 등의 개혁, 개방 정책을 펴며 소련을 발전시키려 노력했으나, 과도한 군비 경쟁과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너무 빨랐던 개혁 속도로 인해 오히려 소련은 붕괴하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1989년,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권력 유지와 국가 조직 개혁, 반대파 제거등을 위해 1930년대 스탈린의 대숙청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숙청을 계획하였다. 이 숙청 리스트 안에는 당시 KGB의 수장이던 블라디미르 크류츠코프와 육군참모총장 발렌틴 발렌니코프, 해군참모총장 블라디미르 체르나빈, 공군참모총장 알렉산드르 예피모프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이 계획을 승리의 날 행사 직후인 5월 12일 시행할 예정이었으나, 1989년 4월 26일 KGB의 수장인 블라디미르 크류츠코프가 이 계획에 대해 알게 되면서 쿠데타를 획책하였다.

1차 1989년 쿠데타[편집]

1989년 5월 8일 밤 11시 블라디미르 크류츠코프는 육군참모총장 발렌틴 발렌니코프와 계획하여 106공수사단의 연대 병력으로 크렘린GRU 본부를 공격하였다. 크렘린 경비연대는 교전 끝에 1989년 5월 9일 새벽에 결국 항복했으며, GRU 본부도 마찬가지로 저항하였으나 크류츠코프의 쿠데타군에게 장악당했다. 이후 크류츠코프는 크렘린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서기장 사임을 명시하는 서류에 서명할 것을 지시했고, 고르바초프는 서명 직후 크류츠코프의 병력들에 의해 크림 반도로 이송되었다. 1989년 5월 9일 오전 5시 쿠데타는 완전한 성공으로 끝났으며, 새 소련 서기장으로 블라디미르 크류츠코프가, 소련 대통령으로 부통령이던 겐나디 야나예프가 취임하였다.

양 군조직의 반응[편집]

1989년 5월 9일 오전 3시 나토의 참모총장이던 만프레드 뵈르너가 모스크바의 급변사태에 대해 보고받았다. 뵈르너 참모총장은 나토 전군에 즉각적인 경계태세를 하달하였으며, 전 휴가, 외박자의 원대 복귀를 지시하며 브뤼셀의 본부에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이는 소련의 갑작스러운 침공을 염려해 실행된 지시였지만, 반대쪽인 주독소련군, 즉 GSFG에서는 쿠데타군의 계획 중 하나인 통신망 제거로 모스크바와 어떠한 통신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러한 나토군의 갑작스러운 병력 증강이 자신들에 대한 기습 침공을 위한 전초 단계라 판단하여 자체적으로 수립되었던 V 작전을 통해 예방공세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고, 이 과정에서 소련과 동독의 많은 특수부대들이 서쪽으로 진입하였다.

특수부대 교전[편집]

1989년 5월 9일 오후 6시를 기해 소련과 동독의 특수부대원들이 베를린 장벽독일 내 국경을 넘어 서독으로 잠입하였다. 서베를린에서는 이들에게, 그리고 이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미군 60여명, 영국군 70여명, 프랑스군 50여명이 전사했으며, 이중에는 502 공수연대의 부연대장이던 존 F. 햄먼 중령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서독 본토에서는 최소 197명의 나토 군인들이 전사하였다. 한편 이 과정에서 서베를린에 주둔중이던 미 육군의 특수부대인 델타 포스의 인원들은 당시 서베를린에 침투해있던 KGB 요원인 블라디미르 푸틴(당시 계급 대위)을 납치하여 정보를 얻어냄으로써 이번 전쟁이 소련의 전면적인 공세가 아닌 GSFG 안에서 일어난 착오로 인한 예방공세임을 알 수 있게 되었고, 이 정보를 본국으로 송신함으로써 3차 세계대전이 핵전쟁으로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이들에겐 전후 전원 명예 훈장이 수여되었다.

전쟁의 경과[편집]

USS 테네시 침몰사건[편집]

교전 이전이던 1989년 5월 8일, 미국의 오하이오급 핵잠수함인 USS 테네시가 항해 도중 무르만스크 북동쪽 330마일 지점에서 소련의 알파급 잠수함인 K-136과 충돌, 두 함정의 승조원 162명이 전원 사망하였다. 이 사건은 전쟁과는 관련이 없는 순수한 사고였지만, 소련과 미국 수뇌부 양 측에서 각각 상대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증거로 쓰였다.

소련의 초기 공세[편집]

1989년 5월 8일 밤 11시 경 주독소련군이 베를린 장벽을 넘어 공격을 시작하였다. 베를린 여단과 베를린 주둔 영국군, 프랑스군은 방어를 펼쳤으나 1일만에 전멸되어 베를린이 함락되었고, 12시간 내로 시작된 독일 내 국경에서의 교전도 사태는 비슷하게 전개되면서 전체적인 NATO 병력들이 후퇴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개전 2일만에 네덜란드군 1군단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풀다에서는 2차 세계대전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최대의 기갑 전투가 진행되며 지역을 방어하던 11 기갑기병연대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고 미 5군단의 후퇴를 초래했다. 킬에서는 서독군 2군단이 1대 3의 전력비에도 불구하고 포위된 상태에서 전투를 지속하였으나 18일 결국 항복하였다.

5월 12일 주독소련군은 베저 강에 진출하였고, 이후 브레멘을 함락하였다. 한편 체코 주둔 소련군도 주독 소련군의 공격 개시 12시간 이후 공세를 개시하였으며, 미 7군단이 후퇴하는 결과를 낳았다. 5월 13일까지 주독소련군은 베저 강 동쪽의 대부분의 도시를 점령하였으며, 베저 강 서쪽으로도 일부 진군하면서 V 계획에 명시되어있던 작전목표보다도 더욱 진군하는 결과를 낳았다. NATO에서는 총후퇴를 실시하였으며, 전략적 재배치가 시행되었다.

2차 한국전쟁[편집]

6월 22일, 북한의 김일성이 침공을 개시하면서 2차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 초기 북한군은 제1보병사단에 기습공격으로 피해를 입히면서 잠시 파주 근교까지 진출하였으나 곧 반격으로 후퇴하게 되었고, 그것이 북한군의 최대 남침선이었다. 이후 한국군의 반격으로 북한군은 후퇴하였고, 한국군도 개성에 대하여 공세를 펼쳤으나 역시 반격으로 돈좌되었다. 이후 상호 고지전을 펼치는 양상으로 전선이 정체되었으며, 종전시까지 이는 계속되었다.

평화회담 개시[편집]

8월의 폭풍 작전[편집]

합참의장 교체[편집]

교착 상태[편집]

편서풍 작전[편집]

철의 장막 진입[편집]

2차 1989년 쿠데타[편집]

휴전협정[편집]

종전[편집]

영향[편집]

파나마 침공[편집]

걸프전[편집]

소련 붕괴[편집]

1992년 미 대통령 선거[편집]

LA 폭동[편집]

특징[편집]

기계화전[편집]

해전[편집]

공중전[편집]

전쟁 범죄[편집]

민간인 학살[편집]

포로 학살[편집]

파괴공작[편집]

논란[편집]

3차대전 신드롬[편집]

초토화 전략[편집]

형벌 부대[편집]

쿠데타 주역 암살[편집]

사상자[편집]

군인 사상자[편집]

민간인 사상자[편집]

같이 보기[편집]

참고 자료[편집]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