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토론:Tarant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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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의견: 13년 전 (Silverlion님) - 주제: 김정숙의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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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 tasty bread 2010년 1월 5일 (화) 21:43 (KST)답변

신민당[편집]

안녕하세요. 신민당 (동음이의)신민당으로 옮기고 싶어하시는 것 같아 몇가지 수정을 했습니다.[1][2] 그리고 신민당으로 링크하고 있는 페이지들이 있는데,(특수기능:가리키는문서/신민당) 이걸 정리하는 걸 도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Puzzlet Chung (토론) 2010년 1월 13일 (수) 10:58 (KST) 신민당이 한개가 아니더라그요. 근디 신민당을 그한개로 단정짓는것 같아 그랬습니다.---Tarantius (토론)답변

편집 요약 알림[편집]

반갑습니다, Tarantius님!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편집에 참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편집 요약은 자신의 편집의 목적 등을 간결히 적을 수 있게 마련된 공간입니다. 편집 요약은 최근 바뀜, 문서 역사, 주시문서 목록 등에 노출됩니다. 자신의 편집에 관한 편집 요약을 적으면 그 편집이 문서 훼손 행위 등이 아님과 편집의 목적을 알릴 수 있어 다른 사용자들에게 도움이 됩니다. 여기를 참고해 주세요. 위키백과를 편집할 때 궁금한 점이 있다면 길라잡이사용법을 보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궁금한 점이 있다면 얼마든지 다른 사용자에게 질문해 주세요. —밥먹어쏭(우리 함께해요!) "First in my diary" 2010년 3월 28일 (일) 02:37 (KST)답변

이념 보다는 불필요한 서술이고 그럼 김대중 문서나 김영삼 문서에도 다함께 여성 편력 관련된 내용이 실려야 균형이 있지요. 그런게 전혀 감안이 안된다면 그건 박정희에 음해성이나 폄하 의도의 편집이 확실해 보이는 행위들입니다. 백과는 감정적인 편집보다는 가치중립성을 지향해야 하지 않을까요? -- Tarantius (토론) 2010년 3월 28일 (일) 02:38 (KST)답변
해당 문서 편집과 관련해 저는 특별한 의견은 없습니다. 다만 편집시 편집요약을 밑에 적어 주는 일은 해당 문서 관심 있는 다른 사람들이 편집 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밥먹어쏭(우리 함께해요!) "First in my diary" 2010년 3월 28일 (일) 02:53 (KST)답변

안녕하세요.[편집]

제가 파일:1919년 임시정부 요인들.jpg을 원판으로 복구시킨 이유는 새로 수정한 판의 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깔끔하지 않은 손글씨도 있구요, 또한 문서에서 사람을 설명할 때는 "몇 번째 줄 왼쪽에서 몇 번째"라고 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별 이의 없으시면 되돌리겠습니다.--누비에크 () 2010년 3월 28일 (일) 04:08 (KST)답변

제가 재주가 없어서 서툴렀네요. 하지만 그걸 무조건 되돌리는건 다소 지나치시다 생각됩니다. 유감이군요. -- Tarantius (토론) 2010년 3월 28일 (일) 04:10 (KST)답변

제가 먼저 통보하지 못한 점은 사과드리겠습니다. 되돌려도 되겠습니까?--누비에크 () 2010년 3월 28일 (일) 04:13 (KST)답변
무조건 되돌리시기 보다는 수정을 해서 올려 주실수는 없나요? -- Tarantius (토론)
어떤 수정을 원하시나요?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어디 줄 어디에" 있다고 서술해도 좋을 것 같거든요. 파란색 원과 이름 설명도 지우고싶으나, 원본이 그래서요.--누비에크 () 2010년 3월 28일 (일) 04:20 (KST)답변

미리 보기 알림[편집]

미리 보기를 생활화 합시다.
미리 보기를 생활화 합시다.

안녕하세요.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에 기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같은 시간에 동일한 문서를 여러 차례 편집하고 계시기에, 미리 보기 기능에 대해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편집하실 때에는 ‘저장’ 단추 옆에 있는 ‘미리 보기’ 단추를 이용해, 바르게 편집되었는지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리 보기’ 기능을 활용하면, 기여 횟수가 줄어들어 문서의 ‘역사’를 확인하기가 편해지며, ‘최근 바뀜’이 불필요한 편집으로 채워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위키백과를 편집할 때 궁금한 점이 있다면 소개사용법을 보시면 도움이 됩니다. 더 궁금한 게 있다면 질문방을 통해 다른 사용자에게 질문해 주세요. 앞으로도 좋은 기여 부탁드립니다.--Dalgial (토론) 2010년 4월 7일 (수) 00:21 (KST)답변

중립성?[편집]

김일성 문서에 중립성 틀을 달아주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궁금하네요... -- 노승희 (토론) 2010년 4월 11일 (일) 03:30 (KST)답변

답변은 토론:김일성에 달아주세요. 아무 이유도 없이 중립성 틀을 다시는 건, 말이 안되죠;; -- 노승희 (토론) 2010년 4월 11일 (일) 03:33 (KST)답변

답변[편집]

일개 범죄 사건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어떠한 논란거리가 될만한 내용이 없습니다. --Erio-h (토론) 2010년 4월 14일 (수) 09:27 (KST)답변

뉴데일리 밀회 사건에 대해[편집]

뉴데일리 밀회 사건 문서(이하 뉴데 문서)를 신설, 뉴델리 밀회 조작 사건으로 넘겨주기 처리해주셨는데요. 제 생각엔 뉴데 문서를 넘겨주기 처리식의 문서로 만드는 건 할 필요가 없었으실 것 같습니다. 일단 뉴델리를 뉴데일리라 부르는 경우가 없구요, 뉴데일리는 위키백과에도 등재되어 있는 인터넷 언론입니다. 고로 이 언론과 헷갈릴 여지가 있다고도 생각하여, 해당 문서를 삭제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합니다만... -- 노승희 (토론) 2010년 5월 2일 (일) 17:42 (KST)답변

무조건적인 삭제는 좀 지양해주셨으면 하네요. 오타로 쳐도 쉽게 검색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어떤분들은 뉴델리를 뉴데일리로 부르기도 한답니다. -- Tarantius (토론) 2010년 5월 2일 (일) 17:44 (KST)답변
오타로 쳐서 안나오면 다시 제대로 쓰면 되는 것 아닌가요? 그리고 누군가가 뉴델리를 뉴데일리라 부를지라도 그것은 자신이 명칭 자체를 잘못 알고 있는만큼 자신의 책임 아닌가요?진실과 환상 (토론) (기여) 2010년 5월 2일 (일) 17:47 (KST)답변
다른사람은 전혀 배려하지 않는 공격적이고 무례한 언사이시군요.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 Tarantius (토론) 2010년 5월 2일 (일) 17:49 (KST)답변
무지가 자랑은 아니지요.진실과 환상 (토론) (기여) 2010년 5월 2일 (일) 17:50 (KST)답변
제가 주장하는 삭제가 무조건적인 삭제는 아닙니다. 진실과 환상님의 의견처럼, 그저 오타일 경우면 다시 쓸 수도 있습니다. 또한, 뉴델리를 뉴데일리라고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제가 말한 의도는 그게 아닙니다. 인터넷 언론 뉴데일리와 헷갈릴 수 있다는 거지요. -- 노승희 (토론) 2010년 5월 2일 (일) 17:59 (KST)답변

New Delhi는 New Daily가 아닙니다. 그렇게 읽힌다는 객관적 출처를 제시해주신다면 상관 없겠지만, 저는 불필요한 넘겨주기라고 보입니다. 오타를 고려해줄 필요는 없습니다. - 츄군 (토론) 2010년 5월 2일 (일) 18:13 (KST)답변

백:선의를 생각합시다. :)--sienic (토론) 2010년 5월 2일 (일) 20:14 (KST)답변

제천 에이즈 사건 문서[편집]

제가 아는 바로는 2010년 4월 13일 쯤 제천 에이즈 사태란 이름의 문서를 사용자:Kys951님이 '문서가 사건이라고 할만큼 특징적인 것이 없음.'이란 이유로 삭제하신 걸로 아는데, 이름만 바꿔서 재생성하시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만...? -- 노승희 (토론) 2010년 5월 2일 (일) 18:06 (KST)답변

따라서 해당 문서에 삭제 신청을 하려고 하는데, 이의 없으신가요? -- 노승희 (토론) 2010년 5월 2일 (일) 18:07 (KST)답변
이의 있습니다. 대대적인 성추문 사건으로, 2009년 당시 이슈였던 성추문 사건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사회적 파장이 있는 사건인데 왜 굳이 삭제를 하려 하는지요? 범죄 피해자들이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사건은 언제 다시 터질수도 있는 사건입니다. 사건이 발생한지 1년이 지났으나 사건의 원인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아 충청북도 제천시충주시 지역은 아직도 이 문제로 시끌벅적 한줄로 압니다. -- Tarantius (토론) 2010년 5월 2일 (일) 18:08 (KST)답변
(편집 충돌) 글쎄요, 해당 사건이 벌어진 곳인 제천시에 제 친척분께서 사셔서 얼마 전에도 갔다 왔습니다만, 그 문제는 잊혀진 것으로 압니다. 또한, 해당 문서의 삭제(2010년 4월 13일의)는 에리오님께서 하셨습니다. 그 문제로 당시 타란티스님께서도 에리오님의 토론란에 삭제 이유를 물어보셨으며, 에리오님의 그 이유를 타란티스님의 토론창에 밝히시고 끝난 일로 기억합니다. 더 이상 타란티스님이 에리오님의 의견에 아무 의견을 달지 않아 해당 토론이 끝난 걸로 생각합니다만...? -- 노승희 (토론) 2010년 5월 2일 (일) 18:16 (KST)답변
잊혀진게 아니라 님이 친척이니까 응답을 회피하는 것이겠지요. 친척간의 예의란게 있으니까요. 단지 말하지 않고 있고 아직도 에이즈 사건 때문에 흉흉한데 님의 개인적 경험을 근거로 문서를 삭제하자는 이유는 타당성이 없어 보입니다. -- Tarantius (토론) 2010년 5월 2일 (일) 18:18 (KST)답변
개인적인 경험은 타란티스님께서 먼저 근거로 들어주시지 않으셨던가요? '사건이 발생한지 1년이 지났으나 사건의 원인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아 충청북도 제천시충주시 지역은 아직도 이 문제로 시끌벅적 한줄로 압니다.'란 개인적인 경험을 먼저 적어주신 터라, 저는 그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을 적었을 뿐이며, 제가 해당 문서를 삭제하자는 근거는 사용자:Kys951님이 1차 삭제 때 삭제 이유를 '문서가 사건이라고 할만큼 특징적인 것이 없음.'이라고 하셨으며, 타란티스님이 Kys951님의 의견(사용자토론:Tarantius#답변)에 더 이상 아무 의견을 달아주시지 않아 그걸로 종결된 것으로 봤기 때문입니다. -- 노승희 (토론) 2010년 5월 2일 (일) 18:26 (KST)답변
한 가지 더, 제가 그 문장을 개인적인 경험으로 본 이유는, 타란티스님이 근거로 들어주신 문장은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증거(예를 들어 지방신문의 신문 기사 같은)가 없어 '개인적인 경험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 노승희 (토론) 2010년 5월 2일 (일) 18:28 (KST)답변
더 이상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22분 후인 오후 7시에 삭제 신청하겠습니다. -- 노승희 (토론) 2010년 5월 2일 (일) 18:38 (KST)답변

삭제신청보다는 삭제토론을 열어주세요. 사건에 달린 출처, 언론에서의 언급 등을 보았을 때 관리자 1인의 판단으로 일의적으로 바로 삭제할 대상은 아니고 공동체의 합의인 삭제토론을 거칠 대상으로 보입니다. --hun99 (토론) 2010년 5월 2일 (일) 18:43 (KST)답변

네, 알겠습니다. 타란티스님의 의견을 듣고, 하실 말씀이 없으신 것 같으면 예고한 시각인 7시에 삭제토론을 열겠습니다. -- 노승희 (토론) 2010년 5월 2일 (일) 18:44 (KST)답변
삭제 토론에 올렸습니다. 주 기여자이신 타란티스님은 이 토론에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위키백과:삭제 토론#제천 에이즈 사건으로 와서 해주시기 바랍니다. -- 노승희 (토론) 2010년 5월 2일 (일) 19:30 (KST)답변
그런데 타란티스님은 정작 자신의 입장만 밝히시려 하시고 제 의견은 피하려고만 하시는 것 같네요. 제가 타란티스님의 의견에 조목조목 의견을 제시했는데, 정작 타란티스님은 이 부분에서는 아무 말씀도 없으시네요. 토론을 회피하려 하시는 건가요? -- 노승희 (토론) 2010년 5월 5일 (수) 03:08 (KST)답변
토론회피로 몰고 가시려는군요? - 난 분명 내 의견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무조건 내 성향이나 내 판단에 의해서 임의로 삭제에 회부하는건 좋은 태도 같아 보이지는 않는군요. -- Tarantius (토론) 2010년 5월 7일 (금) 12:14 (KST)답변

그림 관련[편집]

올려 주시는 자료의 출처를 명확히 해 주시고, 저작권 소멸이라는 근거를 제시해 주세요. 또한, 정말로 저작권이 소멸된 자료에 자의적으로 GFDL 라이선스를 적용하지 말아 주세요. - IRTC1015 (토론) 2010년 6월 11일 (금) 21:42 (KST)답변

반복해서 말씀드립니다. 그림에 자의적으로 라이선스를 적용하지 마세요. 정말로 저작권이 소멸됐다면 적절한 라이선스는 GFDL이 아니라 PD입니다. - IRTC1015 (토론) 2010년 6월 13일 (일) 17:14 (KST)답변

PD입니까. 네 참고할께요. ^^ --Tarantius (토론) 2010년 6월 13일 (일) 19:43 (KST)답변

삭제 신청 알림[편집]

Tarantius님!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에 기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박용만 (1875년) 문서는 위키백과에 어울리지 않거나 위키백과의 삭제 정책의 삭제 사유에 해당한다고 판단되어 삭제 신청되었습니다.

박용만 (1875년) 문서가 삭제 신청된 이유는 잘못된 넘겨주기입니다. 해당 문서의 삭제 신청 이유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해당 문서의 변경 내력을 확인하여 어떤 분이 삭제를 신청하였는지 확인하신 후 그 사용자와 토론을 시도해 주세요. 토론이 잘 해결되지 않는다면, 위키백과의 여러 편집자들과 함께 삭제에 대한 토론을 하실 수도 있습니다.

위키백과를 편집할 때 궁금한 점이 있다면 길라잡이사용법을 보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궁금한 점이 있다면 얼마든지 다른 사용자에게 질문해 주세요. -- 土屋光 : "츠치야 히카루" (토론·기여) 2010년 6월 13일 (일) 14:16 (KST)답변

삭제 알림[편집]

김구 (동음이의)문서의 김구 (교수) 문단을 저명성 이유로 삭제하였습니다. 만약, 저명할 경우 근거를 밝혀주세요. --가람 (토론 - 편지) 2010년 6월 13일 (일) 21:24 (KST)답변

질문[편집]

의견 김구 문서 중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김은열(金殷說)의 둘째 아들인 평장사 김숙승(金叔承)의 31대손이다. 충렬공 김방경의 25대손이며 익원공 김사형의 21대손이었다. 김자점의 11대 방계 후손으로, 김자점의 옥 당시 그의 11대조로 사과(司果)를 지낸 김대충(金大忠)이 화를 피하여 가족을 이끌고 개성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해주로 피신해 왔다.' '~대손' 또는 '후손' 등이 너무 많이 표기되어 있습니다. 고쳐 주실 것을 부탁합니다. -가람 (토론 - 편지) 2010년 6월 13일 (일) 21:34 (KST)답변

되돌림[편집]

장덕수 관련은 이제는 말할수 있다 비밀결사 백의사참조하시고요. 김두한은 김구와 이범석에게 들은것이 아니고요. 그리고 위연홍 부분은 김좌진 문서 참고하시고요.--떠돌이 (토론) 2010년 6월 13일 (일) 21:42 (KST)답변

자기 자신의 개인적 사고방식을 강요하지 마시죠. 김구와 이범석에게 듣지 않았다는 증거는 있나요? -- Tarantius (토론) 2010년 6월 14일 (월) 12:09 (KST)답변
  1. (명문家를 찾아서)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덕수 이씨家
  2. 김두한의 노변야화--떠돌이 (토론) 2010년 6월 14일 (월) 12:12 (KST)답변
그본문 어디에도 김두한이 나는 김구나 이범석에게 그런말 들은적 없다고 명시하지 않았거든요? 함부로 단정짓지 마십시오. -- Tarantius (토론) 2010년 6월 14일 (월) 12:22 (KST)답변
김두한 노변야화2 그리고 역사문제연구소 일설에는 김두한이 그의 주장과는 달리 해방 후에야 이범석 쪽에서 알려줘서 자기 아버지가 김좌진 장군인 것을 알았는데, 그때 자기 아버지를 공산주의자가 죽였다고 듣고 열렬한 반공투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김좌진이 아나키스트라고 말하고있지만 김좌진은 아나키스트가 아니고 김좌진의 사촌 김종진 (1901년)이 아나키스트입니다. 북로군정서 대부분은 대종교계열 민족주의입니다. 대종교 홈페이지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 그리고 현대사를 바꾼 전쟁과 정치 : 전사를 통해 진단한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은 이범석에서 김구만 바꿨고요. 그리고 김두한은 교동초등학교(당시 교동보통학교) 1학년만 다녔습니다.--떠돌이 (토론) 2010년 6월 14일 (월) 13:32 (KST)답변
김좌진아나키스트인 것과는 무슨 상관입니까? 님의 주관적인 판단을 개입시키지 말라 이겁니다. 그리고 1학년만 다녔으니 1학년 중퇴가 맞는데 이건또 왜 임의로 되돌리시죠? 토론의사 없이 다른소릴 하시는것 보니 개선의 여지가 없어보이네요. 차단신청 다시 하겠습니다. --Tarantius (토론) 2010년 6월 14일 (월) 20:15 (KST)답변
김좌진은 아나키스트가 아닙니다. 그리고 김두한은 2학년 중퇴입니다.--떠돌이 (토론) 2010년 6월 14일 (월) 20:55 (KST)답변
누가 김좌진이 아나키스트인가 여부를 물었습니까? 엉뚱한 대답으로 토론의 본질을 흐리시는 목적이 뭡니까? -- Tarantius (토론) 2010년 6월 14일 (월) 20:56 (KST)답변
김좌진아나키스트인 것과는 무슨 상관입니까? 님이 말한 부분입니다.--떠돌이 (토론) 2010년 6월 14일 (월) 20:57 (KST)답변
김좌진에 대해 저는 질문한적이 없는데 김좌진이 아나키스트가 아니라고 말한게 님 아닙니까? 계속 엉뚱한 말씀 하실거면 그만 하시죠. -- Tarantius (토론) 2010년 6월 14일 (월) 20:58 (KST)답변
김좌진이 아나키스트라고 역사문제연구소에 나와있습니다.--떠돌이 (토론) 2010년 6월 14일 (월) 20:59 (KST)답변
그래서요? 김좌진이 아나키스트인거하고 김두한 문서를 님이 임의대로 훼손하는게 무슨 상관입니까? -- Tarantius (토론) 2010년 6월 14일 (월) 21:01 (KST)답변
훼손은 님이하셔놓고 무슨말씀이시죠?.--떠돌이 (토론) 2010년 6월 14일 (월) 21:01 (KST)답변
  1. 교동보통학교 (현 교동초등학교) 1학년 중퇴 -> 2학년 중퇴입니다.
  2. 위연홍(외조카) -> 김좌진 문서 참고하세요.
  3. 미군정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감형 석방되었다. -> 미군정에서 사형은 1947년이고요. 이승만 정부때는 1949년에 국가보안법으로 투옥되었습니다.(한성일보 1949년 09월 10일)
  4. 김춘삼과는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5. 3대 국회의원 당선이후 이승만 정권 비판혐의로 선거법위반과 김관철 살인미수로 구속 됐습니다. ([3])--떠돌이 (토론) 2010년 6월 14일 (월) 21:10 (KST)답변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님이 이유없이 삭제하는 부분을 되돌렸는데 왜 계속 다른이야기를 꺼내십니까? -- Tarantius (토론) 2010년 6월 14일 (월) 21:12 (KST)답변
?? 무슨상관입니까라뇨..? 지금 님이 되돌리기하신 (님이 편집한게 아닌 이전 버전으로 편집버전이지만) 그 부분이 저 내용입니다. 내용은 보고 되돌리기하세요.--떠돌이 (토론) 2010년 6월 14일 (월) 21:15 (KST)답변
김좌진의 아나키스트 경력은 없었거든요?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 Tarantius (토론) 2010년 6월 14일 (월) 21:17 (KST)답변
인물로 보는 항일무장투쟁사 18페이지 19페이지에 김좌진이 아나키스트로 기울렸다고 기재되어있습니다. 이거 님이 되돌리기한 부분입니다. 김좌진이 아닌 김종진이 아나키스트입니다. 김좌진은 민족주의입니다. 그리고 역사문제연구소는 날짜는 모르지만 조선일보에서 종로시장상인들이 철시했다고도 말하기도 합니다만, 이 부분은 김두한 잘못 알려진 것 <-에 참조하세요.--떠돌이 (토론) 2010년 6월 14일 (월) 21:20 (KST)답변
김좌진이 아나키스트인게 김두한하고 어떤 상관이냐고요. 그리고 김좌진이 아나키스트인거 하고 김구, 이범석과 김두한의 대화 내용은 왜 님 맘대로 지우는건데요? --Tarantius (토론) 2010년 6월 14일 (월) 21:21 (KST)답변
님이 되돌리기 중 역사문제연구소 링크가 있고 이 출처에서 김좌진은 아나키스트라고 기재되어 있다고요. 그리고 김구와 이범석과 김두한의 대화내용?? 김구와 이범석에게 김좌진의 죽음을 들었다는 부분 말하시는건가요? 이범석과 김구가 김좌진의 죽음을 알려줬다는 역사문제연구소, 현대사를 바꾼 전쟁과 정치 : 전사를 통해 진단한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 이 두 링크에 일설만 전해져있고 현대사를 바꾼 전쟁과 정치 : 전사를 통해 진단한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는 이범석에서 김구만 바뀐 부분입니다. 김두한은 이범석과 김구에게 들은것 아니고요. 이규갑, 장덕수 등 여러 인물에게 알게된겁니다. (명문家를 찾아서)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덕수 이씨家, 김두한의 육성녹음 노변야화--떠돌이 (토론) 2010년 6월 14일 (월) 21:29 (KST)답변
이보세요. 노변야화 봤지만 어디에도 김두한이 아버지의 죽음을 이범석이나 김구에게 들은적은 없다고 말한적은 없습니다.

이범석이나 김구에게서 듣지 않았다는 증거를 갖고 오세요. 그건 김두한이 이규갑이나 장덕수에게 들은 이야기 정도는 돼도 김구나 이범석에게 듣지 않았다는건 아니잖습니까? 왜 맘대로 허위사실을 날조하십니까? -- Tarantius (토론) 2010년 6월 14일 (월) 21:53 (KST)답변

의견이 없으시네요? (그리고 수정 오타를 미쳐 발견하지못해서 수정한겁니다.)--떠돌이 (토론) 2010년 6월 14일 (월) 21:52 (KST)답변

이범석이나 김구에게서 듣지 않았다는 증거를 갖고 오세요. 그건 김두한이 이규갑이나 장덕수에게 들은 이야기 정도는 돼도 김구나 이범석에게 듣지 않았다는건 아니잖습니까? 왜 맘대로 허위사실을 날조하십니까? -- Tarantius (토론) 2010년 6월 14일 (월) 21:53 (KST)답변

의견이 없긴요. 님은 글 작성하고 남 대답달기 전에 맘대록 그렇게 편집합니까? -- Tarantius (토론) 2010년 6월 14일 (월) 21:53 (KST)답변
이범석에게 들었다는 역사문제연구소 링크 김두한 노변야화2 그리고 역사문제연구소 일설에는 김두한이 그의 주장과는 달리 해방 후에야 이범석 쪽에서 알려줘서 자기 아버지가 김좌진 장군인 것을 알았는데, 그때 자기 아버지를 공산주의자가 죽였다고 듣고 열렬한 반공투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역사문제연구소는 김좌진이 아나키스트, 종로구 상인들이 철시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역사문제연구소의 다른 책인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 中

(전략) 요즘 우리 역사에서 잘못 알려져 있는 것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제가 일제시대 때 신문을 뒤적이다가 조선일보에서 보았는데 날짜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만, 김두한 때문에 종로시장이 철시(撤市)한 기사가 나옵니다. (중략) 김구 선생이라면 우익 민족주의자였죠. 일제 치하 전체를 반공투쟁으로 일관했던 분인데요, 그렇게 반공투쟁에 철저했던 분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김구 선생을 좌익으로 몰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김구 선생이 민족주의자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런 김구 선생이 김두한을 불러서 호부에 견자라고 노골적으로 충고하는 것이 백범어록에 나와있습니다. 이렇게 호랑이 아버지에 개새끼라고 비판받았던 김두한은 미군정하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래서 오키나와 감옥에서 갇혀 있었는데 미군정에서 집행하지 않고 이 핑계 저 핑계로 이승만 정권으로 넘겼고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고 난 뒤 그를 사면해서 데려왔습니다. (후략)")</ref>

그리고 1947년 김구의 김좌진 추도사 내용 일부내용

서대문감옥에서 어느 청년이 내게 와 인사를 하는데, 나는 처음으로 이름만 듣던 청년이던 김좌진 당신을 만났소. 나는 그때 나이 사십에 15년 중역이었고, 당신은 2년 6개월의 형을 받았기에 당신이 먼저 나가서 일을 하겠다고, 밥을 먹을 때마다 내게 와서 둘이서 소곤거렸지요. 그 후 당신도 총에 맞고 나도 총에 맞았는데, 왜 나 혼자 살아서 오늘날 이 꼴을 본단 말이오. 당신은 영혼이 되시어 우리 동포를 이끌어가는 나를 보호해 주시오. 그리고 땅 밑에서 당신과 만날 때 우리 둘이서 그 옛날 서대문감옥에서 하던 말 다시 말해 봅시다.</ref>

(나는 왜 살아서 이 꼴을 보는가 - 김좌진 장군 추도사 (백범어록)

그리고 백범김구기념사업회 김구 연보

그리고 의견남길때 댓글형식으로 하지마시고 순서대로 올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편집충돌관련은 위키백과:편집 충돌참조하세요. --떠돌이 (토론) 2010년 6월 14일 (월) 22:25 (KST)답변

답글남기기도 전에 임의로 편집을 반복해놓고는 뭘 참고하라 마라 하는 겁니까? 대화가 통하지 않는 분이군요. 저것들이 김두한이 김구나 이범석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은적 없다는 증거는 되지 않네요. 맘대로 -작의적으로 해석하지 마시지요. -- Tarantius (토론) 2010년 6월 14일 (월) 22:48 (KST)답변
뭐가 임의로 반복이라는 말씀이신지? 편집충돌은 위키백과:편집 충돌 이곳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그 링크는 이미 수시로 해드렸습니다만?
  1. (명문家를 찾아서)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덕수 이씨家
  2. 김두한의 노변야화
  3. 김두한 노변야화2

--떠돌이 (토론) 2010년 6월 14일 (월) 22:51 (KST)답변

인물로보는 친일파 역사도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출판한 책입니다.--떠돌이 (토론) 2010년 6월 14일 (월) 22:55 (KST)답변
문서 훼손 하지마시고 의견을 올리세요.--떠돌이 (토론) 2010년 6월 15일 (화) 22:42 (KST)답변
문서훼손을 누가 하는데 누명을 씌우십니까? -- Tarantius (토론) 2010년 6월 15일 (화) 22:44 (KST)답변

훼손[편집]

의견없이 되돌리기는 문서 훼손입니다.

Tarantius님, 잠시 주목해 주세요. Tarantius님이 김두한 문서에 해 주신 편집은 사실 왜곡 문서를 편집하시기 전의 상태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이전의 편집 내용은 편집 역사에 기록되어 있으니 다시 한번 편집 내용을 확인해 주세요. 길라잡이질문방 등을 참고하시면 작성하신 내용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더 쉽게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행동이 계속될 경우 관리자에 의하여 편집이 차단되거나 제한될 수 있습니다. 좋은 편집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한근조는 3대에서 조선민주당으로 출마하였고 4대와 5대는 민주당 후보 6대는 민주당 비례대표가 맞고요. 그리고 무소속 김두한에게 낙선하였다.(무소속은 부분은 되돌리기 안하셨네요? 무소속도 수정도 본 사용자가 한건데.)에 달린 출처 링크에 한국독립당 후보 김두한, 한근조는 민주당 후보라고 나와있습니다. 조선민주당민주당은 다릅니다. 김두한은 한국독립당은 6대 국회 때이고 3대가 무소속입니다.--떠돌이 (토론) 2010년 6월 14일 (월) 23:16 (KST)답변

민주당을 한번만 쓰면 되지 왜 불필요하게 3번 강조합니까? -- Tarantius (토론) 2010년 6월 14일 (월) 23:17 (KST)답변
강조안했습니다만? --떠돌이 (토론) 2010년 6월 14일 (월) 23:18 (KST)답변

훼손[편집]

Tarantius님, 지금 당장 편집을 멈춰 주십시오. Tarantius님께서 김두한 문서에서 편집하신 내용은 위키백과:문서 훼손 정책에서 하지 말 것을 언급하는 훼손 행위에 해당되기 때문에 위키백과의 정책과 지침과 맞지 않아, 편집하시기 전으로 되돌렸습니다. 위키백과 사용자들이 지키는 기본적인 사항은 정책과 지침 문서를 참고하시면 알 수 있습니다.
되돌려지기 전에 하셨던 편집은 편집 역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른 사용자와 먼저 토론을 하시기를 권고합니다. 자신이 관련 정책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신다면, 이 아래해당 문서의 토론란에 본인이 왜 그러한 편집을 하셨는지 의견을 먼저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이 안내에도 불구하고 같은 편집이 반복되는 경우, 위키백과:차단 정책에 따라 위키백과의 관리자가 사용자 분을 차단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Tarantius님, 지금 당장 편집을 멈춰 주십시오. Tarantius님께서 한근조 문서에서 편집하신 내용은 위키백과:문서 훼손 정책에서 하지 말 것을 언급하는 훼손 행위에 해당되기 때문에 위키백과의 정책과 지침과 맞지 않아, 편집하시기 전으로 되돌렸습니다. 위키백과 사용자들이 지키는 기본적인 사항은 정책과 지침 문서를 참고하시면 알 수 있습니다.
되돌려지기 전에 하셨던 편집은 편집 역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른 사용자와 먼저 토론을 하시기를 권고합니다. 자신이 관련 정책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신다면, 이 아래해당 문서의 토론란에 본인이 왜 그러한 편집을 하셨는지 의견을 먼저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이 안내에도 불구하고 같은 편집이 반복되는 경우, 위키백과:차단 정책에 따라 위키백과의 관리자가 사용자 분을 차단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Tarantius님, 지금 당장 편집을 멈춰 주십시오. Tarantius님께서 김구 문서에서 편집하신 내용은 위키백과:문서 훼손 정책에서 하지 말 것을 언급하는 훼손 행위에 해당되기 때문에 위키백과의 정책과 지침과 맞지 않아, 편집하시기 전으로 되돌렸습니다. 위키백과 사용자들이 지키는 기본적인 사항은 정책과 지침 문서를 참고하시면 알 수 있습니다.
되돌려지기 전에 하셨던 편집은 편집 역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른 사용자와 먼저 토론을 하시기를 권고합니다. 자신이 관련 정책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신다면, 이 아래해당 문서의 토론란에 본인이 왜 그러한 편집을 하셨는지 의견을 먼저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이 안내에도 불구하고 같은 편집이 반복되는 경우, 위키백과:차단 정책에 따라 위키백과의 관리자가 사용자 분을 차단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떠돌이 (토론) 2010년 6월 15일 (화) 20:54 (KST)답변

누가 누구에게 경고하시나? -- Tarantius (토론) 2010년 6월 15일 (화) 20:55 (KST)답변
내용물을 확인안하고 그냥 무조건 되돌리기하시는데, 백과사전은 개인사이트가 아닙니다.--떠돌이 (토론) 2010년 6월 15일 (화) 20:57 (KST)답변
백과사전을 개인 의견대로 편집하는것이 누구인데 남을 개인사이트이며 토론없이 되돌린다고 하십니까? -- Tarantius (토론) 2010년 6월 15일 (화) 21:00 (KST)답변
닥쳐 -- Tarantius (토론) 2010년 6월 15일 (화) 20:57 (KST)답변

여운형문서 부분에 이 문장에 대해서 답변부탁드립니다. :)[편집]

의견 안녕하십니까? 한국 근현대사를 비롯해서 많은 기여를 하신점에 노고를 표합니다. :)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여운형 문서가운데 '독립운동 투신'문단에 '1910년 여운형은 동생 여운홍과 만민공동회에서 강연하는 안창호의 연설을 듣게 됐다. 여운형과 여운홍은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격하였다 한다. 그러나 안창호의 발언 하나로 지역감정이 싹트게 된다. 안창호는 윤치호에게 ‘일본인들은 최근의 적이지만 기호파는 500년간의 적이기에 먼저 기호파를 박멸하고 독립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여운형 등도 독립지사들과 함께 윤치호를 찾아가 서북파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기호파 비밀결사를 제안하였다. 윤치호는 이를 자신의 일기에 기록으로 남겼고, 윤치호는 안창호와 여운형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지역감정을 놓고, '지역감정 하나로만 봐도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자격이 없다'고 비난했다.' 이부분이 문장표현이 애매모호하다는 제 주관적인 생각이 문득 들게 되더군요...;;

제가 아는바로 여운형은 상해임정 활동할때 국민대표회의때 안창호를 따라 개조파로 활동한것으로 알고있고, 도산선생이 말년생활에 여운형과 고당 선생이 같이 보필했을만큼 두터운 관계로 알고있습니다. 그런데, '지역감정이 싹트게 되었다.'이부분은 제가 처음아는군요..;; (출처 제시한 기사에 분명히 있다는거 봤습니다.) 이부분이 애매모호하게 느껴져서 이렇게 글올리네요..; 이에 대한 답변 부탁드립니다. :)--sienic (토론) 2010년 6월 15일 (화) 22:34 (KST)답변

그 기사에도 애매한것이 년월일을 정하지 않은것이 애매합니다. 그러나 윤치호가 안창호, 여운형외 여러 명의 방문을 받으려면 둘 다 조선땅에 있을 때로 생각됩니다. -- Tarantius (토론) 2010년 6월 15일 (화) 22:37 (KST)답변
아하, 그렇군요. :) 그러면 그렇게 알겠습니다. 자료 및 서적을 좀 더 찾아보면서 문장을 가다듬겠습니다. :) (지금은 수정생각없습니다.)--sienic (토론) 2010년 6월 15일 (화) 22:39 (KST)답변

다시 말씀드리죠. 김구, 김두한, 장덕수, 한근조 문서[편집]

  1. 이제는 말할수 있다 비밀결사 백의사
  2. (명문家를 찾아서)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덕수 이씨家
  3. 김두한의 노변야화
  4. 김두한 노변야화2
  5. 교동보통학교 (현 교동초등학교) 1학년 중퇴 -> 2학년 중퇴입니다.
  6. 위연홍(외조카) -> 김좌진 문서 참고하세요.
  7. 미군정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감형 석방되었다. -> 미군정에서 사형은 1947년이고요. 이승만 정부때는 1949년에 국가보안법으로 투옥되었습니다.(한성일보 1949년 09월 10일)
  8. 김춘삼과는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9. 3대 국회의원 당선이후 이승만 정권 비판혐의로 선거법위반과 김관철 살인미수로 구속 됐습니다. ([4])
  10. 그리고 한근조는 3대에서 조선민주당으로 출마하였고 4대와 5대는 민주당 후보 6대는 민주당 비례대표가 맞고요. 그리고 무소속 김두한에게 낙선하였다.(무소속은 부분은 되돌리기 안하셨네요? 무소속도 수정도 본 사용자가 한건데.)에 달린 출처 링크에 한국독립당 후보 김두한, 한근조는 민주당 후보라고 나와있습니다. 조선민주당민주당은 다릅니다. 김두한은 한국독립당은 6대 국회 때이고 3대가 무소속입니다.
  11. "이보세요. 노변야화 봤지만 어디에도 김두한이 아버지의 죽음을 이범석이나 김구에게 들은적은 없다고 말한적은 없습니다.", "이범석이나 김구에게서 듣지 않았다는 증거를 갖고 오세요. 그건 김두한이 이규갑이나 장덕수에게 들은 이야기 정도는 돼도 김구나 이범석에게 듣지 않았다는건 아니잖습니까? 왜 맘대로 허위사실을 날조하십니까? " -> 역사문제연구소에서 말하는 이는 "일설에는 김두한이 그의 주장과는 달리 해방 후에야 이범석 쪽에서 알려줘서 자기 아버지가 김좌진 장군인 것을 알았는데, 그때 자기 아버지를 공산주의자가 죽였다고 듣고 열렬한 반공투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출처가 어디에도 출처가 없고요.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 그리고 김구라는 현대사를 바꾼 전쟁과 정치 : 전사를 통해 진단한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은 이범석에서 김구만 바꿨고요.역사문제연구소는 조선일보에서 종로구의 상인들이 철시했다는 기사가 있다는 등 김좌진이 아나키스트 내용 등도 말했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12. 교동보통학교 (현 교동초등학교) 1학년 중퇴 -> 2학년 중퇴입니다.
  13. 위연홍(외조카) -> 김좌진 문서 참고하세요.
  14. 미군정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감형 석방되었다. -> 미군정에서 사형은 1947년이고요. 이승만 정부때는 1949년에 국가보안법으로 투옥되었습니다.(한성일보 1949년 09월 10일)
  15. 김춘삼과는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16. 3대 국회의원 당선이후 이승만 정권 비판혐의로 선거법위반과 김관철 살인미수로 구속 됐습니다. ([5])

--떠돌이 (토론) 2010년 6월 15일 (화) 23:03 (KST)답변

그게 김구나 이범석이 김두한하고 아무런 대화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되지 않습니다. 증거가 안된다니까요. 노변야화 본문 어디에도 김구나 이범석에게서 아버지 얘기 들은적 없다 거나 비슷한 대화를 한 부분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승만 정권 얘기는 대화하고 상관없는 내용인데 왜 꺼내십니까? 저는 이승만 정권 비판과 김관철에 관련된 질문은 한적 없습니다. 그리고 사용자토론:떠돌이에서 토론할 뜻 없이 임의로 훼손하셧습니다. 그 해명을 해주십시오. -- Tarantius (토론) 2010년 6월 15일 (화) 23:05 (KST)답변

(편집충돌) : :: 그러니깐요, 이범석과 김구 설이란 그게 역사문제연구소의 오류라는 말입니다. 노변야화는 물론, 회고록에서도 이범석과 김구에 대해 김좌진의 죽음에 대해 들었다는 내용도 없습니다. 그리고 주위 기록에서도 물론이고요. 제가 혹시나 뭐 잘못빠트렸나하고 계속 자료를 찾아보아도 나오지도 않고요. 그리고 님이 되돌리기하는 버전에 김관철 살해미수, 선거법 위반 부분도 되돌리기 됐습니다. [6]--떠돌이 (토론) 2010년 6월 15일 (화) 23:12 (KST)답변

역차단 당하셨습니다.[편집]

여기를 참고하세요.진실과 환상 (聞きたい) (Contribuciones) 2010년 6월 15일 (화) 23:07 (KST)답변

닥쳐 라는 발언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 판델라 (토론) 2010년 6월 16일 (수) 00:24 (KST)답변

되돌림[편집]

안녕하세요 Tarantius님! 위키백과에 기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한명숙 문서에 해 주신 편집은 위키백과에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기 때문에 문서를 편집하시기 전의 상태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이전의 편집 내용은 편집 역사에 기록되어 있으니 다시 한번 편집 내용을 확인해 주세요.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위키백과 도움말을 참고하시거나 다른 사용자에게 질문해 주시면 됩니다. 연습이나 시험은 연습장에서 하실 수 있습니다. 좀더 객관적으로 서술해주세요 푹 쉬시고 일주일 후에 좋은 기여 기대합니다.--1 (토론) 2010년 6월 16일 (수) 03:07 (KST)답변

사진[편집]

pd로 볼 수 없는 사진들을 삭제했습니다. 백:저작권#퍼블릭 도메인에 제가 설명을 넣어둔 것을 참고해주세요. 작자 미상이라는 근거를 제시해주셔야 하지, 불분명한 점만을 들어 작자 미상이라고 단정지으셔서는 안됩니다. 한국/미국법상 모두 퍼블릭 도메인이기 위해서는, 1956년 이전 (56년 포함)저작자가 사망했거나/ 1956년 이전 (56년 포함) 단체 명의로 공표된 것이어야 합니다. 팁을 드리면, 1956년 12월 31일 이전의 신문 기사의 사진을 활용해주세요. 노다지를 꽤 건질 수 있습니다. --hun99 (토론) 2010년 6월 16일 (수) 06:15 (KST)답변

되돌림 안내[편집]

안녕하세요, Tarantius님!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에 기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귀하께서 이오시프 스탈린 문서에 해 주신 편집은 문제가 있어서 문서를 편집하시기 전의 상태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이전의 편집 내용은 편집 역사에 기록되어 있으니 다시 한 번 편집 내용을 확인해 주세요.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위키백과 도움말을 참고하시거나 다른 사용자에게 질문해 주시면 됩니다. 연습이나 실험은 연습장에서 하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7]의 내용을 그대로 가져오셨는데, 위키백과는 영리 목적으로도 재배포가 가능하므로 저작권이 있는 다른 글 또는 그림을 가져오시면 안됩니다. 주의 바랍니다.--소심자 (토론) 2010년 6월 26일 (토) 22:36 (KST)답변

문서 훼손[편집]

안녕하세요? 역사문제연구소 사무국장입니다.



먼저, 답변이 늦어진 점에 대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저도 문의하신 내용에 관해 해박한 전문가가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제가 확인한 바에 의거해서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문의하신 내용 중에 나오는 역사문제연구소 발행의 책들은 대중 강연 내용을 간추려서 나온 책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논문 작성과 같이 정확한 전거를 제시하면서 서술된 것이 아니라 강연주제를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여러 설들이나 자신의 경험 등이 언급되었다는 점입니다.


특히 김봉우 선생의 글은 김두한이 본래 강연주제와 직접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2) 이범석과 관련된 부분은 책의 서술(69쪽/71쪽)과 같이 "일설"일 뿐입니다.


자료로써 확인된 내용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해방 후 김두한의 우익청년단 활동에 비추어 볼 때 이범석과 이규갑, 둘 중에 그 개연성이 높은 것은 이규갑 측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상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2010년 7월 5일 11시 45분 역사문제연구소 사무국장

김구가 알려주었다는 내용은 이범석이 김두한에게 알려주었다는 일설 내용에 이름만 이범석과 김구 바뀐거고요. 답변내용 안보이십니까? 이범석과 관련된 부분은 책의 서술(69쪽/71쪽)과 같이 "일설"일 뿐입니다. 자료로써 확인된 내용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해방 후 김두한의 우익청년단 활동에 비추어 볼 때 이범석과 이규갑, 둘 중에 그 개연성이 높은 것은 이규갑 측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다른 문서 되돌리기 또하시는데 내용을 확인하고 되돌리기하시죠. 그런 행동은 문서훼손입니다.--떠돌이 (토론) 2010년 7월 6일 (화) 18:46 (KST)답변

누명씌우지 마시죠. 저 내용은 일설이라 명시했지 광복직후 김구와 김두한이 만난적 없다 라고 확정지은건 아닙니다. 단장취의하지 마시죠. -- Tarantius (토론) 2010년 7월 6일 (화) 18:49 (KST)답변

행적 서술 기준 및 사임[편집]

[토론]에 글을 올렸습니다..--Mimacds (토론) 2010년 7월 18일 (일) 14:51 (KST)답변

김정숙의 주석[편집]

김정숙은 북한(조선인민공화국) 국적입니다. 주관대로 편집하지 마십시오. 한국의 혁명가는 옳지 않습니다.--Silverlion (토론) 2010년 11월 18일 (목) 22:35 (KST)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