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마르티노 4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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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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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티노 4세는 로마에서 대관식을 가지려고 했으나, 로마는 프랑스인을 교황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마르티노 4세는 라티노 오르시니 추기경과 조프레도 다 알라트리 추기경을 친서와 함께 로마로 보내 로마에 들어가서 대관식을 갖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하지만 로마 시민들은 로마에서 새 교황의 대관식이 열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마르티노 4세는 로마에서 대관식을 가지려고 했으나, 로마는 프랑스인을 교황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마르티노 4세는 라티노 오르시니 추기경과 조프레도 다 알라트리 추기경을 친서와 함께 로마로 보내 로마에 들어가서 사순 제1주일에 대관식을 갖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ref>Theiner, ''Caesaris S.R.E. Card. Baronii Annales Ecclesiastici'' 22, under the year 1280, &sect; 5, pp. 483-484. Gregorovius, Volume V, part 2, pp. 493-495.</ref> 하지만 로마 시민들은 로마에서 새 교황의 대관식이 열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시민회의를 소집해 순전히 개인적 역량만 보고 조반니 가에타니 오르시니를 자신들을 대변하는 원로원 의원으로 뽑고 조반니에게 그의 대리인을 임명할 권한까지 주었다. 결국 마르티노 4세는 1281년 3월 23일 [[오르비에토]]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그는 재임기간 동안 평생 로마 땅을 밟지 못했다. 대신에 그는 라바냐의 피에트로를 자신의 대리로 로마에 파견했다. 그러나 1281년 4월 30일 마르티노 4세는 카를로 1세를 재차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하였다. 카를로 1세는 남은 재위기간 동안 로마의 원로원을 겸직하게 되었다.<ref>Gregorovius, Volume V, part 2, p. 494.</ref>


한편 교황은 샤를의 지위를 이탈리아 반도 안에서 강화시켜 로마의 원로원이 되게 하고 그의 동방 계획을 지지하였다. [[1281년]] 교황은 동서 교회의 일치를 방해한 [[미카일 8세|미카일 8세 팔라이올로고스]]를 파문하고 이어서 프랑스를 위해 [[시칠리아]]를 구하려고 노력한 [[아라곤의 페드로 3세]]도 파문하였다. 교황은 수도회들을 좋아하여, 특히 [[프란치스코회]]에는 칙서를 내려 그들의 설교와 고해성사권을 부여하고 가난에 관한 규율을 완화시켰다.
한편 교황은 샤를의 지위를 이탈리아 반도 안에서 강화시켜 로마의 원로원이 되게 하고 그의 동방 계획을 지지하였다. [[1281년]] 교황은 동서 교회의 일치를 방해한 [[미카일 8세|미카일 8세 팔라이올로고스]]를 파문하고 이어서 프랑스를 위해 [[시칠리아]]를 구하려고 노력한 [[아라곤의 페드로 3세]]도 파문하였다. 교황은 수도회들을 좋아하여, 특히 [[프란치스코회]]에는 칙서를 내려 그들의 설교와 고해성사권을 부여하고 가난에 관한 규율을 완화시켰다.

2017년 9월 27일 (수) 19:31 판

마르티노 4세
전임자니콜라오 3세
후임자호노리오 4세

교황 마르티노 4세(라틴어: Martinus PP. IV, 이탈리아어: Papa Martino IV)는 제189대 교황(재위: 1281년 2월 22일 - 1285년 3월 28일)이다. 본명은 시몽 드 브리옹(프랑스어: Simon de Brion)이다.

유년 생활

시몽 드 브리옹은 장 드 브리옹의 아들로 1210년경 프랑스의 일드프랑스에서 태어났다.[1] 그의 형제 질로는 사스 교구의 기사였다.[2] 봉건 영주 집안이었던 브리옹 가문의 명칭은 쥬와늬 인근에 있는 브리옹에서 유래한 것이다. 파리 대학교 출신으로 파도바볼로냐로 가서 법학을 공부했다. 1238년 교황의 호의에 힘입어 생캉탱의 의전참사회원이 되었으며, 1248년에서 1259년까지는 루앙 대성당의 의전참사회원을 지내다가 나중에 수석부제가 되었다. 동시에 그는 프랑스 왕 루이 9세에 의해 투르에 있는 생마르탱 성당의 회계원으로 임명되어,[3] 1281년 교황으로 선출될 때까지 지냈다. 1255-1259년, 루이 9세는 롱샹에 클라라회 수녀원을 세우고, 여동생 이자벨 공주를 후견인으로, 시몽 드 브리옹을 보호자로 임명했다. 1260년 시몽 드 브리옹은 루이 9세의 측근으로서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상서국장으로 등용되었다.[4]

추기경

1261년 12월 17일 프랑스 사람인 새 교황 우르바노 4세는 프랑스 상서국장 시몽을 산 체칠리아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했다. 그래서 시몽은 로마에 와서 살아야 했지만, 우르바노 4세는 루이 9세와 그의 동생 앙주의 샤를을 상대하기 위한 고위직을 대리인으로 프랑스에 파견해야 했다. 프랑스 궁정에서의 경력은 시몽이 교황의 대리인으로 일하기에 충분했다.

그리하여 시몽 추기경은 우르바노 4세에 의해 교황 특사로 임명되어 프랑스로 다시 돌아갔으며, 우르바노 4세의 후임인 교황 클레멘스 4세 때도 마찬가지였다.[5] 1264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전날, 시몽은 파리에서 시노드를 소집했다.[6] 그는 1274년 8월 1일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에 의해 재차 교황 특사로 임명되어 1279년까지 프랑스에 계속 머물렀다. 그가 부여받은 첫 번째 임무는 호엔슈타우펜 왕가만프레디에 맞서 십자군 원정을 위한 자금과 지원군을 모집하는 것이었다.[7] 그는 곧 앙주의 샤를이 카를로 1세로서 시칠리아의 왕위에 오르도록 지원하였다. 특사로서 그는 개혁을 위한 시노드를 몇 차례 주재하고 그레고리오 교황의 십자군 기금 모금에 나섰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시노드는 1276년 9월 13일 부르주에서 열린 시노드였다.[8]

시몽은 교황 특사로 계속 프랑스에 머물러야 했기 때문에 교황 인노첸시오 5세, 교황 하드리아노 5세, 교황 요한 21세, 교황 니콜라오 3세 등이 선출된 콘클라베에 연이어 참석할 수가 없었다. 니콜라오 3세는 선출된지 일주일 후에 프랑스의 교황 특사 시몽에게 친서를 보내 프랑스 왕 필리프 3세와 레온과 카스티야의 왕 알폰소가 화해를 하도록 했다.[9] 아라곤의 왕이 된 후, (시칠리아의 콘스탄체와 혼인한) 알폰소는 시칠리아를 둘러싸고 카를로 1세와 대립하고 있었는데, 교황의 평화 촉구는 카를로 1세와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1279년 4월 22일 니콜라오 3세는 시몽에게 필리프 왕에 관한 친서를 써서 보냈다. 교황이 마상 시합 금지령을 내렸지만, 필리프 왕과 프랑스 귀족들은 이를 어기고 마상 시합을 계속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몽은 금지령을 어긴 프랑스 왕을 파문하라는 지시를 받았다.[10] 니콜라오 3세는 교황청에 대한 앙주 가문의 영향력을 희석시키고자 추기경을 추가로 10명을 선임하고 수도회, 특히 프란치스코의 비중을 상당히 늘렸다. 니콜라오 3세는 개인적으로 프란치스코회를 총애하기도 하였다. 로마의 영향력 또한 강화되었다. 이 모든 것은 시칠리아의 카를로 1세의 영향력 아래 새 교황이 선출되지 않기 위함이었다.

나중에 시몽 드 브리옹은 1279년 10월 19일 니콜라오 3세에 의해 이탈리아로 소환되었다.[11] 니콜라오 3세는 1280년 8월 22일 비테르보에서 뇌졸중에 걸려 선종했으며,[12] 그가 선종할 당시 추기경은 13명이 있었다.[13] 카를로 1세는 오르시니 가문의 적이면서 니콜라오 3세가 선종한 후 일어난 시가전에서 패해 로마에서 쫓겨난 안니발디 가문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로 하였다.[14] 안니발디는 비테르보로 피신해 그곳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비테르보 시장이자 선종한 전임 교황의 조카인 오르소 오르시니를 몰아냈다. 그러자 곧바로 앙주파는 콘클라베를 장악했는데, 당시 그레고리오 10세가 세운 규칙들은 유명무실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데르 3세가 세운 규정에 따라 콘클라베에서 교황이 선출되기 위해서는 여전히 3분의 2 이상의 득표가 필요했다. 오르시니파나 프랑스 어디에서도 충분한 표를 얻지 못하고, 단지 상대 진영의 후보가 교황으로 선출되는 것을 막기만 할 뿐이었다. 이러한 교착 상태는 겨울 내내 계속되었다. 1280년 2월 2일 성모 취결례 축일에 성난 군중들이 콘클라베가 열리고 있는 주교 관저로 쳐들어가 마테오 오르시니 추기경과 전임 교황의 동생인 조르다노 오르시니 추기경을 납치했다.[15] 그러자 시몽 드 브리옹이 1281년 2월 22일 반대 없이 만장일치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마르티노 4세로 명명했다.[16]

교황

마르티노 4세는 로마에서 대관식을 가지려고 했으나, 로마는 프랑스인을 교황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마르티노 4세는 라티노 오르시니 추기경과 조프레도 다 알라트리 추기경을 친서와 함께 로마로 보내 로마에 들어가서 사순 제1주일에 대관식을 갖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17] 하지만 로마 시민들은 로마에서 새 교황의 대관식이 열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시민회의를 소집해 순전히 개인적 역량만 보고 조반니 가에타니 오르시니를 자신들을 대변하는 원로원 의원으로 뽑고 조반니에게 그의 대리인을 임명할 권한까지 주었다. 결국 마르티노 4세는 1281년 3월 23일 오르비에토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그는 재임기간 동안 평생 로마 땅을 밟지 못했다. 대신에 그는 라바냐의 피에트로를 자신의 대리로 로마에 파견했다. 그러나 1281년 4월 30일 마르티노 4세는 카를로 1세를 재차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하였다. 카를로 1세는 남은 재위기간 동안 로마의 원로원을 겸직하게 되었다.[18]

한편 교황은 샤를의 지위를 이탈리아 반도 안에서 강화시켜 로마의 원로원이 되게 하고 그의 동방 계획을 지지하였다. 1281년 교황은 동서 교회의 일치를 방해한 미카일 8세 팔라이올로고스를 파문하고 이어서 프랑스를 위해 시칠리아를 구하려고 노력한 아라곤의 페드로 3세도 파문하였다. 교황은 수도회들을 좋아하여, 특히 프란치스코회에는 칙서를 내려 그들의 설교와 고해성사권을 부여하고 가난에 관한 규율을 완화시켰다.

주석

  1. Nikolaus Backes, Kardinal Simon de Brion (Breslau) 1910, used by H.K. Mann and J. Hollnsteiner, The Lives of the Popes in the Middle Ages XVI (London) 1932: 171–205., both quoted by Kay, Richard (1965). “Martin IV and the Fugitive Bishop of Bayeux”. 《Speculum》 40 (3): 460–483 [p. 461f.] doi:10.2307/2850920. JSTOR 2850920. 
  2. F. Duchesne, Preuves de l' histoire de tous les cardinaux françois (Paris 1660) p. 220.
  3. F. Duchesne, Preuves de l' histoire de tous les cardinaux françois (Paris 1660) pp. 218-219.
  4. F. Duchesne, Histoire des chanceliers et gardes des sceaux de France (Paris 1680), 234-236.
  5. 우르바노 4세 및 클레멘스 4세와 시몽 추기경 간에 주고받은 서신들은 다음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Edmund Martène and Ursine Durand, Thesaurus novus anecdotorum Tomus Secundus (Paris 1717), 1-636.
  6. F. Duchesne, Preuves de l' histoire de tous les cardinaux françois (Paris 1660) p. 219.
  7. Martene and Durand, p. 114, Epistle 32.
  8. Lorenzo Cardella, Memorie storiche de' Cardinali della Santa Romana chiesa I. 2 (Roma 1792), p. 304; Adolphe-Charles Peltier, Dictionnaire universel des conciles I (Paris 1847), 358. Carl Joseph von Hefele, Conciliengeschichte nach dem Quellen bearbeitet second edition Volume VI (Freiburg im Breisgau: Herder 1890) 176-177.
  9. Otto Posse, Analecta Vaticana (Oeniponti: Libraria Academica Wagneriana 1878) #898.
  10. Augustinus Theiner (Editor), Caesaris S. R. E. Cardinalis Baronii, Od. Raynaldi et Jac. Laderchii Annales Ecclesiastici Tomus Vigesimus Secundus 1257-1285 (Barri-Ducis: Ludovicus Guerin 1870), under the year 1279, § 17, p. 454. August Potthast, Regesta Pontificum Romanorum II (Berlin 1875), p. 1742, no. 21567.
  11. H. Denifle, Chartularium Universitatis Parisiensis I (Paris 1889), p. 578. Lorenzo Cardella, Memorie storiche de' Cardinali della Santa Romana chiesa I. 2 (Roma 1792), p. 304
  12. Bernardus Guidonis, "Vita Nicolai III" in Ludovico Muratori, Rerum Italicarum Scriptores III. 1 (Milan 1733), p. 606-607.
  13. Conrad Eubel, Hierarchia catholica medii aevi I editio altera (Monasterii 1913), p. 10 note 3.
  14. Gregorovius, Volume V, part 2, pp. 491-492.
  15. Giovanni Villani, Cronica Book VII, chaper 58 (ed. Dragomanni) Tome I (Firenze 1844), pp. 391-392.
  16. 원래대로 하자면 교황은 마르티노 2세라는 이름을 선택해야만 했다. 그러나 당시 교황 인명록에서 교황 마리노 1세교황 마리노 2세가 마르티노 2세와 마르티노 3세라는 이름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교황은 마르티노 4세라는 이름을 선택하였다.
  17. Theiner, Caesaris S.R.E. Card. Baronii Annales Ecclesiastici 22, under the year 1280, § 5, pp. 483-484. Gregorovius, Volume V, part 2, pp. 493-495.
  18. Gregorovius, Volume V, part 2, p. 494.
전임
니콜라오 3세
제189대 교황
1281년 2월 22일 - 1285년 3월 28일
후임
호노리오 4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