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파스칼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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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2세
Pope Paschal II.jpg
본명 라이네리우스
임기 시작 1099년 8월 13일
임기 종료 1118년 1월 21일
전임 우르바노 2세
후임 젤라시오 2세
탄생 미상
신성 로마 제국 브레다
선종 1118년 1월 21일
교황령 로마

교황 파스칼 2세(라틴어: Paschalis PP. II, 이탈리아어: Papa Pasquale II)는 제160대 교황(재위: 1099년 8월 13일 - 1118년 1월 21일)이다. 본명은 라이네리우스(Ranierius)이다.

클뤼니 수도원 출신인 그는 1073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 의해 산 클레멘테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그리고 1099년 8월 19일 교황 우르바노 2세의 뒤를 이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재임기간은 약 20년으로, 중세 시기의 교황들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오래 재임한 편에 속한다.

약력[편집]

초기 생애와 교황[편집]

파스칼 2세는 로마냐 주 포를리 인근의 브레다에서 태어났다.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간의 서임권 투쟁에 있어서 그는 전임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정책을 이어받아 의욕적으로 추진했으나, 부분적인 성공만을 거두었다. 장차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될 하인리히 5세는 자기 아버지 하인리히 4세가 파문된 것을 기회 삼아 그를 향해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하인리히 5세는 나중에 자기 아버지와 화해하기 위해 교황을 찾아가 그의 사면을 요청하기도 하였다.[1] 하인리히 5세는 비록 교황의 편에 서서 자기 아버지와 적대하기는 했지만, 서임권 문제에 있어서는 자기 아버지보다 훨씬 완고한 입장을 취하였다. 1106년 1월 마인츠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서는 서임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스칼 2세에게 초대장을 보냈지만, 파스칼 2세는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1106년 10월 구아스탈라에서 시노드를 소집해 평신도의 서임권 금지를 재천명하였다.[2]

같은 해 그는 잉글랜드에서 서임권을 놓고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모와 국왕 헨리 1세 간의 갈등을 해소하려고 노력하였다. 당시 헨리 1세가 지명된 후보자에게 성직록과 영지 부여 및 왕에 대한 충성 서약을 시킴으로써 주교를 임명하자, 안셀모는 자신의 주교 반지와 주교 지팡이를 보여줌으로써 주교인 자신만이 서임권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며 맞섰다. 1106년 말, 파스칼 2세는 신성 로마 제국과의 싸움에서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의 중재를 요청하기 위해 직접 프랑스로 갔으나, 아무런 소득 없이 1107년 9월에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하인리히 5세가 자신의 황제 대관식을 위해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격하자, 파스칼 2세는 1111년 2월 그와 협정을 맺었다. 교회는 카롤루스 대제 시대부터 제국으로부터 받은 모든 소유물에 대한 사용료를 지불하는 대신 황제는 서임권을 포기한다는 내용이었다. 1111년 2월 하인리히 5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의 대관식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지만, 로마 시민들이 하인리히 5세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다. 하인리히 5세는 급히 대관식을 취소하고 교황을 인질로 삼아 피신하였다.

파스칼 2세는 61일 동안 감옥에 갇혀 힘겹게 살았으며, 카푸아 공작 로베르 1세의 노르만 군대가 그를 구출하기 위해 나섰지만 독일군에 패퇴하여 실패로 끝났다. 파스칼 2세는 감옥 생활을 견디다 못해 결국 하인리히 5세에게 굴복하여 그의 서임권을 인정하였다. 그 후 하인리히 5세는 1111년 4월 13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위에 올라,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어떠한 보복 행위도 하지 않기로 합의한 후, 알프스 너머로 철수했다. 그러나 교회 개혁파는 이에 반발하여 1112년 3월 라테라노 시노드를 통해 폭력에 의해 강요된 양보이기 때문에 무효라고 선언했다. 1111년 10월 에서 열린 시노드에서는 하인리히 5세를 파문하기로 결의하였으며, 파스칼 2세는 이를 승인하였다. 재임 후반에 들어서면서 잉글랜드에서 새로운 문제가 불거졌다. 헨리 1세 국왕이 교황의 허락 없이 주교들의 소임지를 마음대로 이동시킨 것이다. 이 소식을 들른 파스칼 2세는 1115년 시노드를 열어 그를 규탄하고 파문을 경고하였다. 토스카나의 마틸데는 1115년 죽기 전에 자신의 모든 영지를 교회에 양도했다고 알려졌으나, 이를 입증할 구체적인 증거는 남아있지 않다. 교황청에서도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 하인리히 5세는 즉시 마틸데의 영지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였고, 파스칼 2세는 그를 피해 로마를 떠났다. 1118년 초 하인리히 5세가 철수하면서 파스칼 2세는 로마로 돌아왔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1118년 1월 21일 선종하였다.

재임 시기 동안의 활동[편집]

파스칼 2세 교황은 1084년 노르만족의 로마 약탈 기간 중에 전소된 산티콰트로 코로나티 성당의 재건을 지시하였다.[3]

1116년에 그는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렌가리오 3세에게 타라고나를 탈환하기 위한 십자군을 일으킬 것을 지시하였다.[4]

파스칼 2세가 재임한 동안,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 간의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왜냐하면 1112년 후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게 모든 교회에 대한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할 것을 파스칼 2세가 요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동방 정교회 측의 대다수 성직자들과 수도자들, 평신도들이 격렬하게 반대에 부딪혀 무위에 그쳤기 때문이다.[5] 이후 교회의 분열은 현상 유지 상태로 남게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게 되었다.

최초의 아메리카 대륙 주교는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너기 약 4세기 전인 파스칼 2세의 재임기간 중에 서임되었다. 파스칼 2세는 에리크 그눕손을 그린란드빈란드의 교구장 주교로 서임했는데, 빈란드 지방은 오늘날의 뉴펀들랜드 섬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6]

1113년 2월 15일 교황 파스칼 2세는 《Pie postulatio voluntatis》라는 제목의 교서를 발표하였다.[7] 교서 내용은 몰타 기사단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예루살렘의 성 요한 구호기사단의 창설을 인가한다는 것이다. 교서에는 또한 교황의 보호 아래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기사단의 재산과 영지에 대한 세금을 면제해 준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8]

주석[편집]

  1. Megan McLaughlin, Sex, Gender, and Episcopal Authority in an Age of Reform, 1000-1122,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175.
  2. Uta-Renate Blumenthal, The Investiture Controversy: Church and Monarchy from the Ninth to the Twelfth Century,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88), 167.
  3. Matilda Webb, The Churches and Catacombs of Early Christian Rome: A Comprehensive Guide, (T.J.International, 2001), 93.
  4. Bernard F. Reilly, The Contest of Christian and Muslim Spain:1031-1157, (Blackwell Publishing, 1995), 177.
  5. J.M. Hussey, The Orthodox Church in the Byzantine Empire (OXford: University Press, 1986), pp. 170–171.
  6. Historical Records and Studies, volume 12 (1918)
  7. Piae postulatio voluntatis | http://blessed-gerard.org/bgt_1_3.htm
  8. Sire, H.J.A.: The Knights of Malta, Yale University Press, New Haven & London, 1996
전 임
우르바노 2세
제160대 교황
1099년 8월 13일 - 1118년 1월 21일
후 임
젤라시오 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