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그레고리오 7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그레고리오 7세
D567 - Grégoire VII -liv3-ch6.png
본명 일데브란도 디 소아나
임기 시작 1073년 4월 22일
임기 종료 1085년 5월 25일
전임 알렉산데르 2세
후임 빅토르 3세
탄생 1020년
Banner of the Holy Roman Emperor with haloes (1400-1806).svg 신성 로마 제국 소바나
선종 1085년 5월 25일
아풀리아 공국 살레르노

교황 그레고리오 7세(라틴어: Gregorius PP. VII, 이탈리아어: Papa Gregorio VII)는 제157대 교황(재위: 1073년 4월 22일 - 1085년 5월 25일)이다. 본명은 일데브란도 디 소아나(이탈리아어: Ildebrando di Soana)이다.

위대한 개혁가 교황 가운데 한 사람인 그는 특히 신성 로마 제국하인리히 4세서임권 분쟁을 겪은 인물로 유명하다. 동시에 그는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에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관계를 발전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하기도 하였다. 그레고리오 7세는 가톨릭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수세기에 걸쳐 진행된 금욕적 방식을 매우 엄격하게 시행한 최초의 교황이었으며, 성직매매 관행을 크게 질타하며 뿌리뽑는데 노력하였다.

사후 1584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728년 교황 베네딕토 13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약력[편집]

초기 생애[편집]

그레고리오는 오늘날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주 남쪽에 있는 그로세토의 소바나에서 태어났다. 본래 그는 비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1] 요한 게오르크 에스토아에 따르면, 그레고리오의 본명은 일데브란도 보니치로, 대장장이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일부 확인되지 않은 정보에 따르면, 어린 시절에 그는 공부를 위해 로마로 갔으며, 그의 삼촌은 아벤티노 언덕에 있는 수도원의 아빠스였다고 한다. 일데브란도가 모신 장상들 중에는 박학다식한 아말피의 대주교 라우렌시오를 비롯하여, 훗날 교황 그레고리오 6세가 되는 요한네스 그라티아누스가 있었다.[2] 그레고리오 6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3세에 의해 폐위되어 독일로 망명길에 오를 때, 일데브란도는 그를 따라서 쾰른까지 갔다.

몇몇 연대기 작가에 따르면,[3] 1048년 그레고리오 6세가 선종하자 일데브란도는 클뤼니 수도원으로 갔다고 한다. 물론 그가 클뤼니 수도원에 갔다고 해서, 그가 그곳의 수사가 된 것은 아니다. 이후 일데브란도는 툴의 아빠스 브루노와 로마까지 동행했다. 로마에 도착한 브루노는 교황으로 선출되어, 교황 레오 9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좌에 착좌하였다. 레오 9세는 자신과 동행한 일데브란도를 부제로 서품함과 동시에 교황청 행정관에 임명하였다. 레오 9세는 투르의 베렝가리오에 의해 성체성사에 대한 논쟁이 촉발되자, 일데브란도를 교황 특사로 임명하여 투르로 파견 보냈다. 레오 9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교황 빅토르 2세는 일데브란도를 재차 교황 특사로 임명했으며, 빅토르 2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교황 스테파노 9세는 그를 루카의 안셀모와 함께 독일로 보내서 당시 제국의 섭정이었던 푸아투의 아그네스 태후로부터 자신의 교황 선출에 대한 승인을 받아오라고 지시하였다. 스테파노 9세는 로마로 돌아가기 전에 선종했지만, 일데브란도는 로마에 무사히 돌아갔다.[4] 이후 그는 로마인 귀족들이 대립 교황 베네딕토 10세를 선출함으로 교회에 닥친 위기를 해결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대립 교황 베네딕토 10세는 아그네스 황태후의 뜻에 따라 자리에서 쫓겨나고, 피렌체의 주교가 교황 니콜라오 2세라는 이름으로 즉위하였다. 일데브란도는 직접 카푸아의 리카르도 1세가 지원한 노르만족 기사 300명을 이끌고 대립 교황이 도망간 갈레리아 안티카 성[5]을 공략해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그 공로로 이후 그는 로마 교회의 수석부제로 서임되었으며, 교회 행정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인사로 두각되었다.

1061년 교황 선거에서 루카의 대안셀모가 새 교황으로 선출되어 교황 알렉산데르 2세로 즉위하면서, 일데브란도는 교회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인사가 되었다. 새 교황은 그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제안한 교회 쇄신 작업을 시작했다. 일데브란도는 로마와 이탈리아 남부 노르만 왕국의 화해를 비롯하여 이탈리아 북부의 파타리아 운동과의 반독일 동맹 체결, 추기경들에게 새 교황을 선출할 수 있는 고유의 권한을 부여하는 교회법을 도입하는 등에 있어서 크게 활약하였다.

교황[편집]

교황 선출[편집]

저자 미상의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묘사한 11세기 그림

1073년 4월 21일 알렉산데르 2세가 선종한 후,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그의 장례 미사가 거행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성직자들과 평신도들 사이에 큰소리가 울려퍼졌다. "일데브란도를 교황으로!", "복되신 베드로께서 일데브란도 수석부제를 선택하셨다!" 그 직후, 같은 날에 일데브란도는 사람들에게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으로 안내를 받아 그곳에 모인 추기경들에 의해 교회법의 절차에 따라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며, 로마 사제단이 이에 동의한 순간 군중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당시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이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이 일데브란도를 지지하면서 일어난 이러한 돌발적인 행동이 순전히 즉흥적으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사전에 철저히 준비된 상태에서 일어난 결과물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당시에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확실히 그레고리오 7세가 선출된 과정은 비록 사적인 감정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반대자들로부터 강도 높은 비난을 샀다. 그가 교황으로 선출된 지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가 교황이 된 것이 적법했느냐를 놓고 비판이 일어났다는 사실로 보아, 이미 불신의 감정이 자리매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레고리오 7세의 교황 선출이 매우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1059년 교회법에 명시된 규정들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의 선출 과정 당시 기록으로 보아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새 교황의 선출에 있어서 사전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부터 양해를 구해야 한다는 교황 니콜라오 2세의 주장은 완전히 무시되었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7세의 선출에 대한 유효성을 유리한 방향으로 바꾼 것은 대다수 로마 시민들이 그에게 강력한 지지의사를 표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레고리오 7세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작성한 초기 서신들을 보면, 분명하게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선출이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1073년 5월 22일 그는 사제품을 받았으며, 같은 해 6월 30일에는 교황이 되기 위해 주교품을 받았다.

1073년 4월 22일 교황 선출 발표문에서는 그레고리오 7세를 새 교황으로 선택한 이유에 대해 그가 “신심이 깊고, 하느님과 사람들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공명정대하고, 정의로우며, 역경에 강하며, 부유함을 절제할 줄 알면서 사도들의 가르침대로 행하는 행동주의자인 데다가 떳떳하고, 겸손하며, 냉철하며, 순결하고, 친절이 몸에 배여있으며, 자기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인 동시에 어린 시절 어머니 교회의 따뜻한 품 속에서 풍요롭게 자라, 어느덧 삶의 정점에 다다랐을 즈음 수석부제로서의 위엄을 갖추는 수준까지 도달”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서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일데브란도를 교황이자 사도의 후계자로 선택하였다. 그는 그레고리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이 이름은 앞으로 영원히 그의 이름이 될 것이다.”라고 나온다.[6]

그레고리오 7세의 첫 번째 대외정책은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끄는 노르만족과 화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은 끝내 만나지 못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북유럽 제후들에게 십자군 원정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한 후,[7] 베네벤토의 란둘프 6세카푸아의 리카르도 1세 등 노르만 제후들로부터 지원의사를 받자 1074년 로베르를 파문하였다. 같은 해에 그는 라테라노 궁전에서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성직매매를 규탄함과 동시에 성직자들의 독신 생활을 재천명했다. 이 때 발표된 칙령들은 다음해(2월 24일-28일) 이를 위반할 시 파문될 것이라고 경고함으로써 한층 더 강조되었다.[7] 특히 2차 회기에서 그레고리오 7세는 오직 교황만이 주교를 서임하거나 면직시킬 수 있으며, 더불어 주교의 소임지를 이동시킬 수 있다는 내용의 칙령을 발표하였다. 이는 뒤이어 일어날 서임권 투쟁을 야기하였다.

의복[편집]

이탈리아의 역사학자 아고스티노 바라비치니 바리아니로세르바토레 로마노를 통해 많은 사람이 흰색 수단을 최초로 입은 교황이 교황 비오 5세(1566–1572)라고 여기는 통설은 잘못된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덧붙여, 그는 문서상 교황의 흰색 수단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274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 때였다고 썼다. 그는 “1067년 그레고리오 7세는 교황 선출 직후 붉은색 망토를 착용함으로써 장엄하게 교황권을 부여받았음을 알린 최초의 교황이었다”고 언급하면서 “전통적으로 선출된 교황은 두 가지 색상의 의복을 착용하는데, 바로 붉은색(모제타, 신발, 망토)과 흰색(수단, 양말)이다.”라고 덧붙였다.[8][9]

황제와의 갈등[편집]

그레고리오 7세의 교회 및 정치와 관련된 주요 정책은 대부분 독일과 연관된 것이었다. 하인리히 3세의 사망 후 독일 황실은 심각하게 권력이 약화되어 가고 있었으며, 그의 아들 하인리히 4세는 제국 내에 산적한 커다란 난제들과 맞닥뜨렸다. 이러한 정세는 그레고리오 7세에게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이는 1073년 하인리히 4세가 겨우 24세의 청년에 불과했다는 점으로 인해 더욱 유리한 상황이 되었다.

그레고리오 7세가 교황으로 선출된 때부터 2년여 동안 하인리히 4세는 작센 전쟁 때문에 그와 사이좋게 지내지 않을 수 없었다. 1074년 5월 하인리히 4세는 과거 그레고리오 교황이 파문한 교회회의 위원들과 친밀한 관계를 계속 유지한 죄를 뉘우치기 위해 뉘른베르크에서 교황 특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고해성사를 본 다음 교황에게 순명을 맹세하고, 교회를 개혁하는 일에 앞장서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러한 모습으로 인해 처음에는 교황으로부터 신임을 얻은 그였지만, 1075년 6월 9일 랑엔살자 전투에서 작센 공국을 굴복시키자마자 곧바로 태도를 바꾸었다. 그는 주저없이 이탈리아 반도 북부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다시 주장하였다. 그는 파타리아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에버하르트 백작과 테달도 신부를 각각 롬바르디아와 밀라노 대교구에 보냈다. 그리고 오랫동안 질질 끌었던 문제였던 노르만 공작 로베르 기스카르와의 동맹 관계를 다시 맺으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러한 하인리히 4세의 행동에 대해 그레고리오 7세는 1075년 12월 8일 다소 거친 언사가 담긴 서신을 보내는 것으로 응수했다. 서신에서 그는 교황에게 순명하지 않아 끝내 파문당한 성직자들에 대한 지원을 계속한 황제의 행동에 대해 비판했다. 동시에 그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암시하는 구두 메시지도 적어 보냈다. 즉 그의 책임으로 보여질 수 있는 대죄들 때문에 그가 교회에서 추방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제위도 박탈당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1975년 그레고리오 7세는 예수 성탄 대축일 밤 미사를 집전하던 중에 첸시오 1세 프라지파네라는 과격한 반대자의 기습을 받아 인질로 끌려 갔으나, 그를 매우 존경하던 로마 시민들이 힘을 합쳐 첸시오 1세의 저택을 찾아가 공격함으로써 위협을 느낀 첸시오 1세에 의해 다음날 풀려났다.

교황과 황제의 격돌[편집]

한편 일찍이 전례가 없을 정도로 과격한 교황의 문책을 받은 하인리히 4세와 독일 궁정은 크게 격분하였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그들은 서둘러 1076년 1월 24일 독일의 보름스에서 긴급 회의를 소집하였다. 독일의 고위 성직자들 중에는 그레고리오 7세에 반감을 품은 이들이 많이 있었다. 과거에 그레고리오 7세와 친밀한 관계였으나 나중에 그의 적대자가 된 로마의 추기경 휴고 칸디두스 역시 보름스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둘러 독일로 갔다. 보름스 회의는 칸디두스 추기경이 그레고리오 7세를 고발한 혐의들을 모두 인정하고, 그를 폐위시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결의문 내용은 그레고리오 7세에 대한 비난으로 가득찼으며, 독일 주교들은 그에 대한 순명을 공식적으로 철회하였다.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오 7세의 폐위를 선언하면서, 로마 시민들에게 새 교황을 선출할 것을 요구하였다.[10]

보름스 회의는 두 명의 주교를 이탈리아로 보내, 피아첸차에서 시노드를 소집하도록 하였다. 피아첸차 시노드에서 그들은 랑고바르드 주교들로부터 지지를 얻는데 성공하였다. 파르마의 롤란드는 라테라노 대성전에 소집된 시노드에 참석하여 운 좋게 연설할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그는 그레고리오 7세의 폐위가 결의되었다고 알렸다. 시노드에 참석한 교부들은 이 소식을 듣고 처음엔 놀랐으나, 이내 분노로 빗발쳤다. 다행히 그레고리오 7세의 인내로 롤란드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거나 폭행을 당하지 않고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

다음날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에 대한 파문을 장엄하게 선포하였으며, 그의 제위를 박탈하는 동시에 제국 신민들의 그에 대한 충성을 면제시켜 주었다. 세속 군주를 쫓아내는 것은 매우 대담한 행동이기는 했지만, 전례가 없지는 않았다. 200년 전에 이미 교황 자카리아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군주 힐데리히 3세의 폐위와 피핀 3세의 즉위를 승인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레고리오 7세가 선포한 파문장의 내용을 요악하자면 하인리히 4세를 교회 밖으로 내쫓는 동시에 그의 제위를 박탈한다는 것이다. 이 선고가 실질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엄포에 그칠 것인지는 그레고리오 7세보다는 하인리히 4세의 신하들, 특히 독일 제후들의 의중에 달려 있었다. 당시 사료를 보면, 하인리히 4세에게 내려진 파문은 독일과 이탈리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음을 알 수 있다.

30년 전 하인리히 3세는 교황직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한 세 사람을 폐위시킴으로써 교회에 크게 공헌한 인물로 정평이 나 있었다. 하인리히 4세는 이러한 부친의 전철을 흉내내려고 했으나, 민심을 얻지 못해 성공하지 못했다. 독일의 경우 그레고리오 7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급속도로 늘어났는데, 이러한 여론의 반응에 힘입어 각 지역 제후들은 교황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명분하에 황제에 대한 반기의 기회를 잡았다. 성령 강림 대축일에 황제가 그레고리오 7세에 대항할 조치를 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귀족회의를 소집했지만, 정작 회의에 참석한 귀족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작센 공국은 다시금 반역할 매우 좋은 기회를 잡았으며, 황제를 반대하는 세력은 나날이 힘을 키워갔다.

카노사의 굴욕[편집]

카를로 엠마누엘레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용서를 구하는 하인리히 4세

이제 정국은 하인리히 4세에게 매우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교황 특사인 파사우의 알트만 주교가 열심히 여론을 움직인 결과, 독일 제후들은 새 황제를 선출하기 위해 10월 트레부르에 모여 회의를 가졌다. 당시 라인 강 서쪽 제방의 오펜하임에 기거하던 하인리히 4세는 제후들이 누구를 새 황제로 추대한 것인지 합의하는데 실패하는 바람에 간신히 폐위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후들 사이의 의견 불일치는 단순히 그들의 결정을 잠시 지연한 것에 불과하였다. 제후들은 또한 하인리히 4세가 그레고리오 7세에게 마땅히 사죄하고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또한 그들은 100일 동안 하인리히 4세가 파문에서 해제되지 않을 경우,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는 공석 상태인 것으로 간주하기로 합의하였다. 더불어 제후들은 사태를 조기에 매듭짓기 위해 그레고리오 7세를 아우크스부르크에 초대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하인리히 4세는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100일이 지나기 전까지 어떻게 해서든지 그레고리오 7세로부터 파문 철회를 받지 못하면, 자신의 지위를 끝까지 지키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였다. 처음에 그는 사절단을 그레고리오 7세에게 보내 화해를 시도하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직접 이탈리아로 가기로 하였다.

한편 그레고리오 7세는 이미 로마를 떠나, 독일 제후들에게 군사들을 보내 1월 8일 만토바로 떠나는 자신을 호위해줄 것을 기대한다는 뜻을 넌지시 비추었다. 이에 따라 호위대가 파견되었지만, 하인리히 4세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되돌아갔다. 하인리히 4세는 부르고뉴 지역을 지날 때, 랑고바르드족으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무력을 동원해 그레고리오 7세를 제압하라는 제안은 거절하였다. 1076년 겨울, 하인리히 4세는 소수의 수행원만을 대동한 채 아펜니노 산맥의 북쪽에 있는 카노사에서 참회를 상징하는 옷을 입고 그곳에 있는 그레고리오 7세를 알현하기 위해 성문 앞에서 이틀 간 기다렸다. 이 사건이 그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이다.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와 오랫동안 협상한 끝에 그로부터 분명히 약속을 이행하겠다는 다짐을 받고 나서야 마지못해 자신의 입장을 한 발 양보하였다. 여기에는 정치적인 영향을 고려한 것도 있었다. 만약 그레고리오 7세가 하인리히 4세의 회개를 받아들여 용서해 주지 않았다면, 당연히 아우크스부르크 회의의 결과와 이후 역사 전개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며 용서를 청하는 사람을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기독교 교리상 불가능하였다. 그리고 그레고리오 7세에게 있어 종교적 책무는 정치적 이해득실보다 우선시되었다.

생애[편집]

이탈리아토스카나 지방 소바나에서 1020년에서 1025년 사이에 태어났다. 로마의 수도원에서 성직 교육을 받고 교황청과 연관을 맺어 1046년 교황 그레고리오 6세독일로 피난을 갈 때 동행을 하였으며 쾰른에서 공부하였다. 원래 클뤼니 수도원과도 연관이 있는 듯하다.

로렌의 개혁가들과 접촉하여 툴의 주교 브루노가 1048년 교황 레오 9세가 되었을 때 로마로 동행하여 교황청의 일을 담당한 지적으로 뛰어난 인물 중의 하나였다. 레오 9세는 그를 부제서품하고 교황청의 재무 담당관과 성 바오로 대성당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하였다. 이 때부터 그의 역할이 두드러지기 시작하였다. 1054년 교황청 사절로 투르의 지방 공의회를 주관하여 성체성사의 이단자 베렌가리우스의 사건을 담당하였다. 또한 그는 1058년 교황 니콜라오 2세1061년 교황 알렉산데르 2세의 선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니콜라오 2세의 업적인 1059년의 교황 선거령의 재정은 그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1073년에 힐데브란트는 만장 일치로 교황이 되어 그레고리오 7세로 명명하고 성 베드로성 바오로의 축일에 교황좌에 올랐다. 그레고리오 7세는 평소에 두 사도들에 대하여 깊은 신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레고리오 7세는 재위 초창기에 십자군의 모집에 관심이 많았으나 여러 장애 요인들로 인해 포기하였다. 동방 정교회와의 분열과 중동에서 셀주크 투르크의 작태에 관심을 가지고 성지를 순례할 수 있기 위해 무력으로 그들을 제압하려고 하였다. 또한 그레고리오 7세는 전례에도 많은 관심을 보여 로마 전례를 에스파냐에 보급하여 모자라빅 전례에 대치시키고 사계 시기에 재를 지키게 하였다.

그레고리오 7세는 예외적인 성격, 예지, 전망의 소유자였다. 서신과 칙령에서 그는 자신의 지적인 출중함을 유감 없이 드러내보였다. 그레고리오 7세는 엄격한 법을 통한 행정을 강조하여 타락해 있던 교회를 엄하게 다스렸다. 개혁은 고위 성직자들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들의 정화된 생활을 요구하였다. 성직 매매, 사제의 결혼, 평신도의 임직권을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1074년1075년의 지방 공의회는 이전 교황들의 쇄신 정책을 확인하여 성직매매와 성직자들의 결혼을 금지하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반대에 봉착하였다. 특히 프랑스신성로마제국에서 그런 움직임이 일어나자 그레고리오 7세는 사절을 보내어 극복하게 하였다. 개혁을 위하여 이제부터 서품되는 주교들은 순명 서약을 하게 하였고 정기적으로 교황청을 방문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레고리오 7세가 주관한 라테란 지방 교회회의의 결정 사항들은 자연적으로 공의회로 발전되었다.

교회 쇄신 개혁은 다른 면으로는 세속 군주의 주교 감독을 폐지한다는 의미였다. 이제까지 세속의 군주들은 자신들이 직접 주교들을 서임하여 직책과 은전을 베풀어 왔다. 그레고리오 7세는 선임 교황들에 의해 이미 단죄되어 온 이 제도를 공격한 것이다. 가장 심한 마찰을 빚은 나라는 신성 로마 제국이었다. 왜냐하면 신성 로마 제국과 교황청은 여러 면에서 상호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마찰은 전임 교황이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4세의 고문 다섯 명을 파문했을 때부터 생기기 시작하였다. 또한 밀라노의 교구장이 공석이었을 때 황제는 황실과 가까운 지원자를 임명하였으나 파타리노들은 교황과 가까운 지원자를 추천하였다. 평신도 서임에 대한 교황청의 단죄에도 불구하고 신성로마제국은 밀라노, 스폴레토, 페르모 그리고 독일에서 황제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주교아빠스로 임명하였다. 그러므로 교회 내부의 가장 큰 부패 요인은 세속인의 서임이었다. 1075년 사순절 로마 회의에서 세속인의 서임을 더욱 엄격히 규제하고 교구 점류의 모든 권리를 왕으로부터 찾아낼 것을 파문의 위협하에 결정하여 이를 12월에 왕들에게 통보하였다. 이 내용은 특히 신성로마제국의 제국주의적 전복을 의미하였다.

그레고리오 7세의 서신을 접한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굽히지 않고 1076년 1월 말 보름스에서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교황 반대 운동을 전개하여 주교 스물여섯 명의 서명을 받아 그레고리오 7세가 저질렀다는 범행들을 규탄하고 그레고리오 7세를 폐위시키기로 결정하였다. 1076년 사순절, 로마 회의에서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그의 모든 권한을 금하며 황제의 신하들에게는 충성의 의무에서 면제시켜 주었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는 폐위되지 않았다. 그는 교황청의 명령에 반대하고 황제 편에 섰던 주교들을 파문하거나 성무 정지를 시켰다. 신성로마제국 내의 제후들은 하인리히 4세가 1년 내에 그레고리오 7세에게 파문을 취소해 주도록 간청하거나 아니면 힘을 합쳐 새 황제를 뽑을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자 황제는 1076년 겨울 소수의 수행원만을 대동하고 알프스의 아펜니노 산맥의 북쪽 카노사에서 회개의 옷을 입고 마침 그 곳에 가 있던 그레고리오 7세를 만나기 위해 성문 앞에서 2일간 기다렸다. 이 사건이 그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이다.

하인리히 4세는 제후들의 분쟁에 있어서 교황의 중재적 판결에 따른다는 조건으로 그레고리오 7세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를 받아 권한의 일부를 회복할 수 있었으나 제국의 위세는 무너지고 말았다. 황제의 마음은 복수로 불타고 있었다. 얼마 안 가 제후들이 1077년 3월 15일 교황청의 승인 없이 슈바벤공작 루돌프를 새 황제로 선출하자 그 여파로 신성로마제국에서는 3년간 격렬한 내전이 일어났다. 이 내란을 중재하기 위하여 그레고리오 7세는 《대화》를 발표하여 양측의 분쟁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자 1080년 사순절에 하인리히 4세를 재차 파문하여 그를 폐위시키고 제후들이 선출한 루돌프 공작을 신성로마제국의 합법적인 황제로 승인하였다. 유럽의 실권은 황제에게서 교황에게로 넘어갔다. 이를 계기로 그는 유럽의 질서를 바로잡고 교황권의 절대성을 확립하여 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묘소

그레고리오 7세의 처사는 불안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1080년 6월 하인리히 4세가 브릭센에서 회의를 개최하여 라벤나의 귀베르트대립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1084년 하인리히 4세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해오자 그레고리오 7세는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한 후 로베르토 기스카르의 도움을 받아 살레르노로 피신하여 노르만족의 보호를 받다가 1085년 5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와의 대립에서 패배한 것처럼 보였으나 실질적으로는 그레고리오 7세가 최종적으로 승리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레고리오 7세는 황제만이 아니라 여러 국경을 넘어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모든 나라들과 교섭하여 통치자로 임하였다. 덴마크,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 잉글랜드, 프랑스 그리고 그 외의 여러 작은 나라들과도 연락을 취하여 로마 교회의 우위성을 주장하였다. 토스카나의 여공작 마틸다는 황제를 반대한 교황청의 동맹자로서 영토의 일부를 교황청에 양도하여 다음 세대에 교황령의 일부가 되었다.

주석[편집]

  1. Paravicini Bagliani, Agostino (December 2008). 《Medioevo》 (143): 62–63.  |제목=이 없거나 비었음 (도움말)
  2. Paravicini Bagliani, Agostino (December 2008). 《Medioevo》 (143): 64.  |제목=이 없거나 비었음 (도움말)
  3. Paravicini Bagliani, Agostino (December 2008). 《Medioevo》 (143): 66.  |제목=이 없거나 비었음 (도움말)
  4. According to the sources, feeling he was nearing his end, Stephen had his cardinals swear that they would wait for Hildebrand's return to Rome before electing his successor.Paravicini Bagliani, Agostino (December 2008). “Una carriera dietro le quinte”. 《Medioevo》 (143): 70. 
  5. "La città perduta di Galeria"
  6. Mansi, "Conciliorum Collectio", XX, 60.
  7. Paravicini Bagliani, Agostino (December 2008). “Sia fatta la mia volontà”. 《Medioevo》 (143): 76. 
  8. “Vatican newspaper examines history of red, white papal garb : News Headlines”. Catholic Culture. 2013년 9월 2일. 2014년 1월 28일에 확인함. 
  9. “L'Osservatore Romano”. Osservatoreromano.va. 2014년 1월 28일에 확인함. 
  10. Letter to Gregory VII (24 January 1076)

바깥 고리[편집]

전 임
알렉산데르 2세
제157대 교황
1073년 4월 22일 - 1085년 5월 29일
후 임
빅토르 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