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국 시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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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칭 ==
== 명칭 ==
조선전기에는 이 시기를 신라와 발해의 남북국시대로 인식하지 않았다. 이는 신라가 정통왕조라는 《[[삼국사기]]》의 사관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에 따라 신라중심으로 서술된 역사에서는, 북쪽의 발해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졌다.
조선전기에는 이 시기를 신라와 발해의 남북국시대로 인식하지 않았다. 이는 신라가 정통왕조라는 《[[삼국사기]]》의 사관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에 따라 신라중심으로 서술된 역사에서는, 북쪽의 발해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졌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한국사, 또 [[만주]]의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발해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를 통하여 역대의 사가들이 발해사를 한국사에 편입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이 등장하였다. 실학자 [[유득공]]은 《[[발해고]]》(渤海考)에서 고구려가 망한 후 남쪽에 신라가 있었고 북쪽에는 발해가 있었다고 설명하면서 이를 '남북국'이라 하였다.<ref>'及扶餘氏亡 高氏亡 金氏有其南 大氏有其北 曰渤海 是謂南北國', 유득공, 《발해고》</ref>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이 시기를 일반적으로 통일신라시대라고 불렸으나, 1970년대 이후로 발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1980년대 들어 남북국시대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한국사, 또 [[만주]]의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발해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를 통하여 역대의 사가들이 발해사를 한국사에 편입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이 등장하였다. 실학자 [[유득공]]은 《[[발해고]]》(渤海考)에서 고구려가 망한 후 남쪽에 신라가 있었고 북쪽에는 발해가 있었다고 설명하면서 이를 '남북국'이라 하였다.<ref>'及扶餘氏亡 高氏亡 金氏有其南 大氏有其北 曰渤海 是謂南北國', 유득공, 《발해고》</ref>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이 시기를 일반적으로 통일신라시대라고 불렸으나, 1970년대 이후로 발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1980년대 들어 남북국시대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라는 용어는 발해를 배제하고 신라만을 인정, "신라 하나로 통합 되다"(統一)라는 뜻이므로 발해가 빠져있다. 때문에 한국의 사학계에서 스스로 버린 발해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중국 동북공정의 정당화로 쓰이고 있다. 실제로 중국학계에서는 현재 "통일의 신라"(统一的新罗)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때문에 학계 일부에서는 최초의 통일을 신라가 아닌 [[고려]]가 이루었다고 보는 반성이 일어나고 있다. 실제로 고려태조는 발해왕자 대광현을 비롯한 발해유민들을 받아들였고, 대광현에게 왕씨성을 주어 왕족의 반열에 들게 하였다. 도올 김용옥은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용어 대신 "신라의 삼국해체"라는 용어를 책에서 사용하였다.
통일신라시대라는 용어는 발해를 배제하고 신라만을 인정, "신라 하나로 통합 되다"(統一)라는 뜻이므로 발해가 빠져있다. 때문에 한국의 사학계에서 스스로 버린 발해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중국 동북공정의 정당화로 쓰이고 있다. 실제로 중국학계에서는 현재 "통일의 신라"(统一的新罗)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때문에 학계 일부에서는 최초의 통일을 신라가 아닌 [[고려]]가 이루었다고 보는 반성이 일어나고 있다. 실제로 고려태조는 발해왕자 대광현을 비롯한 발해유민들을 받아들였고, 대광현에게 왕씨성을 주어 고려왕족의 반열에 들게 하였다. 도올 김용옥은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용어 대신 "신라의 삼국해체"라는 용어를 책에서 사용하였다.


[[중국]]의 학자들 사이에 발해사를 한국사에 포함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으며,<ref>
[[중국]]의 학자들 사이에 발해사를 한국사에 포함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으며,<ref>

2013년 3월 7일 (목) 15:19 판

남북국 시대(南北國時代) 또는 통일신라 시대(統一新羅時代)는 698년 발해의 건국 이후 신라와 공존하다가 926년발해가, 935년에 신라가 각각 멸망하면서 끝난 시대를 뜻하는 역사 용어이다.

시기

신라는 고구려백제와의 전쟁이 끝나자 내실을 기하기 위해 국가제도를 개혁하였고, 강화된 왕권으로 귀족들을 억눌렀다. 또한 인구 증가와 생산력 향상에 따라 조세가 늘어나자 수도를 정비하고 대대적인 건설공사를 벌였다. 그 무렵 압록강 북쪽에서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났다. 대조영이 고구려의 유민들을 모아 발해를 건국하고 고구려의 후신임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 역사에 북쪽의 발해와 남쪽의 신라라는 남북국시대가 시작된다.

명칭

조선전기에는 이 시기를 신라와 발해의 남북국시대로 인식하지 않았다. 이는 신라가 정통왕조라는 《삼국사기》의 사관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에 따라 신라중심으로 서술된 역사에서는, 북쪽의 발해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졌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한국사, 또 만주의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발해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를 통하여 역대의 사가들이 발해사를 한국사에 편입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이 등장하였다. 실학자 유득공은 《발해고》(渤海考)에서 고구려가 망한 후 남쪽에 신라가 있었고 북쪽에는 발해가 있었다고 설명하면서 이를 '남북국'이라 하였다.[1]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이 시기를 일반적으로 통일신라시대라고 불렸으나, 1970년대 이후로 발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1980년대 들어 남북국시대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라는 용어는 발해를 배제하고 신라만을 인정, "신라 하나로 통합 되다"(統一)라는 뜻이므로 발해가 빠져있다. 때문에 한국의 사학계에서 스스로 버린 발해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중국 동북공정의 정당화로 쓰이고 있다. 실제로 중국학계에서는 현재 "통일의 신라"(统一的新罗)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때문에 학계 일부에서는 최초의 통일을 신라가 아닌 고려가 이루었다고 보는 반성이 일어나고 있다. 실제로 고려태조는 발해왕자 대광현을 비롯한 발해유민들을 받아들였고, 대광현에게 왕씨성을 주어 고려왕족의 반열에 들게 하였다. 도올 김용옥은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용어 대신 "신라의 삼국해체"라는 용어를 책에서 사용하였다.

중국의 학자들 사이에 발해사를 한국사에 포함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으며,[2] 발해에 대한 고고학 연구에 한국 학자들의 접근을 방해하고 있다.[출처 필요]

신라

한반도를 통일한 신라는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고도의 중앙집권체계를 확립하였다. 집사부 장관인 시중의 권한이 강화되어 왕권의 전제화가 실현되었다. 신문왕은 녹읍을 폐지하였으며, 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하였다. 진골귀족과 대결 세력이었던 득난세력(6두품)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으나, 골품제는 유지되었고 진골귀족의 고위직 독점은 여전하였다.

발해와 신라의 관계

발해와 신라의 관계는 대체로 대립적이었다. 733년,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발해를 공격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두 국가의 관계가 항상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발해 남경에서 신라 금성에 이르는 신라도는 발해와 신라가 서로 교류를 했다는 증거로 보인다. 이러한 교역로는 발해의 상경에서 동경과 남경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신라에 이르던 교통로인데, “신라도”라고 불렀다. 신라도는 8세기 전반에 개설되었으리라 여겨지며, 자주 이용된 때는 8세기 후반부터 9세기 전반까지이다.[3]

주석

  1. '及扶餘氏亡 高氏亡 金氏有其南 大氏有其北 曰渤海 是謂南北國', 유득공, 《발해고》
  2. 박기성 특파원. “중국, 발해사 포함 고대사 송두리째 왜곡”. 한겨레신문. 2009년 11월 10일에 확인함. 
  3. 국사 편찬 위원회; 국정 도서 편찬 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서울: (주)두산. 63쪽.쪽. 

바깥 고리

  • 남북국시대, 《한국민족문화대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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