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물 마립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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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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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
=== 드라마 ===
* 《[[근초고왕 (드라마)|근초고왕]]》 ([[KBS]], [[2010년]]~[[2011년]], 배역:[[김하균]]
* 《[[근초고왕 (드라마)|근초고왕]]》 ([[KBS]], [[2010년]]~[[2011년]], 배우:[[김하균]]


== 참고 ==
== 참고 ==

2013년 1월 29일 (화) 19:22 판

경주 내물왕릉

내물 마립간(奈勿麻立干, ? ~ 402년, 재위: 356년 ~ 402년)은 신라의 17대 임금으로, 내물왕(奈勿王)이라고도 한다. 성은 김씨이며, 구도(仇道) 갈문왕의 자손이며, 아버지는 각간 김말구(金末仇), 어머니는 휴례부인 김씨(休禮夫人 金氏)이며, 왕후는 보반부인이며, 미추 이사금의 딸이다. 말구는 미추 이사금의 동생으로 내물 마립간은 미추 이사금의 사위이자 조카이다.

내물 마립간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는 등 지배세력이 강화되어 중앙 집권 국가로써의 발전을 보이기 시작한다. [1]이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는데, 이것은 왕권이 안정되고 다른 집단들에 대한 통치 집단의 통제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고구려와의 관계

392년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왔다. 고구려가 강성하기 때문에 이사금실성을 볼모로 보냈다. [2]실성은 401년 신라로 돌아왔다. 399년 (내물 마립간 44년)에는 고구려광개토왕군사를 보내어 신라에 침입한 왜군을 몰아내는 등 신라고구려의 보호를 많이 받았고, 이 때문에 고구려군대신라 영토 내에 머물기도 하였다. 그 후 신라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한편, 이 동안에 보다 앞선 고구려의 문화와 또한 고구려를 통하여 중국 북조(北朝)의 문화를 도입하면서 차차 발전을 하게 되었다.[3]

백제와의 관계

366년 음력 3월 백제인이 와 예방하였고[4], 368년 봄에는 백제가 사신을 보내 좋은 말 두 필을 보냈다. [5] 373년 백제의 독산 성주가 3백 주민과 함께 투항, 이사금진한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백제 근초고왕이 이에 항의했으나 내물 마립간은 주민을 돌려보내지 않았다. [6]

왜(倭)와의 관계

내물 마립간 때에는 해안가로 왜구의 침입을 많이 당하였다. 364년 음력 4월 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쳐 왔는데, 토함산 아래에 허수아비 수천 기를 세워 마주하게 하였다. 왜병은 수가 많은 것을 믿고 달려들다가 신라 복병에 걸려 크게 패했다. [7] 393년 음력 5월 왜인이 크게 쳐와 금성을 포위하고 닷새가 되도록 풀지 않았다. 장병들이 나가 싸우기를 청하는데 이사금이 거부, 적의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농성하였다. 적이 퇴각하자 2백 기병으로 퇴로를 막고 보병 1천을 내보내 협공하여 크게 이겼다. [8]

진과의 관계

381년, 위두(衛頭)를 중국의 (351년~394년)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진의 황제 부견(재위 357년~ 385년)이 묻기를 "해동의 사정을 말하매 언어가 예전과 다르니 어찌 된 일인가?" 하는데 위두가 답하기를 "이는 중국과 동일한 현상이라, 시대가 바뀌며 말과 이름이 변하니 오늘의 말이 어찌 옛과 같겠는가?" 하였다. [9]

죽음

400년 신라는 국가존망의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당시에 고구려에 볼모까지 보내며 제휴하고 있던 신라에 고구려와의 항쟁에서 계속 열세에 있던 백제가 앙심을 품고 백제와 제휴하고 있던 가야를 부추겼다. 그러자 일찍부터 신라와 경쟁관계였던 가야가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있던 일본의 소국들을 동원해 신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했던 것이다. 이미 잇단 천재지변과 의 침략으로 국력이 소진되어 있던[10] 신라는 남천가에서 대참패를 당하고 서라벌까지 가야군과 왜국의 연합군에게 함몰당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고 이에 다급해진 이사금은 백제와의 전쟁을 위해 평양[11]에 진주하고 있던 광개토왕에게 구원을 요청해 겨우 가야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덕분에 신라는 오랜 라이벌이었던 가야를 패퇴시키고 그 영역이었던 부산 일대와 낙동강 하구를 손에 넣을 수 있었지만 동시에 한동안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가야의 침공으로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이사금은 몸져 누웠고 이 때문에 이듬해인 401년 고구려에 볼모로 왔던 실성이 귀국했다. [12]그로부터 7개월 후인 402년 5월에 이사금이 서거해 첨성대 서남쪽에 능이 조영되었다. [13]

신라 후기에는 그의 방계 후손들이 왕위를 잇게 된다.

가계

  • 아버지 : 각간 김말구(金末仇)
  • 어머니 : 휴례부인 김씨(休禮夫人 金氏)
    • 왕후 : 보반부인 김씨(保反夫人 金氏) : 미추 이사금(味鄒泥師今)의 딸
      • 아들 : 눌지(訥祗) : 417년눌지 마립간(訥祗麻立干)(? - 458년) 즉위
      • 아들 : 복호(卜好) : 내물 마립간(奈勿麻立干)의 둘째 아들
      • 아들 : 미사흔(未斯欣) : 내물 마립간(奈勿麻立干)의 셋째 아들(? - 433년)
      • 아들 : 파호갈문왕(巴胡葛文王)

관련 작품

드라마

참고

주석

  1. 신라의 건국과 발전〔槪說〕〉.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2004. 4세기 말엽인 17대 내물왕(奈勿王) 때부터 지배세력이 강화되어 고대 국가로서의 기초가 잡히기 시작하였다. 
  2. 김부식 (1145). 〈본기 권3 내물 이사금〉. 《삼국사기》. 三十七年 春正月 高句麗遣使 王以高句麗强盛 送伊湌大西知子實聖爲質(37년 봄 정월에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왕은 고구려가 강성하였으므로 이찬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보내 볼모로 삼았다. ) 
  3. 〈[[: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고대사회의 발전/삼국의 성립과 발전/신라의 발전#신라의 건국과 발전〔槪說〕|신라의 건국과 발전〔槪說〕]]〉.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2004. 제2기 초인 내물왕 때는 왜(倭)의 침입을 자주 당하여 399년(내물왕 44년)에는 광개토왕군사를 보내어 신라에 침입한 왜군을 몰아내는 등 고구려의 보호를 많이 받았고 이 동안에 보다 앞선 고구려의 문화와 또한 고구려를 통하여 중국 북조(北朝)의 문화를 도입하면서 차차 발전을 하게 되었다. 
  4. 김부식 (1145). 〈본기 권3 내물 이사금〉. 《삼국사기》. 十一年 春三月 百濟人來聘(11년 봄 3월에 백제인이 와서 예방하였다. ) 
  5. 김부식 (1145). 〈본기 권3 내물 이사금〉. 《삼국사기》. 十三年 春 百濟遣使 進良馬二匹(13년 봄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좋은 말 두 필을 바쳤다. ) 
  6. 김부식 (1145). 〈본기 권3 내물 이사금〉. 《삼국사기》. 十八年 百濟禿山城主 率人三百來投 王納之 分居六部 百濟王移書曰 兩國和好 約爲兄弟 今大王納我逃民 甚乖和親之意 非所望於大王也 請還之 答曰 民者無常心 故思則來 斁則去 固其所也 大王不患民之不安 而責寡人 何其甚乎 百濟聞之 不復言 夏五月 京都雨魚(18년 백제 독산성(禿山城) 성주가 300명을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으므로 왕이 그들을 받아들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하니, 백제 왕이 글을 보내 말하였다. 두 나라가 화친을 맺어 형제가 되기를 약속했었는데, 지금 대왕께서 우리의 도망한 백성을 받아들이니 화친한 뜻에 크게 어긋납니다. 이는 대왕이 바라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바라건대 그들을 돌려 보내십시오. [왕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백성은 일정한 마음이 없다. 그러므로 생각나면 오고 싫어지면 가버리는 것은 진실로 그렇기 때문이다. 대왕께서는 백성이 편치 않음은 걱정하지 않고 도리어 과인을 나무라는 것이 어찌 이렇게 심한가? 백제에서 그 말을 듣고 다시는 말하지 않았다. ) 
  7. 김부식 (1145). 〈본기 권3 내물 이사금〉. 《삼국사기》. 九年 夏四月 倭兵大至 王聞之 恐不可敵 造草偶人數千 衣衣持兵 列立吐含山下 伏勇士一千於斧峴東原 倭人恃衆直進 伏發擊其不意 倭人大敗走 追擊殺之幾盡 (9년 여름 4월에 왜의 군사가 대거 이르렀다. 왕이 듣고서 대적할 수 없을까 두려워 풀로 허수아비 수천 개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서 토함산 아래에 나란히 세워 두었다. 그리고 용맹한 군사 1천 명을 부현(斧峴)의 동쪽 들판에 숨겨놓았다. 왜인이 자기 무리가 많음을 믿고 곧바로 나아가자 숨어 있던 군사가 일어나 불의에 공격하였다. 왜군이 크게 패하여 달아나므로 추격하여 그들을 거의 다 죽였다. ) 
  8. 김부식 (1145). 〈본기 권3 내물 이사금〉. 《삼국사기》. 三十八年 夏五月 倭人來圍金城 五日不解 將士皆請出戰 王曰今賊棄舟深入 在於死地 鋒不可當 乃閉城門 賊無功而退 王先遣勇騎二百 遮其歸路 又遣步卒一千 追於獨山 夾擊大敗之 殺獲甚衆(38년 여름 5월에 왜인이 와서 금성(金城)을 에워싸고 5일 동안 풀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지금 적들은 배를 버리고 [육지] 깊숙이 들어와 사지(死地)에 있으니 그 칼날을 당할 수 없다'고 말하고 성문을 닫았다. 적이 아무 성과없이 물러가자 왕이 용맹한 기병 200명을 먼저 보내 돌아가는 길을 막고,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獨山)까지 추격하여 양쪽에서 공격하여 크게 쳐부수었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 
  9. 김부식 (1145). 〈본기 권3 내물 이사금〉. 《삼국사기》. 二十六年 ... 遣衛頭入苻秦 貢方物 苻堅問衛頭曰 卿言海東之事與古不同 何耶 答曰 亦猶中國 時代變革名號改易 今焉得同(26년... 위두(衛頭)를 부씨의 진(秦)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부견(苻堅)이 위두에게 물었다. 경(卿)이 말하는 해동(海東)의 일이 옛날과 같지 않으니 어찌된 것인가? [위두가] 대답하였다. 역시 중국과 마찬가지로 시대가 변혁되고 이름이 바뀌었으니, 지금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 
  10. 이전까지의 일련의 왜란도 가야의 사주에 의해서였다는 설이 있다.
  11. 북한 평양직할시
  12. 김부식 (1145). 〈본기 권3 내물 이사금〉. 《삼국사기》. 四十六年 ... 秋七月 高句麗質子實聖還(46년 ... 가을 7월에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실성(實聖)이 돌아왔다. ) 
  13. 김부식 (1145). 〈본기 권3 내물 이사금〉. 《삼국사기》. 四十七年 春二月 王薨(47년 봄 2월에 왕이 죽었다. ) 
전 대
흘해 이사금
제17대 신라 국왕
356년 - 402년
후 대
실성 마립간

틀:신라의 역대 국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