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홍희
이 문서는 영어 위키백과의 Choi Hong Hi 문서를 번역하여 문서의 내용을 확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
최홍희 | |
---|---|
기본 정보 | |
국적 | 대한민국 |
출생일 | 1918년 11월 9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함경북도 명천군 |
사망일 | 2002년 6월 15일 | (83세)
사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 |
사용 무술 | 태권도, 가라테, 택견 |
스승 | 한일동, 김현수, 후나코시 기친 |
계급 | 태권도 9단, 가라테 2단 |
기타 | 본관: ( 전주) 군복무: 대한민국 육군 (1944년 ~ 1962년) 육군 제6군단 (근무) 육군 제6군단 부군단장 (지휘), 대한민국 육군 소장 (최종계급) 학력: 육군사관학교 3기 졸업 조선경비보병학교 졸업 태권도 보급 운동가 활약 |
최홍희(崔泓熙, 1918년 11월 9일 ~ 2002년 6월 15일)는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태어난 대한민국 육군 장성 출신 무술가로, 국제 태권도 연맹(ITF)이 주장하는 태권도의 창시자이다.[1]
항일 투쟁
[편집]일본 주오 대학 법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4년 1월에 징용되어 평양의 42부대에서 근무하였다. 그는 조선 학병을 중심으로 전국 반일동맹 조직을 도모했다가 검거되어 6년형(7년형이라는 말도 있다)을 선고받아 평양 형무소에서 수감되었다가 해방과 함께 풀려났다.
해방 후
[편집]해방 이후 군에서 장성으로 복무하던 그는, 해방 전 일본에서 배운 가라테를 중심으로 한국군에게 새로운 무술을 가르쳐야겠다고 결심하고 군대내에 도장 오도관을 세워(민간 청도관 출신 인물들이 많았다) 지금의 ITF 태권도의 원형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또 택견에서 영감을 받아서 '태권도'라는 명칭을 창안한다.
1955년 초기 태권도에 많은 기여를 한 청도관에서 손덕성 2대 관장 명의로 명예 4단증을 받았다.[2]
1961년 육군 제6군단 부군단장을 역임하였으며 1962년에 예편하였다.
1966년 3월 22일에 국제태권도연맹(ITF)를 창립하고 총재로 취임하였다.
1972년 3월 박정희 정권과 갈등을 빚다 캐나다로 망명한 후 유신체제 반대 운동을 펼쳤다.
1980년대 들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몇 차례 방문해 ITF 태권도를 보급했다. 오늘날 ITF 태권도가 북한 태권도라는 잘못된 속설이 퍼진 계기.
2002년 6월 15일 북한과 캐나다를 오가며 위암 치료를 받다 평양에서 사망한 뒤 애국열사릉에 안장됐다.
최홍희의 영향으로, 스위스에서는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국제태권도연맹(ITF)태권도가 주류를 이루었다.[4] 사실 북미나 공산권에서도 꽤 큰 조직세를 갖췄었다. 다만 그의 사후 내부가 북한계/비북한계로 나뉘어 파벌 싸움이 일어나며 쪼개졌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90년대 다부작 영화 《민족과 운명》9부~13부의 모델이 최홍희이다.[5]
각주
[편집]- ↑ tae kwon do (martial art) - Britannica Online Encyclopedia
- ↑ 서울신문, 1959년 6월 16일자.
- ↑ “崔泓熙씨任命”. 동아일보. 1962년 5월 1일. 석간1면.
政府는 外務部待機大使로 있던 崔泓熙씨를 30日字로 「말라야」聯邦駐箚特命全權大使로 任命했으며
- ↑ 최효찬 기자 (1999년 7월 27일). “맨주먹으로 일군 ‘태권 스위스’”. 경향신문사.
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스위스에서는 「북한식 태권도」가 주류를 이뤘다고 한다. 제3대 대한태권도협회장(65~66년)을 역임하고 월북한 최홍희의 제자들이 활동했다. 지금은 북한인들이 거의 활동하지 않는다고 한다.
- ↑ 문철 기자 (1996년 9월 2일). “북한상식 연작영화 「민족과 운명」”. 동아일보사.
그동안 이 다부작은 ... 崔泓熙(한국외교관출신·전국제태권도연맹 총재) .... 등 지도급 해외동포들의 생애를 다뤘다.
외부 링크
[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최홍희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초대 주(駐)말레이시아 대사 1962년 4월 ~ 1964년 11월 |
후임 최규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