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Theantares/연습장

〔 〕【 】『』≪≫ 《》 「」々 ㆍ· 。○○ 김일성·김정일·김정은 김일성ㆍ김정일ㆍ김정은

蘭星會名簿 / 蘭星會本部 編 東京 : 蘭星會本部, 昭和47[1972]
北朝鮮踏査期(完) / 本社特派記者 朴燦植 = p.(16,14)
p.(20, 18) : 김일성은 가짠가? (12월 3일 화) - 12월 6일 (금) 남행열차 승차
p.14:北朝鮮踏査記 / 本社特派記者 朴燦植 = 14,14,2 - 10월 29일 서울 출발
p.14:北에對한關心 / 小梧生 = 14,14,2 - 북한에 언론, 집회의 자유가 없었음 맹비판
p.19 : 北朝鮮特輯 : 作家가 본 金日成將軍 / 韓雪野 = 30,19,1
p.21 : 北朝鮮踏査記 / 本社特派記者 朴燦植 = 32,21,4
p.28 : 軟禁中의曺晩植氏近況 / P記者 = 39,28,1
p.4 : 凱旋한 우리 팔티산 名將 金日成將軍 會見記 / 韓一宇 - 동흥사건을 김일성이 주도.
p.5 : 간도의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는데... (북한 암행기 : 1945년 11월 18일 기차로 방북)
凱旋한 우리 팔티산 名將 金日成將軍會見記 / 平壤 韓一宇 = 5,4,1 - 1945년 12월
北韓 三十八度以北暗行記 : 蘇聯進駐下의 北朝鮮現狀 / 洪淳穆記 = 6,5,2 - 1945년 11월 18일 ~ 12월 14일
580 김영순(김광렬, p.372), 1110 박경순(박운석, p.398), 1223 박운석(p.404), 2289 이정락(이종락, p.455), 1282 박차석(p.406)
국가기록원 발간 자료
일제문서해제 행형편 2012
24권 p.198 (원 p.36) 이정락
통합당 "국정원장직과 이해충돌 우려"
박지원, 전두환 언급!? 강력한 지도자가 그리웠나 뉴데일리 2013. 7. 1
“전두환 대통령 당선 진심 환영…모든 국민 새 지도자 밑에서 승공통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잘못한 부분이 있지만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정치는 잘했다고 말하는 분이 많다"며 "호남에서도 그렇게 말하는 분들이 꽤 있다"

" 방학 때마다 서클 친구들과 공사판을 나갔죠. 공사판 잡부로 닥치는 대로 일했어요. 내 등록금 벌어 놓고 혁명운동을 해야 하니 정신없이 바빴죠.(웃음).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일 하면 일당이 5만원이었는데, 반대로 저녁부터 아침까지 일하면 7~8만원을 줘요. 그래서 야간에만 작업했죠. 시청 앞부터 덕수궁 돌담길 앞 케이블 매설공사 주역이 접니다. 그때는 한 학기 등록금이 70만원을 웃돌았는데, 한 열흘 일하면 등록금을 벌었죠.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 대학교 등록금은 보통 오른 게 아니에요. 학자금 대출해준다고 해결되는 게 아닌데…."

金學俊(김학준) 韓国(한국)전쟁 ⑯ 金日成(김일성)의 공식등장 金日成(김일성),曺晩植(조만식) 첫 対面(대면)서 "가짜"실토
로마넨코,요리집서 金日成(김일성)을 소개
권투선수같은 모습……군중(群衆)들 "속았다"
국내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들도 크게실망‥‥평양(平壤)떠나 서울로
출처 : 조선일보 뉴스 라이브러리


동국대학교(경주) 불교문화대학 불교학부 교수
惠山署演武塲に戰死者を收容, 負傷者は道立醫院に 조선신문 [朝鮮新聞] 1937년 06월 07일 2면 1단
谷巡查以下七名戰死す, 越境の金一味追擊中
討伐の銳鋒を避け密林地帶に逃入, 我が討伐隊連絡行動に惱む 조선신문 [朝鮮新聞] 1937년 06월 08일 2면 1단
匪團を追跡 조선신문[朝鮮新聞] 1937년 06월 10일 2면 4단
國境の警備愈愈嚴重 조선신문 [朝鮮新聞] 1937년 06월 11일 2면 4단
食糧に窮迫し襲擊の謠言頻り, 大密林地帶に逃入討伐困難, 金日成一派虎視耽耽 조선신문 [朝鮮新聞] 1937년 06월 12일 2면 3단
  • 沢庵 宗彭(たくあん そうほう、澤庵 宗彭、天正元年12月1日(1573年12月24日) - 正保2年12月11日(1646年1月27日)
沢菴和尚全集 https://dl.ndl.go.jp/info:ndljp/pid/1088656
新釈沢庵和尚法語 https://dl.ndl.go.jp/info:ndljp/pid/1259004
https://ndlonline.ndl.go.jp/#!/search?searchCode=SIMPLE&lang=en&keyword=%E6%B2%A2%E5%BA%B5
沢庵 德川家光 東海寺 童子僧 德川実紀 徳川実記
https://ja.monumen.to/spots/93

問答河岸由来記

寛永の昔 徳川三代家光 将軍 勇壮活達の明君也 宗彭沢庵 禅師に帰依して 品川に萬松山東海寺 を建つ 寺域五萬坪寺領五百石 殿閣僧房相連って輪奐美を極む 将軍枉駕年間十数度法を聴き 政治を問う 厚遇思う可し 将軍一日天地丸に座乗し品海を渡り目黒河口に繋船して東海寺に詣し 喫茶法話 薄暮に至って江戸城に還らんとす 禅師河畔に立って是れを送る 将軍乗船に臨んで禅師に参問して曰ク 海近くして如何が是れ東海寺と 禅師答而曰ク大軍を指揮して将軍と言が如しと 将軍一笑 纜を解いて而て還る 時移りて三百年地勢亦変じ河海遠し然れ共 市人傳えて問答河岸と称す 一世の英主 一代の名僧 諧謔談笑の蹟 菊鮨總本店主其煙滅を惜み石に録して永世芳を傳えんとす 亦可しからすや 昭和四十三年仲秋 衆議院議員 宇都宮徳馬 書

독립군의 두목 洪範圖의 消息, 수비대가 밤중에 드리칠 때 혼잡통에 저격당한 말 매일신보[每日申報] 1920년 11월 06일 3면 4단
김준연 - 모스크바에서 공산대학 다니는 오성륜을 만남


月別 分館 匪首名 匪賊團名 部下數 根據地 橫行地區 系統 摘要
8월   金一善 反日遊擊隊

20

汪淸   共匪 最近 人民革命軍 傍系에 編入되었음.
9월   金一善 人民革命軍 第二軍獨立師

20

汪淸 汪淸 延吉 合流匪  
'Tucker Carlson Tonight' host on police visiting the home of activist who criticized AOC. #FoxNews​
조선의 풍광 1927년
東北抗日聯軍史料 / 東北抗日聯軍史料編寫組 編. 下. [北京]: 中共黨史資料出版社, 1987. (김일성의 항련제1로군약사 수록)
주보중, 김책에게 보내는 김일성의 서한 (번역문) : 1941년 9월 30일
[북카페] ‘박물관에서 읽는 세계사’ 외 조선일보 2020.12.26

김일성, 1925~1945 중국과 소련에서 무엇을 했나

재미 정치학자 이정식 교수가 1983년 쓴 ‘만주에서의 혁명적 투쟁(Revolutionary Struggle in Manchuria: Chinese Communism and Soviet Interest, 1922-1945 Hardcover – May 1, 1984 by Chong-Sik Lee)’, 재미 정치학자 서대숙 교수가 1988년 쓴 ‘김일성,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을 휘하에 거느리고 있던 동북항일유격대 지휘관 저오바오중이 1991년 낸 ‘동북항일유격일기’,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등 네 권의 책에 기록된 김일성을 비교했다. 국제정치학 박사인 저자는 “북한에 대한 객관적 접근과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김일성 연구서를 썼다”고 말한다. 박승준 지음, 유나미디어, 1만5000원.

1923년 9월 29일자 고경제3172호 : 박용만, 신팔균, 김경천...
P.688 55.의열단의 근상에 관한 건
P.850 63.의열단의 근상에 관한 건
P.126 9.의열단의 근정에 관한 건
八(팔)일오전二(이)시五十(오십)분 김일성(金日成(김일성))비임(林(임))참모의 인솔...
金日成一派匪賊(김일성일파비적) 東興署對岸(동흥서대안)에襲來(습래) 1938.04.10 조선일보 2면
p.5 제1독립사장 주진 p.6 제2독립사장 박춘산
p.30 주진 - 인민혁명군 독립제1사 300명
주모 (朱某, 1933년 30세 정도) 중국공산당 滿洲省委 延吉縣委 依蘭溝區 유격대 제1소대장
빨치산 김일성이 나오는 초기 기록들 : 1932~1936
金日成(김일성) 吳義成(吳义成오의성) 朱鎭(주진)
박춘 (朴春, 1933년 30세 정도)
김응률(金應律, 1900 ~ ?) 동흥중학 졸
이기석 (李基石, 1897~ ?)
김병률 (金炳律, 1897~ ?) 함북 출신
김병률 (金炳律, 1911~ ?) 奉天省 安圖縣 少沙河 / 中國共産黨 滿洲省委 安圖縣委 간부
박성춘 (朴成春)
김칠룡 (金七龍, 1900~ ?) 강원 철원 출신
[이기석(李基錫, 생몰년 미상) 朴成春 金炳律 金七龍 朴春山 姜萬熙 姜晩熙]

(조공 만주총국 위원) 함북 출신으로, 용정(龍井) 동흥중학(東興中學)에서 수학했다. 1923년 5월 고려공산청년회 간도지부 결성에 참여했고 1924년 9월모스끄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했다. 러시아공산청년동맹(꼼소몰)에 가입했다. 1925년 1월 연해주에서 조선공산주의운동의 통일을 목표로 비밀리에 공산주의 단체를 결성했다가 종파행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러시아공청에서 제명되었다. 그해 하얼삔(哈爾寶)에서 고려공청 만주비서부 결성에 참여했고 1926년 12월 고려공청 중앙위원 후보로 선임되었다. 1927년 10월‘제1차 간도공산당 검거사건’ 당시 검거를 모면했고, 11월 검거로 인해 파괴된 고려공청 동만도(東滿道)조직 재건에 착수했다. 1928년 3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위원, 7월 조공 동만구역국 책임비서, 고려공청 동만도 책임비서로 선임되었다. 1929년 1월 고려공청 중앙위원회 재결성에 참여하고 만주총국 책임비서로 선임되었다. 그해 5월 조공 재건운동을 지도하기 위해 귀국하여 1930년 6월 조공(ML파) 함남도당을 결성하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1004247430、密大日記 第8冊 共8冊 昭和11年(防衛省防衛研究所)」
標題:朝鮮国境守備隊の件(分割4) 朝鮮国境守備隊월보 1935년 5월, 8월
p.238 보병제75연대 월보 (8월)
pp.241~242 동북인민혁명군(동북항일구국군) 제2군 제1독립사 제1단 창단이래 단장 임승규
p.249 안봉학 제1단장 승임.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1004247440、密大日記 第8冊 共8冊 昭和11年(防衛省防衛研究所)」
標題:朝鮮国境守備隊の件(分割5) 国境守備隊월보 1935년 9월 朝鮮군참모부
p.92 보병 제75연대 월보 - 1935년 9월
pp.112~113 동북인민혁명구국군 2군 제2사 정치위 전일성 / 제1단 참모처 김일성
p.117 보병 제76연대 국경수비대월보 - 1935년 9월
pp. 131~ 135 : 汪淸-琿春 縣境 十里坪 林海山 부대 60명 穩城 對岸 凉水泉子 부근에서 빈번하게 출몰하며 금품을 약탈하거나 협박장을 보내옴. 南大洞 각 部落 屯長 앞으로 보낸 협박장 要求物品 東村屯長殿 西洞屯長殿 水南洞屯長殿
음력 8월 8일자 협박장(脅迫狀)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 제2군 제1사 제3단(第二軍 第一師 第三團) 계 : 정속 (精粟) 1. 좁쌀을 깨끗이 찧음. 또는 그렇게 한 쌀./2. 조를 찧은 후 물을 조금 부어서 다시 깨끗이 찧는 일. 조포(粗布) : 막베. 거칠고 성기게 짠 베 じかたび (地下足袋·直足袋) (노동자용의) 작업화((왜버선 모양에 고무 창을 댐)). (=ちかたび) / 맥분(麥粉) 1. 밀가루. 2. 보릿가루. 石 疋 袋
p.175 : 무송현 비적표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1004247600、密大日記 第8冊 共8冊 昭和11年(防衛省防衛研究所)」
標題:続 朝鮮国境守備隊の件 朝鮮国境守備隊월보 1935년 11월
p.45 보병 제75연대 월보 - 1935년 11월

김일성 : 만주서는 중국공산당을 위해 투쟁, 소련으로 도주하여 소련 용병이 되어 5년간 아무 항일투쟁도 하지 않고 소련의 목적에 맞는 교육과 훈련을 받음.- 북한 주민들이 누군지도 모르고 자력으로 정치무대에 얼굴을 내밀 능력도 안되는 자가 지도자가 될 정당성은 전혀 없었음. 소련이 무력과 정치공작을 동원하여 자신들 용병들에게 북한의 핵심권력을 쥐어준 것에 지나지 않음.

이 책 부록에 참고자료로 밝힌 관련 서적과 자료들 가운데, 지금까지 북한이나 남한에서는 물론이고 중국에서조차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자료들 제목과 출처는 자세히 밝히지 않았다. 그 이유 중 하나로 중요한 자료의 상당 부분, 예를 들면 지금까지 한 번도 세상에 공개된 적이 없었던 연고자들의 회고 자료나 연고자 본인 및 가족들이 제공한 김일성과 관련한 많은 증언과 사료들을 실명으로 공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나에게 기꺼이 증언해주고 자료를 제공했지만, 실명만큼은 절대 공개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그중에는 국가기밀 보존시한과 상관없이 여전히 봉인된 상태인 주요 자료들을 유출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도 한 분 계셔서, 솔직히 지금까지도 나는 불안하고 미안한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한편으론 이 책을 전문적인 연구논문이나 정통 역사서 형식 대신 논픽션 형태로 집필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

저자에게는 자신이 보았거나 들었다는 자료와 증언을 구체적으로 속시원히 밝히지 못하는 사정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 때문에 이 책에서 새로이 내놓은 확인이 어려운 주장들의 학술적 가치도 별로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자료나 증언이 실재하는지, 내용이 정말 믿을만한 것인지 검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간의 대화는 대부분 저자의 창작이고, 줄거리는 항일연군 출신자들의 후일 회고담이나 관련자 증언에 기초한 것이라 주장하지만 근거가 명확히 제시되지도 않아 그가 새롭게 밝혀냈다는 사안들을 얼마나 검증된 사실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이 책은 진지한 역사서로 보기는 곤란하고 허구가 많이 가미된 역사 소설 정도로 보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항일연군과 88여단 출신 조선인들은 대다수 북한 주민들이 그 존재도 알지 못했고, 북한의 권력을 장악할만한 아무런 명분도 없었지만 소련군 앞잡이가 되어 그들 군사력의 도움으로 북한이란 나라를 강탈해 갔다. 북한 주민들은 해방된 것이 아니라 1930년대대에 국경을 자주 침범하던 만주 비적단 출신들에게 패망한 일제의 뒤를 이어 다시 나라를 빼앗긴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일만군과 투쟁도 하고 양민을 상대로 비적행위도 서슴지 않은 잔인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무슨 목적으로 투쟁했는지는 해방 후 한 일들로 명명백백히 다 드러나 있다. 노동자 농민을 위한다는 공산주의자들의 구호는 언제나 그렇듯이 노동자 농민을 속여 권력을 장악하고 그들을 착취하기 위한 술수에 지나지 않았다. 북한과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이 잡은 권력을 언제 한번 내려놓은 적이 있으며, 그들이 말로만 사랑한다는 인민들에게 주권을 돌려준 적이 있는가? 대를 물려가며 인민들의 대부분 자유를 빼앗고 노예로 부리며 착취하여 자신들만 호의호식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해외로 빼돌리는 흡혈귀가 되어 있다. 동북항일연군 출신들을 항일영웅이라며 찬양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만들어 놓은 국가의 오늘날의 참상은 보지 않는 외눈박이들이다.

流氷(유빙)으로渡江不能(도강불능),江岸(강안)에서掩護射擊
於赤島二千四百名(어적도이천사백명) 激浪(격랑)에싸혀救護絕叫(구호절규) 1935.07.31 동아일보 2면
[좋은 장소] 김정일 생가 다녀왔네요ㅎㅎ 시베리용 2020.01.19
1914년 행정구역 폐합 시에 풍산군 웅이면 용문리로 되었고, 광복 직후에 웅이면의 도하리가 편입되었으며, 1952년 군면리 대폐합에 따라 풍서군 용문리로 되었다.
40°57'10.4"N 127°59'43.1"E (40.952900, 127.995300) 구글지도
장백이 현으로 된지 20년 밖에 안돼.
Report on Communist military activities and organization in North China], December 17, 1945, 5 pp. [WN#18105] : p.205
김일성 평전 (하권) 제8부 내 조국 제35장 보천보의 총소리 5. 전영림과 반목 : 김정부와 회견 기사 - 엉터리 해석
https://kobay.co.kr/kobay/item/itemLifeView.do?itemseq=10069KTDFYH
포로 문만순 소령 심문
p.24 SPS (특경부) -김일성도 감시 당함.
p.25 김정숙은 한국전 반대하다 살해당함?
p.79 군사위원회 - 1950년 2월~3월 구성. 6월 26일 공표
p.96 소련군 보병 참전
p.114 남일
p.116 최용건
p.119 무정
p.121 이상조
p.122 유성철
p.124 박헌영
p.127 최연 (최원) 정찰국장
p.137 최현 - 무식함.
p.138 유경수
p.141 최용진


  • 친일파 몰이의 속내 : 자유 민주 국가의 중요성을 감추고 시선을 항일투쟁으로 돌려 항일투쟁만 했으면 이후 무슨 짓을 했어도 무죄라는 관념을 형성하기 위한 것.
자유와 인권이 철저히 무시 당하는 북한의 처참한 상황을 외면하고 김일성의 항일투쟁 이력으로 그런 나라를 만든 책임에 대해 면죄부를 줌.
大韓光復團 甲山分團과 同 第三分支團 朝鮮獨立運動 第1卷 分冊 朝鮮國內に於ける民族主義運動 1921년 04월 14일
무장독립단 15명, 함남 갑산군 會麟面주재소 습격. 1921년 10월 17일
甲山에 武裝團, 會麟駐在所襲擊事件 매일신보 [每日申報] 1921년 10월 19일
不逞の一團會鱗駐在所を襲擊す 조선시보 [朝鮮時報] 1921년 10월 20일
甲山敵駐在所 襲擊 詳報 독립신문 1921-11-19
二十名의 獨立團이 甲山敵駐在所를 襲擊 독립신문 1921-10-05
駐在所를 襲擊, 陰謀團 20명이 甲山에 出現 매일신보 [每日申報] 1921년 09월 26일
駐在所 武器를 掠奪, 甲山襲擊事件 詳報 매일신보[每日申報] 1921년 09월 30일
http://srchdb1.chosun.com/gisa/art2040_call.html
  • 李鍾洛 부하 3명 又 피검 : 조선일보 1931.03.26 석간2 2 면
  • 만주의 비밀결사. 농민동맹사 공판. 치안유지법과 살인죄로 구형. 신의주 법원에서 : 조선일보 1933.02.03 조간 6 면
  • 기회 엿보던 共匪團 冬期들어 大跋扈. 金周賢, 曺國鉉, 金日成 일파 암중 활약. 부대를 편성?處處에서 약탈 자행 : 조선일보 1937.11.19 조간 4 면
  • 김일성 일당중에는. 여 당원도 10여명. 순직 경관 위령 방법을 강구. 보천보 습격사건 후보 : 조선일보 1939.06.08 석간2 2 면



유순호의 조부가 도와준 김일성은 다른 사람. 김일성 아편 거래. (그때 연변에선 아편이 돈처럼 거래될 때였는데, 하루는 아편을 빨치산에 전달해주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됐습니다.)
조선말 서툴러 - 박일, 이기건- 중국말로 대화, 진지첸 / 조선독립 의지 무 - 안도현장/소련군 출세 / 해방당시 김일성의 국내 지명도 -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무명인사 - 비밀입북, 가명행세, 박석정 시, 이현상, 최강미 논문, 해방일보 기사 / 김일성 동명이인 / 김일성 가짜설 /가짜 김일성 관련 기록과 증언 / 보천보 사건 - 이 때문에 김일성이 유명해진 것 아님, / 제1방면군장 / 소련군 NKVD요원
김일성의 구국군 연고: 동장영 지시로 왕덕림 - 우사령, 위증민 보고서, 조선신문 1934년 기사 (이청천), 대전자령 전투

북한소설 연구에서 ‘김일성 형상’은 주요한 주제 중의 하나이다. 1960년대 후반 북한의 주체시대가 시작되면서 문예작품에서는 김일성 형상화를 의미하는 ‘수령형상화’가 중요한 정책적 과제로 지정된 이래 북한소설은 김일성의 형상이 전면화되거나 전제된 텍스트로서 특징화되어 왔다. 그러나 수령형상화의 연원은 해방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김일성이 등장하는 해방기 소설은 삽입된 일화나 인물을 이루는 요소 등에서 당시 저널리즘을 통해 소개된 김일성 관련기사들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 특히 김일성의 형상은 당시 속속 귀환하던 항일투사들의 소개기사내용과도 밀접한 관련을 보인다. 따라서 대중 매체에 소개된 김일성의 모습을 검토해 보는 작업은 해방기 소설에서 김일성 형상의 의미를 모색해 보기 위한 기초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이 글은 그 첫 번째 작업으로서 해방기 서울에서 발행된 최초의 국문신문이자 대표적인 좌익 매체 중 하나였던 『조선인민보』에 실린 귀환 항일투사들의 소개기사와 김일성 관련 기사를 검토하면서 김일성 형상의 초기 모습을 당대 저널리즘을 통해 형성된 항일투사 형상의 연속선상에서 살펴보았다. 초기 김일성의 형상은 다른 항일투사들의 형상을 이루고 있는 내용 요소들을 대체로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정보가 구체적이지 않은 데 비해 찬양의 수사가 과도해지면서 불균형이 심화되는 경향을 보여 준다. 특히 다른 항일투사들과 달리 투옥 경험 등 고난에 대한 구체적인 이력이나 정황이 제시되지 않음으로써 강하지만 훼손되지 않는 낭만적 투사 이미지도 형성되고 있다. 한편 전자의 불균형은 다른 인물의 구체적인 정보를 활용해 이상화할 수 있는 여지를 높여 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본고는 일종의 시론(試論)으로서 한계를 지니며, 이후 두 번째 작업인 북한에서 발행된 매체의 기사를 검토하는 후속 작업을 통해 수령형상의 기원과 형성에 대한 탐색을 좀더 보충하고 논의를 확장해 가고자 한다.

김사량 연구를 오랫동안 해온 일본의 문학평론가인 가와무라 미나토 교수의 자문을 얻어 재일교포 문학평론가 안우식 선생이 엮은 김사량 작품집의 일본어판을 발굴


[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35)-‘옹성라자사건’과 왕덕림의 구국군

The Soviets had three training camps in Siberia - (1) Okeanskaya Field School near Vladivostok, (2) Voroshilov Camp near Nikolsk, and (3) the 88th Special Independent Guerrilla Brigade of the Soviet Army in a wooded area near Khabarovsk. The Soviets planned to use these units as vanguards of their planned attack on Manchuria and Korea.

Yossef Bodansky, Crisis in Korea Spi Books (July 1, 1994), p.32

higher military schools , primarily the Okeanskaya Field School near Vladivostok , the Voroshilov Camp near Nikolsk , and a field training site in Khabarovsk

평양책방 250종의 북한 책과 만나다 접경인문학자료총서 1 한상언 지음 | 한상언영화연구소 | 2018년 07월 03일 출간
- 수필·수기·오체르크 -
91. 『김일성장군』, 북조선「오일」절기념사업준비위원회, 1946.5.1.
  • 대포시하진(大蒲柴河鎭)

Enclosure No. 1 to Despatch No. 14 of April 18, 1946 from the office of the Political Advisor, Seoul, Korea, on the subject of "Biographical Data Concerning Leading Koreans."

BIOGRAPHICAL SKETCHES OF LEADING KOREANS
IN KOREA SOUTH OF THE 38TH PARALLEL

(Note: Those Koreans originally included in Field Memorandum No. 934 of December 17, 1945, prepared by the Interim Research and Intelligence Service, Research and Analysis Branch, but who do not appear in this study are not now considered of sufficient importance for inclusion here at this time.)

p.42 북한, p.48 김일성
p.45부터 친일파, 인명....etc
p.32부터 북한 1950년 4월 24일
  • Official Gazette, Usamgik 官報 內容目次 : 布告, 法令, 指令, 部令, 規則其他文書: 在朝鮮美國陸軍司令部軍政廳 / [미군정청]
원본: 발행일 : 7 September 1945 to30 September 1946
Historical Journal, 11 Aug - 10 Oct 1945 (Journal historian, xxiv corps, 1st INFO. And historical service} 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Supreme Commander Allied Powers, and United Nations Command
p.135 : 1945년 10월 8일 친일파 관련 기자회견
A. Keep/ 1st Lt., Inf., Actg. CO of 1st I&H : Journal historian, xxiv corps, 1st INFO. And historical service
  • 검색어 : RG 554 Records of 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1945 / (G-2 Reports / G-2 Summary 로 되어 있는 것이 다수)
  • G-2 Periodic Reports (G-2 Reports / G-2 Summary 로 되어 있는 것이 다수)
G-2 Reports: 6th Div. Oct-Dec 1945 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Supreme Commander Allied Powers, and United Nations Command
G-2 Reports XXIV Coprs, Jan-Feb 1946 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Supreme Commander Allied Powers, and United Nations Command
G-2 Reports XXIV Coprs, Mar-Apr 1946 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Supreme Commander Allied Powers, and United Nations Command
G-2 Reports: 6th Div. July-Sept 1946 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Supreme Commander Allied Powers, and United Nations Command
《동북항일연군투쟁쟁사략(초고)(東北抗日聯軍鬪爭爭史略(初稿))》1980. 3, p.98; 《동북항일연군투 쟁사(東北抗日聯軍鬪爭史)(초고(草稿))》(1986.10월(月)),p.50
한국잡지정보관 - 한국잡지협회
해방직후 평양 법조인 선발 개판 무자격자 수두룩. 남북협상 당시 평양의 분위기; 조만식 선생 부인의 이야기
  • 중국의 엉터리 주장
조국안 후임 2사 사장 조아범 - 양준형이다.
조국안 전사 연대 고증 틀림.
주보중 동북항일유격일기 후기 - 간행을 고려하여 손질함.
안경 낀 김일성 - 북한 김일성 맞다. - 일본측도 1952년 현재의 김일성과 상당히 다르다고 함.
안도현 유격대 비석 - 북한 김일성이 아님.
유격대 내에 김일성은 1인 뿐 - 1934년 5월 체포된 명월구 김일성, 1938년 12월 김일성 비단 2개 - 이종석도 김일성은 한 사람 뿐이라고 극구 주장.


  • 이종석
권용호, 조선이 낳은 청년 영웅 내가 아는 김일성 장군 : 해방일보 1946년 4월 8일, 9일
북한 김일성(金日成)의 본명은 金成柱 / 金聖柱 어느 쪽인가?
제3사장 金日成(金一善)은 1932년 연길 의란구 유격대의 김일선(金一善)

이종석, 새로 쓴 현대 북한의 이해 (역사비평사, 2000) p.443

그[허동찬]는 『현대사 자료 30』에 실린 1932년 7월 경의 연길현 의란구(延吉縣 依蘭溝) 유격대 조직상황을 알리는 일제첩보자료에 왕청 출신의 30세의 김일선(金一善)이란 이름의 유격대원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근거로 항일유격대 내의 두 명의 김일성론을 주장한다.

  • 박금철 관련
박금철(朴金喆) : 6.25 때 군 총치국 부국장
김일성이 가짜라는 박갑동과 이기건의 결정적 증언
(843)<제자 박갑동>|<제31화>내가 아는 박헌영(162)|박갑동 중앙일보 1973.09.08 종합 5면 : 박헌영이 군총정치국장, 박금철이 부국장

이러한 때에 군대에 정치훈련을 시키기 위하여 박헌영이 군복을 입고 전선에 나타나게 되었다. 박헌영이 자기 손으로 인민군대안에 총 정치 국을 창설, 총 정치국장에 취임하고 인민군 중장의 군복을 입었었다. 박헌영의 밑에 박금철이가 부국장이 되어 인민군 소장의 군복을 입고 나섰다. 박금철은 다 알다시피 1937년 보천보 습격사건 때 박달과 함께 보천보의 지도를 그려서 압록강을 건너온 김일성에게 제공하여 성공하게 한 공로자로 선전된 자이다.

박금철은 그 사건 때문에 일경에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징역을 살다가 8·15해방 때 석방되었었다. 해방 후 박금철은 박달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보천보 습격당시 김일성을 만나려고 김일성을 찾아갔었다. 가서 만나 보니 이름은 같은 김일성이라도 사람은 달라서 서로 모르는 사람이었다. 박금철은 실망하여 평양에서 취직도 되지 않고 하여 할 수 없이 자강도 강계에까지 가서 강계시 당에서 일을 하다가 시의 조직부장이 되었었다. 동란이 일어나자 군의 문화부장교가 되었다가 박헌영이 군의 총 정치국장이 되자 박금철을 뽑아다가 부국장을 시켰던 것이다.


석책자(石柵子) 석붕자(石棚子) 柵 栅
독립신문 건립 당시 사설
  • 허동찬 김일성 평전 pp.392~418
  • 國境警備 平安北道警察部 編 平北警鐘編輯部 昭和11[1936]
東興事件後の越境討伐,水野宅三郞 / 土城に於ける馬賊襲擊事件,小林忠治
History of the North Korean Army, 1952/ Hichey, Doyle O. 국회도서관
p.9 (pdf p.22) - 김일성이 9월 25일 원산항으로 도착했다고 함.
pdf pp.109~110 : 최고사령관 김일성 아래 군단, 사단급 조직 나옴.


고할신 중심의 김석하, 이성근, 이윤환이 주창, 이성상, 안도형과 중공당 가입문제로 다투다 1931년 1월 16일 총살당함.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Image:1931-02-07_%E5%8D%97%E6%BB%BF%E9%AE%AE%E4%BA%BA_%E4%B8%BB%E7%BE%A9%E8%80%85%E9%96%93%E3%83%8E%E5%85%A7%E8%A8%8C.pdf

박갑동(朴甲東, 1919 ~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第31話 : 내가 아는 박헌영』

남한총선 결정에 남로당서 폭동 / 김구·김규식, 단정 수립안 계속 반대 / 동맹휴교 60교·306명 검거… 하루만에 폭동진압
2·7투쟁전후 제주에 무장행동 지령 / 중앙당선 당 군사부 책임자까지 파견 / 경비대 소속 남로당원들 경찰서·14개지서 등 습격 / 토벌대장도 피살, 폭동 1년 계속… 여·순 사건으로 비화
단독정부 반대 위해 남·북 정당·단체 연석회의 / 김구·김규식, 남한대표로 평양회합에 양 김씨는 주석단에 안 껴주고 푸대접 / 조만식 석방요구에 김은 밀서 내밀며 "장난 그만 하시오"
남·북 연석회의, 김일성의 모략에만 이용당해 / 김구·김규식은 귀경 즉시 성명을 발표 실패나 성공 말 않고 요령부득한 내용 / 북쪽선 이미 인민공화국헌법의 초안을 채택
소, 김·박 두 사람 놓고 지도자선출 신중 / "이남 선거인 해주로 보내라" 박의 지령 / 박은 "친소정권에 대한 태도 불투명" 트집 실격 / 소의 「전조선적인민정당」방침 따라 남로당선 「지하선거」
지하선거로 대의원 3백60명 선출 / 남로당, 최고인민회의에서 북로당 압도 / 무력 없는 남로당, 행정부 구성 때 김일성 세력에 밀려나
폭동진압 출동에 항거, 14연대가 반란 / 남로당 세포위, 찬반 싸고 심각한 내분 / 군 내부 「푸락치」침투에만 주력했던 박도 예측 못한 우발사고


- 2012년 6월 25일 강남 중식당에서의 저녁식사 모임에는 장승호, 이병헌과 함께 김한수도 1시간 이상 동석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김한수가 그 근처에 사무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예약은 장승호가 한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문갑식, 친문매체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네요.
2004년도, KBS 아나운서협회, 문갑식 고소
JTBC 앞에서 엎드려 용서를 구한 문갑식과 월간조선
문갑식의 "박근혜는 부모 망신 그만시켜라" 조롱하던 칼럼 게재 날짜
문갑식 사탄파 정당에 숟가락 들고 참여 3대 통신사 모두 보도
문갑식 사탄파 정당 참여, 오보가 아니라 조선일보에 까였을 가능성


3. 조선최고인민회의 선거를 앞두고 평남강동군 승호선거구 선거자들 앞에서 진술한 김일성위원장의 연설 = p.24 : 8월 25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제23호 선거구에서 전유권자의 100% 찬성으로 김일성 당선
pp.174~189 김일성 장군의 항일무장투쟁 - 맨뒤 연표에 보천보 사건


Confirmed Cases and Deaths by Country, Territory, or Conveyance
'코로나19' 국내 / 국외 발생 동향
평양시 남산동 1번지 김일성 4호택(일제 때 평안남도 도지사 관사)응접실에서 북조선 인민군 창설과 관련된 제1차 회의가 극비리에 개최됐다.


창간 72·복간 30주년 맞아 1947~80년 시기에 발행된 옛 신문·책자·기록물 등 찾아 온고지신 콘텐츠 제작 계획

꼬마 김정은 사진

https://www.rfa.org/korean/weekly_program/ae40c528c77cac00c758-c228aca8c9c4-c9c4c2e4/co-su-04252017123508.html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13050338200、野副討伐隊冬作命綴4/5 昭和16年1月6日~16年3月1日(防衛省防衛研究所)」

件名標題 : 野討冬作命第19号 野副討伐隊命令 3月9日 資料作成年月日 昭和16年3月9日 (1941년 3월 9일)

나가시마 공작대가 1941년 3월 8일에 1로군 부사령 위증민 이하 8명을 섬멸했다고 하였다. (三月八日長島工作隊ハ樺甸県夾皮溝北方地区ニ於テ第一路軍副司令魏極民以下八名ヲ殲滅セリ). 김일성비 토벌을 중점 지향한다(金日成匪討伐ニ重点ヲ指向スベシ)고 하여 그가 작년 10월말 소련으로 도주한 사실은 모르고 있다.

변희재 “박근혜 대통령 목을 친 다음에 박정희 갖다 붙여서 버티겠다는 것 아닌가”
문갑식, 정규재 대표가 반발하자 “사이비 우파 나가라” 비난...본 영상은 내려


대통령 심부름이나 하던 최순실, 국정 농단하고 부정한 富도 챙겨
그녀의 딸은 대학에 부정 입학
올해 박정희 대통령 탄생 99주년… 부친 무덤 구린내로 안 덮으려면 깊이 뉘우치고 애국의 길 고심을
최순실과 놀아난 전경련이 피해자 맞는가
조국 교수 ‘복사표절’은 비판하더니 전희경 의원 ‘복사표절’은 감싸던 모습과 오버랩

북한 역사사전 단독입수
“이순신·정약용 등 우리 위인 깎아내리면서도 김일성 가계(家系) 미화에는 평균 A4 6장씩 할애”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H&nNewsNumb=201704100052

  • 국정운영은 항일투쟁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국정 각 분야에는 전문지식이 필요하며, 국민을 설득하는데는 상당한 정도의 학식과 교양도 필요하다. 빨치산처럼 낮은 학력으로 산야를 누비며 거칠게 살아온 경력의 사람들은 군인은 할 수 있을 지 모르나 여타 분야 국정의 최고 책임자들이 되기에는 부적격이다. 친일의 때가 다소 묻어보이더라도 일제시대에 제대로 배우고 어느 정도 경력을 쌓은 사람이 일을 훨씬 더 잘할 가능성이 높을 수 밖에 없다.
남한은 민주팔이 사기꾼들이, 북한은 항일팔이 사기꾼들이 점령하여 국민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만의 권력 잔치를 벌이고 있다. 민주화유공자가 된 남의 민주팔이 사기꾼과 독립유공자가 된 북의 항일팔이 사기꾼에게 책임을 묻고 그들이 갈취해간 국민세금에 대한 배상을 받아내야 한다.
동북항일연군은 조직상으로 중국공산당 산하의 군대였지만, 실제로는 코민테른의 지휘감독을 받았고, 일만군과 간혹 싸우기는 했지만 마적떼나 다름없었다. 중국공산당이 종전 이전과 이후에 중국인이나 조선인에 끼친 피해는 일제가 끼친 피해의 몇십배가 넘는다. 일본군과 주로 싸운 중국군은 장개석의 국민당군이고, 모택동의 중공군은 국민당군에 심어둔 첩자가 얻어낸 정보를 일본군에 거액을 받고 팔아넘겼다. 역사는 큰 틀에서 보아야 한다. 동북항일연군이 가끔씩 일만군과 전투를 벌였다고 해서 대단한 항일투쟁을 한 영웅들로 보는 것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됀 것이다.
남의 힘으로라도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으면, 자유롭고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항일투사들을 모시기 위해 나라와 국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지도자는 국민이 선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소련군이 내세운 꼭두각시 김일성의 북한은 실격이다. 소련군은 국민들이 자유롭게 지도자를 선택할 권리를 주지 않았고 자신들이 훈련시켜 데려온 꼭두각시 진지첸 대위를 지도자로 만들었다.


민주를 중시하다보면 민주팔이하는 가짜 민주세력들이 창궐하고, 독립운동을 중시하다보면 항일팔이 사기꾼들이 득세한다. 민주나 독립운동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누가 진짜 민주주의자이고, 누가 진정한 독립운동가인지 정확히 가리고 판별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 틈을 비집고 대중을 상대로 사기치고 선동하는 세력이 판을 칠 공간이 생겨난다. 민주나 독립운동이 중요한만큼 민주팔이나 항일팔이에 속지 않는 것 또한 중요하다. 북한의 김일성 같은 자가 전형적인 사례이다. 이런 사기꾼들의 전형적인 수법이 자신들은 민주세력 항일세력으로 위장하고, 상대를 독재세력이나 친일세력 또는 외세 앞잡이로 모는 것이다.

==함께 보기==

* 단군신화
* 백두산 밀영
* 김정일 생가
* 백두산 구호 나무
* 백두혈통
* 제88독립보병여단
* 김정일
* 김일성
* 김일성 영생교
* 백두산 대학
* 보천보사건
* 백두수호대
* 백두산 삼지연대기념비
어느 정도 교육받고 성실히 노력해서 입신양명하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이 꿈꾸오 오던 것이고, 그 과정에서 특별히 남을 속이거나 피해를 주지 않았다면 크게 욕먹을 일도 아니다. 하지만 일제의 통치를 받던 시대에만은 그런 노력을 해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사람은 모두 때려죽일 친일파, 민족반역자가 되어 버린다. 나라없던 시절에 일본인들에게 설움을 당해가며 노력해서 조그만 성취라도 이룬 것이 그렇게도 큰 죄인가? 먹여살려야 할 가족도 내팽개치고, 숙식을 해결할 길조차 막막한데도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한 목숨 바치지 않았으면 모두 민족 반역자인가? 태평성대에 태어나 자신은 그런 시대에 살아보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간고한 삶을 살았던 그 시대 사람들에게 친일파 민족반역자라며 돌던지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
독립운동이 과연 그렇게 지고지순해서 모든 사람들이 독립운동 했다는 사람들을 떠받들어 모시고 살아야할 그러한 것이었나? 독립운동했다는 사람들 때문에 해방이 되기라도 한 것인가? 독립운동을 했는지 친일파였는지가 과연 모든 정의를 재단하는 유일한 잣대인가? 누가 그런 잣대의 지위에 올렸는가? 친일파라고 욕먹는 사람들 후손은 모두 매장하고, 독립운동했다는 사람들 후손에게 모든 권력을 쥐어주면 저절로 나라가 부강해지고 모든 사람이 살기좋은 나라가 되기라도 하는가? 독립운동한 사람 가계는 과연 그렇게 자질이 뛰어난 사람들 뿐인가? 누가 독립운동한 사람 후손이고 누가 친일파 후손인지 그렇게 선명하게 가려지는가? 문재인은? 홍영표는? 독립운동 좋아하니 사기꾼 김일성 같은 자가 나타나 자기가 조선을 해방시켰다며 일족이 국가를 자기 일족 소유물로 만들고 국민들을 노예로 부리는 일도 가능한 것 아닌가? 국가를 사유화한 김일성 일쪽에 빌붙어 권력부스러기를 얻어 가지고 인민들을 수탈한 자들은 친일파, 민족반역자라 욕먹는 사람들보다 한층 나은 사람들이기라도 한가?
권력에 빌붙어 양민을 괴롭힌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널려 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왜 일제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만 죽어라 욕먹어야 하는가? 모든 관료들이 백성을 수탈한 것도 아니며 선정을 베푼 이들도 있었다. 일제시대 조선인 관료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없으란 법은 없다. 친일파라 욕먹는 조선인 관료들이 한 사람도 없었다면 조선인들은 모두가 일본인인 관료들 밑에서 더 행복하게 살기라도 했겠는가? 조선인 관료들이 있었으니 말이라도 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 하소연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 아닌가? 일제시대 모든 조선인 관료들이 조선인들을 괴롭히는 집단이었다는 증거라도 있는가? 그런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전부다가 그랬는가?


김정은의 북한식 농담…“김정은 위원장에게 전하겠다” 동아일보 2018-04-03
1928년 전주제일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군산 소화보통학교로 전학갔다가 다시 전주로 돌아오면서 전주 제2보통학교로 전학하였다. 1936년 2월 전주 제2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전주북중학교에 진학하였다.
전주북중학교(全州北中學敎, 전주고등학교의 전신으로 5년제) 재학 중
p.134~135 이철승은 소학교말, 중학교 1~2학년 때 김일성 이야기 들음. 중학교때 경성일보에 김일성이 죽었다는 보도. 전주고보 때 보천보 사건 발생
p.136, p.366 김신이 말하는 김구가 알았던 김일성은 연로. 북한 김일성과는 연락도 없었고, 몰랐다. 남북협상 때 처음만나 인사.


「読書余論」 2012年10月25日配信号 の 内容予告
▼『偕行社記事 No.753』S12-6
 「鮮匪金日成と長白縣」という記事もあり。
[CES 2020]프로젝트 '네온' 공개…실제 사람과 놀랄 만큼 흡사
뉴스앵커·접객원·영화배우까지 '디지털 인간' 다양한 역할 기대
박근혜를 끌어내린 13명의 기자들-방송 - 미디어오늘 2017. 5. 20.
«Тайны корейской войны» Гаврилов Викто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Орлов Александр Семенович
Орлов А.С., Гаврилов В.А. Тайны Корейской войны - М.: Вече, 2003. - 400 с. : M .: Veche 1991 년에 설립 된 Veche Publishing House는 오늘날 러시아 최대 규모 중 하나입니다.
김일성은 민족 영웅이다. 남한보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훨씬 살기 좋다고 한다. 남쪽 정부는 북쪽의 민주주의를 본받아야 해.
속초일대 자연상태 비해 30배 함유
27개 조사지역 모두 농도초과 밝혀져
中(중)핵실험 분진피해 40여년간 누적
체르노빌 인근 체코 보다 오염 심해
5분 12초부터 중국 핵개발 역사와 피해 <중국 핵실험 피해지역 : 한반도 예외 아니다>

合流共匪를 擊破 武器文書等을 押收 적의 유긔시체 중엔 녀자도 一명 新乫坡警官隊凱旋 매일신보 [每日申報] 1938년 03월 10일 2면 8단 - 조국안 부하 동향


國境警察官 慰問班隨行記(2) 大正八年後로 增加된 凶暴한 匪賊의 出沒 - 鮮蘇國境守護의 責務도 重大 매일신보 [每日申報] 1940년 02월 01일 3면 1단 : 김일성, 최현
國境警察官 慰問班隨行記(3) 異彩띤 ˝駐在所時局室˝ 빛나는 婦人들 活動 - 住宅에까지 內鮮一體의 꽃 매일신보 [每日申報] 1940년 02월 02일 : 김일성
國境警察官 慰問班隨行記(4) 千里無邊의 大樹海에 ˝總角警備隊˝는 活躍 - 有名한 國境洪吉童의 武勇談 매일신보 [每日申報] 1940년 02월 03일 3면 1단 : 김일성
國境警察官 慰問班隨行記(5) 아직도 墨痕이 새로운 ˝國境取締˝의 告示板 - 防諜警備第一線의 緊張! 매일신보 [每日申報] 1940년 02월 04일 3면 1단
國境警察官 慰問班隨行記(6) 눈물겨운 自衛團 - 不眠不休 · 勞心焦慮 - 窟속에서 防諜活躍 매일신보 [每日申報] 1940년 02월 04일 2면 1단
國境警察官 慰問班隨行記(7) 마주뵈는 蘇聯監視所 부르면 和答도 할 듯 - 太公望을 威脅하는 『께페우』 매일신보 [每日申報] 1940년 02월 06일
國境警察官 慰問班隨行記(8) 記憶도 새로운 張鼓峯 토치카陣地散在 複雜奇怪한 鮮蘇國境附近 매일신보 [每日申報] 1940년 02월 07일 3면 1단
國境警察官 慰問班隨行記(9) 接踵侵入하는 外諜도 警民一致로 打盡 國境即思想國防線 매일신보 [每日申報] 1940년 02월 08일 3면 1단


  • 鉄心 3(10) - 1937.10 治安部参謀司第二課 編 : 討匪効果表 / 軍事顧問部 / p139~141 (0075.jp2)
  • 鉄心 3(9) - 1937.09 治安部参謀司第二課 編 : 國軍討匪効果一覧表 / 軍事顧問部 / p140~142 (0086.jp2)
  • 鉄心 4(3) - 1938.03 治安部参謀司第二課 編 : 討伐效果表 / 軍事顧問部 / p120~121 (0068.jp2) - 2월호에는 토비 기사는 없음.
제1군관구 월보(第一軍管區 月報); 제1헌병대 월보(第一憲兵隊 月報)
(二) 治安情况

管内北部東邊道並中部東邊道紅軍匪團ハ前月末ヨリ 本月當初ニ亘リ 若干ノ蠢動タ呈シアリタルモ顧問ノ直接指導 ニ依ル國軍ノ獨力ニ依リ 各地ニ於テ匪團タ殲滅シ殊ニ北部東邊道ニ於ケル共産匪團ノ巨魁金日成カ十一月十三日撫松縣 小西南岔ニ於テ步兵第七團第二連ノ為 擊斃セラレ 又十一月二十二日 中部東邊道..........




  • KOREA REPORT January 2, 1948 - 여운형이 생존해 있으므로 1947년 7월 이전에 작성된 문서임.
p.11 소련은 북한에 전체주의 체제를 수립
p.45 김일성의 이력 - 김광서의 아들
김일성의 거처는 일본인이 살던 집, 취향, 식습관 등에 대해 나옴.
김무정이 김일성보다 훨씬 더 잘 알려진 인물이라고 함.


p.8 金一聲(正救團 代表)
國外情報 : 中露聯合宣傳部의 活動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3) 1921-01-17
p.3 金一聲(中露聯合宣傳部 元山方面 宣傳委員), 30세, 중국인 복장


p.5 金一星 - 25세, 정주(定州) 출신. 소주(蘇州) 동오대학(東吳大學) 재학
不逞團關係雜件-鮮人의 部-在上海地方 3 高警 제28373호 在上海 不逞鮮人의 動靜 1921년 10월 19일
p.4 김일성(金一星), 학생, 정주(定州) 출신 23세
p.21 : 金日星(東一少年會 智育部長)
少年東亞日報(소년동아일보) ◇東一少年會檀君記念(동일소년회단군기념) 동아일보 1927년 11월 15일 3면 7단


  • 11) 장례식 참석자의 명단에는 韓淸玉과 崔重熙의 이름이 있다. 《在吉林總領事館および敦化分館》, JFMA, SP86권 (sp. 205~4, pt. 12), 9, 788~91. 이 잡지 그 자체는 지금까지 볼 수 없다.
12) 《第四次間島共産黨事件判決》 『思想月報』 II. 제4호(1932년 7월) JFMA, S 357권 (S. 9. 4. 5. 1~2).


(5) Lankov A.N. Kim Il Sung: An Attempt at a Biographical Sketch // North Korea: Yesterday and Today . - M .: Eastern literature, 1995. (extended version)
(13) Report of Jing Richeng and other representatives of the Nanman Party Committee of the CPC, Khabarovsk, January 1, 1941 // RGASPI. F. 514. Op. 1. D.1041. L.2-8
(14) Ivanov V.I. “In the rear of the Kwantung Army. The truth about the 88th Sino-Korean brigade of the Far Eastern Front. " M., 2009.S. 243
(16) [Front-line order No. 10 / n of 08/29/1945 AF 2 of the Far Eastern Front] Archived on March 13, 2012. / TsAMO, f. 33, inventory 687572, ed. hr 2317.
Memorandum Prepared by the Inter-Divisional Area Committee on the Far East PWC–125 CAC–128] [Washington,] March 29, 1944.
한국 점령에 참여할 나라들 결정 문제
[247] Briefing Book Paper : Inter-Allied Consultation Regarding Korea Summary undated
얄타 회담에서 한국문제 논의 -신탁통치
No. 252 Briefing Book Paper : Interim Administration for Korea and Possible Soviet Attitudes need for joint action
포츠담 회담에서 한국문제 논의 -신탁통치

The Japanese attack on Pearl Harbor, Hawaii, took place on December 7, 1941, at 1:20 p.m., Washington time (7:50 a.m., Honolulu time), which was December 8, 3:20 a.m., Tokyo time.

Attack on Pearl Harbor Wikipedia

The Japanese attack on Pearl Harbor, Hawaii, took place on December 7, 1941, at 1:18 p.m., Washington time (7:48 a.m., Honolulu time), which was December 8, 3:18 a.m., Tokyo time.

The Ambassador in China (Gauss) to the Secretary of State Chungking, December 11, 1941

485. By proclamation dated December 9th the National Government of China “formally declares war on Japan” and by separate proclamation same date declares that “a state of war exists” between China and Germany and Italy “as from midnight December 9”.

[150] The Ambassador in China (Gauss) to the Secretary of State Chungking, November 5, 1942
중국 외교부장 송자문 : 미국의 군사업적 찬양. 중국은 만주 회복, 한국은 독립할 것.
[632] The Acting Secretary of State to the Ambassador in China (Gauss) Washington, March 25, 1942

“President Sun Fo(1891~1973) of the legislative department of the Chinese Government today urged President Roosevelt and Prime Minister Churchill to announce a ‘Pacific charter’ which would pledge the United Nations to recognize the independence of India, French Indo-China, Korea and the Philippines.

It was the first authoritative expression by a member of the Chungking government on this country’s attitude toward the disputed question of independence of India.1

Sun’s views were released in a signed article in the official Central Daily News and urged that the Chinese government immediately recognize members of a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745] The Secretary of State to the Ambassador in China (Gauss) Washington, December 22, 1941
국무장관이 주중대사에게 한국 임시정부의 조직, 규모 등 현황에 관하여 국민당 정부에 알아볼 것을 지시
[746] The Ambassador in China (Gauss) to the Secretary of State Chungking, January 3, 1942
임시정부 승인 문제 - 조직 규모, 역량 명확치 않음. 조소앙이 외무장관이라 칭함. 만주에 조선인 군대가 있으나 임정과 무관.
[747] The Chairman of the Korean Commission in the United States (Rhee) to the Secretary of State Washington, February 7, 1942
이승만이 임정 주석 김구의 한미 국교 재개를 희망하는 편지를 국무장관에게 제출
[748] The Ambassador in China (Gauss) to the Secretary of State No. 297 Chungking, February 12, 1942 : 이미지 pg_860 / pg_861
임정 외무장관 조소앙이 찾아와 미국의 임정 승인 요청 - 임정의 실체가 모호함. 일본 패전후 중국이 한국을 속국화할 것을 우려함.
[749] The Secretary of State to the Chairman of the Korean Commission in the United States (Rhee) Washington, February 19, 1942.  : 이미지 pg_862
[750] The Acting Secretary of State to the Ambassador in China (Gauss) Washington, March 20, 1942
Mr. Tjo So Wang (조소앙) - 한국인들은 독립을 원하지만 분열되어 있음. 중국 주재 각국 대사관에 독립관련 호소문 전달
[751] The Chairman of the Korean Commission in the United States (Rhee) to the Secretary of State Washington, March 24, 1942.
이승만의 임정 승인 요청
[752]The Ambassador in China (Gauss) to the Secretary of State No. 335 Chungking, March 25, 1942.
[753] The Ambassador in China (Gauss) to the Secretary of State Chungking, March 28, 1942

It seems to me here, however, that the subject of Korea is not entirely unrelated to the problem of the independence aspirations of other Asiatic colonial peoples including the Indians. The Chinese seem to be sympathetic toward outright independence for India.

[755] President Roosevelt to the Acting Secretary of State Washington, April 8, 1942. : 이미지 pg_867 / pg_868 / pg_869
T. V. Soong : Soong Tse-ven or Soong Tzu-wen (Chinese: 宋子文)
[758] The Acting Secretary of State to President Roosevelt Washington, April 13, 1942. : 이미지pg_870
[760]The Ambassador in China (Gauss) to the Secretary of State Chungking, April 18, 1942
중국 정부의 한국임정 승인 문제. 선결요건 검토 - 중국은 한국에 대한 영토욕심이 없음을 밝혀야. 등등
[769] The Ambassador in China (Gauss) to the Secretary of State Chungking, December 9, 1942
조소앙이 전후 중국의 한국 지배를 우려함.
[791] The Under Secretary of State (Welles) to President Roosevelt Washington, April 17, 1942
[970] Memorandum of Conversation, by the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Berle) [Washington,] May 12, 1943
임정승인 문제 - 승인하면 비슷한 다른 나라 임정들도 승인 요구할 것. 임정이 얼마나 조선국민을 대표하는지 미지수. 중국 정부와 공조 필요
[974] The Ambassador in China (Gauss) to the Secretary of State No. 1886 Chungking, December 6, 1943
이승만 : 소련 극동군의 조선인부대가 조선에 침입하여 소비에트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려 하므로 임정에 대한 조속한 승인 요청.
대사의 의견은 결국은 소련군과 조선인 소련군 부대가 조선에 침입해 올 것이지만, 중국의 임정은 끊임없이 서로 싸우고 있어 그런 사태를 막지 못할 것임.
[975]The Ambassador in China (Gauss) to the Secretary of State Chungking, December 7, 1943
중국의 한국인 두 정당이 in due course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 문의
[1234]The Secretary of State to the Ambassador in China (Gauss) Washington, August 16, 1944
영국 외무부와 전후 한국문제 논의예정


신탁통치 반대운동

소련은 미소 2개국 영향아래 있는 한반도를 영국과 중국을 끌어들여 4개국 영향하에 두어 자신들 영향력을 줄어드는 것으로 할 이유가 없었다. - 술책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의 행태를 보면 공산주의자가 주도하는 한반도 단일 정부(지도자 여운형, 국방상 김일성)를 세우는 가능성을 모색해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KBS취재팀, 김정일 실제 출생지 확인 위해 러시아 비야스크 마을 촬영 1997.03.03 (21:00) - 김일성의 다른 여자의 묘가 있다고 함.
[KBS 특별기획] 김정일 ②비극의 시작 KBS 2011.12.23 (23:36)
[KBS 특별기획] 김정일 ③최후의 선택 KBS 2011.12.24 (23:26)
-------------------------------
장남 슈라 (익사) 차남 에라 (김정일), 김정일은 30대 중반
장남 슈라 (익사) 차남 에라 (김정일), 김정일은 30대 중반

<김정일은 33세>

북한문제 전문가들은 통일일보 보도에 대해 『북괴 내부의 권력투쟁과 후계문제로 인한 동요는 충분히 있다. 그러나 그 신문보도에는 부분적인 착오가 있다』고 지적했다.

성균관대 이명영 교수는 김정일이 차남 아닌 장남(본명 「슈라」)이며 나이는 33세이고, 그 기사에서 김일성이 만주에서 어떤 조직을 가지고 활약한 듯이 돼있으나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입소자들은 소련극동군사령부에 수용되어 장차 있을 소·일 개전에 대비한 첩보공작요원으로의 훈련을 받았다. 김성주도 그 속에 끼여 있었다. 해방 후 김성주는 평양에 와서 그것을 자랑삼아 얘기했었다. 소련서 그의 처 김정숙이 낳은 아들 이름들은 「유라」와 「슈라」였다.

그런데 지금은 김성주는 소련에 간 일이 없다고 한다. 해방 때까지 만주에서 조선인민혁명군(있지도 않았던 항일부대 이름이다)을 이끌고 일제와 싸웠다는 것이다. 거짓일 뿐이다.

김정일 (일명 에라)
장남 슈라, 차남 에라, 김정일이 장남 슈라
韓載德(한재덕)이가 金日成(김일성)의口述(구술)을 받아 썼다는 소위 「金日成(김일성)장군 개선기」(韓(한)의 越南(월남)이후 금서로 폐기됨)에 金貞淑(김정숙) 소생의두아들이 분명히 러시아式(식) 兒名(... 슈라(김정일), 애라 (동생)....


  • 鬱島人數 대한매일신보(국한문) [大韓每日申報(국한문)] 1906년 05월 08일
鬱陵島에 韓民은 總게 三千八百名이오 住在 日人이 總게 三百三名인 日人中民長은 吉郞乙治郞氏오 副長은 片罔吉兵衛라더라
鬱陵島의 人口調査 者를 據 즉 我國人口 四千六百六十一人이오 戶數 八百九十九戶오 日本人口 七百十三人인 戶數 二百十三戶라더라
김학준, 북한의 역사 제2권 : 미소냉전과 소련군정 아래서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건국 1946년 1월 ~ 1948년 9월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년 06월 10일
스탈린이 김일성과 박헌영을 불러 면접시험을 보았다! 스탈린의 면접시험을 거쳐 수괴로 임명된 김일성

池甲龍 金益顯 金福祿 (李福祿?)

소련으로 도주한 2대 김일성을 비롯한 항일연군대원들의 소식은 1941년 7월13일 연길 현광개촌 왕 동포에서 체포된 제2방면군 제4연장 오갑룡, 동년 8월11일 혼춘현두황자동방 지점에서 체포된 제2방면 군대 원 이자민, 1942년 6월4일 혼춘현유수하자 근처에서 체포된 제2방면 군 경위 연 정치위원 이봉록 등에 의해 비로소 파악되었다. 이들은 소련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무장간첩으로 파견되어왔던 자들이다.

(45)<제자=김홍일>|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입소 이후의 2대 김일성 [출처: 중앙일보]

ソビエト極東軍中佐(当時) - ワシーリー・イワーノフ : Soviet Far East Lieutenant Colonel (at that time)-Vasily Ivanov


各地通信 國境惠山より 鮮匪金日成と長白縣 / 西風隱士 偕行社記事 (753호) 1937년 6월호 (東京 : 偕行社編纂部, 1937-06) pp.121~123.


  • 사료로 확인하는 김일성의 진실
拉去、殺害等威脅에 護身策으로 組織 二十一個村區長이 中心되여 外廓團體發生裡面
長白朝鮮族自治縣 十八道溝 二頭崗


10월 4일 김일성 부대가 5명납치, 소 5두 약탈
[문순보 데일리포커스] 보천보 전투, 북한 주장과 달리 성과 미미 Free NK 2014.06.18
조선일보(朝鮮日報)는 1936년 10월 4일에 김일성이 40여 명과 함께 스류다오거우(十六道溝)라는 작은 마을에 사는 박흥룡(朴興龍)이라는 한인 농부의 집을 습격하여 소와 곡식을 가져갔다는 기사를 싣고 있다. 그밖에도 당시 김일성의 활동에 관한 보도들은 대부분 그를 비적으로 다루면서 그의 약탈 행위를 규탄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 이승만 박정희 정권이 김일성이 가짜라고 교육시킴 - 교과서, 정부 기록에 그런 것 없다. 민간 기록에 주로 나옴.
  • 반공정책이 만들어낸 허구 - 정부 수립이전에 이미 가짜라고 광범위하게 알려짐.
  • 친일파 박정희가 항일투쟁한 김일성에 대한 컴플렉스 때문에 가짜로 만들었다 - 박정희가 김일성 가짜설이 퍼진 해방 직후에도 정권 잡았나?
박정희 정권 때 처음으로 보천보 사건을 김일성의 항일경력으로 기록 시작.
미군정과 남한 정권은 소련군이 데려온 낯선 인물 김일성이 막연히 만주에서 항일 게릴라 활동을 했다는 것 정도 외에 그의 해방전 경력을 잘 알 수 없었음. 의도적으로 은폐하려 했던 것이 아님. 오늘날에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것이 많다.

https://blog.naver.com/tigerkimtiger/220952847668


대전자령전투(大甸子嶺戰鬪)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민족 전투원형 동녕현(東寧縣)전투 문화콘텐츠닷컴

〈대한국 국제(大韓國國制)〉 고종실록 39권, 고종 36년 8월 17일 양력 2번째기사 1899년 대한 광무(光武) 3년
일성록 (1899년 7월 12일 陽曆八月十七日木曜)
승정원일기 3111책(탈초본 140책) 고종 36년 7월 12일 정사 [양력8월17일] 1899년 光武 3년 光緖(淸/德宗) 25년
승정원일기 고종 36년 기해(1899) 7월 12일(정사, 양력 8월 17일) 비 번역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한제국 대한국국제 wikisource

채백[1957-] 부산언론사 연구 부산 : 산지니, 2012 - 한림대, 강원대 소장
김대상 『釜山言論史의 再照明 : 신문언론과 방송언론의 맥락』 부산: 뉴-워드사, 2004 - 한림대, 강원대 소장
김대상 『釜山言論史의 再照明 : 신문언론과 방송언론의 맥락』 부산: 뉴-워드사, 2004 : 1945년 8·15 해방 이후부터 1960년 4·19 혁명 직후까지 부산 지역 언론의 변천사를 기술한 책.

p.16 1948年11月19日周保中夫妇离开朝鲜前,向金日成首相夫妇告别,摄于金日成首相宅前
在共同抗击日本帝国主义武装侵略的斗争中,在东北抗日联军的峥嵘岁月里,中朝两国人民结下了深厚的战斗情谊,周保中与金日成成为亲密的战友。1948年8月至11月,周保中、王一知应赴朝,受朝鲜战友的热情接待。图为1948年11月19日周保中夫妇离开朝鲜前,向金日成首相夫妇告别,摄于金日成首相宅前。后排左起:金日成、金贞淑、王一知、周保中。前排左起:金正日、周伟
p.22 1948년 11월 안길의 묘 앞에 선 김일성, 주보중 일가


金日成의 마적단 심리 연구 - 조갑제닷컴
최언위(崔彦撝, 868~944)仁渷, 辰韓茂竣人. 天祐中官新羅國翰林學士, 守兵部侍郞知端書院事.
聞夫眞境希夷, 元津杳渺. 澄如滄海, 邈若太虛. 智舟何以達其涯, 慧駕莫能尋其際. 況復去聖逾遠, 滯凡旣深. 靡制心猿, 難調意馬.
태자사낭공대사비(太子寺郞空大師碑)
新羅國故 兩朝國師 敎諡朗空大師白月棲雲之塔碑銘幷序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
聞夫禪境玄寂正覺希夷難測難知如空如海故龍樹師子之尊者喩芭蕉於西天弘忍惠能之祖師譚醍醐於震旦


"DJ 비자금, 뉴욕의 친북단체로 유입" chogabje.com 2006-06-08
´김대중 비자금 미국유출 방북규탄 특별 기자회견'.호남출신 자유진영 인사들 단체 결성, 김대중 반대 결의.
  • 김대중 사망 - 법 개정으로 국장,, 곤룡포 - 장례식 빈 자리, 조기 건 집이 거의 없음.; 대전 현충원을 동작동으로.
이희호 - 경호법 개정
DJ, “‘도청 파문’ 참담한 심정” KBS 2005.08.10


안경 낀 제2방면 군장 김일성 사진 - 김혜순의 진술에 의한 것으로 보임 - 믿을 수 없다.
韓國現代史 資料 叢書 : 1945-1948. 1-5, 신문편(제1부, 제1-5권) / 金南植 ; 李庭植 ; 韓洪九 엮음 / 내용: 1-2, 漢城日報. - 3,朝鮮人民報, 獨立新報. - 4獨立新報. - 5, 解放日報, 靑年解放日報, 노력인민
15. 王作舟 东北抗日联军第二军第六师参谋长。1941年吉林省延吉县牺牲。(吉林省英烈网)
15. 王作舟 东北抗日联军第二军第六师参谋长。1941年吉林省延吉县牺牲。(吉林省英烈网)
http://chardb.iis.sinica.edu.tw/char/46395
p.19 소련군 군표 발행, 화폐개혁

소련군은 북한 점령 직후인 1945년 9월 21일 소련군의 군표를 발행하여 일제하에서 발행된 조선은행권과 같이 통용시켰다. 소련군은 아무 규제 없이 군표를 발행하여 시중에서 조선은행권을 수집할 수 있었으며, 그 조선은행권은 남한에서의 공작활동 자금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소련군과 북한정권은 1947년 12월 6일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조선은행권을 회수하고 새로이 북조선중앙은행권을 발행했다. 조선은행권은 무조건 몰수하고 주민 1세대 당 최고 500원의 북조선중앙은행권을 일률적으로 나눠주었다. 이러한 약탈적 화폐개혁으로 회수한 조선은행권의 액수는 엄청난 거액이었으며, 30억원에 달했다는 설도 있다.71) 북한은 이러한 화폐개혁을 단행하면서 그런 사실이 남한에 알려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것을 라디오 방송으로는 보도하지 않았다. 남한에서는 1948년 4월까지 북한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일제하에서 발행된 조선은행권이 그대로 통용되고 있었다. 남한의 미군정(남조선과도정부)은 1948년 4월에 이르러서야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일제하에서 발행된 조선은행권을 유통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북한정권이 북한주민들로부터 약탈한 화폐를 남한에서 4개월 동안이나 통용시켰으니, 그 4개월 동안 북한정권은 북한주민들로부터 약탈한 조선은행권을 남한으로 대량 밀반입하였다.72) 해방공간에서 북한으로부터 밀반입된 조선은행권으로 매입해둔 부동산등 각종 재산이 훗날까지 남한 내 북한 고정간첩들의 공작금으로 사용되었다는 설도 있다.

71) 대검찰청 수사국,『좌익사건실록』 제1권, 427쪽.

72) 북한에서 몰수한 조선은행권이 남한에 대량 밀반입되었음을 시사해주는 사건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소련영사관원 세르게이 세묘노빗치 슈딘이 북한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은행권 100만원으로 서울에서 다량의 귀금속과 물품을 매입한 사건(조선일보, 1948. 4.6.), 남파된 북로당원과 남한의 연루자들이 북한에서 가져온 500만원의 조선은행권으로 납, 등사잉크, 생고무, 타이어, 금괴 등을 매입하여 북한으로 밀반출하려다가 철도경찰에 검거되어 물품과 조선은행권을 압수당한 사건(조선일보, 1948. 4.7.), 남파된 북로당원이 북한에서 가져온 조선은행권 1.053만원으로 공작자금으로 사용하다가 철도경찰에 발각 체포되어 사용하고 남은 돈 조선은행권 715만3천원을 압수한 사건(조선일보, 1948. 4. 7.) 등이다. 대검찰청 수사국, 『좌익사건실록』 제1권,428-429쪽.

양동안, 1948년의 남북협상에 관한 연구 정신문화연구 제33권 제2호 (통권 119호), (한국학중앙연구원, 2010.06)
양동안, 1948년 남북협상과 관련된 북한의 대남 정치공작 국가정보연구 제3권 1호 (한국국가정보학회, 2010-08-17)
인들, 특히 김구와 김규식을 끌어들이기 위해 북한정권이 1947년 가을부. 터 1948년 봄까지 전개한 ..... 데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 참여에 강한 영향을 미친 인사는 홍명희와. 백남운이다. ...... 박갑동,『통곡의 언덕에서』, 서울: 서당,1991. 박광, 『진통의 ...
양동안, 해방공간에서의 남북한 정보·정치공작 활동 2010-02-23 한국국가정보학회 학술세미나 발표문
이중국적, 당적 문제
박갑동 - 공산당 북조선 분국



1939~1945간 군인, 군속 동원 24만 사망자 2만 2천 / 탄광 공장 노무자 72만, 희생자 수 불명
만들어진 근현대사, 일제시대 “강제징용”이라는 신화 mediawatch 2018.11.25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시작한 뒤 1939년 9월부터 조선인을 동원하는 “노무동원”이 시작되었다. 이 “노무동원”의 마지막 단계가 바로 법적으로 강제할 수 있는 “징용”이다. 하지만 “징용”은 사실 1944년 9월부터 불과 몇 개월간 시행되었다.
한편 “징용”은 미공군이 한일해협을 장악하는 1945년 3-4월경이 되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에만 실시된 것이고 일본으로 간 조선인 근로자 72만 4천여 명 중에서 징용으로 간 사람은 10만 명 내외로 추산된다.
요컨대, 1939년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 전체를 “강제”로 동원된 사람들로 볼 수도 없고, 일본에 의한 조선인 노무동원을 한데 묶어 “강제”라고 할 수도 없다는 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일제시대 육군특별지원병,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mediawatch 2018.12.02
학도지원병, 기억과 망각의 정치사 mediawatch 2018.11.27
학도지원병 출신자들이야말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반일종족주의라는 참담한 정신문화와 반일강박관념의 정신세계를 가공해 낸 장본인들

‘지원의 자발성’이라는 학도지원의 수치심이 이들 스스로의 심성을 왜곡시키고 의식·무의식 세계마저 구속하고 말았다. 이들의 기억과 망각의 정치성은 20세기 후반 민족주의 역사학과 야합하면서 ‘반일민족주의 역사관’의 형성과 확산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이들 학도지원병 출신자들은 일제의 기만과 선동에 넘어가는 바보/천치도 아니었지만, 강제동원의 피해자/독립투사도 더욱 아니었다. 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일본 국민이었고, 유년기 이래 철저한 황민화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전무후무한 세대였다.


  • mikeryu 체험 인터뷰를 들을 때 주의 할 점입니다.

체험 인터뷰를 들을 때 주의 할 점입니다.

이는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출신 이영훈 교수로부터 영감을 받아서 씁니다.

이영훈 교수는 한국 경제사 전공입니다. 그의 전공은 대개 조선부터 지금의 이르기까지 한국의 경제역사이죠.

그의 여러 연구 활동 중 일제 시대 징용을 갔던 조선인들의 경제 상황이 어떤지를 알고 싶어서 수 백명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터뷰한 내용들에 대한 100 % 신뢰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실토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첫 번째, 질문자가 누구냐에 따라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점입니다. 두번 째는 이 답변을 들을 사람이 누구냐를 고려해서 답변이 재단된다는 점이고요. 세번째는 질문자가 질문을 하면 거기에 영향을 받고, 심지어 특정 답변이 유도된다는 점이라고 합니다.

일본에 징용을 갔다가 해방된 다음에 귀국해서 농사 짓는 어르신들이 그의 인터뷰 대상분이었습니다. 그들은 대개는 일본이 얼마나 악랄하게 부려 먹었는지, 차별을 했는지를 성토하더랍니다. 그런데 유도 질문을 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하도록 개입하지 않으면, 대개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추억에 잠기면서, 저녁 때 놀러나간 일, 데이트 한 일, 재미있는 일들에 눈이 반짝거리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일은 고된데 월급을 받았고, 그걸로 일본 생활응 했다는 거죠. 그런데 귀국해서 일본에 대한 조금이라도 찬양을 하면 욕 먹을까봐 상대를 봐 가면서 답변을 조절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나는 이를 탈북자들 인터뷰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봅니다. 이 인터뷰를 듣는 사람들이 한국인이므로 이들을 고려하여 적절하게 수위를 조절하고 있다는 점, 자신이 북한에서 잘못한 것들은 생략한다는 점, 몇 가지 요소가 어우러지면, 이건 완전이 왜곡된 내용으로 변질되죠. 그래서 이제 저는 그런 것들을 잘 캐치하면서 봅니다. 어떤 내용은 감추었구나. 어떤 건 본인의 착각일 거고, 어떤 것은 거짓말이다. 이런 거 말이죠.


  •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3040734700、宣伝関係雑件/嘱託及補助金支給宣伝者其他宣伝費支出関係/外国人ノ部 第一巻(1-3-1-35_1_2_001)(外務省外交史料館)」
標題:4.在上海中日公理基督教会 p.2 :여운형은 대정8년(1919년) 11월 14일 목사


  • 外務省 警察史 在吉林總領事館及敦化分館, 9640面
外務省警察史 / 滿洲ノ部 / 在吉林總領事館及敦化分館
재간도총영사관 원전 경시 : 소화 11년(1936) 12월 12일
원제목 : 管內鮮人ノ匪害及保護ニ關スル狀況其他送付ノ件
발신 : 在間島總領事館 園田 警視


고동뢰 사망 시기 엉터리, 손인실 증언 엉터리, 조국광복회 엉터리, 광복의 천리길 맹세 엉터리, 길림 감옥 8개월 수감 엉터리. 동아일보 길림성 정부 호송 기사는 1931년 5월초/ 3월초 체포기사를 놓고 엉뚱한 해설, 김인욱의 무운 장구 엉터리- 김석원으로 이름도 잘 못 아는데 무슨 무운장구 깃발을 들었다고 주장하는 것도 웃기지만 그걸 사실이라고 옮겨적는 사람도 한심.

이북통신_1947_02_04

평양 쏘미공동위원회 합동회의 개최 중 무허가 시내통행자는 엄벌에 포고령 33
소련시민과 특히 부인아동에 대하여 36
소위 평양에서 사망자8백여명 중상자 수천명을 내였다는 반탁시위사건의 진상발표 39

p.9 북한 토지개혁 법령
p.221 임시인민위원 약력
p.269 금성 지역에서의 소련군의 쌀 수탈. 배급 무
p.275 동아일보 03/07 기사 - 평양 학생들의 소군정 항의 시위- 반탁
十三專門中學男女學生(십삼전문중학남여학생)들 突然(돌연)히同盟休學(동맹휴학)을斷行(단행) 1946.03.07 동아일보 2면 - 평양의 반탁 운동
서울 平壤合同 留學生同盟强化 大東新聞 1946.04.30


공동위원회 사업 재개 이후 남․북조선 상황에 대한 정보 1947.06.05
홍명희의 말에 따르면, 미국 대표단은 김규식, 여운형과 자기 자신을 천거할 것이라고 합니다.
군정청 홍보처는 서울에 거주하는 1,000명을 대상으로 남조선 대통령 후보자 문제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조사자 가운데 43.9%가 이승만을, 18.5%가 김규식을, 17.5%가 여운형을, 15.2%가 김구를, 1.3%가 허헌을, 1.3%가 조소앙을, 0.9%가 김원봉을, 0.7%가 김성수를, 0.4%가 박헌영을 거명하였습니다.



일제하에 평양을 비롯한 평안남·북도지역은 민족자본가층이 두텁게 존재하였으며 민족주의운동, 특히 기독교 민족주의운동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해방 직후 이 지역에서 건국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바로 이들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었으며, 그 지도자는 曺晩植이었다. 조만식이 주도하여 출범한 ‘平安南道建國準備委員會’의 간부 명단은 아래와 같다.
위원장 曺晩植, 부위원장 吳胤善, 총무부장 李周淵, 치안부장 崔能鎭, 선전부장 韓載德, 교육부장 洪箕疇, 산업부장 洪貞模, 재정부장 朴承煥, 생활부장 李宗鉉, 지방부장 李允榮, 외교부장 鄭基秀
무임소위원 金炳淵, 韓根祖(법조계), 金翼鎭, 金主敎(종교계), 池昌奎(유림), 朴賢淑(여성계), 金秉瑞(의료계), 金洸鎭 등(오영진,≪소군정하의 북한-하나의 증언≫, 국민사상지도원, 1952, 35∼36쪽;김용복,<해방 직후 북한 인민위원회의 조직과 활동>,≪해방전후사의 인식≫5, 한길사, 1989, 203쪽).

==논란이 된 발언== ===일제하 국내에 있은 사람은 모두 친일파라 발언===

===김일성에게 노후를 보낼 과수원을 부탁했다는 발언의 사실 여부===
===김구-유어만 대화록=== ===경교장 소유주는 친일파===
===국내파 방응모는 한독당 재정부장===송진우의 재정 지원

==신탁통치 반대 운동== ==남북협상== ===김일성에게 과수원을 요청한 것은 사실인가?=== ===남침을 예견하면서도 미군철수를 주장했나?=== 김구-유어만 대화록 ==암살==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에게 암살 당했다. 암살 배후에 대한 논란이 많으나 명백히 밝혀지지 않았다.



pp.18~22 박헌영의 1월 16일 19:15 라디오 연설문 나옴. (공산당이 번역해 준 것이며, 실제 방송은 박헌영이 했는지 불명)


Vyacheslav Molotov(1890~1986) Nikolai Bulganin(1895~1975)

· 수신자 메레츠코프, 시티코프


우선 일본인, 친일분자, 민족반역자들의 옛 토지가 몰수되었다. 그 후 소작료가 3.7제로 운영되고 있다. 민주적 토지개혁의 시행으로 농민들은 토지를 분배받을 것이다. 식량공급과 공산품 보장에 있어 그들이 겪고 있는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순수교역망의 확대를 통한 농산물 매매를 시행하고, 이러한 시책을 기반으로 암거래와의 결정적인 투쟁을 전개할 것이다. 이 시책은 나라의 물적 상황을 개선시킬 것이다. 조선 인민들은 자기들 고유의 힘으로 인민경제를 재건할 것으로 보인다.

1945년 9월 25일 조선공산당 평남지구확대위원회에서 결정한 소작료 3.7제와 일제 및 친일파 반동지주 토지몰수 방침은 1945년도 시점에 평안남도뿐만 아니라 북한 전역에서 실시되기 시작했다. 각 도인민위원회 및 농민위원회는 몰수한 토지를 농민에게 경작케 했으며, 지주층 일반에 대해서는 소작료 3.7제 적용과 지주 식량분 이외의 공출 정책을 통해 지주 경영을 위축시키고 있었다. 조선산업노동조사소, 󰡔옳은 路線을 爲하야󰡕, 우리문화사, 1945, 26~31쪽; 김성보, 󰡔남북한경제구조의 기원과 전개: 북한농업체제의 형성을 중심으로󰡕, 역사비평사, 2000, 95~101쪽.

남조선의 미국 지역은 상황이 다르다. 미군사령부는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 그 중에서도 특히 친일분자들과 반동들을 지지하고 있다. 그들은 거리낌 없이 후술하는 일본인들을 이용하면서 친일분자들을 중요한 자리에 등용하고, 군사관료 통치를 시행하고 있다. 이로 인해 반소 및 반공 선전을 노골적으로 자행하는 반동세력들이 강화되고 있다. 현재 노동자대중은 좌익의 지도하에 놓여있다. 따라서 반동들은 대중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자기들이 마치 신속한 민주주의 정책을 시행하는 것처럼 대중들을 기만하면서 민족 부르주아와 함께 다양한 정당들을 새롭게 조직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기만적 정책은 와해되었다. 이 정책이 와해됨에 따라 그들은 좌익 지도자들에 대한 테러를 조직하였다.




◎견제­협력하며 권력놓고 경쟁/미소공위 급진전에 3차 평양행/김등 고위간부들 외곽까지 마중


南北朝鮮, 左右一致, 行動方針을 討議 決定, 反託總動員中央委員會 중앙신문 1946.01.01 상임위원 : 21명중 洪命憙, 朴憲永 있음.
元旦의 決意는 託治 排擊!! 共黨서울委員會서 飛檄, 託治는 民族의 恥辱, 戰線 統一하고 走狗輩를 驅逐하자. 중앙신문 1946년 01월 01일
이날 총회는 金台俊의 개회사에 이어 朝共黨 李鉉相으로부터 동회의 취지설명과 결성에 이르기까지의 경과보고
託治(탁치)는 國際協力(국제협력) 朝共(조공)의 態度表明(태도표명) : 1월 2일 동아일보 1946-01-05 1면


동아일보 모스크바 삼상회의 보도의 진실 / 박헌영의 뉴욕타임스 발언 논란

강덕상(姜徳相) 편, 『현대사 자료(現代史資料) 30 : 朝鮮 6』(東京, みすず書房, 1976) p.164 : 《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 동경(東京) : 미스즈서방(みすず書房)
1930年代の在満・朝鮮人の武装闘争や在間島共産党関係檄文類、また日中戦争勃発後のパルチザン闘争の領事館・憲兵隊他の資料。
Korean Leftists Divide Sharply by Richard J. H. Johnston New York Times 1946.02.16
North Korea Reds Said to Start Rule by Richard J. H. Johnston New York Times 1946.02.20
Party rift widens in Korean dispute by Richard J. H. Johnston New York Times 1946.01.18
Parley in Korea is said to be set by Richard J. H. Johnston New York Times 1946.01.08
Communist leader favors Russian control over Korea by Richard J. H. Johnston New York Times 1946.01.10
5 Parles in Korea back allied offer by Richard J. H. Johnston New York Times 1946.01.11
Korean complain of Russian looting by Richard J. H. Johnston New York Times 1945.10.27
Korea's rightists again on parade by Richard J. H. Johnston New York Times 1946.01.14


Orionsword/m31andro%/mtsmt@hanmail.net/Yung Ahn


왜 허구헌 날 자주적인 독립국가 수립 타령을 하면서 소련이 대리인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만든 것에는 일언반구도 비판하지 못하는가? 북한 도처에 걸어놓은 큼지막한 스탈린 사진은 무얼 뜻하는가? 신탁통치를 처음에는 좌익 보두가 격렬히 반대하며 찬성자는 반동분자라고까지 하다 소련의 지시를 받고는 일시에 찬탁으로 돌아선 것이 얼마나 자주적인 행동인지는 따지지 않는가? 좌파들은 소련의 눈밖에 나면 하루 아침에 정치생명이 끝나는 처지에 있었는데 그들과 무슨 자주적인 통일정부 협상을 하는가? 미군정이 그렇게 행동했는가? 미군정이 김규식을 지도자로 선호했다는 증거는 많지만 그는 항상 이승만, 김구, 한민당에 비해 열세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신탁통치안이 보도되자 즉각 반탁운동 대열에 동참했으나 소련의 지시 하나로 일제히 1월 3일부터 찬탁으로 돌아섰다. 소련이 김일성을 택한 것이 확실해지자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이 하루 아침에 박헌영을 버리고 김일성에 줄 선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박헌영 본인도 소련의 지시를 맹종하는 사람에 불과하여 반탁에서 하루 아침에 찬탁으로 바꾸고, 소련만의 신탁통치에다, 조선의 소련 연방 편입까지 주장하였다. 오죽했으면 일개 소련 부영사에 불과한 아나톨리 샤브신이 박헌영은 나의 심복이라고 말했겠는가? 박헌영이 이런 정도이니 소련군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고 소련이 자신들의 대리인으로 선택한 김일성이야 말할 것도 없다.

미소공위가 열리기도 전에 소련은 조만식등 북한의 반탁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모두 제거하고,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사실상의 정부인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소련에 충성하는 찬탁파들만 살아남은 북한과 남한의 반탁파를 제외한 좌익 및 중도세력이 참여하는 통일정부가 구성되면 그 정부는 소련의 의중대로 끌려갈 수 밖에 없는 구조가 되며, 결국 공산국가로 가는 지름길이 된다. 소련이 추진했던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미국도 소련의 방식대로 남한의 공산주의자나 좌익들을 모두 제거하고 우파만의 임시정부를 세운후 협상에 임했어야 형평이 맞다


이런 소련의 행태로 볼 때 공산주의자들에게 찬탁을 지시한 것은 미소공위에서 논의할 조선임시정부에 반탁을 꼬투리 잡아 우익을 배제하려는 노림수임.


미소공동위원회에 임하는 소련의 의중
소련의 의도는 대외적으로 하는 발언보다 당시 북한에서 실제로 추진하고 있던 일들이 더 정확히 반영하고 있음.
(당연히 공산당의 협조 여부는 무슨 말을 했는가보다는 무슨 행동을 했는가를 기준으로 판단되어져야 했다. 주한미군사 2 > 2부. 1장. 한국의 정치와 사람들, 첫 6개월 > 2. 공산당)
1945년 9월 초 스탈린이 88여단의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불러 면접한 후 북한 지도자로 결정 - 북한 분할 의도를 내보인 첫 증거 9월 20일 스탈린 비밀 지령문 12.25 슈킨 보고서 - 스탈린 비밀지령 이행 속도 느리다.
01.05 신탁 반대 조만식을 친일파로 몰아 연금. 반대세력 제거

02.08 소련이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고 김일성을 위원장에 임명한 이유 - 자칭 정부수립이라 함.
미소공위에서 통일정부수립 합의가 될 경우 북쪽이 헤게모니를 잡도록 하기 위해
국내 기반이 없는 김일성이 소련군정 기간에 확고한 기반을 만들 수 있도록 돕는다
북한은 소련군이 아닌 조선인이 통치한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3월 5일 토지개혁 - 김일성의 지지기반 확대 : 1946년 봄에는 남한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도 김일성에 대한 지지도가 박헌영보다 우위로 됨.
3월 23일 20개 정강 - 공산국가 건설
6월 현물세 징수
6월에는 8시간 노동제를 규정한 노동법령이, 7월에는 남녀평등권에 대한 법률이 공포되었다. 8월에는 '산업⋅교통운수⋅체신⋅은행 등의 국유화 법령'이 공포되었다.

당시 일본이 소유하였던 산업체는 소련군의 승인 하에 각급 인민 위원회가 접수하고 공장 위원회 등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는데, 국유화 법령을 통해 이들 산업체가 정식으로 국유화 되었다. 이때 국유화한 공장과 기업은 북한 전체 산업 규모의 90%인 1,034개에 달하였다.
8월 산업, 교통운수, 체신, 은행 등의 국유화

북한에서 진행된 이런 일들은 소련의 지휘 감독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북한 지역을 공산화시켜 자신들의 영향력하에 둔다는 계획은 처음부터 확고했고, 그 외에 미국과 협상을 벌여 종국적으로 남한마저 적화시키는데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음. 남한의 공산주의자들 지원하여 파업 폭동을 일으킨다든가 하는 일을 대화와 병행.




  • 북한임시인민위원회 (사실상 북조선 정부, 사진이 증명) : 소련 군정은 조선인을 내세워 간접 통치를 했으나 미군정은 직접통치를 했으니 나쁘다 + 총선으로 남조선 단정 수립을 주장한 이승만이 분단의 원흉 (남북협상파의 구국충정이 좌절?)

소련군정이 간접통치했다고 찬양하는 임시인민위원회는 사실상 북한 단독의 정부 - 토지개혁, 20개 정강 제멋대로 실시....


  • 북한 김일성이 실제로 전설적 김일성 장군처럼 유명해서 자력으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정도의 인물이었다면 독자 세력을 구축하여 소련에 고분고분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므로 소련이 지도자로 선정하지 않았을 것.
박헌영 같은 상당한 독자세력을 가진 사람은 소련에 순종적이었음에도 탈락시키고 무명인사를 지도자로 고른 이유임.
이에 대해 해방 직후 평양에서 김일성이 지도자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본 오영진이 심도있는 분석을 내 놓음.


김일성이 지도자로 받아들여진 과정

  • 한재덕 : 의심스런 자이지만 소련군이 미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1] : 1945년 10월 13일 저녁 일본요정 다마야 모임.

蘇聯(소련)이 내민 『金日成(김일성)』

너무나 초라한 모습
…모두 눈을 疑心(의심)했으나 별수없어…

金日成(김일성)이라 불리운 三○(삼십) 대의 젊은이는 자그마한 몸집에 얻어 입은 듯한 잘 어울리지 않는 밤색 양복을 입어 어딘지 시골떼기 청년같이 보였으나 검게 거을린 얼굴과 쏘련군 젊은 장교들이 많이하는 식으로「스포츠」형으로 짧게 깍은 머리는 그를 무척 경강스럽게 보이게 하였다. 그러나 어느 모로보나 「장군」이라는 인상은 찾아볼 흔적도 없었다. (사실 이때는 그들 사이에서조차 「장군」이라고 불리우지도 않던 때이다.) 더우기나 연세가 이미 노경에 이르렀을 것이나 기골이 장대하고 위풍이 늠름하다는 전설적 존재로 되어있는 그 金日成(김일성) 장군으로 상상되는 풍채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좌중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그러나 쏘련군이 들어와서 이미 두 달동안, 그 사이 그들의 하는 일과 억지를 보아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벌써 직감적으로 「이것은 쏘련이 내세우는 金日成(김일성)이다!」하는 판단과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타협이요 체념이기도 하였다. 아니라고 해보았대야 별 수없는 일이요 그러니 그렇게 알면 그만이 아니냐! 하는 생각이 먼저 앞서는 것이었다. 더우기 공산측 위원들에게 있어서는 쏘련 상전이 내세우는 일에 대하여 의심을 갖는다는 것조차가 죄악시되는 일이었다.
........................
金日成(김일성)의 등장은 이와같이 첫날 비공식 좌석에서부터 다분히 연극적이었던 것이다. 먼저 「로마넹코」소장이 「다와리시치·김일쎈(김일성 동무)」을 소개한다고 그 육중한 몸집을 일으켰다. 그는 마치 金日成(김일성)이 일제를 반대하여 싸운 우리나라 최대의 애국자요 영웅인듯이 장황하고 거창한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러니 「민족적 지도자」로 받들라는 소리였다. 이런 것이 얼마나 허황한 것인가에 대하여는 차차로 밝히려하는 바이지만, 하여간 만일 그가 그런 존재라면 그것은 우리 민족의 일이니 우리 민족 자신이 알아서 할 일이지 왜 외국 사람, 쏘련 사람이 그것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떠맡긴단 말인가? 그것은 「로마넹코」의 춤뛰는 열변을 들으면서 누구나가 첫째로 반문하고싶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朝鮮民衆運動者大會, 治安維持法, 新民府, 金佐鎭, 爆彈, 齋藤 / 수십개의 폭탄과 권총을 휴대한 신민부원 조선내디로 들어와서 뎨일차로 총독○○




한동석 (1938) / 제국의회 보고서 (1944) 김일성 유언비어 / 유석인이 들은 김일성은 일본 육사 나온 사람이라는 요시다의 강연

김일성 장군의 전설은 일찍부터 존재했지만 후대에 항일연군의 6사장이나 또는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소식도 덧붙여져 소문이 퍼진 경우도 없지 않았던 것 같다. 함경북도 도민회 회장과 15대 국회의원(자유민주연합)을 지낸 월남민 김허남(金許男, 1920~ )은 자신이 소학교 입학하면서부터 김일성 장군의 이야기를 듣고 관심을 가졌는데, 처음에는 항일투쟁의 영웅으로 소문이 나더니, 나중에는 주민을 괴롭히는 비적으로 소문이 바뀌더라고 증언하였다.[2] 항일연군의 김일성은 당시 신문에 주로 약탈을 일삼으며 주민을 괴롭히는 공비로 보도되었었다. 김허남은 해방 후 북한 김일성이 대중 앞에 처음 등장하던 1945년 10월 14일의 평양 집회에도 참석했다가, 아무래도 말로 듣던 김일성 장군이 아닌 것이 분명하여 주변 알만한 사람들에게 그에 대해서 물었으나 아무에게도 그런 말 하지 말라는 협박만 받았다고 하였다.


평양 회담 당시에 김구가 김일성에게 정치적 망명을 타진했다는 것이다. 곧 김구는 자신의 장래 활동에 대하여 만일 미국인들이 자신을 탄압한다면 이북에서 정치적 피난처를 구할 수 있는가를 물었고 김일성은 긍정적으로 대답했다는 기록이 있다. 김일성은 1985년 8월 일본 월간지 ‘세카이(世界)’와의 회견에서 김구가 자신에게 “지난날의 죄과를 털어놓으면서 여생을 편안히 보낼 수 있도록 과수원을 차려 달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뒷날 그의 어록에서 이를 다시 언급하면서, “김 선생(김구)이 남조선에 나가서 투쟁하다가 정 곤란하면 다시 북조선에 들어오겠다고 했는데 그렇게 하십시오. 우리는 선생이 북조선에 들어오는 것을 언제나 환영할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더 증폭되어 김구가 김일성에게 임시정부 주석의 직인(職印)을 내놓으면서 “앞으로는 장군님이 국가의 지도자이시니 이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이에 대해서 김일성은 “선생이 내놓은 상하이임시정부의 인장은 그냥 가지고 가십시오. 내가 그 인장은 받아서 무엇하겠습니까? 우리에게는 그저 인민 대중의 두터운 신임이 있으면 됩니다”라고 거절했다는 것이다.(‘김일성저작집’(4), 303~304쪽·김구와 한 담화(1948년 5월 3일))

이 대목은 매우 미묘하여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당초 김일성의 입을 통해 이 비화가 공개되었을 때 그것은 사실을 과장했고 또 악의가 있었다는 것이 통념으로 받아들여졌다. 김구가 임시정부 주석의 인장을 김일성에게 바쳤다는 그의 발언은 믿을 수가 없다. 김구가 평양에 갈 때 그 직인을 가져갔으나 그것은 남북한의 합의가 이뤄지면 권위 있게 날인하기 위한 것이었지 김일성에게 ‘헌상(獻上)’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과수원 문제는 망명한다거나 구걸의 뜻이 아니라 김구가 자신의 고향도 이북인데 노후에는 통일된 고향에 돌아가 과수원이나 운영하면서 여생을 마치고 싶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그런데 김정일은 더 나아가 영화 ‘위대한 품’(1986)에서 이 일화들을 과장하여 극화했다. 이 일화는 북한이 남북협상을 정치적으로 어떻게 선전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이완범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는 이 대목을 거론하면서 “김구는 김일성·김정일에게 살아서도 이용당하더니 죽어서도 이용당했다”는 글(‘김구, 남북협상, 대한민국 수립’·한국정치외교사학회·2015년 4월 23일·54쪽)을 남겼다.


pp.14~18 : Ⅲ. 남파 공작원들을 통한 공작 - 김구 포섭을 위한 간첩 성시백의 역할 :


남북 단일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은 북한이 이미 토지개혁등 여러 공산주의 개혁을 단행하여 남한도 공산화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단계에 이미 들어서 있었다.

소련군이 점령지역인 북한에서 실천에 옮겨야 할 정책은 그때까지 구체적으로 확정되지 않았다.

문제는 9월20일 스탈린의 ‘지령’을 통해 일거에 해결됐다. ‘지령’은 소련군이 북한 점령정책을 수행하는 데 반드시 따라야 할 강령과 같은 방침으로 다음과 같은 사항을 열거했다. (1)북한 영토 내에서 소비에트나 소비에트 정권의 다른 기관을 수립하거나 소비에트 제도를 도입하지 말 것. (2)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 사회단체의 광범위한 동맹에 기초해 북한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데 협력할 것. (3)적군이 점령한 북한의 각지에서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 단체가 형성되는 것을 방해하지 말고 그 활동을 원조할 것. (중략) (7)북한의 민간 행정에 대한 지도는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에서 수행할 것.



김구는 1948년 1월 25까지만 해도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에 참여한다는 데에 이견이 없었다. 김구뿐만 아니라 한독당 구성원 다수도 같은 생각이었다. 유엔위원단의 입북(入北)을 거부한 소련의 입장을 재확인했다는 보도가 있자 한독당은 1월 25일 “소련측이 북조선 입경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부득이 유엔 감시하에 수립되는 정부가 중앙정부라면 38선 이남에 한하여 실시되는 선거라도 참가할 용의가 있다”라고 천명했으며, 김구와 임정계가 주도하는 국민회의도 “남북통일선거가 불가능함은 극히 유감이다. 남한만에 국한된 선거이라도 중앙정부로 세계가 인정하는 한 이에 협력할 수밖에 없다.”라는 성명으로 미루어 김구와 임정계열의 단선에 대한 입장은 긍정적이었다.

그리고 김구는 이때까지만 해도 남북협상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그 예로 47년 10월부터 조소앙 주도하에 한독당의 일부 간부가 중도파세력 중심의 각 정당협의회에 참가하면서 남북협상론에 동조하자 김구는 남북협상을 주장하는 한독당 간부들을 해당행위자로 규정하고 제명했다.

그러나 1948년 1월 26일, UN한국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한 후 열린 청문회에서 김구는 외국 군대의 즉시 철수와 남한만의 선거 반대를 표명하였다.

원문 마지막 부분 : 5.10 총선 직후의 남북한 상황, 남북 연석회의 결과 분석 / 김구 방북에 동행했던 좌파인사도 구금되었다 돌아와 남한은 북한에 비해 천국이라고 함.



스탈린의 비밀 지령문, 쉬킨 보고서 등: 소련은 북한 점령초기부터 단독 정권을 세우는 계획하에 이를 주진. 공작을 통해 남한 사회의 분열과 혼란을 유발시켜 공산화 기도. 이런 대남 정책은 그 후 김일성 정권도 그대로 이어 받음.

특히 비망록에는 남한(南韓)으로부터 받은 정세보고에서 김구가 기자들에게『나를 5월10일까지 암살하려는 것을 알고 있다』고 기록, 김구는 평양으로 출발하기 전 자신의 암살을 예견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이후 평양에 간 김구는 48년5월3일 1시간 30분동안 김일성과의 단독회담에서『만일 미군정(美軍政)이 나를 강하게 압박하면 북한에서 나에게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은가』라고 묻자『김일성이 긍정적으로 대답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그나찌예프가 보고하다. 1946년 10월 6일 박헌영이 남조선을 탈출하여 북조선에 도착했다. 박헌영은 9월 29일부터 산악을 헤매며 방황했는데, 그를 관에 넣어 옮겼다. 박헌영이 휴식을 취하게 하라고 지시를 내리다. 합당 사업은 도 수준까지 진척되었고, 지하에 정치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선거에 대해 보고하다. 지식인들의 동향에 대해 보고하다. 지주들의 동향 - 지주들은 토지를 다시 몰수할 것이라는 선전을 해대고 있다. 각급 인민위원회 위원 입후보가 시작되었다. 발라사노프가 보고하다. 번스는 서로 상의하여 타협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번스와 조만식의 대담에 대해. 번스와 김일성의 대담에 대해 보고하다.註 048

48) 번스와 김일성의 회담 기록은 러시아연방대외정책문서보관소 문서군 0102, 목록 6, 문서함 2, 문서철 3, 3-10쪽(번스와 김일성의 대담)에 수록되어 있다. 번스와 김일성의 회담에는 발라사노프와 그의 부관 샵쉰도 동석했다. 번스는 남조선에서 우익은 좌익을 반대해 투쟁하고 좌익도 좌우합작을 원치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번스는 이승만과 김구가 “좋지 못한 사람들”이며 박헌영도 정당들의 통일을 방해한다고 비난한 반면 김규식은 인민에게 영향력 있는 “훌륭한 사람”으로 친일파와 투쟁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번스는 김규식과 여운형이 추진하는 좌우합작에 기대를 표명했다. 그는 박헌영과 여운형의 합작은 미군정에 대한 반대를 의미하기 때문에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번스는 모스크바 결정에 반대한 일부 세력을 용납할 필요가 있음을 언급했다. 번스는 미소공위 재개조건으로 반탁세력을 용인하되 이승만 김구 박헌영으로 대표되는 좌우 양극단이 아니라 김규식과 여운형으로 대표되는 중도 좌우파에 기초해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박헌영이 김규식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묻고 있다. 그는 이승만과 김구의 정체를 대중 앞에 폭로한 것처럼 김규식의 정체도 폭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흥분하지 말고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고 지시하다.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그의 옳지 못한 결정들을 근거로 폭로해야 한다고 조언하다.


김두학 비화: 평양의 소련 군정 --> 秘錄 평양의 소련군정 (기록과 증언으로 본 북한정권 탄생비화) 김국후|한울아카데미 |2008.06.14


남조선 정세를 검토하고 [남조선 좌파에 대한] 지원 대책을 강구한다.

로동당의 당원 수는 약 40만 명이다.(377,000명) 합당이 임시적인 조치라는 말들이 계속되고 있다. 이론적인 문제들에서 명확하지 못한 점들이 많다.

박헌영은 당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1946년 9월 8일자 서울의 라디오방송 보도에 의하면 박헌영과 이주하(공산당 제2비서) 및 이강국(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국장)은 법률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註 007

7) 박헌영 등에 대한 체포령을 말한다.


집회 현장의 상황에 대한 소련군정 당국자의 증언[편집]

월남민들의 김일성 가짜 증언은 무시되고, 친일파가 주도하는 남한 정부가 항일 영웅 김일성에 비해 정통성이 밀려서 김일성을 가짜로 만들었다는 주장이 횡행하고 있다. 잘 밝혀진 이승만의 독립운동이, 온갖 조작으로 뒤범벅되어 실제로 무슨 일을 했는지 알기도 어렵고 논란만 무성한, 비적질과 구분하기도 어려운 김일성의 빨치산 투쟁보다 정통성이 없다는 것은 무슨 근거로 하는 말인지 알기 어렵다. 국민이 선거로 선출한 지도자보다 스탈린의 임명을 받은 지도자가 더 정통성이 있다는 것은 한국 좌파들만 가진 상당히 독특한 견해이다.

남한의 우파들이 김일성을 가짜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당시 평양의 집회를 기획하고 주도했던 소련군정 당사자들의 집회 현장의 모습에 대한 후일 증언을 보면 알 수 있다. .....


의란구 유격대 강덕상(姜徳相) 편, 『현대사 자료(現代史資料) 30 : 朝鮮 6』(東京, みすず書房, 1976) p.164 (허동찬, p.130) / 조선공산청년회 조직의 건 / 해방일보 2건 / 조영암, 북한일기

8•15해방일주년기념 북조선 민주주의 건설 사진첩 / 조소 경제 문화 협회 사진첩 / 조소 친선과 소비에트 문화 순간 기념 사진첩 / 1949년의 `조쏘친선과 쏘베트문화 순간`

Signal Corps Photographs of American Military Activity Part 2 (2차 세계대전 전후) : page 2에 대한민국독립1주년 사진 나옴. (1948년 건국)

안동에서 작전 지도를 살펴보는 김석원과 미군 장교들 국립문서기록관리청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청류정에서 본 모란대와 대동강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정보시스템 p.68


満州事変関東軍記念写真帳 3分冊の1 / 満州事変関東軍記念写真帳 3分冊の2 / 満州事変関東軍記念写真帳 3分冊の3

c:Category:Trams in Pyongyang / c:Category:Taedong River / c:Category:Pyongyang in the 1900s / c:Category:Korea under Japanese rule / c:Category:Rail transport in Korea 1896 – 1945 / c:Category:Buddhist temples in North Korea / c:Category:History of Pyongyang /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 고문헌 > 일제강점기 사료 > 조선총독부(朝鮮総督府) 사진기록물

국가기록원 6.25 전쟁 / 6.25전쟁 단계별 개관 > 제3단계(1950. 10.19 ~ 1951. 7. 9) : 6.25 당시 대동강을 넘는 피난 대열

기록으로 기억하는 6.25 전쟁 국가기록원 e-기록 속으로 2010 AUTUMN + 제3호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 고문헌 > 일제강점기 사료 > 조선총독부(朝鮮総督府) 사진기록물

미국 국립기록관리청(NARA) 소장 6.25전쟁 관련 수집 기록물 공개 국가기록원 2015-06-24 : 대동강 철교의 피난민 사진이 2번째 파일에 있음.

NARA 기록으로 보는 6.25 / 전쟁, 사람 그리고 삶 : 사진으로 보는 6·25 국립중앙도서관 : 1950년 12월 3일 대동강 물을 건너는 사람들

당창건기념탑

대동교


민성일보(民聲日報) 1946년 1월 14일 1면 : 원문보기 p.7 (밑에서 2번째 단 좌측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金日成)이 나옴.)

1946년 1월 14일 발행된 민성일보(민성일보, 제83호) 제1면. 민성일보는 1945년 9월 15일 대구에서 창간된 좌익 성향의 일간지. 본 면에는 사설(社說) "우리의 진로"를 통해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토대로 민족통일전선에 의한 임시민주정부를 수립을 주장하고 있고, 미소공동위원회 개최를 앞두고 각도 인민위원회 대표회의 개최 소식과 동회의에 보고된 이강국의 "현 내외 정세 보고" 요지를 싣고 있음.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金日成), 조선독립동맹 대표(金枓奉),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북부조선총국 위원장(문창형) 등 이북 정당 사회단체 명의의모스크바3상회의 결정 지지 성명서,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박두 소식 등이 게재되어 있음. 취급인물 이강국;김일성;김두봉;문창형;이관엽;박정애(朴正愛);방수영(方壽永)


http://botw.egloos.com/11277065


2-го Дальневосточного фронта: 2nd Far Eastern Front

Дальневосточный фронт (ДВФ) / 구글 영역 The Far Eastern Front (FEF)

Soviet 88th Special Rifle Brigade ja:第88独立狙撃旅団 (ソ連軍)


틀:PD-North Korea File:1945-10-14-김일성과 Mekler 중좌.jpg

틀:PD-Art File:Heo Jong-suk and Kim Jong-suk ather in Pyungyang.jpg

틀:PD-Old

김일성 연보 : http://www.cybernk.net/infoText/InfoHumanDetail.aspx?SearchSubject=null&SearchAdminst=null&schword=&cp=0&mc=EJ0902&hid=EJ090200227704&direct=1&SearchSubject=null&SearchAdminst=null

김일성에 대한 연구[편집]

보천보 사건 주역 6사장 김일성의 신원(身元)과 전사에 관한 기록들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조국.. 김영환 가명... 조부모가 그리워 한 숨에 달려갔다.... - 한재덕

장군님이 오시는 줄은 아무도 몰랐으나 장군님이 오신 것은 누구나 알았다. - 이찬

장군님은 꼭 나이가 많아야 하나? - 이찬

장군님의 과거는 몰라도 좋았다 - 박석정

유학관(劉學官, 1892 ~ ?) 1921년 9월 16일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 제1중대 제3소대 제1분대 상등병으로, 군비단 본부를 출발하여 23일 함남 갑산군(甲山郡) 동인면(同仁面) 함정포(含井浦)의 일본경관주재소를 공격하여 주재소를 폭파하고 순사부장을 사살한 뒤 무기와 탄약을 확보하여 30일 본영으로 귀환하였다.

김봉관(金鳳官, 1862. 2. 25 ~ 1922. 6. 22) 대한독립군 단장 홍범도(洪範圖)의 비밀대원으로 1922년 6월 14일 동지 다수와 함께 갑산(甲山)경찰서 함정포(含井浦)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인 수석강구(首席江口)와 그의 처를 사살하고 주재소를 전소시키고 무기 탄약 등을 탈취하였다. 그러나 동년 6월 20일 갑산군(甲山郡) 동인면(同仁面) 외산리(外山里) 산중에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본서(本署)로 압송 도중 일경에게 피살 순국하였다.

甲山含井駐在所(갑산함정주재소)에 爆發彈(폭발탄)을投擲(투척) 독립단이십명이폭탄을던지고영림창출장소와면소까지방화 駐在所下人一名慘死(주재소하인일명참사) 동아일보 1921-09-27 03면 이십사일새벽두시삼십분경에약이십명의독...

官廳破壞目的(관청파괴목적)으로 1925.03.24 동아일보 2면

駐在所(주재소)와營林廠(영림창)을 爆彈(폭탄)으로襲擊(습격) 1926.07.17 동아일보 2면



김창국 정찰 부국장 / 최원 (崔元, 정찰국장)

http://botw.egloos.com/11100142


[File:김일성수령_홍명희선생_김구선생.jpg|thumb|240px|left|1948년 4월. 김일성수령 홍명희선생 김구선생]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EA%B9%80%EC%9D%BC%EC%84%B1%EC%88%98%EB%A0%B9_%ED%99%8D%EB%AA%85%ED%9D%AC%EC%84%A0%EC%83%9D_%EA%B9%80%EA%B5%AC%EC%84%A0%EC%83%9D.jpg

陸軍工兵參領 金成殷 http://e-kyujanggak.snu.ac.kr/LINK/Link.jsp?type=GAN&id=GK17289_00I0115_0020

軍部參謀局第二課長陸軍工兵副領金成殷이가本月一日에身故事 http://e-kyujanggak.snu.ac.kr/LINK/Link.jsp?type=GAN&id=GK17289_00I0126_0012

간도의 비수 김일성[편집]

  • 죽은 유명한 간도성의 비수 김일성 이름 습명 - 만선일보
  • 왕청현 출신 연길현 의란구 유격대 김일선 - 3사장 김일성(김일선)
  • 간도에 처자식이 있다. - 3천리
  • 왕청현 유격대 정치위원?

金聖柱[3]


모자쓴 대위[4]

金日成 중국에서 약탈, 도둑질 일삼아 : 러시아의 정치 주간지 '노보에.브레미야'(新時代) [5]


해방 후 귀국할 때 그의 공식적인 이름과 신분은 소련군 진지첸 대위였다.

청중들은 그가 무슨 항일투쟁을 했는지, 이름을 무얼 썼는지는 알지 못했으므로....

"I want you to work on this person," said Meretskov, referring to Kim. "At the moment not many people know him. Travel to every corner of North Korea with him. It will be useful for both of you." 메클러에 따르면 키릴 메레츠코프 소련군 원수가 김성주에게 김일성으로서 살아가며 일을 하라고 지시 했다고 하며, 메클러는 1945년 이 후 북한 방방곡곡에 김성주를 데리고 다니며, 그를 선전했다.[6] - (ref) tag에 name 삽입


외조모 위돈신[7]

각주[편집]

  1. 金日成(김일성)을 告発(고발)한다 (5) 1962.05.08 동아일보 2면
  2. 내가 본 金日成 / 동호 김허남 수상집(桐湖 金許男 隨想集) ; Ⅲ) 부산 만덕사(萬德社), 1991; pp.17~28
    “전범자(戰犯者) 김일성은 독립운동가 김일성 아니다” 미래한국 2005.07.14
  3. 「조선공산청년회 조직의 건(朝鮮共産靑年會 組織ノ件)」, 昭和四年(1929년) 五月 十四日附 在吉林 川越 總領事 發信 田中外務大臣 報告要旨, 外務省警察史 / 滿洲ノ部 / 在吉林總領事館及敦化分館 9640面 : 여기에는 毓文學校 生徒 金聖桂로 나오나 金聖柱의 오기로 보임.
  4. 모자쓴 대위
  5. 金日成 중국에서 약탈, 도둑질 일삼아 : 러시아의 정치 주간지 '노보에.브레미야'(新時代) 1993-04-19
  6. Staff writer. “Soviets groomed Kim Il Sung for leadership”. 《Vladivostok News》. 2013년 10월 1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7. 북한교회를 가다③ 평양칠골교회 편(상) : 최재영 목사의 남북사회통합운동 방북기(43회) 통일뉴스 2016.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