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Theantares/연습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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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 북한 토지개혁 법령
p.221 임시인민위원 약력
p.269 금성 지역에서의 소련군의 쌀 수탈. 배급 무
p.275 동아일보 03/07 기사 - 평양 학생들의 소군정 항의 시위- 반탁
十三專門中學男女學生(십삼전문중학남여학생)들 突然(돌연)히同盟休學(동맹휴학)을斷行(단행) 1946.03.07 동아일보 2면 - 평양의 반탁 운동
서울 平壤合同 留學生同盟强化 大東新聞 1946.04.30

p.175 Sgt. Robert Cornwall의 1945-01-03 Pac. S & S
p.216 존스턴의 박헌영 인터뷰 관련기사,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관련 기사
p.220 임정 귀국 환영집회 사진
p.221 존스턴의 이승만 인터뷰 사진
p.222 AP 특파원 Morrie Landsberg 의 Pac. S&S 기사
p.234 소련군 약탈기사
p.267 존스턴의 소련군 약탈기사
p.269 소련군 약탈기사

pp.1~7 한경직/윤하영 목사의 청원서 KyungJik Han / Ha Young Yoon
이 문건 여러 곳에 소련군 만행에 관한 진술 나옴.
신탁통치에 관한 미군정청 의견도 나옴.
p.41 (Nov. 09, 1945 Vincent의 말)얄타회담에서 루즈벨트가 한국의 4개국 신탁통치를 꺼내고 스탈린의 동의를 얻음. 1945.05.28에 Harry Hopkins가 스탈린과 이 문제를 협의하고 동의를 얻음.
p.43 Harry Hopkins의 5/28일자 탁치 논의에 대한 의견 : 기간 미정, 스탈린도 탁치에 동의
p.44 얄타 회담부터 탁치 논의 과정
p.64 랭던의 탁치 반대 의견 보고(11/20) 국무부 수신 pp.69~74
pp.80 ~ 한국 점령군에 대한 태도 ; 일본 작가의 북한 소련군 상황 설명
pp.83 ~ 소련군 만행
pp.118 ~ 일본 피난민이 전하는 소련군 상황 - 경성 원산 철로변 공장은 뜯겨서 원산에서 배로 소련으로 실려감. 소련군 강간.
pp.138 ~ 국방부 수신 메시지 - TFGBI 81, Dec. 23, 1945 - 김일성
pp.141 ~ 142 소련이 공장을 뜯어 원산으로 실어날라 소련으로 가져 가는 상황 - 종합 목록
p.143 12/26/1945 송진우가 소련영사 폴리안스키를 만나 소련군의 학정에 대해 따지며 소련군 철수를 요구
p.159 TFGBI 99 거의 모든 한국인이 탁치 반대. 국무성, 국방성 수신분
p.163 12/30 거의 모든 한국인이 탁치에 굴욕감 느낌.

p.41 : TFGBI 81, Dec.21, 1945 p.45에 김일성 인물 소개. (pp.53~59 에 같은 문건 또 나옴.)
pp.70~71 : 하루 5~6천명의 피난민이 남으로 넘어 옴.
p.82 김구 탁치 반대 표명. 12월 8일의 임정 환영회에서도 이승만이 트루먼 행정부에 탁치 반대 의견 표명
pp.83~84 - 소련군 만행, 소련의 쌀 강탈해 가기
p.88 12월 11일 ; 송진우가 소련영사 폴리안스키를 만나 소련군의 학정에 대해 따지며 소련군 철수를 요구
p.103 : 중국서 온 모택동 부하들이 소련영사관 신고, ...샤브신은 스파이 헤드

pp.13~, pp.17 TFGBI 20, 20 Nov. 1945 랭던이 맥아더 사령부를 통해 국무성과 애치슨에게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 의견 전달.
Dean Gooderham Acheson / 랭던(William R. Langdon), 베닝호프(Merrell H. Benninghoff)
p.21 Nov. 15, 1945 소련군이 수풍발전소 뜯어감 철도로 옮겨 배로 실어감. 조선 노동자 20명이 밤낮 해체작업에 동원됨.
p.27 11/13 소련인이 수풍발전소 발전기 뜯어감. p.38 같은 말
pp.36~37 11/09 Vincent의 언급 - 탁치 반대 정서 강렬
pp.45~46, 47 소련의 수풍발전소 해체에 대한 랭던의 국무부 공식 보고
p.51 한국인들은 기본적으로 공산주의를 싫어하며 민족주의적임. 외부 전문가로 조직된 잘 훈련된 그룹의 선전에 현혹된 일부 제외.


미소위원회가 평양서 열리는 줄로 잘못알고 북한 다녀온 기자의 현지 사정 증언: 1월 3일 학생, 근로자 4,000여명 동원한 평양의 관제 찬탁 데모.- 처음에는 독립시위로 속임. 북한 공산당 지지율 20% 미만.
수풍댐(Sui-ho Dam) 철거 시설을 청진으로 운송하기 위해 평양 철도 관리국장 김원걸 및 기술자 10여명이 현지로 가서 선로 연결 작업
美軍政 情報報告書 - 駐韓美陸軍司令部惰報參謀部 日日報告書 - 第2卷 (1946. 2-1946. 7) 國土統-院 : p.91에 평양 철도국장 김원걸이 수풍댐 갔다는 부분 나옴.

(4) 그 신문기자가 보낸 계속된 보고는 소련군이 수이호 댐 (수풍동(800-1990))에서 발전기를 제거하고 있으며 이를 청진(1250 - 2150)항을 거쳐 운반하고 있다고 한다. 평양의 철도 보수국장인 김원걸 (KIM, Won Gul)이 10명의 기술자와 함께 수이호 댐으로 갔는데 이는 이 기계가 철도로 운반될 수 있도록 철도 운반도를 마련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어서 였다.

p.3 G-2 Periodic Report : 1946.02.01 (1월 30일~1월 31일)

4 . 시민동향

a. 소요-위 기간에 보고된 시민소요 없음.
b. 정당 및 기타조직
(l) 2명의 알려진 공산당 선동가인 최헌리와 최진선이 경주부근 모래서마을에서 도둑질을 하다가 들켜 주민들에게 폭행당했음. 둘다 심하게 얻어 맞았으며 최진석은 사망함 (일일보고서 No. l27 참조). 최헌리를 취조한 바에 따르면 그와 최진석 및 다른 4명이 북한에서 조선 공산주의 주요 지도자인 김일성장군에 의하여 서울내의 공산당 책임자인 박헌영에 보고차 보내진 것으로 밝혀졌음. 이들은 38도선 이북의 불특정 지역으로부터 출발하여 10월 25일 서울에 도착하였음. 최에 따르면 자신은 당의 하수인일 뿐으로 본 그룹에 할당된 임무를 모르고 있다고 함. 그러나 그가 공산당 활동을 은폐하는 원조조직 역할을 하는 한국형제당의 일원이라는 증거가 있음. 한층 더, 최는 박헌영이 "29부"의 지도자라고 말하고 있는 바 그 자신 역시 이 정보조직의 일원으로 생각됨. 최는 또 자신이 서울을 떠나 경주로 올 당시 박헌영이 경비조로 500엔을 주었다고 진술함.
한편 당의 다른 동료인 최진석은 죽으며 "조선에는 절대적 볼세비즘이 필요하다." "우리는 미국인, 기독교인, 부자들 모두를 파괴할 임무를 갖고 있다."와 같은 말을 한 것으로 알려짐. 최헌리로부터 얻어진 정보는 조선내 2개의 공산주의 파간에 실제적인 접촉이 있다는 첫번째 결정적인 증거임. 최헌리는 추가심문차 서울로 이송될 예정임.

G-2 Periodic Reports, 2 January 1946 - 7 March 1946 pp.215~216 같은 내용  : G-2 Periodic Reports, 18 February 1946 : 앞에 민주주의 민족전선 이야기가 나옴.
pp.192, 194~195 - G-2 Periodic Reports #156, 19 February 1946 : 존스턴 사건 요약 및 최종 발표문


소련 - 자유시참변, 연해주한인 강제이주로 독립운동가들을 일제보다 더 많이 죽이고 탄압한 국가, 북한 진주후 병사는 부녀자 겁탈, 약탈, 윗선은 공장 시설 소련으로 반출, 인민의 지지가 높던 조만식 감금, 공산주의 체제 강요 - 이런 소련의 지시 하나에 찬탁으로 돌아선 자들은 이념에 눈멀어 소련에 민족을 팔아먹은 자들.

소련 지시 하나에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아섰던 자들은 자진 월북했다 김일성 정권이 안정될 때까지 이용 당한 후 쓸모 없어지자 모두 처형됨. - 자신의 앞날도 모르는 자들이 민족과 국가의 앞날을 결정하겠다는 것도 웃기는 짓.


#7 (09/17) pp.37~38 09/16 매일신보 - 인공의 조각명단임 : 매일신보 09/15일자 명단 수록 / 주한미군사 동진공화국 조각명단
p.56 언론인 김동성의 견해 : 소련인들은 북한을 점령하여 일본과 한반도를 다투던 40년 전의 희망을 달성


p.33 11/08 - 김일성 나옴. (G-2 Periodic Report # 59: 8 Nov. 1945)
p.39 김일성 처음 나옴. (G-2 Periodic Report # 60: 9 Nov. 1945)
p.49 Kim Nichi Sei (G-2 Periodic Report # 63: 12 Nov. 1945)
p.80 간첩 남파, 한반도 공산주의자 최고지도자는 김단야 - 평양에 있는 것으로 추정
pp. 86~87 월남민 - 소련군과 공산당의 쌀 강제징수
p.164 임시인민위원회 명단 p.166 정로 02/10 번역문 : G-2 Periodic Reports, 21 February 1946
pp.194~195 : Johnston사건 press release
p.203 청진서 서울로온 빨갱이 - 공산당 무서워, 막아내야
p.446 김구의 쿠데타 : G-2 Periodic Reports, 2 January 1946


p.102 WS #6 (1945.10.30, p.6) 공산주의 선전, 박헌영의 민주주의관에 대한 코멘트 - 박의 민주주의는 넌센스로 봄
p.123 #9 (1945/11/13)
p.126 b. 김일성 나옴. 11월 5~6일 노동자 연합 명예 대표로 선출
p.128 Incl#3 Report on the Situation in Russian Occupied Korea북한 정치 상황 (조만식과 소련관계가 주. 김일성은 아직 안 나옴.)
p.132 김일성 처음 등장. 진짜는 따로 있다고 함.
p.182 #12 WS #12 (1945.12.11, p.6) 박헌영의 민주주의는 미국민주주의와 판이하게 다름.
#14 (1945/12/18) p.188 맨 밑줄 ~189 : 김일성에 대한 이야기 - 소련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는 말은 한재덕의 글에서 나온 것?
p.219 Political Trends #3 (1945/10/29) - 한민당의 반탁 팸플릿
p.221 Political Trends #2 (1945/10/26)



註 037 Radio TFGBI #157, CG USAFIK to CINCAFPAC ADVON, 251000/I Jan. 1946. : 전신번호와 내용이 맞음.
Telegram from CG USAFIK to CINCAFPAC 1946.01.25
박헌영은 1월 1일에 Hodge와 만나 반탁입장 밝힘, 1월 3일 Hodge와 만나 찬탁으로 입장 선회 밝힘. 박헌영은 1월 2일 입장 선회
박헌영은 연말에 평양가서 찬탁 지시를 받고 1월 1일밤 38선 넘어 귀환했다는 박병엽의 증언은 사실이 아닌 듯.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02일 > 인공 중앙인민위원회, 3상회의 결정 지지 전문 보냄 조선일보 1946년 01월 04일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02일 > 조공, 3상회담 결의에 지지 표명 중앙일보 1946년 01월 03일
Translations South Korean Newspapers, Dec. 15. 1945 - Dec. 31. 1945 p.200 : 12/29 조선인민보의 반탁 기사, 12/28 저녁 정태식이 대독한 박헌영의 반파시즘방송. p.203 - 여운형이 임시정부 반탁투쟁 동참 선언


註 038 USAFIK G-2 Weekly Summary #32, 23 Apr. 1946, Incl. #2. : 공산당이 찬탁 지시를 받은 듯
註 039 Interview between Mr. Pak, Hung Yung, Leader of Korean Communist Party and Mr. Richard J. H. Johnston of NYT recorded by XXIV Corps PRO and I and K representatives present; I & H Journal. See also TFGBI #190, CG USAFIK for Benninghoff to SCAP, 081500/I, dated 7 February 1946.
TFGBI #190, CG USAFIK for Benninghoff to SCAP, 081500/I, dated 7 February 1946 : Classified Outgoing Radios - Korean Situation, 1 Jan 1946 - 23 Oct 1946 pp.352~354.



p.6 조선인민보 12/30 인민공화국의 중앙인민위원회 해산 - 임정의 반탁 투쟁에 참여하기 위해 : G-2 Periodic Reports, 2 January 1946 - 7 March 1946 p.454 같은 기사
pp.67~68 조선인민보 1/06 박헌영 인터뷰
p.37 Political Trends #14 (12/29)
p.80 Political Trends #15 (01/05)
p.155 Political Trends #16 (01/12)
p.52 신조선보 1/16 : 샌프란시스코 방송 기사
p.56 p.68 조선인민보 1/17 : 샌프란시스코 방송에 대한 박헌영의 해명 "It is rumored that Korea will become Soviet" says Park Hun Yung.
p.57~58 조선인민보 1/17 : 1/16 박헌영의 방송 연설 "Let us support the Tri-Power Pact which concerns Korea." Broadcast by Park, Hun Yung, leader of Communist Larty.
pp.60~61 서울신문 1/17 : 박헌영의 해명발언
pp.79~80 조선인민보 1/18 : 17일자 조공의 박헌영에 대한 변호 발언
p.180 - 01/28 외신 기자들의 미소회담 정보 비공개에 대한 청원 - 존스턴, 호이트(UP), 마이어스(AP), Howard Handleman(1914~1994)(INS)
p.198 Political Trends #18 (01/26)
p.72 : Polotical Trends #19 (2 Feb., 1946)
pp.165~167 : Military Government Press Relaese, 18 February 1946 : Incl #1 to USAFIK G-2 Periodic Report #156 (18 February 1946)
p.188 조선인민보 2/20 : 조사발표에 대한 항의성명
p.191 정로(북한신문) 2/16 :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관련 사항. 위원회를 정부라 칭함. 위원회 위원 명단, 결의사항.
p.198 : Polotical Trends #21 (17 Feb., 1946)


12월 29일밤 경교장에 모인 사람들이 신탁통치 문제에 관해 격론을 벌일 때 반탁은 하되 미군정과 대립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온건론을 펼친 송진우가 이튿날 새벽 자택에서 암살당하고, 가장 강경한 반탁을 주장한 임정이 총파업을 선언하고 국자 1, 2호를 선포하자 군정청 한국인 직원들이 이를 따르려 하는 미군정에 대한 사실상의 쿠데타를 시도한 것으로 볼 때 UP, AP가 미국은 즉시 독립, 소련은 탁치를 주장했다는 오보를 낸 것을 국내 언론이 보도한 것이 격렬한 반탁운동을 촉발시켰다는 것은 근거없음. 신탁통치 자체를 반대했을 뿐 어느 나라가 주장했는가는 문제되지 않았음. 반탁은 반소 감정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탁치 자체에 대한 반대였음. 당시는 미소 양국에 대한 선호도가 명백히 정립되기도 전임.


존스턴과 박헌영의 발언과 관련하여 「정계동향 (Political Trends)」 제17호에 실린 글의 저자 버취 중위(中尉)는 그 기사가 존스턴이 정확하게 박(朴)의 발언을 보도하였다는 인상을 준 것이었다고 자인(自認)하였다. 그래서 그는 다음 호(號)에 존스턴의 보도는 거짓 (false)이었다고 정정기사를 써도 무방(無妨)한지 국장인 뉴만 대령(大領)에게 물었다. 뉴만 대령은 안된다고 말했고 그냥 그대로 놓아두라고 하였다. (left just as it was).

Richard Massock in Rome October 3, 1938 The Decatur Daily Review from Decatur, Illinois · Page 12
Richard Massock Award
The Massock Award is presented to recognize the most outstanding chapter-produced newsletters and alumni programming. The award honors Richard G. Massock, Illinois '17, former Associated Press correspondent and bureau chief, who served as editor of Sidelights, forerunner of The Laurel.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北朝鮮臨時人民委員會] 金日成,金두奉,康良황,崔용達,崔순健,李순根,李文환,張鍾植,韓히珍,韓東燦,尹기寧,李봉洙,趙永烈,方禹용,洪箕주,金德수,玄昌형,李기永,강진건,朴正愛,洪기황,方壽永,康永根



RG 332의 Box No.28 속의 Folder "▶ Historical Journal of Korea, 1 Jan.~30 April, 1946"
RG 332의 Box No.75 속의 Folder " ▶ US-USSR:Communism in South Korea"
Cover Sheet: (US-USSR: Communism in South Korea)
p.118 : 17. American correspondent endorse park's statement of deny:발췌문/The Seoul Times, 1946.01.18 : Robert Cornwall의 진술
p.119 : 18. Discretion counseled on Pak's alleged statement:발췌문/The Seoul Times, 1946.01.23
p.120 : 19. A Editorial: Misunderstanding or bias:기록자료/The Dong-a Ilbo, 1946.01.18 : 1/18 동아일보 사설 영역 - 소련의 부동항 욕심 - 박헌영 책임.
p.121 : 20. National issues: (Trusteeship and Russian relations):기록자료, 1946.04.23 - 남파 간첩 체포 - 찬탁 지령/ 찬탁운동 방법 etc
p.139 : 26. It seems that I was Misunderstood. Explanation of Park, Hum Yung to the journalists:기록자료/The Seoul Shinmun, 1946.01.18 : 서울 신문 1월 17일자 박헌영 관련 기사 영문 요약
p.156 : You've got it at last!
p.169 : 49. Newspaper translation:비망록/Gordon B. Enders Major MI Chief For Aff See 발신;Office of the Civil Administrator 수신, 1946.01.16 : 동아일보 1/16 박헌영이 소련 속국 희망 기사 영역본
p.181 : 57. Newsmen testify on Pak:발췌문, The Seoul Times, 1946.01.19 : 기자들의 1/18 성명서 요약
p.235 : 58. "Go back to your country and learn democracy" Communist party states reason for Johnston's exile:기록자료/Chosun Inmin Po, 1946.02.20
p.239로 연결됨
p.236 : 59. Military government press release:기록자료, 1946.02.18 : 조사발표문 초안
p.238 : 60. Testimony on American broadcat of misinformation:기록자료/Chosun Inmin Po, 1946.01.19 - 국내기자들의 항변서
p.193 : ◦ CIC File Number 4-44, 9-1346:박헌영과 이강국
∙ 9월 4일 박헌영과 이강국을 체포하기로 결정, 여러 좌익신문을 정간시킴과 동시에 그를 체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CIC가 바로 그들의 행방을 추적.
p.201 :◦ 인민당, 설국환 인터뷰, 8-19 R. D. Robinson(9-D)
∙ 인터뷰 내용에 의하면, 여운형은 4월경 2번째로 평양에 갔으며, 첫 번째 평양 방문은 작년 가을로 김일성, 김두봉과 회합하였고, 이때 여운형은 남한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그들에게 관계를 수립하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p.203 ◦ G-2, CP-1, (9-D), 24, 25 Apr. 1946
∙ 김일성이 약 5일간 서울에 있었고, 전반부는 호텔에서 묵고, 후반부는 영사관에서 묵었다는 내용.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41 41권 일본 · 미국보도기사 > 미국보도기사 > 101. 한국인 징병 : 이 보고서는 ‘아시아를 위한 전투’의 저자 에드가 스노우(Edgar Snow)의 최근 발언과는 충돌된다. 에드가 스노우는 2십만 명의 한국인들이 이미 훈련을 마치고 일본군에 복무하고 있으며 그들 중 일부는 이미 남부전선에 투입되어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연합군이 남태평양 전선에서 마주친 한국인들은 보고에 따르면 일본인들에 의해 뉴기니아로 이송된 단지 소수의 노동자들 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뉴욕 타임즈』 존스톤 기자의 박헌영 기자 회견 결과가 국내에 널리 보도된 것은, 1946년 1월 15일의 미국의 소리 방송 때문이었다. 사실 여부조차 논란이 되었고, 정작 『뉴욕 타임즈』에는 실리지도 않았던 내용이 미국의 소리 방송에서 다루어진 것은 미군정의 공작 때문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미국의 소리 방송은 1945년 12월부터 고정 편성되어 30분 동안 방송되었다. 정용욱, 『해방 전후 미국의 대한정책』(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174~176쪽.


1990년 박사학위 논문 "解放後 左右合作에 의한 民族國家建設運動 硏究"를 수정 증보한 것으로 1991년 초판 이래 판과 쇄를 거듭하여 출간되었다.
서중석 저,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2 - 1948∼1950 민주주의ㆍ민족주의 그리고 반공주의 (역비한국학연구총서 - 현대편) : 발행기관 : 역사비평사 / 자료유형 : 전자책 시리즈 / 발행일 : 2008.5
<해방일보> 1월16일치는 박헌영이 존스턴이 문제의 기사를 미국으로 타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1월12일 존스턴을 찾아가 문책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서울신문>은 1월17일치로 같은 회견에 참석한 미군 기관지 의 기자인 현역 군인 로버트 콘월(Robert Cornwall)이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외신기자들과 박헌영 사이에 오간 문답록을 작성하여 발표하였는데, 그는 박헌영이 “조선인이 조선인을 위해 다스리는 조선”을 원한다고 말했을 뿐 소련 일개국에 의한 신탁통치나 조선의 소련 연방 편입 등의 발언을 듣지 못하였다고 보도했다.
<해방일보>는 1월18일치에 ‘박 동지를 무고하는 음모배 한민당 간부는 사과하라’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명의의 장문의 성명을 게재했다.
<조선인민보>는 1월19일치로 문제의 내외신 기자회견에 참석했던 국내의 12개 신문 및 통신사 기자 일동의 명의로 된 성명을 실었다. 이 성명에서 참석 기자들은 박헌영이 소련의 한 연방으로 조선이 참가하기를 희망한다는 발언을 한 사실이 없음을 확인했다.

  • 박헌영 : 소련지시로 반탁에서 찬탁 돌변; 사사건건 스티코프에게 문의; NYT 회견 - 소련 1국의 신탁통치, 소연방의 일원 희망 - 논란 벌어지자 거짓말; 일개 부영사가 자기 심복이라 함; 김일성과 스탈린에게 지도자 면접 시험. 1946년 봄에 이미 김일성에게 지지도가 밀림.
  • 김구 : 마크게인 - 조선에 있은 사람은 모두 친일파, 감옥에 가두어야 - 전국민을 감옥에 가두고 자신은 간수나하면서 죄수들 먹여살리면 되겠네; 미군정에 의해 고하, 설산 암살의 배후로 지목됨. 반탁 빌미로 미군정에 쿠데타 시도; 평양 방문시 과수원 발언은 진실 (레베데프 비망록); 독립운동 지도자로서의 명성에 걸맞는 정치적 역량을 보여주지 못함.


민족전선(民族戰線) 결성 준비위원, 각계 24씨를 전형 발표 자유신문 1946-02-01 01면 09단
民族戰線결성대회 개막 / 民主主義民族戰線에 총역량 집결 절규, 감격의 절정으로 화한 대회장 자유신문 1946년 02월 16일
民線의 확대 강화 등 각항 제안을 결의 역사적 민선대회 원활히 폐막 / 대회 결의문 자유신문 1946년 02월 17일


미군정청의 NYT 박헌영 인터뷰 기사 사실여부에 대한 조사 발표 이후 박헌영과 조공 측은 더 이상 반발하지 못했다는 것이 중요. 그들도 보도의 진실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자신의 발언을 번복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다시 나간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미군정의 박헌영에 대한 신뢰 저하. 남한내 지지도 저하. 궁지에 몰림. 1946년 봄에는 남한에서도 지지도가 김일성에 밀림.


신탁통치 관련 주요 참고 문서[편집]

p.17부터 신탁통치에 관한 사항 나옴 : (k)해방 직후부터 인공이 정권을 차지하려 하다 45/10/10 공식해체. 김구 및 임정 귀국 후 12/31~ 1/1 쿠데타 시도. (l)항부터 신탁통치 정국에 대한 이야기. 미군정은 국무성에서 10월부터 신탁통치안이 거론되는 것을 알고, 반대입장 전달. 신탁안이 발표될 때 사전에 알지 못함. 좌우모두 반탁하다 죄익이 1/02 부터 찬탁으로 일제히 변함.....


스티코프가 신탁통치는 미국의 안이라는 1/26 인터뷰 때문에 미국에 대한 비난이 높아지므로 반박 필요.
p.99 01/28 스티코프의 기자회견에 신탁을 주장한 쪽은 타스통신은 미국이라 하고, 미국언론은 소련이라 하는데 어느 것이 맞느냐는 질문
p.106 : 01/25조만식 구금, 김구...
p.111 : 01/22 김구가 이승만 지지 약속, 임정을 버림.
p.14, p.16 스티코프의 기자회견에 신탁을 주장한 쪽은 타스통신은 미국이라 하고, UP는 소련이라 하는데 어느 것이 맞느냐는 질문



信託(신탁) 統治(통치)의 不必要(불필… (동아일보 1946-01-04 1면) - 위 기사의 연속 (잘못 분리됨)

동공동위원회는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와 연락하여 가지고 일하여 나가도록 될 것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신탁통치를 避免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우리의 목표는 조선이 하루 바삐 독립국가의 일원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 [신탁통치 실시여부 결정. 미국 국무장관 미국, 소련 공동위원회 성격표명] 조선일보 1946년 1월 2일 1면

NYT 서울 특파원 존스턴의 신상[편집]


박헌영은 자신에 대한 기사 논란에도 불구하고, 민전 회견에 Johnston을 다시 초청하고 있다. 미군정 조사 발표를 인정한 것.


박헌영 발언 및 주변 상황에 대한 일자별 기록들[편집]

By the end of the war, VOA had 39 transmitters and provided service in 40 languages.[23] Programming was broadcast from production centers in New York and San Francisco, with more than 1,000 programs originating from New York. Programming consisted of music, news, commentary, and relays of U.S. domestic programming, in addition to specialized VOA programming


논란의 핵이 된 박헌영의 발언은 김일성과 지도자 경쟁을 하던 박헌영의 소련에 대한 과잉 충성의 표현으로 보인다. 국내로는 알려지지 않고 미국에만 보도되어 소련측에나 전해지기를 희망했을 것이다. (金日成將軍은 民族的英雄: 朴憲永氏의 對答 : 1946. 03. 31 : 김일성은 박헌영의 인터뷰 직후인 2월 8일 임시인민위원장이 되었다.)

p.101 : 01/07 문제의 박헌영과 존스턴 인터뷰가 나옴. - That's it !!!
p.84 01/11 조만식은 사실상 연금상태
p.48 찬탁, 반탁....논란, p.118 bt. .p.116 bt. p.111 bt.
pp.105 bt~106 : (01/05)북의 러시아인들은 인민들이 탁치 소식을 못듣도록 억압. 시위 금지. 한달전 엉성한 중앙정부를 세웠는데 협상 목적인 듯. 북한 대중은 소군정을 견디기 힘들어하며 미국이 구원해 주길 원함.
CINCAFPAC Adv Tokyo, Japan ; CINCAFPAC MANILLA :
CINCAFPAC, Commander in Chief, Army Forces in Pacific
ComGen USAFIK, Commanding General, U.S. Army Forces in Korea




외신 회견은 한국 기자들과 분리해서 이루어짐. (한국인 기자들의 성명은 증거가 못됨.), cable 전송에 문제가 발생하여 원기사는 실리지 못함(?)
Johnston, Robert Meyers (Associated Press), Captain Tucker USAFIK press officer, and Pacific Stars and Stripes reporter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Part Ⅱ > CHAPTERⅠ KOREAN POLITICS AND PEOPLE - THE FIRST SIX MONTHS > The Communist Party
주한미군사 2 > 2부. 1장. 한국의 정치와 사람들, 첫 6개월 > 2. 공산당 좌익은 1월 3일부터 찬탁으로 돌변 / 1946년 봄부터 남한 좌익에서도 김일성에 비해 열세로 전락 / NYT 기사에 대한 조사결과 수록 / 샤브신은 박헌영이 henchman

1946년 1월 3일에 “조선공산당 북한 책임비서”가 모스크바 회담의 결정에 대하여 “공산당 전 분야 책임비서”들에게 지시를 하달하였다. 이 지시는 모든 공산당원은 모스크바 회담의 결정을 지지할 것을 명령하였다.註 038

1월 3일의 좌파의 시가행진은 처음에는 반탁 시위였으나 몇 시간 뒤에 찬탁으로 바뀌었다. 외부 영향의 증거가 된 이와 같은 사건에 뒤이어 1월 8일에는 박헌영과 뉴욕 타임스(New York Times)의 존스턴(Richard J. H. Johnston) 사이의 논란이 되고 또 많이 알려진 면담이 있었다. 영리하고 민첩한 기자는 공산당 지도자로부터 10~20년 사이에 한국의 소비에트화 계획에 대한 지지와 소련 일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선호한다는 것에 대해 많은 발언을 하도록 유도하였다. 이러한 발언은 소비에트의 의미에 대한 설명이나 한국의 완전한 독립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주장으로 보완되었지만 뒤이어 나온 비난에 의해 묻히고 말았다.註 039 비록 몇몇 한국 신문들에 의해 지지는 받았지만 박헌영이 자신이 한 발언을 부인하고 존스턴의 추방을 요구하면서 자신의 위치는 더욱 약화되었다.註 040 존스턴이 거짓말한 것도 아닌데 그를 추방할 할 근거도 없었다. 존스턴의 발언은 인터뷰의 전체적인 해석에 동의하지 않았던 미국인 참석자에 의해 정당하다고 확인이 되었다. 이에 따라 군정사령부의 조사 이후 존스턴은 공식적으로 혐의를 벗었으며 박헌영은 모습을 감추고 숨었다.註 041 존스턴의 적들은 그의 목에 300,000원의 현상금을 걸었다.註 042 중도적이거나 보수적인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미군에게도 경각심을 일깨워 준 이 일화는 공산주의자들과 관련된 지금까지의 효과적이었던 협조가 종말을 고하는 시작을 의미하였다. 다른 사건들은 이와 같은 틈을 더욱 크게만 하였다.

『조선일보』에서는 1946년 1월 3일 있었던 좌익이 주최한 3상결의지지대회였던 서울시민대회의 사진을 싣고 탁치반대서울시민대회장 전경이라고 설명하였다.


박헌영은 자신에 대한 기사 논란에도 불구하고, 민전 회견에 추방을 요구했던 Johnston을 다시 초청하고 있다. 미군정 조사 발표를 인정한 것.
박헌영이나 조공이 미군정 조사 발표에 항의하거나 불인정했다는 기록은 없고, 침묵 모드였다. 사실상 인정.
민족전선(民族戰線) 결성 준비위원, 각계 24씨를 전형 발표 자유신문 1946-02-01 01면 09단
자료대한민국사 제2권 > 1946년 02월 15일 > 민전 결성대회 개최 서울신문 1946년 02월 15일
자료대한민국사 제2권 > 1946년 02월 15일 > 민전 집행부 선거, 집행위원 선거 조선일보 1946년 02월 16일
民族戰線결성대회 개막 / 民主主義民族戰線에 총역량 집결 절규, 감격의 절정으로 화한 대회장 자유신문 1946년 02월 16일
民線의 확대 강화 등 각항 제안을 결의 역사적 민선대회 원활히 폐막 / 대회 결의문 자유신문 1946년 02월 17일


미군정청의 조사 발표에 항의한 것이 아니라, 존스턴의 박헌영, 여운형에 대한 기사가 맘에 안 드니 미국으로 돌라가라는 주장임.


미군정의 조사결과 존스턴 기사가 사실임을 확인. (박헌영이 영어로 이야기 했으므로 오해 여지도 없었음.)

朝鮮共産黨 정식대변자 朴氏는 1월 5일 記者團會見에 美國人記者를 초청하였다. 3명의 美紙特派員, 존스톤氏, 콘월軍曹는 美軍司令部 피·알·오將校 턱카大尉와 동반하여 정식으로 記者團會見에 출석하였다. 美國人記者會見席上에서는 모두 英語를 사용하였다. 당시 기록한 턱카大尉와 존스톤氏의 手記中에는 질문한 것과 대답한 것이 있는데 그 내용은 정확한 것으로 콘월軍曹도 其後에 그 정확성을 인정하였다. (마속크氏는 이미 朝鮮에 없으나 그 당시 同氏가 동료들과 말한 중에 同氏는 이와 똑같은 問答을 들었다고 한다)
伍長(하사) 軍曹(중사, Sergeant First Class) 曹長(상사)
朝鮮共産黨 정식대변자 朴氏는 1월 5일 記者團會見에 美國人記者를 초청하였다. 3명의 美紙特派員, 존스톤氏, 마속크씨, 콘월軍曹는 美軍司令部 피·알·오將校 턱카大尉와 동반하여 정식으로 記者團會見에 출석하였다. 美國人記者會見席上에서는 모두 英語를 사용하였다. 당시기록한 턱카대위와 존스톤씨의 수기중에는 질문한것과 대답한것이 있는데 그내용은 정확한것으로큰월군조도 기후에 그정확성을 인정하였다.


信託(신탁) 統治(통치)의 不必要(불필… (동아일보 1946-01-04 1면) - 위 기사의 연속 (잘못 분리됨)

동공동위원회는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와 연락하여 가지고 일하여 나가도록 될 것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신탁통치를 避免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우리의 목표는 조선이 하루 바삐 독립국가의 일원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 [신탁통치 실시여부 결정. 미국 국무장관 미국, 소련 공동위원회 성격표명] 조선일보 1946년 1월 2일 1면



소련 관영언론의 보도는 3상회의 직후가 아니라 한국의 반탁시위가 격렬해진 후에야 나온 것으로 책임을 미국에 돌리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보임. 반탁의 배후가 미국이라고 주장 - 3상회의에서 미국이 신탁통치를 고집했다면서 미국이 반탁의 배후라는 건 자기 모순임. 소련 공산당의 통제하에 놓인 관제언론은 믿을만하고 미국의 자유언론은 믿을 수 없다는 근거는?

1946년 1월 26일 발행된 민성일보(民聲日報, 제49호) 제1면. 민성일보는 1945년 9월 15일 대구에서 창간된 좌익 성향의 일간지. 남조선의 반탁 혼란은 미군정측의 책임라는 타스 통신의 기사 소개, 하지 장군의 이에 대한 반박, 박헌영과 존스톤 기자회견 내용에 관한 기사 등이 게재되어 있음.


pp.50~51 Political Trends Report #17 Jan. 20, 1946 : 버취 중위가 쓴 박헌영 인터뷰 관련 글


(問) 朴憲永씨와 만난 일이 있는가?

(答) 지난 8일 내외가자단과 같이 만났는데 내 질문에 대하여 朴씨는 우리에게 영어로 말해 주었다.
......
(問) 그럼 그뒤(8일후) 朴씨와는 만난 일이 없는가?
(答) 朴씨가 나를 찾아 와서 단 두사람이 서로 전번에 한 말은 취소해 달라는 말과 재성명을 발표하겠다고 해서 취재한 일은 있다.
(問) 朴씨는 무엇이라고 하여 취소를 원하던가?
(答) 내(朴)생각에는 내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 같으니 취소해 주오. 그래서 나(존씨)는 잘못 알아듣지는 아니했다고 말한 즉 그(朴씨)는 그럼 다시 성명하겠다고 하여 재성명을 발표하겠다 하므로 나는 내손으로 朴씨의 재성명을 받아 응락을 얻은 후에 다시 타전했으니 18일부 뉴욕타임즈지상에는 게재되었을 것이다.




[一聯邦化란 千萬不當. 斷乎한 懲治를 決議. 40餘 團體 緊急 協議會에서. 決議.附帶決議(부대결의)參加團體.]
附帶決議(부대결의) 동아일보 1946-01-17 1면
유·피가傳(전)한 問題(문제)의電文(전문) 동아일보 1946-01-17 1면
朝共 朴憲永氏 言動에 큰 波動 全國的으로 排擊運動 各政黨과 五十餘團體 憤然蹶起//附帶決議//「유·피」가 傳한 問題의 電文 朴憲永氏談要旨 동아일보 1946년 01월 17일 석간 01면 07단



스티코프가 서울에 옴.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1월 16일 > 제1차 미소공위 개막 조선일보 1946년 01월 17일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15일 > 미소공위 소련측 대표 73명 입경 조선일보 1946년 01월 16일
미국소련 일차정식회담. 16일오후1시 군정청에서 개최. 소련대표 入京. 소련대표 13명 氏名 : 조선일보 1946년 1월 16일 1면


초기 좌우익의 반탁운동[편집]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08일 > 한민당, 반탁을 일관한다는 성명서 발표 동아일보 1946년 01월 09일





  • Political Trends No. 15 1946.01.05 : G. Newman/ Col., CAC, Secretary of Public Information Section, Office of the Military Governor, Hqs. USAFIK/S
탁치 소식이 전해진 후의 혼란에 대해 나옴.


박헌영의 내신과 외신 기자회견은 양차에 나누어서 진행 : 박헌영은 영어에 능숙한 사람이 아니므로 외신 회견을 위해서는 사전에 준비를 많이 했을 것이고, 영어로 말한 것을 받아적어 언어상의 문제 없음. 외신용 회견은 국내에 보도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했을 것. 김일성과의 지도자 경쟁 때문에 소련의 환심을 사려는 목적. 북한(공산당) 최고 지도자는 인민이 아니라 소련이 결정한다. 박헌영 외신 회견 한달 후 소련은 김일성을 임시인민위원장에 임명하여 공식적으로 북한지도자로 전면에 내세움.


RG 332, 332.3 Records of U.S. Army Organizations in Pacific Theaters, 1941-48, Records of the Historical Section of the Intelligence Division (G-2) of HQ, USAFIK, XXIV Army Corps, 1945-48,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XXIV Corps, G-2 Historical Section, 1945-46 국편 전자사료관 : pp.14~17 에 조선인민보 기사 영역이 나옴. (맨 처음에 여운형 사망 기사 나옴.)



信託(신탁) 統治(통치)의 不必要(불필… (동아일보 1946-01-04 1면) - 위 기사의 연속 (잘못 분리됨)

동공동위원회는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와 연락하여 가지고 일하여 나가도록 될 것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신탁통치를 避免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우리의 목표는 조선이 하루 바삐 독립국가의 일원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 [신탁통치 실시여부 결정. 미국 국무장관 미국, 소련 공동위원회 성격표명] 조선일보 1946년 1월 2일 1면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31일 > 임정, 행정권이양 등을 선언하는 포고 발표 동아일보 1946년 01월 02일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1946년 새해를 맞이하여 1월 1일 국자(國字) 제1호와 제2호를 잇따라 발표하여 임시정부가 권력행사의 주체임을 천명하였다. 이것은 미군정에 대한 정면 대결의 선언이었다.

국자 제1호(國字 第1號)

1) 현재 전국행정청 소속의 경찰기관 및 한인 직원은 전부 본 임시정부 지휘 하에 예속케 함.
2) 탁치반대의 시위운동은 계통적 질서적으로 행할 것.
3) 폭력행위와 파괴행위는 절대 금지함.
4) 국민의 최저생활에 필요한 식량 연료 수도 전기 교통 금융 의료기관 등의 확보 운영에 대한 방해를 금지함.
5) 불량상인의 폭리매점 등은 엄중취체함.

국자 제2호(國字 第2號) 요지

차(此) 운동은 반드시 우리의 최후 승리를 취득하기까지 계속함을 요하며 일반 국민은 금후 우리 정부 지도하에 제반사업을 부흥하기를 요망한다. (주석 2)


  • 12월 30일 고하 송진우(1890~1945) 피살 : 오전 6시 15분 종로구 원서동 자택에서 한현우(韓賢宇), 유근배(劉根培) 등 6명의 저격을 받고 사망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30일 > 한민당수석총무 宋鎭禹 피살 서울신문, 동아일보 1945년 12월 31일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12월 29일 > 한민당 수석총무 宋鎭禹, 반탁투쟁을 역설 동아일보 1945년 12월 29일





미군정의 조사결과 존스턴 기사가 사실임을 확인. (박헌영이 영어로 이야기 했으므로 오해 여지도 없었음.) - 동아일보 2월 19일자 조사내용 발표 보도






여운형의 행보[편집]

RG 332, 332.3 Records of U.S. Army Organizations in Pacific Theaters, 1941-48, Records of the Historical Section of the Intelligence Division (G-2) of HQ, USAFIK, XXIV Army Corps, 1945-48,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XXIV Corps, G-2 Historical Section, 1945-46 국편 전자사료관 : pp.14~17 에 조선인민보 기사 영역이 나옴. (맨 처음에 여운형 사망 기사 나옴.)
pp.50~51 Political Trends Report #17 Jan. 20, 1946 : 처음에 자리를 물러난다고 한 여운형의 거취가 나오고, 이어 버취 중위가 쓴 박헌영 인터뷰 관련 글



모스크바 3상 회의 이전의 신탁통치 거론[편집]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Part Ⅱ > CHAPTERⅠ KOREAN POLITICS AND PEOPLE - THE FIRST SIX MONTHS > The Communist Party
주한미군사 2 > 2부. 1장. 한국의 정치와 사람들, 첫 6개월 > 2. 공산당 좌익은 1월 3일부터 찬탁으로 돌변 / 1946년 봄부터 남한 좌익에서도 김일성에 비해 열세로 전락 / NYT 기사에 대한 조사결과 수록 / 샤브신은 박헌영이 henchman


12월 29일 경교장에서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됐다. 각계 인사로 구성된 중앙위원 76명 중엔 박헌영 홍남표 이극로 김세용 같은 좌익 지도자들도 다수 포함됐다. 그와 동시에 좌익단체와 좌익인사들의 반탁 담화와 성명이 줄을 이었다. 12월 30일엔 40여 개의 좌익단체가 모여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 결성대회를 갖고 신탁통치안철폐요구성명서를 채택했다.

● 찬탁을 반동으로 몰던 그들인데…

이 성명서에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반동분자들이 갈망하는 신탁통치는 결코 실현되고야 말았다’는 것이다. 그 시점엔 좌익에게 있어서도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사람은 ‘반동분자’임이 분명했다. 조선공산당 서울시위원회는 12월 31일까지도 반탁 전단을 살포했다. 이쯤에서 확실히 가릴 것이 있다. 그것은 신탁통치를 제의한 쪽이 소련이었다고 해서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가 더 커졌다고 해석하는 논리는 정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좌익도 초기엔 신탁통치 자체를 반대했지 그것을 어느 쪽이 제의했느냐는 중시하지 않았다. 그러던 좌익의 태도가 해를 넘기면서 돌변했다. 1946년 1월 3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돌연 3국 외무장관회의 결정에 대한 지지담화문을 발표했다. 1월 4일 인공 중앙인민위원회도 뒤를 따랐다. 이어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은 1월 5일 기자회견에서 “김구 씨의 반탁데모는 큰 과오를 범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박헌영, 존스턴 회견의 미군정 발표문에 대한 서중석의 시각[편집]

한민당 기관지라는 동아일보의 문제의 보도 몇일 후 전사장이자 한민당수 고하 송진우가 암살되었다. 고하는 임정과 같은 과격한 반탁파와는 달리 온건파였는데, 그 때문에 암살당한 것. 동아일보가 그런 일을 부추겼다는 것인가?


해방 직후에는 분할점령이 한반도가 분단된다는 생각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미소가 논의해서 당연히 단일정부가 들어설 것으로 생각. 때문에 미소공위의 단일임시정부 수립안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고 탁치를 더 중요하게 여겨 반대한 것임. 일제로부터 해방된 줄 알았는데 또 외국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에 대한 반감이 클 수 밖에 없던 시기임. - 서중석의 말은 개소리.

  • 국민들 사이에 미국과 소련 사이의 선호도가 뚜렷이 나뉘어지기도 전인데 미국 아닌 소련이 신탁 주장했다는 보도 때문에 반탁이 거세어졌다는 주장은 넌센스
  • 미국이 신탁을 주장했다고 보도했으면 반탁이 안 일어났을 거라면 반탁 주도세력인 임정이 반탁을 빌미로 미군정을 접수하려한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텐가? 임정은 소련아닌 미군정에 대한 쿠데타를 시도했음.


반탁투쟁이 격렬히 일어난 데에는 언론의 ‘오보’가 큰 몫을 하였다. 『동아일보』에서는 모스크바에서 3 나라 외무부장관이 회의를 하고 있던 1945년 12월 24일 소련이 원산·청진에 특별이권을 요구한다는 기사를 싣고 다음날부터 주간 설의식이 소위 소련이 했다는 요구를 반박하는 해설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이 기사는 사실이 아니었다. 12월 25일 『동아일보』는 톱으로 소련이 조선과 만주 등을 차지하려 한다는 기사를 실었다. 12월 26일 이승만은 미국의 트루먼대통령·번즈국무장관 등 미국정부의 지도자들이 조선독립을 주장하고 있다고 명언하고, 소련이 신탁통치 실시를 주장하는 것처럼 시사하는 방송을 하였다. 12월 27일에 『동아일보』 등 여러 신문은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즉시 독립을 요구한다는 기사를 대대적으로 실었다. 모스크바3상결의의 과정과 전면 배치되는 주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워싱턴발’로만 표기되었을 뿐 뉴스의 출처도 불명이었다. 미·영·소 세 나라 서울에서 3상결의 내용이 발표되었던 12월 28일에는 『동아일보』 등에서는 전날의 보도를 더욱 강렬하게 표현하면서 소련에 대해 비난을 퍼붓고 각계의 반탁성명을 실었다. 12월 29일 『동아일보』에서는 모스크바회의에서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결의하였다고 전단으로 보도하였는데, 이 보도에는 3상결의 제1항에 명시된 임시정부를 조속히 수립한다는 내용도, 임시정부를 수립한 후 임시정부 등과 협의하여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내용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날부터 서울에서 반탁투쟁이 일어났다. 3상결의 내용은 12월 30일에야 『동아일보』 1면 중간에 실렸는데, 미육군성 발표로 되어 있어 3상결의안인지 잘 알 수 없었고, 더구나 이날에는 서울에서 격렬한 반탁시위가 일어나, ‘사실’이 실렸다고 하여도 제대로 읽혔을지는 의문이다. 『조선일보』에서는 1946년 1월 3일 있었던 좌익이 주최한 3상결의지지대회였던 서울시민대회의 사진을 싣고 탁치반대서울시민대회장 전경이라고 설명하였다.[註 032] 3상결의에 대한 왜곡은 1946년 1월 24일 타스통신에 의해 그것의 결의과정이 공개되고, 1960년대 이후에는 조순승·최상룡·커밍스 등 여러 학자에 의해 연구가 이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영향력을 발휘하였다.[註 033] 신탁통치 문제와 관련된 왜곡보도는 그뒤에도 있었다. 『동아일보』에서는 1946년 1월 16일자에서 1월 5일 박헌영이 뉴욕타임스기자 존스턴과 회견하였을 때, 소련의 1국신탁을 지지하였고, 향후 10~20년 이내에는 소련연방에 합병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샌프란시스코방송에서 방송한 뉴스를 크게 다뤘다.[註 034] 다음날 역시 『동아일보』에서는 지면을 크게 할애하여 박헌영 언동에 각 정당과 50여 단체가 분연 궐기하였다고 보도하였고, 그 다음날에는 이 문제에 대한 사설을 썼다. 하지는 진상을 알고 있었는데도 박헌영이 말했다는 부분에 대한 존스턴의 보도가 정확했다는 성명을 발표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러한 성명서가 나오자 우익 신문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이를 대서특필하였다.[註 035]

註 030 : 미국무성비밀외교문서, 『해방3년과 미국』 1(김국태 역, 돌베개, 1984) p.139.
註 031 : 한민당이 제1차 미소공위에 참여할 의사를 보였을 때, 『동아일보』 주간 薛義植은 “삼상회의는 탁치를 결정한 일도 없고…모든 방안의 성안은 미소공동위원회의 협의에 맡기었고…장차 수립되는 조선임시정부와 협의할 것을 특기”하였다고 지적하였다(『동아일보』 1946. 5. 4). 앞부분을 제외하면 타당성이 있다는 주장이지만, 그것은 반탁투쟁의 논리를 전면 부정한 것이었다.
註 032 : 『조선일보』 1946. 1. 4.
註 034 : 같은 날짜에 『조선일보』에서는 방송 내용과 박헌영의 부인담화를 함께 실었다.
註 035 : 강준식,「김일성과 박헌영, 그 숙명의 대결」(『신동아』, 1989. 4) pp.501~502.


앞에서 언급한 박헌영·존스턴 회담후 나온 샌프란시스코방송에 대한 미군정의 모략적인 성명도 그러하지만, 미군정의 공산당을 약화시키고 분열시키기 위한 제반 노력은 미군정 기록에도 편견이나 모략이나 오보 등 여러가지 형태로 표출된다. 1945년 연말, 1946년 1월에 반탁투쟁이 일어났을 때에 미군정이 취한 태도나 남긴 기록에는 납득이 잘 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다. 정말 그들이 신탁통치와 관련된 미국무부의 정책을 그렇게까지 모르고 있었을까, 반탁투쟁의 뛰어난 반소반공적 효용성 때문에 미군정의 그러한 태도나 기술이 나타난 것이 아닐까 등등, 이 부분만 가지고도 한 편의 논문을 쓸 수가 있을 만큼 납득이 잘 되지 않고 애매모호한 것들이 많다.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은 공산당에게 입힌 타격을 보더라도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다. 또 우익신문이 여러 날에 걸쳐 대대적으로 보도한 것을 보더라도 미군정측에서도 꽤 많은 자료를 남겼어야 했고, 그 이면도 해부해 보려고 했음직하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 미군정이 남긴 자료는 너무 적고, 해석이나 설명도 너무 간단하다. 이 사건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휴회직후 터져 나온 조봉암의 박헌영에게 보낸 사신 공개사건과 여운홍 등 인민당간부들의 탈당사건과 같은 시기에 나온 것들이기 때문에, 또 이 사건에 대한 경찰·검찰·법원·우익과 조선공산당 및 좌익의 주장이 전적으로 상반되고, 증거가 박약하기 때문에도, 미군정측의 자료는 무척 중요한데, 다른 상세한 기록들과는 크게 대조적으로 기록이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