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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달(金益達, 경상북도 상주군, 1916년 5월 9일 ~ 1985년 11월 2일)은 대한민국출판인이자 장학사업가다. 호는 학원(學園)이다.

생애[편집]

소년기[편집]

김익달은 1916년 5월 9일 경상북도 상주군 화서면 중문리에서 김응원을 아버지로, 김안동을 어머니로 하여 4남 3녀 중의 다섯째로 태어났다. 빈농의 집안이었던 탓에 어려서부터 궁핍한 생활을 면치 못했다. 이때부터 몸에 밴 검소한 생활 태도는 그의 일생 동안 나타난 근검ㆍ절약의 생활 철학으로 발전한다. 일제 치하 농촌의 생활, 그것도 빈농의 환경 속에서 유년기를 보내야 했지만 늘 긍정적인 생각과 적극적인 생활 태도를 가진 소년이었다고 한다. 특히 자신이 마음먹은 일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꼭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많은 식구를 부양해야 했던 부친 김응원은 상주에서의 농삿일을 정리하여 김익달이 보통학교(현재의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대구로 나와 조그마한 쌀가게를 운영하게 된다. 그러나 대구에서의 생활도 형편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따라서 당시 대구 해성보통학교(현재의 대구 효성초등학교)에 다니던 소년 김익달은 늘 학비 걱정의 고통을 참으며 학업을 계속해야 했다. 이때 만난 담임선생의 따뜻한 가르침은 소년 김익달을 '남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기고 나눌 줄 아는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키워주었다. 이러한 마음은 훗날 김익달의 근본 철학인 '나라 사랑'으로 발전하게 된다. 해성보통학교 시절 소년 김익달은 훗날 평생 출판 동지의 한 사람이 된 김상문(동아출판사 창립자 및 전 회장, 상문출판사 회장)을 만난다. 김익달과 해성보통학교 동기동창이자, 한 반에서 같이 졸업했던 김상문은 소년 김익달을 "사람을 잘 다스리는 남다른 심성이 있었다."라고 회고한다.

소년 김익달에게 생활고는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었다. 그는 어린 마음에도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은 스스로 힘을 길러 자립하는 길이며, 그것은 곧 식민지 치하에서 일본인들에게 이기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청년기와 일본 유학[편집]

보통학교를 마친 소년 김익달은 자립하는 방법으로 일본행을 결심한다. 그의 나이 15세 때의 일이다. 그의 생애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전환점의 계기가 되는 일본행은 그의 졸업반 담임선생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일본을 이기는 길은 곧 일본을 아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라는 가르침이 소년 김익달의 마음속 깊이 새겨졌던 것이다. 부산항에서 관부연락선에 오른 소년 김익달은 '주먹을 불끈 쥐고 꼭 성공해야만 돌아오겠다.'고 울부짖으며 떠났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생활은 본격적인 '고학'이라는 더욱 큰 시련으로서 시작되었다.

대구에서 친분이 있었던 몇몇 일본인들의 도움으로 도쿄의 한 서점의 점원으로 일자리를 구한 김익달은 타고난 성실성과 근면함으로 인해 금방 주인의 눈에 들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일본에서의 생활은 힘든 만큼 소년 김익달에게는 값진 경험이었고, 그 경험들은 후에 그가 출판인으로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된다. 서점에서 받는 급료로 생활비와 학비를 마련하게 된 소년 김익달은 중단했던 학업을 계속하여 중ㆍ고등학교 과정을 비롯, 대학의 일부 과정까지 마칠 수 있었다. 객지에서 고학의 고통을 고스란히 겪으며 학창 시절을 보낸 김익달은 놀랍게도 그 속에서 '고통을 이겨 낸 사람만이 진실로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값진 인생 철학을 터득한다. 이것은 후에 그가 학원장학회를 설립하는 직접적인 동기로 발전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운명과 맞서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 참다운 인생'이라는 진리를 산 경험 속에서 발견한다. 따라서 일본에서의 고학 시절은 그가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결과로 얻어낸 귀중한 승리였다고 하겠다.

이렇듯 어려운 객지 생활 중에도 그는 부모에 대한 효성이 참으로 지극했다. 서점일로 버는 돈으로는 생활비와 학비를 충당하고, 우유 배달, 신문 배달 등 당시 학생 신분으로 할 수 있었던 아르바이트를 통해 버는 돈은 고스란히 모아 매달 대구에 있던 부모에게 생활비로 부쳐 주었다고 한다. 이에 감복한 서점 주인은 그에게 서점 경영에 관한 업무까지 가르쳐 주었다고 하는데, 이는 아마도 김익달을 자신의 사업의 동반자쯤으로 키울 속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청년으로 성장한 김익달은 한국에서의 서점 경영의 꿈을 안고 1935년 대구로 돌아온다. 그 해 청년 김익달은 대구 동성로에 '춘강당(春江堂)'이란 간판을 걸고 서점을 차린다. 물론 일본에서의 서점 경험이 밑거름 되어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치하에서의 서점 경험은 일본에서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김익달의 첫 사업은 실패로 끝났다. 20세의 나이에 맛본 쓰라린 경험이었다.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청년 김익달은 운명에 굴하지 않았다. 오랜 고향 친구의 권유로 만주행을 결심한 김익달은 또 다른 운명을 향해 일어섰다. 당시 만주는 중국인을 비롯, 한국인, 일본인, 소련인, 서양인들이 모여들어 한창 개발이 벌어지던 때라 사업을 벌이기에 좋은 조건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청년 김익달이 만주에서 어떤 사업을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는다. 단지 중국인이 경영하는 회사에 잠시 다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을 뿐이다.

귀국과 결혼[편집]

만주에서의 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1세에 대구로 돌아온 청년 김익달은 폐결핵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만주에서의 사업 실패와 그로 인해 병까지 얻은 청년 김익달은 전생애에 걸쳐 가장 심한 좌절 속에 빠져 있었다. 죽음까지 생각했다는 대구에서의 몇 달 간은 청년 김익달을 더욱 강인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된다. 물론 그 자신이 스스로 이겨 낸 결과이다. '죽을 용기가 있다면 한 번 더 일어서 보자.'고 결심한 청년 김익달은 폐결핵을 고치는 방법으로 해주행을 택하게 된다. 당시 해주에는 그의 여동생이 황해도 도청 회계과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의 동생은 도청 일로 알게 된 해주종합병원에 다리를 놓아 오빠인 김익달의 병을 고쳐 보려는 심산이었다.

동생의 권유로 해주로 온 청년 김익달은 해주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해주항에 있던 해주종합병원 분원의 병원 서무로 취직하게 된다. 물론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택한 당시로서는 유일한 길이었다. 병원 숙직실에 기거하면서 병원 업무를 거들며 꾸준히 치료를 해 나갔다. 타고난 근면성과 성실성으로 병원장의 신임을 얻게 된 청년 김익달은 얼마 안 가 병원장의 비서로 발탁된다. 병원장은 청년 김익달을 양아들처럼 생각하며 병원 행정을 모두 맡겼고, 정성을 다해 폐결핵을 치료해 주었다. 그 덕에 청년 김익달은 병을 고칠 수 있었고, 조금씩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청년 김익달은 이곳에서 일생의 반려자가 된 하성련 여사를 만난다. 하성련 여사는 당시 김익달의 동생과 같은 직장인 황해도 도청 농촌진흥과에 타이프라이터로 근무하고 있었다. 하성련 여사의 고향도 대구였던 탓에 김익달의 동생과 동향이라는 동류의식으로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생활하던 그들은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하성련 여사는 당시 김익달을 '미남형에 패기에 가득 찬 자신만만한 청년이었다.'고 기억하며, "해주항이 들어선 용당포는 퍽 아름다운 항구였지요. 우리는 서해의 넘실대는 물결을 바라보며 사랑을 키웠습니다. 그분은 한밤중에도 불현듯 찾아와서는 '얼굴을 보지 않고는 잠을 이룰 수 없다.'고 고백할 정도로 정열적인 청년이었지요."라고 회고한다. 청년 김익달은 하성련 여사와 1941년 1월 22일 해주시에서 결혼을 한다. 그의 나이 25세 때의 일이다.

해주에서의 생활과 수안으로의 도피[편집]

병도 고치고 일생의 반려자를 찾은 청년 김익달은 한동안 접어두었던 출판에의 꿈을 다시 펼치기 시작한다. 해주시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 청년 김익달은 시내 중심가에 '낙동서관(洛東書舘)'이란 서점을 차린다. 고향의 낙동강을 생각하며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대구에서의 실패이후 7년여 만의 일이다. 낙동서관은 대구에서의 실패를 보상이라도 하듯이 번창했다. 식민지 말기였던 당시 한국은 출판이란 말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빈약한 출판물이 고작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서점들은 거의가 다 헌책을 위주로 한 책방이었다. 청년 김익달의 낙동서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에서 쌓은 서점 경영에 대한 지식을 한껏 발휘하여 훌륭히 책방을 키워 나갔다. 특히 그는 징용 나가는 일본인들이 내놓은 책 중 독자들이 필요로 하는 책을 끌어 모으는 탁월한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김익달의 낙동서관은 날로 번창하여 해주 일원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큰 서점으로 발전하였다. 서점 경영으로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그의 생애 처음으로 신문 사업에 손을 댄다. 나중에 수안에서 만난 박상련(원효연구소 대표, 소설가 박태순 씨의 부친)도 회고하듯이 김익달은 출판보다는 신문 쪽에 관심이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꿈은 그가 60년대 들어서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일간 신문인 《새나라신문》이나, 그 이후의 《독서신문》 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낙동서관과 함께 《해주일보》 지국을 경영하면서 신문에 대한 꿈을 실현시키기 시작한다. 당시 김익달이 경영한 《해주일보》 지국은 영업과 취재를 겸한 형태의 사업으로 보인다. 그러나 행복한 시절도 잠시뿐, 일본제국주의는 청년 김익달에게 또 다른 고난을 던진다. 2차 세계 대전 막바지에서 패전으로 몰리던 일본한국인들을 징용으로 끌어들였다. 여기에 청년 김익달도 예외일 수가 없었다. 일본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청년 김익달은 징용이 무엇인지, 더구나 한국인징용에 끌려가면 어떻게 되는지를 익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이 난관을 꼭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수안으로의 은둔이었다. 황해도에서 곡산과 함께 가장 험준한 산골로 꼽히는 수안은 광산촌이었다. 수안에서 해방될 때까지 1년여의 은둔 생활을 하게 되는 김익달은 여기서 자신의 출판 인생의 주춧돌이 되는 출판 동지 중 한 사람인 박상련을 만난다. 김익달의 첫 출판 사업인 대양출판사 시절 부사장을 지내게 되는 박상련은 청년 김익달과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상대편의 눈치를 볼지언정 함부로 말하기를 꺼리던 당시의 극한 상황에서 초면부지의 두 젊은이-김 선생은 20대 중반이었고 나는 20대 초반-는 나름대로의 짚이는 데가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 둘은 서로 눈인사를 하면서 금세 십년지기처럼 돼 버렸다. 우리 둘 사이만이 아니라 옆에 있던 부인 하성련 여사의 화사한 웃음이 봇물을 터놓듯 서로 가슴을 여는 촉매가 되지 않았는지……."

김익달의 수안 생활은 출판에 대한 꿈을 구체적으로 다지는 소중한 시기였다. 이러한 사실은 박상련 씨의 회고글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김익달은 이곳 수안에서 9만리의 꿈을 가꾼 것이었다. 그 꿈은 붕(鵬)의 잔등이 만큼이나 광활했으며, 그 날개처럼 무서운 작용을 할 것만 같았다. 어쩌다가 첩첩산중에서의 조용한 대화에서도 쉽게 직감할 수 있었다. ……(중략)…… 그는 즐겨 말하기를 사람들의 귀가 열리고 눈을 뜨게 하는 일 이상으로 우리에게 시급하고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느냐, 하면서 의중을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김익달은 첫 아들 영수(현 민주일보ㆍ학원사 사장)를 얻는다. 국난을 피해 은둔하면서 거둔 삶의 기쁨이었다. 이때를 부인 하성련 여사는 "운둔 생활이라 생활이 말이 아니었지만, 그 시름을 한꺼번에 잊을 수 있다는 듯 그분은 기뻐했지요."라고 회고한다.

수안에서 해방을 맞은 김익달은 그동안 숨어서 가다듬어 온 출판에의 꿈을 펼치기 위해 고향길을 재촉한다. 그러나 수안은 그에게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었다. 즉 평생의 운명을 결정지어 준 출판과 신문에 대한 꿈을 잉태한 것과, 그 꿈을 오늘의 《민주일보》라는 신문 사업으로 연결시켜 준 첫아들을 얻었다는 사실이 그에게 얼마나 소중했던지는 그가 수안을 떠나면서 박상련 씨에게 한 말에서 잘 나타나 있다.

"박 선생, 수안에서의 한 해는 영영 잊혀지지 않을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겁니다. 그동안 타관살이 같지 않게 여러 모로 보살펴 주셔서 더더구나 고맙구요. 일단 고향으로 갑니다만, 부디 서울에서 다시 만납시다. 수안에서 그토록 이야기하던 우리들의 시대를 우리가 껴안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출판 사업[편집]

광복 이후 대양출판사의 설립[편집]

해주로 돌아온 김익달은 해방을 맞아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서둘러 사업을 정리하고 고향길을 재촉한다. 당시 해주의 점령군이었던 소련군의 눈을 피해 38선을 넘은 것이 1945년 8월이었다. 김익달이 수안에서 나와 해주를 거쳐 월남하기까지의 시간이 불과 한 달여 남짓이었던 것으로 볼 때, 그의 마음이 얼마나 급했는지 짐작이 간다. '이제 나의 시대가 왔다. 내 뜻대로 출판을 해서, 이 나라의 눈과 귀와 입을 열어 놓겠다.'라고 다짐을 하면서 38선을 넘은 김익달은 곧 대구로 내려와 구체적인 출판 사업에 발을 내딛게 된다.

해방 바로 뒤끝이라 세상이 몹시 어수선했다. 대구도 마찬가지여서 모든 사람이 호구지책으로 일거리를 찾아 헤매다니던 시절이었다. 김익달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주에서 서점 운영으로 성공을 맛보긴 했지만, 1년 간의 수안 은둔생활 끝에 해방을 맞고 대구로 내려온 김익달의 수중에는 사업을 펼칠 만한 자금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 넘쳐 있었다고 한다. 김익달이 대구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출판 사업은 책과 신문 등을 거리에 펼쳐 놓고 파는 노점이었다. 이처럼 김익달의 본격 출판 사업은 출판의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당시 같은 노점으로 출판을 시작한 김원대(현 계몽사 회장)는 김익달의 첫인상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그에 대한 첫인상은 지금도 지워지지가 않는다. 자그마한 키에 두 눈은 맑게 빛났으며 결단성이 있고 매우 능동적인 사람으로 보였다. 첫눈에도 앞으로 무엇인가 큰일을 해 낼 사람처럼 여겨졌다."

노점상으로 어느 정도 자금을 모으게 된 김익달은 대구 중앙로에 위치한 삼중정백화점 터에 '대양출판사(大洋出版社)'란 이름으로 본격 출판 사업을 시작한다. 해주에서 차렸던 낙동서관이 낙동강을 생각하며 지은 이름이라면 낙동강이 흘러가는 곳은 곧 '대양'이 아니겠느냐 하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대구에서 시작된 대양출판사는 그 이후 서울의 대양출판사-학원사로 이어지면서 김익달을 한국 출판의 제 1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는 모체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처음 시작한 대양출판사는 그야말로 보잘것없는 것이었다고 부인 하성련 여사는 말한다.

"말이 출판사였지 형편없었어요. 바라크를 이어 만든 서너 평 판잣집을 지어 반은 생활 터전으로 썼고, 나머지 반에다 출판사를 차리고 출판을 시작한 것이죠."

이때 김익달은 자신이 직접 등사기로 만든 유행가요집 프린트 본을 대양출판사란 이름으로 찍어서 팔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출판물이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김대원은 회고한다.

"단순히 가사와 악보만을 실은 것이 아니라 화가 박종유 씨로 하여금 삽화를 적절히 그려 넣게 했다. 당시만 해도 이것은 기발한 착상이었다. 김 선생이 정성을 쏟은 대가로 이 첫 출판물은 놀라운 판매고를 올렸다."

이렇게 해서 자리를 잡게 된 대양출판사는 당시 서울에서 발간되는 잡지《사조(思潮)》의 총판을 할 정도로 성장하게 된다.

대구에서의 사업으로 자금을 모은 김익달은 곧바로 서울로 진출한다. 을지로4가로 자리를 옮긴 대양출판사의 첫 출판물은 《명심보감》, 《시조 5백수》를 비롯하여 《열차시간표》등으로 보다 대중적인 출판을 시도했다. 해방 공간의 어수선한 시기에 독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는 몸소 체험을 통해 잘 파악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러한 출판물들은 김익달이 당시의 독자들에게 띄우는 친근한 메시지로 '우리 것 찾기', '새 시대 익히기'의 지침서 역할을 톡톡히 해 냈다고 한다. '대양'이라는 이름이 독자들 사이에 점차로 알려지기 시작하자, 김익달은 전국 중학교 입시 문제집인 《지능고사》를 펴내게 된다. 《지능고사》는 김익달의 예상대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 당시로서는 상상을 뛰어넘는 13만 부라는 판매고를 기록할 정도로 독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김익달의 출판의 목적은 처음부터 돈을 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원하는 좋은 출판물을 내는 데 있었다. 따라서 그가 두 번째로 구상한 것은 우리나라 학습물의 원조격에 해당하는 《간추린》 시리즈였다. 당시로서 순 우리말인 '간추리다'에서 나온 말을 제목으로 선택했다는 것은 놀라운 발상인 동시에 일대 혁신에 가까운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것 또한 김익달이 독자의 편에 서서 내린 결단이 아닐 수 없다. 즉, 이 출판물의 대상은 중학생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알맞는 제목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나온 결과였다. 또한 학원사가 현재로까지 성장하면서 한글 전용에 앞장 선 출판·언론 사업을 펼치고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그리고 김익달이 간추린이란 순 우리말을 선택한 데는 나라 사랑이라는 깊고 큰 뜻이 숨겨져 있다. 미래를 이끌어나갈 청소년들에게 한글의 우수성을 일깨워 나라를 사랑하게 하는 일을 거창한 구호를 내세워 외치지 않으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실천해 낸 것이다. 김익달의 이러한 생각은 간추린 시리즈의 첫 작품에서도 잘 나타난다. 김익달이 이 학습물 시리즈를 통해 제일 먼저 출판한 것은 《간추린 한국 지리》, 《간추린 생물》, 《간추린 물상》등 3종으로 모두 과학에 관한 책을 우선적으로 내놓았다. 학습물 하면 으레 국어, 영어, 수학 등을 먼저 내놓아야만 장사가 되는 법인데, 김익달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우선 우리가 사는 이 땅을 알아야 하며, 이 땅에 더불어 사는 생명체를 알아야 하며, 그것에 기초하여 합리적이며 과학적인 사고를 지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그 당시 앞으로 올 세계는 과학이 선도하는 사회이어야 하며, 그것도 우리의 환경과 처지에 알맞는 합리적 사고가 주해야만 나라가 진실로 발전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대양출판사의 《간추린》 시리즈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각 지방의 총판들이 책을 찍어내기가 무섭게 앞다투어 사갔다고 한다.

잡지 《학원》의 창간과 학원사의 설립[편집]

'대양'이란 깃발을 내걸고 시작한 김익달의 출판 항해가 첫 번째 닻을 내린 곳은 《학원(學園)》이라는 청소년 잡지였다. 나라 전체가 전란에 휩싸여 있던 1952년 11월대구에서 창간된 《학원》은 우리나라 본격 잡지 문화의 서장을 여는 고리였다. 전쟁으로 국가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몰라 대구로 피난 온 서울 출판업자들이 감히 출판 같은 것은 생각조차 못 하고 있던 시절, 김익달은 이 혼돈된 세상을 사람 사는 세상으로 만들어 줄 터전을 닦고 있었던 것이다.

《학원》 창간 때부터 김익달과 친교를 맺어 40여 년 간 가장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던 소설가 정비석은 김익달을 만난 첫인상에 대해 "시국을 초월한 선구적인 결단에 우선 감탄했다."고 말하면서 《학원》 창간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일선에서는 아직도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어서 출판 같은 것은 누구도 생각조차 못 하고 있던 그 때에 김 선생은 국가의 장래를 이끌어 나갈 청소년 학생들에게 인생의 등불이 되어 주기 위해 《학원》이라는 잡지를 간행하기로 결심했다니, 그 얼마나 원대한 포부인가. 어떤 철인은 80노령에 나무를 심으면서 '지구가 비록 내일로 멸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내일을 위해 나무를 심는다.'고 말한 일이 있거니와 비록 전쟁중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장래를 위해 《학원》을 발간하기로 결심했다는 김 선생의 결심을 듣고 나는 위대한 철인을 발견한 듯한 느낌이었던 것이다."

《학원》이 나올 당시 우리나라에는 잡지라는 것은 한 권도 없다시피했다. 몇몇 잡지가 있긴 있었으나 그나마 전쟁 때문에 중단되어 버렸던 것이다. 따라서 《학원》은 나오면서부터 독자들에게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당시 학생으로서 《학원》을 읽지 않은 사람은 학생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는 말까지 떠돌 정도였다고 하니 《학원》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이 간다. 따라서 《학원》은 당시 청소년들의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정신적인 등불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실은 4대 《학원》 편집장을 지낸 바 있는 최덕교(현 창조사 사장)의 다음과 같은 회고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학원》은 한때 거의 10만 부에 가까운 판매고를 올렸다. 당시 이러한 부수는 엄청난 것이다. 그 무렵 국내 최대 일간지 편집국장이 자기네 신문이 5만 부를 넘었다고 자랑삼아 얘기한 적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학원》의 판매고가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학원》의 인기를 말해 주는 일화는 많은데 그 중 김익달이 생전에 말했던 일화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54년에는 서점과의 할인율 문제로 이견이 생겨 전국의 서점이 단합하여 《학원》 취급을 보이콧한 적이 있다. 우리는 전 직원을 동원하여 서울역광화문 등 요지에다 잡지를 수천 권씩 쌓아 놓고 가판을 했는데 학생들이 줄을 서서 책을 사 가자 서점들은 3일도 못 돼서 손을 들었다."

또한 시인이자 아동문학가인 유경환(조선일보 논설위원)은 당시 경복고에 재학 중이었는데 "《학원》이 나오는 날은 조퇴를 한 채 서점으로 달려갔다."고 회고한다. 당시 서울의 몇몇 학교에서는 《학원》이 1000권씩 매진되어 판매라기보다는 배급에 가까웠다고 한다. 더구나 당시 청소년들에게 《학원》은 서로의 생각을 교환할 수 있는 '필담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해 내 공감대를 넓혀 갔다. 이렇듯 오늘날 우리 사회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에게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 낸《학원》은 전란의 폐허 속에서 한 세대를 건강하게 일궈 낸 셈이 되는 것이다.

"우리들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들에게는 죄스러운 이야기지만, 우리는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도 《학원》에서 배운 것이 더 많았다.”고 회고하는 진덕규(이화여대 교수)는 스스로를 《학원》이 만들어 준 학원 세대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다음과 같이 밝힌다.

"우리 세대는 참 행복했던 것만 같다. 아마도 여기서 행복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것은 《학원》이라는 우리들 잡지 때문이라 해도 지나침은 아닐 것 같다. 《학원》,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는 전쟁터의 소년소녀들이었지만 꿈을 키울 수가 있었다. 《학원》이 있었기 때문에 미래를 설계할 수 있었고, 저 멀리 떨어진 세계를 바라보면서 가까이 있지 않은 낯 모르는 친구에게도 만나고 싶다는 충동을 가질 수가 있었다."

《학원》은 창간 때부터 독자들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며 10만에 가까운 놀라운 판매고를 기록했지만, 돈을 벌어 주는 잡지는 아니었다. 즉 한 번도 회사 측에 흑자를 기록하지 못하는 출판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익달은 자신의 출판 의지를 《학원》을 통해 유감없이 펼쳤다고 생전에 늘 얘기했다. 이러한 김익달의 생각은 생전에 가진 한 인터뷰 기사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가난한 아이들에게 읽힐 수 있는 값이 싸고 좋은 잡지를 만들어야겠다는 것이 그때의 내 생각이었습니다. 카레멜이나 소비품 광고를 아예 싣지 않았지요. 소비품 광고를 싣자는 광고주에게 당시의 통상 광고비의 20배 이상을 내서 엄청난 이득이나 올려 준다면 몰라도 돈 없는 아이들에게 과자나 값비싼 학용품을 사라고 권하는 광고는 실을 수가 없다고 주장했지요."

김익달은 《학원》을 발간하면서 청소년들에게 보다 실질적인 지원 제도를 마련하는데, 그것은 창간 기념 사업으로 벌인 학원장학사업과 창간 1주년 기념 사업으로 벌인 학원문학상이다. 학원장학사업이 청소년들이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현실적 여건을 뒷받침해 주는 물질적 지원 제도였다면, 학원문학상은 청소년들에게 꿈을 심어 주는 정신적 지원 제도였다고 한다.

국내 최초의 민간장학사업, '학원장학회'[편집]

여유가 있어 남을 돕는 것은 생색을 내기 위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도움이 꼭 필요한 사람을 찾아 자기 것을 쪼개어 주는 일은 순수한 마음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다. 이는 배고픔을 겪어 본 사람만이 참 도움의 방법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나눔은 곧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사랑을 키울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배가 고파 굶주려 있는 사람에게 보석을 주는 것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들에겐 허기를 이길 수 있는 밥을 주어야만 진정한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정신을 담고 있는 것이 학원장학제도이다. 김익달 자신이 학창시절 뼈저리게 느꼈던 가난, 그 굴레의 무게를 덜어 주는 일을 그는 '학원장학회(學園奬學會)'를 통해 실천하기 시작한다. 김익달은 생전에 가진 한 인터뷰를 통해 학원장학회를 만든 직접적인 동기를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피난지에서 장사를 해 가며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고 결심했습니다. 노변이나 천막 교실에서 공부하는 그들을 보니 어려서 보리죽도 제대로 못 먹고 고학을 하던 저 자신의 가난했던 과거가 새삼스러워지고 뼈가 아파옵디다."

따라서 학원장학제도는 선발 방법이나 지원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선발 방법은 성적이 우수하고 높은 덕성을 갖춘 모범생으로서 가정이 극빈하여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중학생들을 전국 각지에서 학교장의 추천을 받아 서울에서 시험으로 가려 뽑는다. 이때 시골에서 오는 학생에겐 왕복 여비, 숙박비, 잡비 등까지 지급할 정도로 자상한 배려를 했다. 이렇게 해서 뽑힌 장학생들에게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해서 대학 4년 과정까지 (의대인 경우 6년) 학비를 전액 지불해주었다. 김익달은 이들 장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줄 때마다 꼭 세 마디씩의 다짐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것은 첫째 건강할 것, 둘째 국가 사회에 해가 되는 사람이 되지 말 것, 셋째 농촌을 잊지 말 것 등이었다.

김익달의 학원장학회에 대한 생각은 각별했다. 그는 출판계의 거목으로 불릴 정도로 평생 동안 3,000여 종에 달하는 무수한 출판물을 기획하고 생산해 내면서 한국 출판계의 밭을 일구고 씨를 뿌리는 족적을 남겼지만, 그보다 더 큰일은 학원장학회를 통해 우리 사회에 심어 놓은 인재의 씨앗이었다. 그 때문인지 김익달이 출판 일선에서 물러나면서도 끝까지 지킨 것은 학원장학회 사업이었다. 따라서 장학 사업을 하면서 많은 어려움이 따랐는데도 중단하지 않았다. 더구나 여유가 많아 시작한 장학 사업이 아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경제적인 곤란을 겪어 내야 했다. 심지어 학원사 직원들의 봉급까지 늦춰가며 장학금을 지급한 적도 많았다고 한다. 한때 학원장학회에 관여한 적이 있는 소설가 정비석은 "사업을 하다 보면 경제 사정이 곤란할 때가 누구든지 있게 마련인 법이다. 학원사도 그런 경우가 한두 번만이 아니었다. 그런 경우는 수많은 장학생들의 장학금을 일시에 지불하기가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김익달은 막대한 장학금을 단 하루도 기일을 늦추지 않기 위해 시중에서 높은 이자돈을 얻어 대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았다."고 회고한다.

1953년 2월 제1기 장학생 12명을 뽑은 학원장학회는 1985년 김익달이 별세한 후에도 큰아들인 김영수 씨가 유지를 받들어 장학사업을 계속 이어오다, 2005년 밀알장학재단과 통합하여 현재의 학원밀알장학재단(學園밀알奬學財團)에 이르고 있다. 밀알장학재단은 학원장학생 출신들이 '김익달 선생의 숭고한 은덕을 미약하나마 사회에 환원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자발적으로 기금을 모아 1997년 설립한 재단이다.

전후 문단의 텃밭을 일군 학원문학상[편집]

우리 문단의 중추를 이루는 문인들 중에는 '학원세대'로 불리는 학원파 문인이 있다. 이는 학원문학상(學園文學賞)을 통해 등단한 문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요즘이야 문인들의 등단 창구가 다양해져서 공감대를 형성할 만한 영향력 있는 등단 제도가 실제적으로 없지만, 1950년대 문단을 주도했던 것은 《학원》이었고, 그 시대 문학도들이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었던 학원문학상 제도는 한 세대를 만들어낼 정도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학원》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당시 문화계의 주역이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따라서 《학원》은 당시 우리 문화계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학원》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보면 박목월, 조병화, 김용호, 이원수, 정비석, 마해송, 여석기, 김용환, 김동진 등으로 현재 문화계의 원로들이 대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필진이 참여해서 만드는 잡지에서 뽑는 학원문학상은 명실공히 문단의 밑거름 구실을 해 낼 수 있었다.

1954년 1월 호에 첫 번째 학원문학상을 발표했는데, 이때 응모작이 2천여 통을 넘어 심사위원들이 일 주일이나 걸려 심사를 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심사위원으로는 서정주, 장만영, 김용호, 조지훈, 조병화 씨 등이 참여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학원문학상 제도는 1967년 11회까지 계속되면서 유경환, 이제하, 황동규, 정공채 씨 등 시인 84명, 송기숙, 유현종, 이청준, 김주영, 김원일, 최인호, 황석영 씨 등 소설가 44명을 비롯하여 기타 평론, 아동문학, 희곡 부문에서 20여 명을 배출해 냈다.

그런데 《학원》에는 문학에 소질이 있는 청소년들을 위한 학원문학상 제도보다 일반 독자들에게 더 보편적 공감대를 형성해 주는‘학원 문단’이 있었다. 매호 실리는 '학원문단'은 그야말로 청소년들의 필담의 장소였다. 학원파 문인의 한 사람인 시인 김광규 씨는 "독자들의 투고를 뽑아 실어 주었던 '학원 문단'은 전국의 문학소년 소녀들 사이에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 달에는 어디 사는 누구의 글이 뽑혔나 하는 것이 커다란 화제였다."고 회고한다.

또한 시인 이성부 씨도 "'학원문단'은 내가 문학에 눈뜰 무렵의 최초의 스승이었다. 아울러 문학적 열정을 불러일으켜 준 가장 큰 자극제이기도 했다. 중학교 2, 3학년 때부터 '다음에 크면 시인이 되겠다.'고 결심을 하게 된 것도 '학원 문단'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회고한다.

전후 어려운 시절에 10대의 꿈을 키웠던 학원 세대들에게 《학원》은 영원한 청춘이며, 그 세대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한 특권으로 남아 있다.

출판계의 거목[편집]

김익달을 일컫는 말 중 '한국 출판계의 대부'라는 것이 있다. 이 말은 김익달이 한국 출판 제1세대를 대표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만큼 김익달은 새로운 기획으로 한국 출판의 밑바탕이 되는 많은 출판물을 세상에 내놓았다.

대양출판사 초창기에 《학원》편집장까지 맡았던 김성재 씨(일지사 사장)는 "김익달 사장은 앞을 내다보는 기획력과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는 센스와 이를 실천하는 과감한 모험심이 있는 출판인이다. 또 사람을 잘 만나서 잘 쓸 줄 아는 출판인이고 돈을 가치 있게 쓸 줄 아는 분이다. 사람의 의식 구조 형성에 결정적인 구실을 하는 출판 문화를 맡고 있는 사람들이 본받을 만한 문화의 투기사였다."고 김익달의 면모를 회고한다.

김익달의 출판 족적을 더듬어 보면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나라 사랑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김익달이 본격적으로 많은 출판물을 만들어내던 시기가 전쟁을 겪고 난 뒤였고, 그러한 때에 출판의 사명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초기 출판물의 경향은 나라의 미래를 이끌어 갈 청소년 중심의 출판물에 집중되어 있다. 그것은《학원》이라는 청소년 잡지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이와 함께 김익달은 '읽히는 출판'에 주력하는데, 이것은 '아무리 가치 있는 것을 담은 책이라도 읽히지 못하고 현실에서 쓰이지 못하면 죽은 것이나 마친가지다.’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즉, '지식도 살아 있는 지식이었을 때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출판을 통해 나타냈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전후 우리나라에서 꼭 필요한 것이었다. 잘사는 나라,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나갈 실제적인 지식이 필요한 때였다.

전쟁중에 대구로 내려가 있던 대양출판사는 휴전이 되자 서울로 올라와 남산 아래 양동에 자리를 잡는다. 이때부터 김익달의 출판에 대한 욕구는 봇물처럼 터져, 한국 잡지 문화의 터전이 되는 많은 잡지와 기발한 착상을 담은 많은 출판물을 내놓아 한국 출판 문화에 새로운 물꼬를 터놓게 된다. 이 시기에 김익달이 시도한 새로운 출판 방식들은 그 후 우리 출판 문화가 다양한 모습으로 자리를 잡는데 주춧돌 역할을 해 낸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많은 필자가 방대한 자료를 한데 모아 기획·출판하는, 소위 '집대성 출판 방식'의 시도이다.

이러한 출판 방식과 함께 김익달의 업적으로 꼽히는 것은 새로운 편집, 제작 방식의 시도이다. 판형을 다양하게 하고 화보를 이용해 시각적 효과를 높임으로써 독자들의 독서 욕구를 늘려 나갔다. 그렇게 함으로써 김익달은 평소 지녔던 출판에 대한 생각인 '읽히는 책, 쓰이는 지식'을 실천해 나갔던 것이다. 김익달의 새로운 출판 방식은 자연히 제작 측면에서도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인쇄, 새로운 책의 모양들의 속속 등장하게 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컬러 인쇄의 등장이다. 당시 출판계로 볼 때는 일종의 인쇄 혁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우리 손으로 만든 최초의 컬러 인쇄는《학원》 창간호 표지였다. 그 후 학원사 《대백과사전》(전 6권)의 컬러 화보 등을 인쇄해 내면서 컬러 인쇄 방식에 많은 혁신을 이루게 된다.

《학원》편집장을 거쳐 학원사에서 여러 가지 출판물을 만들어냈던 채희상 씨는 "초창기의 사소한 일이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항상 자신의 출판물에 최고의 인쇄 기술을 투여했다. 그러므로 학원사의 발전사는 이 나라 인쇄 문화의 발전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고 말하면서 "출판에 있어서 본격적인 원색 인쇄 시대를 주도한 것은 학원사의 책들이었다. 특히 1965년 창간한 《주부생활》의 표지와 원색 화보는 당시까지 나왔던 한국 잡지 중에서 최고의 호화본으로 꼽혀, 다른 잡지들로부터 '지나치다', ' 현실에 맞지 않는다'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다."고 회고한다.

김익달이 서울 수복 후 서울에서의 출판 시대를 열면서 내놓은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동화집이라고 할 수 있는 마해송 씨의 《떡배, 단배》였다. 이어 그는《학원 명작선》, 《세계위인문고》(전 50권) 등 청소년들의 정신의 밑거름이 될 만한 출판물들을 기획, 세상에 내놓는다.

청소년물에 힘을 쏟던 김익달은 1955년 이 땅의 최초의 본격 여성지가 되는 《여원》을 창간하여, 튼튼한 사회의 기반이 되는 여성 문화 형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김익달은 《여원》을 창간하면서 '여성문화주의를 통한 여권 운동'을 펼치기 시작한다. 즉, 여성 중심의 세계관이 형성될 때 세상은 평화롭고, 평등한 사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나타낸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 김익달은 이미 '여성 해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에서 1980년대에 들어와서야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여성 운동을 김익달은 그보다 20여 년이나 앞서 이미 출판물을 통해 실천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남성과 대립되어 남성을 극복의 대상으로서 보는 여성 운동이 아니라 여성문화주의를 내세워 모성적 세계관으로 끌어들이려는 여성 운동을 펼쳤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여원》 창간사에 나타난 김익달의 글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해방 10년을 맞이하는 오늘, 과연 어느 정도의 남녀 동등권은 획득되었으며,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에 여성으로서의 이바지함은 얼마나 컸었는가를 돌이켜 생각해 볼 때, 무언가 공허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음이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그 이유를 살피건대, 여성들의 문화 의식이 높지 못하다는 결론에 용이히 도달하게 된다. 어느 나라든, 여성의 문화 의식이 얕고서 그 국가 사회의 번영 발달을 바랄 수 없음은 더 말할 나위 없다."
《여원》을 창간한 그 해 12월 김익달은 대입 수험을 위한 수험 교양지 《향학》을 창간한다. 이는 1960~1970년대 대입 수험지 시대를 여는 시발점이 되는 셈이다. 김익달의 시대를 앞선 출판 의지는 백과사전을 비롯한 사전류 출판에서 정점을 이루며, 농촌의 발전을 도모한 《농원》을 비롯한 농업 관계 서적, 생활 관계 서적, 건강 관계 서적, 문화 관계 서적 등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 중 1965년에 창간한 《주부생활》은 여성지의 대명사로, 현재까지 한국 여성 잡지계를 주도하고 있으며, 생활, 건강, 레저 관련 서적 등은 최근 전문화된 출판물로 자리잡는데 기틀을 제공한 셈이 된다.

출판의 꽃, 《대백과사전》[편집]

김익달의 출판 사업의 정점을 이루는 《대백과사전》(전 6권)이 나온 것은 1958년부터 1959년까지이다. 한국 최초의 백과사전인 이 사업은 당시로 볼 때는 일종의 출판 혁명이었고, 한국 출판 역사상으로 볼 때도 커다란 사건에 해당된다. 또한 《대백과사전》의 출간은 우리나라를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세계대백과사전을 보유하는 문화국의 위치로 끌어올린 셈이 되었다.

《대백과사전》의 출간은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문화적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언론 매체의 기사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동경에서 열린 '국제서적전시회'에 한국 출판물로는 《학원 대백과사전》만이 출품되어 일본인을 비롯한 각 외국인들을 경탄케 하였다. 아직도 한국은 미개한 국가로 그릇 인식한 그들에게 건국 10년간 이같은 초경이적인 문화 발전을 이룩하였다는 사실은 과연 대한 민족 문화 의지력을 과시한 것이라 하겠다. 이것은 오로지 김 사장의 천신 만고한 노력의 결정이라고 본다."

그러나 《대백과사전》이 나오기까지는 여러 가지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당시로서는 참고할 만한 자료가 없는 상태였고, 필자 동원에도 무리가 따랐던 것이 사실이다. 한 나라의 문화를 집대성하는 엄청난 작업인데도, 국가 기관이나 공공 단체의 지원은 생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만큼 당시에는 미래를 내다 본다던가 내일을 설계한다는 사실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시절이었다.

당시 《대백과사전》의 편집장을 맡았던 최덕교 씨는 "김 선생의 이러한 발상에 처음에는 너무 놀랐고, 구체적으로 생각을 정리해 보니 너무 엄청난 일이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김 선생의 결심 앞에서는 어떤 어려움도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약졸도 훌륭한 장수를 만나면 용사가 된다고 하던가? 내 비록 분수도 모르고 덤비는 일이지만, 사장의 그 큰 뜻을 따르기로 하자고 마음을 다져 먹고 시작했다. 1958년 1월 '대백과사전 편찬부'를 구성하고 9개월 여에 걸친 작업 끝에 첫 권을 내놓을 수가 있었다. 짓밟혔던 우리 말과 우리 글을 도로 찾아 여기 민족의 긍지로써 백과사전을 낸다는 김 사장의 감격어린 발간사, 각계의 권위 4백 30여 명의 필자, 본문 9백 60페이지, 별색 원색판, 단색 사진판, 다색 지도 등 54페이지, 1천 페이지가 넘는 당당한 모습, 그같이 큼직한 책을 1만 부를 내놓고, 사장 이하 모두가 환성을 올렸다. 누구도 이토록 짧은 시간에 방대하고 엄청난 일을 해 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제6권이 완간된 것은 이듬해인 1959년 5월이었다. 총 6천 페이지가 넘는 거대한 책을 우리 힘으로 완성시킨 것이다."라고 당시를 생생히 기억해 냈다.

일은 해 놓고 보아야 한다는 김익달의 평소의 지론이 폭풍우 같은 추진력으로 증명된 셈이었다.

그러나 백과 사전을 편찬하는 데는 긴 시간과 함께 큰 돈이 필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막대한 자금을 들여 《대백과사전》의 원고를 완성시켜 놓았을 때는 학원사는 많은 빚을 지고 있었고, 이 때문에 출판계에서는 '학원사는 이미 망해 버렸다.'라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기업의 세계는 냉혹하기 이를데 없어서 학원사가 망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때부터는 모든 거래인들이 누구도 김익달을 상대하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누가 종이만 대 주어서 백과사전이 나오기만 하면 출판계에서 선풍을 일으키게 될 것만은 틀림이 없건만, 오랫동안 거래해 오던 지업상들도 망했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 얼굴을 돌려 버렸던 것이다. 이때 "김 선생은 너무도 안타까워 언젠가는 우이동으로 혼자 달려가 풀밭에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소리를 내어 통곡한 일도 있었다."고 정비석 씨는 회고한다. 그러나 김익달의 인격을 믿는 어떤 투자가가 종이를 대 주어서 예정대로 1958년 9월 15일 《대백과사전》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김익달의 예상은 적중하여 《대백과사전》은 선풍을 일으켰다. 학원사로서는 그야말로 사운을 걸다시피 했던 백과사전 출판이 결과적으로 학원사에 영예와 돈을 한꺼번에 가져다 주었다. 김익달은 출판계 최초로 월부 판매 방식을 시도했는데, 이것이 들어맞아 1960년대 초까지 3~4년 동안에는 무려 5만 질(30만 권)이상이 팔려 나갔다. 《대백과사전》은 그 후 3차례에 걸쳐 전 12권, 전 15권으로 개정ㆍ증보를 거듭하여 1973년에 전 20권으로 완간되었는데, 이는 아직까지도 한국 출판사상 기념비적 출판물로 평가되고 있다.

김익달의 집대성 성격의 기획 출판 능력은《대백과사전》외에도 많은 기념비적인 출판물을 내놓았다. 대표적인 것 몇 가지를 꼽아 보면《과학대사전》(전8권), 《국민의학전서》(후에《가정의학대전》, 《가정의원》등으로 6차례 개정판 발행) 및 《문예사전》, 《농업대사전》, 《철학대사전》, 《요리전서》등을 들 수 있다.

이와 함께 김익달은 나라 사랑 정신을 담은 영문판 《KOREA》라는 책자를 1960년에 발간한다. '한국의 문화와 사람들'이란 부제를 달고 나온 이 책은 우리나라를 세계 각국에 소개하기 위한 책자였다. 황수영, 김원룡 씨 등 당시 각계 전문 학자 50여 명이 집필한 이 책은 세계 유수의 대학 도서관을 비롯, 각국의 중요한 도서관에 비치되었는데, 소련의 모스크바 대학 도서관에까지 비치되어 한창 냉전으로 얼어붙었던 공산권에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중요한 외교사절 역할을 해냈다.

《농원》을 통한 농촌 개혁 운동[편집]

'농자천하지대본'이란 말도 있듯이 농업은 국가 경제의 가장 기본이 되는 산업이다. 따라서 선진국치고 농촌이 건실하지 않은 나라는 없다고 우리나라 지도층의 많은 사람들 중에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그러나 농촌을 위한 구체적인 일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김익달 선생을 기억하는 사람들 중에는 《학원》, 《대백과사전》과 더불어《농원》을 얘기하는 이들이 많다. 지금까지도 농촌에 대한 변변한 책이 나오지 않고 있는 실정에 비추어 볼 때, 1964년에 창간됐던 본격 농촌 잡지《농원》의 등장은 김익달의 농촌에 대한 생각이 얼마나 지대했는지를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좋은 예이다.

김익달은 언제나 말보다 실천을 앞세웠던 행동파였다. 농촌에 대한 생각도 예외는 아니어서 자신의 손이 닿는 것이면 언제나 실천에 옮겼다. 심지어 자신이 키워낸 장학생들에게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농촌에 대한 생각을 얘기했다고 한다. "머리 좋은 장학생이 법대에 가는 것을 한 번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 대신에 장학생 가운데 농대에 가서 나중에 농민과 더불어 살겠다는 뜻을 지닌 학생이 있으면 얼굴에 기쁨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김익달은 먼저 농촌이 잘 살아야 이땅의 형편이 좋아진다는 신념을 돌아가실 때까지 버리지 않았다."고 학원장학생 출판인 윤구병 씨(충북대 교수)는 기억한다.

또한 김익달 선생의 생각에 감동을 받아 자신의 진로를 농학으로 바꾼 학원장학생 출신의 강봉순 씨(한국농촌경제연구원실장ㆍ서울대 교수)는 "농업의 성장위에 공업의 성장이 뒤따라야 안정적인 경제 안정을 이룩할 수 있다고 강조하시던 김 선생의 모습이 늘 떠나지 않는다."고 회고한다. 원래 농촌 출신으로 농촌의 현실을 몸소 겪어 알고 있던 김익달이 농촌에 대한 생각을 본격적으로 갖게 되는 것은 195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렸던 '국제출판협회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유럽의 농촌을 보고 나서부터라고 한다. 당시 라인 강변을 본 농촌의 인상을 생전에 김익달은 이렇게 밝혔다.

"나는 라인 강변과 30도 이상의 경사진 산기슭에다 석축을 쌓고 감자를 심는 독일 사람들의 농사짓는 법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귀국한 뒤 우리도 잘사는 농촌을 만들어 보자, 그러기 위해 축산 마을을 일구어야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내가 직접 축산 사업을 하자는 게 아니고 잘사는 농촌의 모델 하나를 만들어 열심히 키워 보자는 것이 나의 소망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실천에 옮긴 것이 '모범 축산 마을'이란 이상촌의 건설이었다. 김익달은 자신의 고향인 경상북도 상주군의 백화산 기슭에다 축산 마을 건설의 꿈을 실천시키기 위해 그곳을 찾아간다. 김익달의 상주행에 동행했던 큰 아들 김영수 학원사 회장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1962년 1월 1일이었지요. 당시 저는 고등학교 재학생이었어요. 아버님을 따라 황간역에서 기차를 내려 트럭 한 대를 빌려 타고 눈 덮인 산길을 이십 리 정도 갔어요. 눈이 몹시 내리고 있었고, 산길이라 험해서였는지 안 가려는 운전수를 겨우 달래 차비를 두 배를 주고 세 시간이나 걸려서 간신히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어요. 그때 산골사람들에게 주려고 서울에서 준비한 생 필품꾸러미가 큰 짐이었지요. 어둠이 짙게 깔린 저녁 일곱 시 우리는 산마을에 도착했어요. 아버님을 아는 사람은 몇 사람 안 되었지만, 아버님은 마을 한복판 초당을 얻어 마을사람들을 불러 모아 놓고, 이 마을을 잘살게 하도록 돕겠다는 뜻을 밝혔지요. 처음에는 외지의 낯선 사람에 대해 모두들 경계하는 눈치였고, 국회의원 출마나 정치 운동을 하러 온 걸로 알더군요. 이틀을 걸려 설득한 끝에 마을 사람들에게 아버님의 뜻이 전달되더군요. 결국 마을 한가운데 열 여덟 평 짜리 공회당을 짓게 됐고, 그걸 이곳 청년 회원들이 운영하면서 축산 마을로 가꿔 나가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그 후 아버님은 이 년 정도 그 마을을 지원했습니다."

이때는 '새마을 운동'이라는 말이 나오기 훨씬 전이며, 한창 정부의 공업 개발 위주의 정책으로 농촌을 돌아볼 겨를이 없던 때였다. 그러나 이 마을에 쏟은 김익달의 이상적 축산 마을 조성 의욕은 더 이상 이어가지 못했다. 그 당시 농민들이 너무 의타적이었고 스스로 돕고 힘을 모아 보겠다는 의지가 없었다는 것을 차차 실감하게 되었다. 결국 한 모델 마을을 가꿔 농촌 근대화의 집념과 함께 이상향을 이룩해 보겠다는 그의 소망은 주춤했다. 그래서 한 마을을 근대화의 모델로 가꿔 나가기보다는 출판 사업을 통하여 전국적인 근대화 운동을 실천해 보자는 것으로 뜻을 바꾸게 된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것이 64년 4월의 농민을 대상으로 한 월간지 《농원》 창간이었다.

김익달이 《농원》 창간을 결심하게 된 데도 단순히 농촌 경제의 활성화만을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는 2년여 걸친 농촌 지원을 통해 우리나라의 가난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터득해 냈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경제 지원만으로는 개혁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즉 정신의 개혁, 그 중에서도 일제 시대와 해방 후 미군의 원조에 길들여진 의타심을 철저하게 몰아내는 일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패배 의식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신감을 갖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것을 깨달 았다. 그것도 국가의 기본이 되는 농촌의 개혁이 먼저 이루어져야 나라 전체가 자연스럽게 바뀔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김익달의 생각은 다음과 같은 《농원》 창간사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국민은 우선 근면과 노력으로 스스로 생활 향상을 꾀하여야 하겠습니다. 남을 의존하거나 구원의 손길만을 바라는 태만은 그대로 기아만을 남겨 준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어째 우리는 조상이 물려 준 가난을 그대로 또 자손에게 넘겨줄 수 있겠습니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였으니 이제 우리는 머리띠를 질끈 동여매고 팔소매를 걷어올릴 때를 맞은 것입니다."

《농원》은 당시 잡지로서는 놀라운 부수인 15만 부를 발행했다. 자전거 600대에, 유니폼을 입은 보급원을 전국 방방곡곡으로 보내 잡지를 외상으로 배달했다. 이것은 판매라기보다 보급에 가까웠다. 그만큼 김익달의 나라 사랑의 철학은 심지가 깊었다. 그러나 잡지 값이 제대로 수금될 만큼 당시의 농촌 사정이 좋을 수가 없었다. 주변에서 동료나 그를 아는 친구들은 《농원》을 하지 말라고 말렸다. 그러나 김익달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잡지 《농원》의 수명은 4년을 더 지탱하여 김선생에게 막대한 손해를 끼치게 했다. 《농원》을 더 이상 못 내게 되자 김익달은 실의에 빠졌고,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복간하려고 노력했으나, 제대로 뜻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러한 노력은 단순히 잡지를 복원한다는 차원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전에 가졌던 한 인터뷰 기사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비록 그 잡지가 오래 가진 못했어도 나로선 지금도 자랑할 수 있는 잡지예요. 내용도 충실했고 농촌 문화ㆍ농촌 경제의 확충을 위한 사회 사업의 뜻으로 만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태평로 서울신문사 뒤에 있던 4층 빌딩을 없앨 정도로 빚을 졌지요. 그 무렵부터 얻은 당뇨병이 지금도 낫지 않고 있어요. 그러나 《농원》만큼은 다시 복간하고 싶은 의욕을 잠재우지 않을 만큼 뜻깊은 일이었다고 자부해요."

평가[편집]

사회 환원을 원칙으로 한 기업 정신[편집]

김익달이 남긴 많은 업적 중에 우리 출판계에서 아직까지도 전설처럼 남아 있는 일화가 있다. 김익달의 인간적인 면모를 잘 드러내 주는 일화는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중에도 특히 부장급 이상 간부들에게 돌아가며 차례로 집을 사 준 이야기는 지금도 전설처럼 구전되고 있다. 그리고 그 무렵 사원의 대우도 국내 최고 수준이었다고 학원사 출신들은 입을 모은다. 그래서 당시 '학원사 편집국장의 월급이 신문사 편집국장보다 많다.'는 말이 떠돌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김익달이 출판을 통해 엄청난 수익을 올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사실 김익달은 몇몇 매체와 출판물을 통해 돈을 많이 벌기도 했지만 언제나 새로운 일에 투자하여 사회 환원을 원칙으로 삼아 왔다. 그리고 김익달 자신은 천성적으로 근검·절약하는 성품이라 겨울에도 빛 바랜 외투를 입고 다닐 정도로 생활이 검소했다고 그를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회고한다.

학원사 부사장을 지낸 바 있는 이규준 씨는 김익달의 일상 생활을 비교적 가까이에서 보아 온 느낌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분의 일상 생활은 지극히 규칙적이고 합리적이며 대단히 검소했다. 공과 사가 분명했고 사치나 허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출판에는 남다른 기지와 정열을 가지고 있었으며 휼빈과 육영에도 사업 의지가 대단했다. 불우한 이웃은 되도록 도와 주되 그 대상은 반드시 자조하는 사람 중에서 선택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이러한 생활 정신이 원동력이 되어 회사 운영에도 기업주 위주의 축재나 업체의 확장에만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종업원의 후생과 복지에도 중점을 두고 거래선과도 공생공영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일반적으로 지급되는 월정급은 물론, 연말이나 추석, 김장철 등에 지급되는 상여금에 이르기까지 보수는 당시 국내 출판업계의 최고 수준이었다."

대개 부장이 되고 3~5년쯤 지나면 집을 사 주었다는데, 그 혜택을 입은 사람이 20여 명이나 되었다. 지금도 간부사원에게 주택 구입비를 보조해 주거나 대여해 주는 출판사가 더러 있긴 하지만, 주택난이 지금보다 훨씬 심했던 시절에 집 한 채를 조건 없이 사 주었다는 것은 김익달이기에 가능했다는 이야기다.

1958년 부터 10여년 간 학원사에 몸담으면서 김익달로부터 주택 구입 혜택을 입었던 박재서 씨(학원출판사 대표)를 통해 다음과 같은 주택 구입 일화를 들어본다.

"1960년대 초에 처음엔 200만 원을 주다가 나중에는 400만 원까지 주었는데, 그땐 그 돈으로 집 한 채를 넉넉히 샀지요. 김 선생이 직접 집을 골라 사 준 일도 있습니다. 나도 그 혜택을 입었는데, 하루는 나를 데리고 불광동 신축 주택가에 가서 나더러 집을 고르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기에 돈으로 달래서 그 돈으로 당시 서교동 허허벌판에 땅 240평을 샀습니다. 나중에 그걸 팔아서 집을 샀지요."

또한 전 한국출판연구소 소장을 지낸 바 있는 주채원 씨는 1960년대에 학원사에서 근무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라며 다음과 같은 김익달의 기업 정신을 전한다.

"제작비 지불 관계로 김 선생이 부채 리스트를 보여 주시는데 거기에는 사원들에게 집 사 줄 액수도 쓰여 있었다. 자금이 남아돌아서 집을 사 주는 게 아니고 빚을 얻어서라도 해야 할 일은 한다는 것이 그분의 소신이었다."

이와 함께 김익달은 자신이 창간한 많은 매체나 출판물들을 독립시켜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기틀을 잡아 주기도 했다. 이것은 기업이 한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사회의 소유물이며, 더불어 살아가면서 도와야 한다는 평소의 기업관을 실천에 옮긴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결국 이것은 오늘날 우리 출판계가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하게 된 밑거름이 되는 셈이다.

1969년, 《주부생활》의 경우에서도 김익달의 이러한 기업 윤리가 적용된다. 1965년 창간되어 한국 여성지를 주도하던 《주부생활》을 김익달은 학원사가 어려워지자 독립시키기로 결정한다. 그 경위를 살펴보면 대충 이러했다. 김익달은 가지고 있던 빌딩을 팔아서 《주부생활》 직원들의 퇴직금으로 잡고 거기에 각각 30~50%를 가산해서 그 액수에 해당하는 《주부생활》의 주식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는 방식으로 《주부생활》을 독립시킨다. 그러니까 사원들 모두가 그 당시 자신이 받을 수 있는 퇴직금 액수에 30~50%를 가산한 액수만큼의 주식을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대신 당시 적자를 내고 있던 학원사의 주식 일체는 모두 김익달이 액면 가격대로 샀다. 그리고 살림을 나가는 《주부생활》에는 2000여만 원을 따로 지원해 주었다. 그러니까 김익달은 《주부생활》을 독립시키면서 최근 우리나라 기업 사이에서 알려지기 시작한 '우리사주제'를 이미 실시한 것이다.

독립 방식은 다르지만 그 동안 김익달이 매체나 지형을 떼어주어 출판사를 차린 사람은 30여 명이나 된다. 물론, 회사를 하나 떼어 주는 데 있어서도 특별한 조건은 붙이지 않았다. 다만 그 사람의 능력과 회사의 형편이 닿는 대로 일을 처리했다. 보통 사람은 생각하기 힘든 일들이다. 정말 마음을 비우지 않거나, 순수한 마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회사를 떼어 주거나, 지형을 독립시켜 그들의 꿈을 열어 주는 일에서 기업하는 보람을 더 느꼈다는 김익달은 생전에 늘 이런 생각을 말해 왔었다고 주변 사람 들은 전한다.

"저도 어려서 고용살이로 시작했으니까 그분들의 고통을 잘 압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포부가 있는 법이니, 그 뜻있는 분들에게 길을 열어 주는 것이 제 책임이기도 하죠. 그러기에 저는 사업가는 되지 못합니다. 벌기보다 쓸 생각이 먼저 앞서 있으니……."

출판 문화계의 씨를 뿌리고 밭을 일구다[편집]

우리나라 출판 문화계에는 '학원사 인맥'이라고 칭할 만한 일군의 출판인들이 있다. 말 그대로 김익달이 학원사를 통해 키워 낸 출판인들이 한 집단을 형성할 만큼 많다는 얘기다. 이들 학원사 출신 사람들은 출판을 중심으로 사회 각 분야에 포진되어 오늘날 우리 출판계를 이끌어가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더구나 이들 학원사 출신들은 김익달의 이름자를 딴 익우회(益友會)란 이름의 친목모임을 중심으로 끈끈한 동질성을 확인하고 있다. 이처럼 어느 한 시기에 같은 직장에 몸담고 역경을 공동으로 헤쳐 왔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그 창업주의 유덕을 두고 두고 기린다는 것은, 흥망성쇠가 무성한 출판계의 현실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학원사 출신들 중 출판 일선에서 뛰고 있는 인사들을 살펴보면 대충 이렇다. 먼저 대양출판사와 학원사 초창기 인사들을 보면, 나말선(향문사), 이재근(수학사), 박상련(박우사), 김성재(일지사), 김명엽(여원사), 류국현(교문사), 주채원(정향사), 김인원(양서각), 최태열(육민사), 최덕교(창조사), 손정삼(학창사), 조우제(진학사), 박재서(학원출판사), 고영진(여명사), 이보승(학명사), 진한철(평범사), 김우석(진명출판사), 채희상(지하철문고사), 백동주(금란출판사), 임대희(농원사) 등 20여 명에 이른다. 이 중에는 현역에서 은퇴 또는 2세에게 물려 주었거나 전업한 이도 있지만, 대개는 지금까지 출판계 일선에서 현역으로 뛰고 있다.

이 밖에 잡지 발행인으로 이규준 씨(전 주부생활 사장)을 비롯, 김재원(여원), 주태길(조원과 원예), 김기제(월간 당구)가 있으며, 인쇄인으로 잉태하(태광문화사), 정태문(홍진문화사), 정해석(인쇄문화사) 씨 등이 '학원맨'으로 칭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한편 역대 편집국장 또는 부장 출신으로 언론ㆍ출판 분야에서 현역으로 뛰고 있는 인사들로는 고정기(을류문화사), 최몽섭(계몽사), 강민(금성출판사), 김승환(코리아 이데아 에이전시), 공재화(교학사), 이중(경남일보), 이희춘(금성출판사), 조남웅(정신문화연구원), 이태원(이화여대), 정용재(한국경제신문), 전영호(예음), 한문교(무역협회), 백승철(서울문화사)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 밖에 학원사를 거쳐간 사람들을 일일이 꼽기란 어렵다. 그 중 두드러진 면면을 꼽아보면, 이연기(국민대 인문대학장), 정구호(전 KBS 사장), 백인수(동아일보 편집위원), 김유동(경향신문 교정부장), 전우억(KAL 기획관리실 이사), 박제천(문예진흥원 홍보출판부장) 씨 등 공직자 외에 여류소설가 구혜영, 시인 홍윤기, 정공채, 낭승만, 황명걸, 민 영, 강은교, 문정희, 전민우 씨, 아동문학가 오영민(재미), 윤일숙 씨, 영화평론가 김종원 씨, 번역문학가 윤용성 씨, 서양화가 윤석원, 최충훈 씨, 사진작가 김대벽 씨 등이 있다.

그리고 김익달이 창간한 매체 중에 《주부생활》과 《학원》은 현재 민주일보·학원사가 계속 발행해 오고 있으며, 《여원》은 여원사에서, 《진학》은 진학사에서, 그리고 《독서신문》은 독서신문사에서 각각 현재까지 발행하고 있다.

새 세대의 텃밭을 일구다[편집]

김익달이 어느 출판인들과 다른 점은 출판을 위한 출판을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를 가리켜 '한국 출판의 개척자', '출판 제 1세대의 대표적 인물', '잡지 계의 대부', '기획의 귀재'등으로 부를 만큼 그가 한국 출판계에 남긴 업적은 지대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나라 사랑이라는 심지 곧은 생각이 깔려 있다. 따라서 그가 출판을 통해 끝없이 추구한 것은 나라의 미래를 꾸려 나갈 새 세대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미 《학원》을 통해 나타났고, 이와 함께 추진한 학원 장학생 제도나 학원문학상 등을 통해 50년대 청소년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 냈다.

그 결실 중 하나가 밀알회다. 학원장학생 출신들이 김익달의 밀알 정신을 따라 만든 밀알회는 현재 김익달의 뜻대로 이 사회의 밀알으로써 서서히 새로운 열매를 보여 주고 있다. 김익달이 생전에 학원장학생들에게 늘 강조했던 밀알정신을 밀알회원인 민주일보사의 김경회 국장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졌다고 하자, 그 땅이 메말라서야 싹이 터서 자랄 수가 없을 것이다. 여기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 그것은 싹이 틈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갖고 많은 결실을 가져오는, 말하자면 그 한 톨 속에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늘 말씀하셨지요. 이 밀알이 지닌 가능성이 제대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그보다 먼저 땅에 묻힌 한 톨 한 톨의 밀알이 밑거름이 되어 줌으로써 가능한 것이니, 어제의 희생의 대가로써 오늘을 가져 왔고, 또 오늘의 희생은 미래를 약속할 수 있다는 것이 그분의 생각이셨어요. 그러면서 메마른 땅에 떨어진 한 톨의 밀알이 썩지 않는다면 어찌 푸른 초원이 이룩될 것이냐? 지금 푸르러 가고 있는 초원은 먼저 떨어진 열매와 땅의 밑거름이 있었기 때문인지 자연히 발생한 것은 결코 아니라고 장학생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말씀했지요. 또한 장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면서 당부하는 말이 있었는데, 이런 내용이었어요. '장학생 여러분들은 바로 밀알 같은 존재다. 알찬 밀알일수록 바람직한 열매를 맺게 된다. 여기서 제군들에게 한 가지 의무가 주어지는데, 제군을 길러 낸 이 풍토에 한 줌의 기름진 흙을 보태라는 것이다. 우리들 주변에는 도움이 필요한 새싹들이 얼마든지 있다. 제군의 손으로 그들에게 한 줌 흙이라도 북돋아 준다면 그것이 결코 헛되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힘이 자라는 한도에서 정성을 다하여 제군이 받은 밑거름을 한층 더 보람있게 해 주기 바란다.'"

1953년 1월에 제1기 학원장학생으로 뽑힌 학생들이 대학생이 되던 1957년에 '장학생회'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밀알회는 그동안 발행해 오던 회지 《이삭》을 1960년에 《밀알》로 바꾸면서 '밀알회'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2010년 기준 밀알회는 751명이 회원으로 있으면서 김익달의 밀알 정신을 실천해 가고 있다.

그리고 김익달은 뜻을 세워야 할 청소년들을 만나면 언제나 용기를 불어넣는 말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뜻을 세워서 정도를 지킬 것을 강조한 김익달의 신념은 《밀알》 회지의 권두언에서 잘 나타난다.

"올바른 길, 정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나를 살리는 길이요, 남을 살리는 길이요, 동시에 나라를 살리는 길이다. 나는 남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라의 일부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해치는 길은 정도가 아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나라를 해치는 길은 정도가 아니다. 정도는 언제나 나와 남과 나라가 함께 살 수 있는 길이다."

이러한 말에서도 김익달의 나라 사랑 정신을 잘 읽을 수 있다. 즉 나라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청소년들에게 나라 사랑 정신을 끊임없이 강조함으로써 나라의 장래를 차근차근 다져 나간 것이다. 한때 학원장학회 이사로 있던 아동문학가 마해송이 1967년 세상을 떠났을 때 김익달은 몹시 슬퍼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마해송 선생의 나라 사랑과 김익달의 생각이 같았기 때문에 동지를 잃은 슬픔이 그만큼 컸던 탓이리라. 김익달은 마해송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이렇게 《밀알》지 권두언에 적고 있다.

"선생은 아동문학가로 알려져 있지만 나는 고결한 선비요, 청빈한 지사로서 존경해 왔다. 특히나 그분이 세상을 떠나실 때 남긴 말씀은 우리들 평생에 큰 교훈이 되었다. '어린이를 위하는 마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어린이를 위한 일을 천직으로 알고 일생을 사셨는데 그것이 곧 애국하는 일이라는 신념을 지니셨던 것 같다."

이러한 김익달의 생각은 이 나라 어린이 신문의 효시가 되는《새나라신문》을 1960년에 창간하기에 이른다. 타블로이드 판 4면 체제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새나라신문》은 1면에 일반, 사회 기사를 넣고, 2면과 3면은 과학 기사가 주종을 이루었으며, 4면은 문화 기사로 채웠다. 그리고 만화가 김용환의 코주부 삼국지, 조흔파의 연재소설 등을 실어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 주었다. 이 신문의 체제는 어린이 신문 모범적인 예가 되어 그 후에 각 일간 신문에서 나온 각종 어린이 신문이 이 체제를 따라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김익달은 이 신문에서 특히 과학 기사에 비중을 두어 어린이들이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사고를 키워 나가도록 유도했다. 이 또한 과학이 발전하지 않고서는 과학이 주도할 미래를 가꾸어 나갈 힘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굳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새 세대를 소중하게 키워 나가던 김익달의 이러한 생각이 사회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학원장학회를 만든 지 17년이 지난 1969년이었다. 새싹회(회장 윤석중)에서 13회 소파상 수상자로 김익달 선생을 선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한 일을 남 앞에 내세우기를 꺼려했던 김익달은 처음에는 이 상의 수상을 거부했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적격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윤석중 씨에게도 굉장한 항의를 했어요. 난 사업가일 뿐 아동을 위해서 일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사양을 하려고 했는데 신문에 발표해 버린 바람에 그냥 타기로 했어요. 너무 사양하는 것도 실례가 될 것 같고 해서……. 부끄러워요."

당시 수상 소감을 묻는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소파상은 소파 방정환을 기리기 위해 새싹회가 정한 상으로, 자라나는 새싹들을 위해 큰 일을 한 사람을 찾아내어 격려하는 상이다. 따라서 새싹회에서는 주저없이 김익달을 수상자로 결정했던 것이다. 윤석중 씨는 그때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한다.

"하나하나 감격적인 상이었지만 특히 김익달 선생에게 드린 제 13회 상은 역경에서 대성하신 분이 역경을 뚫고 학업에 몰두하고 있는 젊은 학도들에게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뒤를 대 주어 젊은 시절에 맺힌 한을 장학 사업으로 풀고 계신 분을 찬양하는 상이었다."

김익달은 국민훈장 동백장(1970년)을 비롯하여 대통령 표창(1969년)·국무총리 표창(1968년)·서울특별시 문화상(1962년)·제1회 한국출판 문화상(1960년) 등 개인· 사회단체·행정부 등에서 주는 감사장·표창장·공로상·문화상·훈장 등을 수없이 받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기쁘고 소중하게 생각되는 것은 소파상이었다고 생전에 늘 자랑스럽게 얘기했다고 한다.

《새나라신문》과 함께 김익달이 청소년을 위해 창간한 것이《독서신문》이다. 1970년에 창간된 주간 단위의《독서신문》은 창간 소식 자체가 화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때만 해도 주간신문 등록은 하늘의 별따기였고, 기존 주간 매체 자체가 없었던 터라 모두들 어떤 모양의 시문이 나올지 궁금했던 것이다. 출판인들이 주주로 된 《독서신문》은 문학과 예술을 위주로 한 교양 신문이었다. 1970년대 초반이니까 광고 시장이 넓지 못했고, 신문의 성격상 책 광고를 위주로 해야 했기 때문에 창간 초기부터 경영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김익달은 광고가 모자랄 때마다 학원사 광고를 대신 실어 가며 이 신문을 살리려고 노력했다. 지금도 《독서신문》이 나오고는 있지만, 《독서신문》을 기억하는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는 김익달이 경영하던 시절의 이미지로 머리 속에 남아 있다.

국민 건강 운동[편집]

이미 《농원》과 '이상적 축산 마을' 시도를 통해 농촌 근대화를 실천에 옮겼던 김익달은 말년까지 국민건강운동을 위한 출판으로 국민 의식 개혁을 실천에 옮겼다. 특히 농업을 '창조하는 사업국가의 기틀'로 본 김익달의 생각은 단순히 그가 농촌 출신이기 때문에 나온 생각은 아니었다. 김익달은 누구보다도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사고 방식을 일찍 터득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를 개척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김익달은 확실히 의식 개혁의 개척자였다. 그가 농촌 개혁을 부르짖는데는 우리 현실을 바로 보고 우리의 여건을 충분히 파악한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 5·16 이후 공업화가 국가 시책으로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던 때에 쓴 다음과 같은 글에서 그의 합리적인 생각을 읽을 수가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공업의 대부분은 진실한 의미에서의 생산이 아니라 그 원료를 미국에서 도입 재수출하는 하나의 가공업적인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그러나 농업 생산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재화를 이동, 가공하는 것이 아니요, 지하에서 채굴해 낼 수도 없는 참다운 생산, 즉 창조하는 산업인 것이다. 가령 고구마를 대량 생산해서 이것을 전분 원료나 전분으로 만들어 외국 수출에 활기를 띤다면, 첫째 고구마를 재배하는 농민의 수익이 증대될 것이요, 둘째는 고구마를 가공하는 공장도 또한 수익이 증대되어 기업이 발전해 갈 것이다……(중략)……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나라는 공업 발전을 위해서라도 농촌의 근대화가 먼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이다."

김익달은 농촌 근대화의 한 방법으로 '식생활 개선 범국민 운동'을 벌이기 시작한다. 즉 쌀과 함께 보리ㆍ감자를 주식으로 하자는 운동이다. 이것을 주장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농촌의 생산물을 다양하게 함으로써 쌀농사 외에 밭농사를 활성화시켜 농촌 경제를 부흥시키자는 것이요, 또 하나는 쌀보다 건강에 좋은 보리와 감자를 주식으로 함으로써 건강한 국민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2천년대 인구 증가로 인해 필연적으로 닥쳐 올 식량 위기 를 대처하자는 큰 뜻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김익달은 이 운동을 자신이 먼저 실천해 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경우를 들어가며 혼식을 권장했다고 한다.

1980년에는 농수산부에 '식생활 개선 범국민 운동 제창 건의'란 제목으로 건의서를 제출하여, 보리 혼식을 국가 시책으로 펼쳐 줄 것을 당국자들에게 당부하기도 했다. 이때 농수산부 장관은 김익달의 건의서에 감동하여 농정에 반영시키겠다는 회답과 함께 감사장을 보내 온 일도 있었다. 김익달은 식생활 개선을 추진하는 방법까지 상세하게 정리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하여 식생활 개선 운동을 펼쳐 나갔다. 식생활 개선의 방법으로는 '교육', '범국민 운동의 전개', '바꾸어 나가야 할 식생활 습관' 등 3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즉, 초등학교 교과 과정을 통해 학생들의 의식을 개혁시키고, 정부 차원에서 매스컴을 통한 혼식의 필요성을 홍보하는 일과 혼식의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는 일, 그리고 쌀과 함께 감자나 보리를 주식으로 삼아 식생활 습관을 개선할 것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는 곧 튼튼한 국민이 부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지극히 교과서적인 진리를 실천해 낸 것이라 하겠다.

이 시대의 '바른 정신'[편집]

1970년대로 넘어오면서 김익달은 1960년대의 《새나라신문》, 《농원》의 실패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1970년에 《독서신문》을 창간했으나 역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김익달이 끝까지 지킨 것은 '출판의 바른 길'이었고, 그 길 위에 세운 '생활의 바른 생각'이었으며, 그 길은 '나라 사랑'이라는 지극히 당연하지만 어려운 곳으로 뚫려 있었다. 그 길을 김 선생은 평생동안 묵묵히 걸어왔던 것이다.

주변에서 그의 일생을 지켜본 동료들은 '그가 출판이 아니라 다른 사업을 했더라면 틀림없이 한국 굴지의 재벌이 되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남들은 땅을 개척하거나 빌딩을 세우거나 수출입에 나서서 기업인으로서 그 토대를 다지던 때에 김익달은 유형이 아닌 무형에 투자했다. 이 무형의 투자가 오늘날 그를 개척자의 상으로 부활시킨 것이다. 김익달의 출판에 나타난 사상을 보면 보다 근본적인 문화 요소를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즉 아동·청소년들을 위한 꿈과 과학적 사고의 형성, 농촌 근대화를 통한 나라 개혁, 주부 문화를 통한 건강하고 건전한 사회 육성, 사전류를 통한 문화 입국의 건설 등이었다. 이 점은 김익달이 늘 강조했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잘 나타난다.

"하드웨어로는 소프트웨어를 만들 수 없지만 소프트웨어로는 하드웨어를 얼마든지 새롭게 만들 수 있다. 출판도 이와 같아야 한다. 소프트웨어를 위한 출판이 먼저 자리를 잡아야 한다."

사회의 소프트웨어를 만들기 위한 출판을 평생 해 왔기 때문에, 유형의 재산이 늘어날 리가 없었다. 사실상 1973년 이후 김익달의 출판물 중에 상업적 성공을 거둔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지론대로 꾸준히 출판을 계속했다. 그래서 1972년에 《과학대사전》(전 8권)을, 1975년에《원색세계백과대사전》(전 20권)을 완간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975년에는《농원》을 재창간하여 농촌 개혁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1978년에는 《학원》을 옛 뜻대로 재창간하여 '출판의 바른 길'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이와 함께 김익달은 1976년에 자신의 전 재산을 정리하여 여의도에 장학회관을 준공한다. 이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장학 사업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김익달의 곧은 정신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힘겨운 공사비로 인한 부채 때문에 준공 5개월 만에 장학회관은 처분해야 하는 운명을 맞았다. 여의도 장학회관을 처분해서 빚을 갚고 나머지는 은행 정기예금으로 넣어 장학회 기본 자산으로 만든 뒤, 김익달은 서대문 뒷골목 조그만 사무실에서 장학회를 운영했다. 그 후 장학회는 김 선생의 장남인 김영수 현 민주일보·학원사 사장이 부친의 평생의 사업인 장학 사업이 심각한 재정난에 빠져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결국 재정적 후원자로 나서면서 장학회 사무실도 서대문에서 여의도 민주일보사 건물로 옮기게 되었다.

김익달은 자신의 필생의 장학 사업이 도중에서 꺾이지 않고 장남의 도움으로 꾸준히 이어지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했다며 장학생 출신인 박범진(제14대·제15대 국회의원)은 회고한다.

"'아버님, 장학회는 이제 제가 뒷받침해 드릴 테니 좀 쉬시면서 건강 관리에 유의하십시오.' 라고 장남 김영수 사장이 자신의 뜻을 이어 주었다고 장학생 출신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는 물론, 나와 개별적으로 만났을 때도 수없이 이 말씀을 되풀이 하셨다. 이때가 김 선생이 작고하기 2년 전이니까 건강이 몹시 악화되어 있던 때였다. 그런데도 김 선생은 자신의 삶이 남아 있는 한 해야 할 일이 무엇이며, 또 그것은 꼭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용하게 실천한 김익달적 사상은, 그의 필생의 사업에 있어서 언제나 가장 중요한 자본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능력은 겸손에서 돋보이며, 실천은 과묵에서 힘을 얻는다는 사실을 전 생애를 통해 보여 준 김익달 선생. 그의 생애 그 자체가, 바른 길이 없는 이 시대에 바른 정신의 모범으로 남아 우리를 반성하게 만든다."

거인 김익달[편집]

출판인이자 사회사업가란 명칭으로 알려져 있는 김익달은 가정에서도 엄격하나 가족에 대한 깊은 사랑을 지닌 사람이었다. 부친 하성련 여사는 "집안에서는 늘 검소한 생활, 건전한 생각을 갖도록 아이들이나 저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당부했지요. 그래서 아이들이 사회적인 아버지라고까지 생각했답니다. 그러나 그분은 표현을 못 할 뿐이지 아이들을 누구보다도 끔찍이 사랑했지요. 물론 아이들이 철이 든 후에는 그분의 이런 면을 이해하더군요."라고 말한다.

김 선생의 이런 면을 잘 보여 주는 일화는 많다. 그 중 만화가 김용환의 회고를 들어본다.

"김 선생이 일본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때 일본에서 공부하는 한 아들이 있었다. 그는 크리스천으로 일본에 와서도 열심히 교회에 나갔다. 어느 일요일, 그는 마침 일본에 온 아버지를 모시고 교회에 갔다. 그리고 목사며 신자들에게 아버지를 소개했다. 김 선생은 신자가 아니었다. 부인을 비롯한 온 가족이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는데 가장인 아버지 혼자만이 교회에 나가지 않는 그런 처지였다. 그때 교회에서 김 선생이 하였다는 말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오늘로서 교회가 세번째입니다.' 신앙심이 깊은 자제로 미루어보아 그 아버지도 교인일 것으로 믿었던 신자들은 의아해했다. 그런데 이어서 김 선생은 '맨 먼저 교회에 나간 것은 큰 애의 결혼식이었고, 두번째로 교회에 나간 것은 둘째 아이가 결혼하는 날이었고, 그리고 오늘 이 자리가 세번쨉니다.' 라고 말해 모두가 박장대소했던 적이 있다. 그것은 '나는 주말마다 교회에 나가는 사람입니다.'라는 말보다도 얼마나 친근감이 가며, 화평한 가정임을 상징하는 말인가. 김 선생이 말년에 기독교에 귀의했다는 말을 들은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김익달은 작고하던 해에 박용익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귀의한다. 평생을 기독교인으로 살지는 않았지만 그의 생애를 돌아보면 기독교 정신인 '사랑'으로 충만된 삶이었다. 따라서 그가 기독교로 귀의하여 영생을 얻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학원 김익달은 1985년 11월 2일, 6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지병으로 인해 몸무게가 29kg까지 줄어드는 극한적인 병고 속에서도, 숨을 거둘 때까지 만들던 책의 교정지를 손에 들고 있었다고 주변 사람들은 전한다. 김익달이 유작으로 남긴 출판물은 《21세기의 자연건강법》으로, 1442페이지나 되는 대작이었다. 김익달의 장례식이 있고 나서도 그의 빈소가 차려졌던 학원사에는 두 달여 동안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문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당시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각 언론의 반응도 대단했다. 김익달이 작고하고 난 3일 뒤인 11월 5일자 각 일간지의 1면 칼럼에는 대부분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이 동시에 실려 있었다.

"……학원장학회를 통해 4백 명에 가까운 인재와 오늘 내로라하는 명사들의 터를 잡아 주었다. 사장들이 도망가기에 바쁜 6.25 아침 사원들에게 쌀을 나누어주고, 초창기 《주부생활》주식의 3분의 2를 사환을 포함한 사원에게 나누어준 사람, 자기 밑에서 일하던 사람에게 인기 있는 책의 지형을 주거나, 아무 조건없이 집 한 채를 사주어 30여 명의 출판사 사장을 만든 사람, 김익달은 갔다. 병마에 시달리는 29kg의 체중에도 평생의 신조이던 보리 혼식 등의 경험을 살려 별세 사흘 전까지 유저로 남을 《자연건강법》교정을 끝낸 사람, 어떤 정치인 어떤 유명 관료보다도 우리는 이런 '문화의 지렛대'적 생애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 (《동아일보》1985. 11. 5.일자 '횡설수설'란)

돌이켜보면 김익달이 살아온 시대는 가장 격변이 많았던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를 헤쳐 나오면서도 그는 꿈을 잃지 않고 끝까지 간직했던 사람이었다. 고난과 불행, 원망과 미움, 시기와 질투가 가득 찼던 세상을 살면서 그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바른 길을 닦아 온 사람이다. '김익달'이란 이름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학원》이나, 《대백과사전》, 《주부생활》, 《여원》, 《농원》, 《진학》등을 아는 사람은 많다. 특히 이 시대의 기둥 계층으로 서 있는 기성 세대는 '학원 세대'라는 영원한 청춘의 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교과서적인 삶의 모형인 나라 사랑이라는 생각을 우리는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이렇듯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의 힘'이 우리 역사를 만들어 왔으며, 우리가 아직도 꿈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있다. 바로 지금 배움의 뜰에서 자라난 학원 세대가 이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