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 벤구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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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 벤구리온
דוד בן-גוריון
벤구리온(1949년)
벤구리온(1949년)
이스라엘제1대 총리
임기 1949년 3월 10일~1954년 1월 26일
대통령 하임 바이츠만
전임: -
후임: 모셰 샤레트(제2대)

이스라엘의 제3대 총리
임기 1955년 11월 2일~1962년 6월 21일
대통령 하임 바이츠만
전임: 모셰 샤레트(제2대)
후임: 레비 에슈콜(제4대)

신상정보
본명 דָּוִד בֶּן־גּוּרְיוֹן
로마자 표기 David Ben-Gurion
출생일 1886년 10월 16일
출생지 러시아 제국 프원스크
사망일 1973년 12월 1일(1973-12-01)(87세)
사망지 이스라엘 라마트간
국적 폴란드 입헌왕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이스라엘 이스라엘
정당 마파이, 라피
배우자 파울라 벤구리온
자녀 3

다비드 벤구리온(히브리어: דָּוִד בֶּן־גּוּרִיּוֹן, 히브리어 발음: [daˈvid ben ɡuʁˈjon] ( ), 폴란드어: Dawid Ben-Gurion, 영어: David Ben-Gurion, 1886년 10월 16일~1973년 12월 1일)은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를 지낸 정치인이다. 어릴 때부터 그는 열정적으로 시오니즘을 지지했으며 영국의 팔레스타인 통치가 만료한 후 이스라엘을 세우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1970년에 정계 은퇴를 선언한 뒤 그가 살던 키부츠로 돌아갔고 그 곳에서 죽었다. 1998년 5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에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명 중의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1]

성장 과정과 가족 관계[편집]

벤구리온은 그 당시 러시아 제국의 일부였던 폴란드프원스크에서 다비트 그륀(폴란드어: Dawid Grün)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아비그도르는 변호사이자 시온주의 단체에서 활동했으며 그의 어머니는 11세때 사망했다. 어린 나이 때부터 시온주의와 사회주의를 긍정적으로 지지했다. 17세 당시 노동 시온주의 단체였던 포알레이 시온에 가입했다. 동유럽에서 일어나던 포그롬반유대주의에 충격받아 1906년 아버지와 함께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애초에는 오렌지 과수원에서 노동자로 일했으나 기자가 되었다.

튀르키예 생활 당시 이스탄불 대학교에서 또다른 시온주의자였던 이츠하크 벤즈비와 법을 공부했을 당시 그의 이름을 히브리어 이름으로 개명했다. 그의 성은 히브리어로 "아기 사자"를 의미한다. 이 시기에 정치를 시작했다. 1915년 그의 정치 활동으로 팔레스타인에서 추방당한후 뉴욕에서 유대계 러시아인 파울라를 만났다. 이 둘은 1917년 결혼했고 세 아이를 가졌다. 1918년 영국 군대에서 싸웠고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왔다.

정치 경력[편집]

미드레셰트 벤구리온에 있는 벤구리온의 묘. 부인 관 옆에 안장되어 있다.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했을 때 벤구리온은 이스라엘이 "모든 시민을 위한 사회적과 정치적 평등을 보호"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벤구리온은 유대인들에게 영국 군대에 가담하라고 권했다. 동시에 영국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것을 금지하자 그는 불법으로 수천명의 유대계 유럽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올 수 있게 도와주었다. 노동당을 이끌었고 수정 시오니즘을 강하게 반대했다. 메나헴 베긴이 이끄는 지하 단체인 이르군에 가담하기도 했다. 팔레스타인을 통치하던 영국군의 망신을 목적으로한 다비드 왕 호텔을 폭파하려는 계획에 애초에 찬성했으나 인명위험이 너무 크다고 판단, 반대했으나 베긴은 취소하지 않았다.

1948년 6:4의 표로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하는 안을 통과시켰다. 이스라엘이 독립된 첫 주안에 영국에게 저항하던 지하 단체들을 모두 해산시키고 하나의 조직으로 통일했다. 제1차 중동 전쟁당시 이스라엘을 이끌었으며 이집트와 첫 휴전을 한 후 1949년 2월 25일 이스라엘의 첫 총리가 되었다. 그당시 거의 빈 지역이었던 네게브를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기를 원했다.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냉전당시 서독과 관계를 맺는 데 열중했다. 취임 당시 예멘에 있던 4만 5천 명의 유대인들을 비행기로 이스라엘로 이송한 마술융단 작전으로도 잘 알려져있다. 이송된 유대인들의 과반수는 아이들이었고 이 작전은 비밀리에 일어나, 끝난 지 몇 달 후에야 언론에게 알려졌다.[2] 1953년 그가 잠시 정치를 그만둔 사이 모셰 샤레트가 총리가 되었고 샤레트의 임기 뒤에 1955년 다시 이스라엘의 총리가 되었다. 1963년 레비 에슈콜이 그의 자리를 이어받았으나 정치적인 대립이 있었다. 라피라는 새로운 좌익 정당을 시작했고 크네셋에서 10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 정당은 이스라엘 노동당의 기원이 되었다. 1970년에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라마트간의 그가 살던 소박한 키부츠로 돌아갔으며, 그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이름을 딴 텔아비브벤구리온 국제공항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공항이자, 이스라엘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각주[편집]

  1. “리더와 혁명가들 - 다비드 벤구리온”. 2005년 11월 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6월 19일에 확인함. 
  2. Operation “Magic Carpet

참고 자료[편집]

외부 링크[편집]

전임
(초대)
제1대 이스라엘의 총리
1948년 5월 14일 ~ 1953년 12월 7일
후임
모셰 샤레트
전임
모셰 샤레트
제3대 이스라엘의 총리
1955년 11월 2일 ~ 1962년 6월 21일
후임
레비 에슈콜
전임
(초대)
제1대 국방부 장관
1948년 5월 14일 ~ 1954년 1월 26일
후임
핀하스 라본
전임
핀하스 라본
제3대 국방부 장관
1955년 2월 21일 ~ 1963년 6월 26일
후임
레비 에슈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