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독일 연방의회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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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1972년 서독 총선거

1969 ←
1972년 11월 19일
→ 1976

선출의석: 518
과반의석: 260
투표율 91.1%[1]
  제1당 제2당 제3당
  Bundesarchiv B 145 Bild-F057884-0009, Willy Brandt.jpg Bundesarchiv B 145 Bild-F027712-0016, Bonn, CDU Vorstandssitzung, Rainer Barzel.jpg Bundesarchiv Bild 146-1989-047-20, Walter Scheel.jpg
지도자 빌리 브란트 라이너 바르첼 발터 셸
정당 사회민주당 기민련/기사련 자유민주당
지도자 취임 1964년 1971년 1968년
지도자 선거구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비례)
파더보른-비덴브뤼크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비례)
이전선거 결과 237석 250석 31석
획득한 의석수 242석 234석 42석
의석 증감 증가 5석 감소 16석 증가 11석
득표수 17,175,169 16,806,020 3,129,982
득표율 45.8% 44.9% 8.4%
득표율 증감 증가 3.1% 감소 1.2% 증가 2.6%

West German Federal Election - Party list vote results by state - 1972.png

선거 결과

선거전 총리

빌리 브란트
사회민주당

총리 당선자

빌리 브란트
사회민주당

1972년 서독 총선거는 전체 496석의 서독 연방의회의 의원들과 서베를린에 할당된 22석의 의원들을 선출하기 위해 1972년 11월 19일서독 전역에서 실시되었다. 1949년 선거 이후 처음으로 의회 임기인 4년을 못채운 조기 총선이었던 가운데 총 37,761,589명의 유권자가 선거에 참여하여 투표율 91.1%를 기록하였다. 이 투표율은 지금까지 역대 독일 총선 투표율 중 가장 높은 수치이다.

선거 전 빌리 브란트는 전 자민당 대표 에리히 멘데 등 일부 의원들의 탈당과 기민련 입당으로 인해 불신임 결의를 받게 된다. 불신임에서 단 2표차로 부결됨으로써 브란트 내각은 붕괴를 면할 수 있었지만, 이로인한 정국 혼란으로 인해 브란트는 현 내각의 신임을 묻기 위해 전후 처음으로 의회를 해산하게 된다. 선거 기간 동안 브란트가 이끄는 사민당과 부총리 셸이 이끄는 자민당은 정국 혼란의 원인으로 불신임을 결의한 기민련의 책임을 추궁하는 동시에 동유럽에 대한 동방 정책에 대한 지지를 부탁한다. 반대로 기민련은 통과될 것으로 예상되었던 불신임이 부결된 후 책임 공방으로 인해 당내 분열 속에서 선거를 치뤄야 했다.

선거 결과, 사민당은 기민련/기사련보다 처음으로 득표율에서 앞서는 승리를 거두게 된다. 사민당은 연정 상대인 자민당의 의석수 증가로 기존 의석 점유율 51%에서 55%로 는 안정적 과반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사민당은 전통적인 기사련의 텃밭인 바이에른을 중심으로 한 독일 남부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기민련을 앞섰다. 이후 12월 15일에 브란트를 총리로 유임한 제2차 사회자유 내각이 발족하였다.

선거 과정[편집]

1969년에 연정에 합의한 사민당자유민주당사회자유 연정은 기존 외교 정책에서 벗어나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대결 국면을 완화하기 위해 동방 정책을 시행하고 동독폴란드, 소련에 대해 우호적 입장을 취하게 된다. 이러한 정책은 대내외적인 논란을 일으켰는데, 보수 진영의 기민련뿐만 아니라 당내 우파 세력으로부터도 비난을 받았다. 급기야 브란트의 외교 정책에 동의하지 못한 자민당 우파 세력은 공공연히 연정 탈퇴를 시사하였으며, 연정 내각은 진통이 거듭되었다. 또한 의석 점유율이 51%에 불과한 브란트 내각은 과반수 턱걸이에 대해 여러 문제를 겪었다.

결국 자민당 우파 세력인 전 대표 에리히 멘데와 일부 자민당 의원, 사민당 소속의 헤르베르트 후프카 등 일부 연정 의원들이 탈당한 후 기민련에 입당하게 된다. 연정 내각은 과반수를 잃지 않았지만 기민련은 자민당 내 의원들의 동조를 기대하면서 1972년 4월 27일에 브란트 내각의 불신임을 결의하고 기민련의 대표인 라이너 바르첼을 총리로 세우려고 하였다. 인론은 브란트 내각의 불신임을 기정사실화 하였으나 막상 투표 결과, 불신임안은 기민련 소속 2명 의원의 반란표로 인하여 부결된다. 1997년에 밝혀진 바로는 동독 정부의 슈타지가 기민련 의원들을 설득하여 몇 명의 의원들이 불신임안에 반대표를 던진 것으로 밝혀졌다.

이로서 내각은 유지되었지만 브란트 내각은 의회 과반수를 잃었음이 나타나면서 심각한 권력 공백 현상을 겪게 된다. 여기에 뮌헨 올림픽에서 발생한 참사로 인해 1973년에 치뤄질 총선에서 정권이 유지될 확률이 줄어들게 된다. 결국 9월 22일에 브란트는 자신에 대한 국민들의 신임을 묻겠다는 이유로 구스타프 하이네만 대통령에게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시행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따라서 전후 처음으로 조기에 의회가 해산된 후 11월 19일에 총선이 치뤄지게 되었다.

선거 기간 동안 라이너 바르첼이 이끄는 기민련은 지난 3년 동안의 브란트의 경제 정책과 외교 정책에 대한 반대로 선거전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불신임 결의안의 부결로 인하여 기민련은 당내 분열을 불러왔다. 한편 브란트는 1971년 수상한 노벨 평화상을 근거로 동방 정책의 효과를 선전하였다. 또한 사민당과 자민당은 브란트 개인의 인기를 이용하여 인물 대결로 선거 국면을 전환하였다. 한편으로 브란트는 선거 운동 동안 문인들의 지지를 얻어냈는데 대표적으로 《양철북》의 작가 귄터 그라스가 있다. 브란트를 지지한 문인들은 "빌리에게 한 표를!" (Willy wählen!)라는 선거 구호를 정한 후 직접 선거 운동을 전개하였다.

선거 결과[편집]

1972년 서독 총선거
투표율 : 91.1%
 %
50
40
30
20
10
0
45.8%
44.9%
8.4%
0.6%
0.4%
기타
득실표율
1969년 선거와 정당별 득실율 비교
  %
   4
   2
   0
  -2
  -4
+3.1%
-1.2%
+2.6%
-3.7%
-0.7%


기타
틀:선거도표/정비

선거 결과 투표율은 91.1%를 기록해 1949년 총선 이후 가장 높은 투표율을 기록하였다. 한편 선거권은 21세에서 18세로 내려졌다.

e • d  1972년 서독 총선거 (1972.11.19.)
정당 지역구 비례대표 의석
득표 % 의석 득표 % 의석
독일 사회민주당 (SPD) 18,228,239 48.9 152 17,175,169 45.8 90 242
독일 기독교민주연합 (CDU) 13,304,813 35.7 65 13,190,837 35.2 121 186
바이에른 기독교 사회연합 (CSU) 3,620,625 9.7 31 3,615,183 9.7 17 48
자유민주당 (FDP) 1,790,513 4.8 - 3,129,982 8.4 42 42
독일 국가민주당 (NPD) 194,389 0.5 - 207,465 0.6 - -
독일 공산당 (DKP) 146,258 0.4 - 113,891 0.3 - -
기타 정당 18,942 0.1 - 27,223 0.1 - -
전체 유효표 37,303,779 98.8 37,459,750 99.2 518
무효표 457,810 1.2 301,839 0.8
전체 37,761,589 91.1
총 유권자수 41,446,302

주별 선거 결과[편집]

비례대표 선거[편집]

사민당 % 우니온 % 자민당 % 기타 % 전체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2,069,169 38.9% 2,648,810 49.8% 544,832 10.2% 59,322 1.1% 5,322,133
바이에른 주 2,483,136 37.8% 3,615,183 55.1% 399,554 6.1% 65,917 1.0% 6,563,790
브레멘 주 284,028 58.1% 144,471 29.6% 54,428 11.1% 5,958 1.2% 488,885
함부르크 주 673,517 54.4% 411,974 33.3% 138,607 11.2% 12,967 1.0% 1,237,065
헤센 주 1,697,322 48.5% 1,409,771 40.3% 355,558 10.2% 36,185 1.0% 3,498,836
니더작센 주 2,235,911 48.1% 1,988,720 42.7% 393,282 8.5% 34,561 0.7% 4,652,474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5,509,886 50.4% 4,484,657 41.0% 856,963 7.8% 83,132 0.8% 10,934,638
라인란트팔츠 주 1,067,953 44.9% 1,090,339 45.9% 193,499 8.1% 26,070 1.1% 2,377,861
자를란트 주 349,801 47.8% 316,955 43.4% 51,762 7.1% 11,394 1.6% 729,912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 804,446 48.6% 695,140 42.0% 141,497 8.6% 13,073 0.8% 1,654,156
전체 17,175,169 45.8% 16,806,020 44.9% 3,129,982 8.4% 348,579 0.9% 37,459,750

주별 당선자 (괄호는 지역구 당선자)[편집]

SPD Union FDP 합 계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28 (12) 36 (24) 8 72
바이에른 주 33 (13) 48 (31) 5 86
브레멘 주 3 (0) 1 (0) - 4
함부르크 주 9 (8) 5 (0) 2 16
헤센 주 23 (20) 19 (2) 5 47
니더작센 주 30 (23) 27 (7) 5 62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75 (52) 61 (21) 12 148
라인란트팔츠 주 14 (9) 15 (7) 2 31
자를란트 주 4 (3) 4 (1) - 8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 11 (9) 9 (2) 2 22
서베를린 12 9 1 22
합계 242 (152) 234 (96) 42 518

선거 이후[편집]

사민당은 기민련/기사련의 의석보다 처음으로 더 많은 의석을 거둬 1930년 이후 최초로 제1당에 오르게 된다. 12월 14일에 연방의회는 사민당과 자민당의 연정이 이뤄진 가운데 빌리 브란트를 다시 총리로 뽑았다. 발터 셸은 부총리 겸 외무장관에 유임하였다. 사민당은 최초로 의회의장으로 자기 당 소속의 안네마리 렝거를 뽑게 되었다. 라이너 바르첼은 당내 분열과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1973년 5월 9일에 기민련 의장직에서 사퇴한다. 후임 자리는 라인란트팔츠 주 총리였던 헬무트 콜이 맡게 된다. 브란트는 1974년 5월 7일기욤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퇴한다. 후임으로 헬무트 슈미트가 총리직에 취임한다.

갤러리[편집]

참고 문헌[편집]

각주[편집]

  1. “Voter turnout by election year”. 《Website of the Federal Returning Officer's Office》. The Federal Returning Officer. 2014년 11월 7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