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립: 두 판 사이의 차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Gwpei (토론 | 기여)
루차돌이 (토론 | 기여)
잔글 왜군 -> 일본군 적 -> 일본군
16번째 줄: 16번째 줄:
|기타 이력=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됨.
|기타 이력=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됨.
|}}
|}}
'''신립'''(申砬, [[1546년]]~[[1592년]])은 [[조선]] 시대 장수로 [[임진왜란]] 첫해에 [[충주시|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펼치고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사람이다. 본관은 [[평산 신씨|평산]](平山)이며, 자는 입지(立之)라 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신립'''(申砬, [[1546년]]~[[1592년]])은 [[조선]] 시대 장수로 [[임진왜란]] 첫해에 [[충주시|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펼치고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사람이다. 본관은 [[평산 신씨|평산]](平山)이며, 자는 입지(立之)라 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 생애 ==
== 생애 ==
27번째 줄: 27번째 줄:
[[1590년]]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보직되고 이듬해 [[한성부 판윤]]을 거쳐,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 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로 임명되어 싸움터로 떠날 때, 선조(宣祖)가 검(劍)을 하사하면서 격려해 주었다. 특히 요청하여 김여물(金汝杖)을 데리고 가고, 도중에서 병정을 모집하여 [[충주시|충주]]에 도착하였다. 이때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상주에서 패하고 쫓겨 왔다. 신립은 그를 사형에 처하려 하였으나 재주를 애석히 여겨 선봉에 나서 싸워 속죄하도록 용서해 주었다.
[[1590년]]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보직되고 이듬해 [[한성부 판윤]]을 거쳐,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 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로 임명되어 싸움터로 떠날 때, 선조(宣祖)가 검(劍)을 하사하면서 격려해 주었다. 특히 요청하여 김여물(金汝杖)을 데리고 가고, 도중에서 병정을 모집하여 [[충주시|충주]]에 도착하였다. 이때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상주에서 패하고 쫓겨 왔다. 신립은 그를 사형에 처하려 하였으나 재주를 애석히 여겨 선봉에 나서 싸워 속죄하도록 용서해 주었다.


김여물은 [[조령]](鳥嶺)에 진지를 구축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신립은“적은 이미 고개 밑에 당도하였으니 고개에서 서로 부딪치게 되면 매우 위험하다. 더구나 우리 병정들은 아무 훈련도 받지 못한 장정들이니 사지(死地)에 갖다 놓기 전에는 용기를 내지 않을 것이다.”라며 마침내 [[탄금대]] 근처에 달천(達川)을 뒤에 두고 배수의 진(背水之陣)을 쳤다. 그러나 실상 신립은 기병전의 달인으로서 자신의 특기인 기병을 이용하여 왜구를 무찌름으로서 영원히 기병으로서의 자부심을 드높이기 위함이였다. 문제는 그 전투가 치뤄지던 1592년 4월 28일 당일 격전지인 충주의 날씨는 비가 왔다는 것인데 비는 기마전에 매우 불리한 조건이였다.
김여물은 [[조령]](鳥嶺)에 진지를 구축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신립은“적은 이미 고개 밑에 당도하였으니 고개에서 서로 부딪치게 되면 매우 위험하다. 더구나 우리 병정들은 아무 훈련도 받지 못한 장정들이니 사지(死地)에 갖다 놓기 전에는 용기를 내지 않을 것이다.”라며 마침내 [[탄금대]] 근처에 달천(達川)을 뒤에 두고 배수의 진(背水之陣)을 쳤다. 그러나 실상 신립은 기병전의 달인으로서 자신의 특기인 기병을 이용하여 일본군를 무찌름으로서 영원히 기병으로서의 자부심을 드높이기 위함이였다. 문제는 그 전투가 치뤄지던 1592년 4월 28일 당일 격전지인 충주의 날씨는 비가 왔다는 것인데 비는 기마전에 매우 불리한 조건이였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하는 적은 조령을 넘어 산과 들에 가득차고, 위풍이 대단하였다. 그는 휘하의 여러 부대를 지휘하여 나가 싸워서 몸소 두 번이나 적진(敵陣)을 돌파하려 하였으나 비가 와서 땅에 진흙이 많아 말(馬)이 움직이는 데 불편한 데다가 적이 강해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어 적은 우회작전(迂廻作戰)으로 그들의 우측에 진출하여 동서에서 압도적인 세력으로 협공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하는 적은 조령을 넘어 산과 들에 가득차고, 위풍이 대단하였다. 그는 휘하의 여러 부대를 지휘하여 나가 싸워서 몸소 두 번이나 적진(敵陣)을 돌파하려 하였으나 비가 와서 땅에 진흙이 많아 말(馬)이 움직이는 데 불편한 데다가 적이 강해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어 일본군은 우회작전(迂廻作戰)으로 그들의 우측에 진출하여 동서에서 압도적인 세력으로 협공하였다.


이에 그는 탄금대(彈琴臺)에 돌아가서 김여물더러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짓게 하여 이것을 부하에게 주어 조정에 달려가서 바치게 하고는 김여물과 함께 적진에 돌진해서 10여 명을 죽이고, 두 사람이 다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에 그는 탄금대(彈琴臺)에 돌아가서 김여물더러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짓게 하여 이것을 부하에게 주어 조정에 달려가서 바치게 하고는 김여물과 함께 적진에 돌진해서 10여 명을 죽이고, 두 사람이 다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2009년 9월 6일 (일) 18:45 판

신립
사망지 충주시 인근
지휘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평안도 병마절도사
삼도도순변사
주요 참전 임진왜란
기타 이력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됨.

신립(申砬, 1546년~1592년)은 조선 시대 장수로 임진왜란 첫해에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펼치고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사람이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자는 입지(立之)라 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생애

1567년(선조 1년) 22세로 무과에 급제했으며, 선전관을 거쳐 도총부도사(都摠莩事), 도총(都摠), 도사(都事), 경력(經歷)을 지내고 진주판관(晉州判官)에 임명되었다. 이때 진주 목사 양응정(梁應鼎)이 “자네는 큰 인물이니 공부를 해야 한다.”라고 하자 그는 이에 양응정을 스스로 모시고 그에게서 글을 배웠다.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쳐 1583년 은성부사(穩城府使)가 되었다. 이 무렵 여진족 니탕개(尼湯介)가 쳐들어와서 여러 고을을 뒤흔들었으나 장군들은 모두 싸움에 지고 말았다. 그가 몸소 나가서 그들을 도와 싸우니 그 위세에 적은 도처에서 패전하고 도망갔다. 그는 즉시 두만강을 건너 적의 소굴을 소탕하고 돌아왔다. 이 전승의 보고가 조정에 들어가 함경 북병사에 승진되었다. 얼마 후 니탕개를 죽이고 북병사로 오랫동안 근무하였다.

1587년 흥양(興陽)에 왜구가 침입하자 우방어사(右防禦使)가 되어 군사를 인솔하여 토벌에 나섰다가 이미 왜구가 철수했으므로 돌아오던 중 양가의 처녀를 첩으로 삼았다는 삼사(三司)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에 다시 등용되었으나, 졸병을 참살한 죄로 중추부동지사의 한직으로 전임되었다.

1590년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보직되고 이듬해 한성부 판윤을 거쳐,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 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로 임명되어 싸움터로 떠날 때, 선조(宣祖)가 검(劍)을 하사하면서 격려해 주었다. 특히 요청하여 김여물(金汝杖)을 데리고 가고, 도중에서 병정을 모집하여 충주에 도착하였다. 이때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상주에서 패하고 쫓겨 왔다. 신립은 그를 사형에 처하려 하였으나 재주를 애석히 여겨 선봉에 나서 싸워 속죄하도록 용서해 주었다.

김여물은 조령(鳥嶺)에 진지를 구축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신립은“적은 이미 고개 밑에 당도하였으니 고개에서 서로 부딪치게 되면 매우 위험하다. 더구나 우리 병정들은 아무 훈련도 받지 못한 장정들이니 사지(死地)에 갖다 놓기 전에는 용기를 내지 않을 것이다.”라며 마침내 탄금대 근처에 달천(達川)을 뒤에 두고 배수의 진(背水之陣)을 쳤다. 그러나 실상 신립은 기병전의 달인으로서 자신의 특기인 기병을 이용하여 일본군를 무찌름으로서 영원히 기병으로서의 자부심을 드높이기 위함이였다. 문제는 그 전투가 치뤄지던 1592년 4월 28일 당일 격전지인 충주의 날씨는 비가 왔다는 것인데 비는 기마전에 매우 불리한 조건이였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하는 적은 조령을 넘어 산과 들에 가득차고, 위풍이 대단하였다. 그는 휘하의 여러 부대를 지휘하여 나가 싸워서 몸소 두 번이나 적진(敵陣)을 돌파하려 하였으나 비가 와서 땅에 진흙이 많아 말(馬)이 움직이는 데 불편한 데다가 적이 강해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어 일본군은 우회작전(迂廻作戰)으로 그들의 우측에 진출하여 동서에서 압도적인 세력으로 협공하였다.

이에 그는 탄금대(彈琴臺)에 돌아가서 김여물더러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짓게 하여 이것을 부하에게 주어 조정에 달려가서 바치게 하고는 김여물과 함께 적진에 돌진해서 10여 명을 죽이고, 두 사람이 다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특징

신립은 조선 최고의 기병 권위자였으며 선조 임금은 이러한 신립을 크게 우대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상방검을 하사하면서 자신의 권한을 위임할 정도였다. 하지만 유성룡은 신립을 그다지 인정하지 않았다.

신립과 관련된 전설

  • 신립이 젊은 시절에 요괴로부터 젊은 처녀를 지켜내었다. 처녀는 신립이 거둬주기를 청했지만 신립이 이를 거절하고 이별했다. 그 직후 그 처녀는 자살했다. 이후 신립이 임진왜란이 터져 도순변사로 임명되어 일본군을 막기 위해 천연의 요새인 조령에서 싸우려 했지만 어느 날 그 처녀의 혼이 나타나 “탄금대에서 싸우세요.”라고 했다는 것이다. 신립은 이말을 듣고 탄금대에서 싸우지만 패배해 전사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 신립의 무덤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 근처를 통과하려는 행인들은 말을 타고 통과할 수가 없었다. 말을 타면 그자리에서 멈춰 버렸기 때문에 말에서 내려 지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어느 날, 이 상황에 화가 난 남자가 바위 앞에서 “패장이 어찌하여 행인을 괴롭히느냐?”라고 외쳤는데 갑자기 번개가 바위에 맞아 갈라져서 이후로는 그러한 일이 없어졌다는 설이 전해진다.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