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진 즙씨: 두 판 사이의 차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Surname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Surname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7번째 줄: 7번째 줄:
| 인물 =
| 인물 =
| 년도 = 2000
| 년도 = 2000
| 인구 = 86명 (성진 즙씨 82명, 성진 십씨 4명)
| 인구 = 86명 (성진 십씨 82명, 성진 즙씨 4명)
| 순위 =
| 순위 =
| 비고 =
| 비고 =
}}
}}
'''성진 즙씨'''(城津 汁氏) 또는 '''성진 십씨'''(城津 辻氏)는 [[함경북도]] [[성진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즙간부'''는 한국인 어머니와 [[일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10대 때인 1954년 어머니를 따라 [[대한민국]]으로 귀화하면서 성진 즙씨의 시조가 되었고, 어머니의 고향인 [[함경북도]] [[성진시|성진]]을 본관으로 등록했다.<REF>[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0854734 '즙씨·어금씨'…어머! 우리나라에 이런 성이 있었네], SBS 뉴스, 2011년 2월 4일</REF>
'''성진 즙씨'''(城津 汁氏) 또는 '''성진 십씨'''(城津 辻氏)는 [[함경북도]] [[성진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즙간부'''는 일제강점기에 철도 공무원으로 [[조선]]에 파견 온 일본인 쓰지 씨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0대 때인 1954년 어머니를 따라 [[대한민국]]으로 귀화하면서 성진 즙씨의 시조가 되었고, 어머니의 고향인 [[함경북도]] [[성진시|성진]]을 본관으로 등록했다.<REF>[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0854734 '즙씨·어금씨'…어머! 우리나라에 이런 성이 있었네], SBS 뉴스, 2011년 2월 4일</REF>


== 시조 ==
== 시조 ==
일제강점기에 철도 공무원으로 [[조선]]에 파견 온 일본인 쓰지 씨와 한국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시조 '''즙간부'''가 어머니 고향인 [[함경북도]] [[성진시|성진]]을 본관으로 즙(汁)씨를 호적에 등록하였다. 즙은 본래 [[일본]] 한자로 한국어 발음은 십(辻)이지만 호적에 올릴 당시 辻의 한국어 음이 없어 즙(汁)의 음을 빌렸다고 한다.<REF>김진우 (한국성씨연구소장), [http://djjunggu.go.kr/html/hyo/museum/museum_040401_2.html?mng_no=923 한국족보박물관 - 성진 즙씨]</REF>
일제강점기에 철도 공무원으로 [[조선]]에 파견 온 일본인 쓰지 씨와 한국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시조 '''즙간부'''가 어머니 고향인 [[함경북도]] [[성진시|성진]]을 본관으로 즙(汁)씨를 호적에 등록하였다. 즙(辻)은 본래 [[일본]] 한자로 한국어 발음은 십(辻)이지만 호적에 올릴 당시 辻의 한국어 음이 없어 즙(汁)의 음을 빌렸다고 한다.<REF>김진우 (한국성씨연구소장), [http://djjunggu.go.kr/html/hyo/museum/museum_040401_2.html?mng_no=923 한국족보박물관 - 성진 즙씨]</REF>


== 본관 ==
== 본관 ==
26번째 줄: 26번째 줄:


== 인구 ==
== 인구 ==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즙(汁)씨는 4명, 십(辻)씨는 82명으로 조사되었다. 즙간부와 그의 딸 2명, 아들 1명도 즙씨라고 한다. 즙씨와 십씨의 본관은 [[성진시|성진]] 단본이다.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즙(汁)씨는 4명, 십(辻)씨는 82명으로 조사되었다. 즙간부와 그의 딸 2명, 아들 1명도 즙씨라고 한다. 즙씨와 십(辻)씨의 본관은 [[성진시|성진]] 단본이다.


==주석==
==주석==

2014년 11월 27일 (목) 22:40 판

성진 즙씨 (城津 汁氏)
성진 십씨 (城津 辻氏)
관향함경북도 성진시
시조즙간부
인구(2000년)86명 (성진 십씨 82명, 성진 즙씨 4명)

성진 즙씨(城津 汁氏) 또는 성진 십씨(城津 辻氏)는 함경북도 성진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즙간부는 일제강점기에 철도 공무원으로 조선에 파견 온 일본인 쓰지 씨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0대 때인 1954년 어머니를 따라 대한민국으로 귀화하면서 성진 즙씨의 시조가 되었고, 어머니의 고향인 함경북도 성진을 본관으로 등록했다.[1]

시조

일제강점기에 철도 공무원으로 조선에 파견 온 일본인 쓰지 씨와 한국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시조 즙간부가 어머니 고향인 함경북도 성진을 본관으로 즙(汁)씨를 호적에 등록하였다. 즙(辻)은 본래 일본 한자로 한국어 발음은 십(辻)이지만 호적에 올릴 당시 辻의 한국어 음이 없어 즙(汁)의 음을 빌렸다고 한다.[2]

본관

성진(城津)은 함경북도 동해안에 있는 시이다. 고대 숙신(肅愼)·읍루(읍婁)·예맥(濊貊)·옥저(沃沮)·말갈(靺鞨)·부여(夫餘) 등 여러 종족이 활동하는 영역이었으며, 고구려가 강성해지면서는 이들을 완전히 통합하면서 영토화하였을 것이다. 고구려668년(보장왕 27)에 멸망한 이후에는 한때 당(唐)나라의 지배에 들어갔으나 얼마 뒤 고구려 유민을 중심으로 발해가 건국되면서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관할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의 영토는 황해도 북계에서 동해의 원산만에 이르는 선의 이남 지역이었으므로, 성진은 고려 건국 초기에는 고려 세력권의 바깥에 위치하고 있었다. 발해거란(契丹)에 의하여 멸망한 뒤에는 거란의 영역이 되었다. 발해가 멸망할 때 이탈한 일부 말갈족 집단인 여진(女眞)이 강성해져서 거란을 멸망시키고 금(金)을 건국하자 그 영토가 되었다. 다시 몽고족에 의하여 원(元)나라가 건국되자 역시 그 관할하에 있게 되었다. 한편 금나라가 멸망한 뒤 여진족은 두만강 유역으로부터 점차 함경도 지방으로 이동하여 고려의 국경 부근에서 자주 충돌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고려 말엽 원나라가 쇠퇴하고 1368년 명(明)나라가 건국되면서, 고려의 북진정책이 실효를 거두어 여진을 몰아내니 그 세력 범위는 두만강 하구에 이르렀다. 과거 여진의 소파온성(所坡溫城)이 있던 이 고장은 동북면(東北面)의 길주(吉州)에 속하여 있었다.

1398년(태조 7) 정도전(鄭道傳)으로 하여금 북도의 행정구역을 분정하게 할 때 이곳은 길주목 성진첨사(城津僉使) 관하의 성진진(城津鎭)이었다.

1614년(광해군 6) 소파온고성 자리에 석성을 쌓고 첨사(僉使)를 두었다가 1701년(숙종 27)에 방어영(防禦營)을 설치하였다. 1749년(영조 25)에 첨사로 하여금 방수장(防守將)을 겸직하게 하였다가 1895년에 폐지되었다. 1898년에는 길주군 성진첨사 관하의 성진진과 동해면 일부 및 함경남도 단천군 이하면 좌측을 합한 지역을 분할하여 함경북도 성진군으로 독립되었다. 다음해 마산·군산과 더불어 개항장(開港場)이 됨에 따라 외국인 거류 구역이 설정되면서 일개 어촌이 차츰 항구도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배후지의 지하자원과 임산 개발에 의한 광석과 목재의 집산항으로 발전함과 동시에 고주파 제강 공장 및 마그네사이트·내화연와 공장(耐火煉瓦工場) 등이 잇따라 건설됨에 따라 공업 도시로서도 크게 번창하여 1943년에는 함경북도 성진시(城津市)로 승격되었다. 광복 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점령하였으며, 1951년 2월 성진시(城津市)가 함경북도 김책시(金策市)로 개칭되었다.

인구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즙(汁)씨는 4명, 십(辻)씨는 82명으로 조사되었다. 즙간부와 그의 딸 2명, 아들 1명도 즙씨라고 한다. 즙씨와 십(辻)씨의 본관은 성진 단본이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