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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르트헤이트"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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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partheidSignEnglishAfrikaans.jpg|thumb|300px|백인전용을 알리는 아파르트헤이트 표지판]]
 
== 아파르트헤이트의 성립 ==
=== 인종분리와 아파르트헤이트 성립이전의 식민주의 ===
아파르트헤이트란 단어는 [[1917년]] [[보어족|보어인]] 얀 크리스티앙 스뮈츠(2년후에2년 후에 총리가 됨)의 연설에서 처음 등장한다. 비록 아파르트헤이트가 보어인이 주축이 된 정부가 주도했지만, 그 뼈대는 영국 식민지주의가 케이프 식민지와 나탈 등지에 도입한 통행법(pass law)의 유산이라는 사실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법률은 영국 당국 통제 하에 있는 백인과 유색인종의 거주구역으로 흑인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통제, 차단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 칼레도니아에도 비슷한 법률이 있었다.
 
법률은 흑인들의 백인구역 출입을 제한했을 뿐 아니라, 한 구역에서 다른 구역으로 이동하는 데도 인증된 통행증이 없으면 이동하지 못하도록 했다. 흑인들은 [[케이프 식민지]]나 [[나탈]]에서 일몰이후 거리에 있는 것이 불허되었으며, 따라서 한꺼번에 그들의 장소를 옮겨야 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비폭력투쟁으로 유명한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영국령 인도]]의 젊은 [[변호사]]였던 그가 남아공에서 동족들의 법률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1년간 머물렀을 때, 그는 [[변호사]] 신분임이었음에도 [[유색인]]이라는 이유로 온갖 수모를 당했다. [[재판정]]에서는 [[터번]]을 벗으라는 [[행정장관]]의 명령을 거부하여 법정에서 쫓겨났고, [[기차]]에서는 1등석 표를 샀음에도 3등석으로 옮겨앉으라는 백인의 말을 거부하여 기차에서 내던져졌으며, [[마차]]에서는 백인승객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내려서 걸으라는 명령을 거부해 구타당했다. 이러한 폭력은 일상적인 것이었으며, 간디는 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비폭력주의]]를 남아공에서 처음 전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