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치바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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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치바
코리치바 FC.png
전체 이름 Coritiba Foot Ball Club
별칭 Coxa Branca (하얀 허벅지)
설립 연도 1909년, 10월 12일
경기장 브라질, 쿠리치바, 쿠투 페헤이라
수용 인원 45,563
회장 브라질 사미르나무르
감독 브라질 산드루 포르네르
리그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이 A
캄페오나투 파라나엔시
2017
2017
세리이 A, 17위
3위
웹사이트 공식 홈페이지
어웨이
서드

코리치바 푸트볼 클루브(Coritiba Foot Ball Club)는 대개 코리치바라고 알려져 있는 브라질의 축구 클럽으로, 파라나 주쿠리치바를 연고로 한다. 1909년 10월 12일 독일계 지역 사회의 젊은이들에 의해 창단하였으며, 이는 파라나 주에서 가장 오래된 클럽이기도 하다. 2011년 2월부터 5월까지 브라질 모든 대회를 통틀어 24연승을 기록하며, 세계 신기록을 달성한 바 있다.[1] 1973년에는 토르네이우 두 포부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브라질 전국구 대회에서 우승한 최초의 브라질 남부 축구팀으로 기록되었으며,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코파 수다메리카나 등 남미 주요 대회에 참가한 최초의 브라질 남부 축구팀으로도 기록되었다. 또한 1985년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이 A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파라나 주 최초의 전국 리그 우승팀이 되기도 하였다. 1971년부터 1976년까지 6년 연속 주리그 타이틀을 거머쥐며, 파라나 주 유일한 6연패 팀으로 남아있다. 코리치바 FC는 이 대회에서 가장 자주 출전한 팀이기도 하다. 2018년 현재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이 B와 파라나의 주 리그 캄페오나투 파라나엔시에 참가하고 있다.

코리치바는 아틀레치쿠 파라나엔시, 파라나 클루비과 큰 라이벌 관계를 이루고 있다. 파라나 주의 라이벌인 아틀레치쿠 파라나엔시와의 더비 경기는 아틀레치바(Atletiba), 파라나와의 더비 경기는 파라치바(Paratiba)로 불린다.

2013년 기준으로 코리치바는 세계 각지에 축구팀들과 파트너십을 맺고 있으며, 이는 유소년 선수들 간의 임대 및 이적 계약을 위한 것이다. 포르투갈FC 포르투, SL 벤피카멕시코치바스 과달라하라, 네덜란드VVV 펜로 그리고 대한민국대구 FC와 이 계약을 맺고 있다.

역사[편집]

초창기 : 1900년대[편집]

클럽의 구성[편집]

코리치바의 창립자 프리츠 에센펠더

1909년 독일계 브라질인들의 체육 클럽 클루비 지나스치쿠 테우투-브라질레이루 턴퍼레인(Clube Ginástico Teuto-Brasileiro Turnverein)에는 젊은 청년들이 모여 여러 종류의 스포츠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클럽의 주요 회원이었던 프레데리쿠 "프리츠" 에센펠더가 한 가죽공을 들고 클럽에 나타났다. 그는 그 공을 들고 그의 친구들에게 축구라는 새로운 스포츠를 전파하였다. 에센펠더와 그의 친구들은 공권 본부(포르투갈어: Quartel da Força Pública)의 운동장에서 축구를 시작하였다.[2] 이 후 폰타 그로사 철도회사의 영국계 노동자들의 축구팀의 초청을 받아 경기를 뛰기도 하였다.

1909년 10월 12일 프리츠 에센펠더는 하우어 극장(Theatro Hauer)에서 미팅을 소집하여 팀의 첫 축구 경기를 주선하였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축구단의 창설이 이루어졌으며, 구단명칭은 테우투-브라질레이루(포르투갈어: Teuto-Brasileiro)였다. 테우투(Teuto)는 독일인을 지칭하는 또다른 말 테우탕(teutão, 튜턴족)에서 따온 말이며, 구단 명은 직역하자면 독일계 브라질인이었다. 이 클럽은 파라나 주의 최초의 축구팀이었다.

최초의 경기[편집]

코리치바의 첫 경기

1909년 10월 23일 폰타 그로사에서 구단의 역사적인 첫 경기가 개최되었다. 상대는 클루비 지 풋볼 지 치루 폰타그로센시(포르투갈어: Clube de Foot Ball de Tiro Pontagrossense)로, 브라질의 엔지니어링 회사의 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경기는 치루 폰타그로센시가 1-0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창단[편집]

하우어 극장

폰타 그로사에서의 첫 경기 이후, 축구단의 창립 멤버들은 새로운 경기로 인해 들떠있었다. 이 후 그들의 클럽을 축구 전문 클럽으로 육성하는 것으로 새로운 방향을 설립하였다. 또한 클루비 지나스치쿠 테우투-브라질레이루 턴퍼레인은 오직 독일계 회원만 가입을 승인시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테우투-브라질레이루 축구팀은 독일계 이외의 선수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축구단의 독립은 빠르게 논의가 진행되었고, 1909년 하우어 극장에서 기나긴 토론을 벌였다. 1910년 1월 30일 독립 축구단 코리치바누 FC가 창단되었으며, 구단 명칭은 그들이 첫 축구 경기를 치렀던 폰타 그로사의 도시명 쿠리치바에서 따왔다.

1910년 4월 21일 창단 이후 첫 미팅이 소집되었으며, 리우데자네이루상파울루의 축구단들로부터 스포츠 규칙에 대해 주로 습득하였다. 이 미팅 동안 구단의 첫 보드진이 구성되었으며, 주앙 비아나 세일러가 초대 회장으로, 아르투르 하우어가 부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조제 줄리우 프랑쿠와 레오포우두 오블라덴이 각각 제1 및 제2 비서로 선임되었으며, 와우테르 디트리히와 아우빙 하우어 각각 제1 및 제2 회계인사로 선임되었다. 프리츠 에센펠더는 구단 최초의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이 미팅이 진행되는 동안, 구단명 교체 또한 논의되었다. 그 이유는 같은 도시 내에 코리치바누라는 이름을 가진 사교 클럽이 존재하여, 혼동을 피하기 위함이었고, 구단명은 코리치바 FC로 변경되었다.

파라나의 사자 : 1910년대 ~ 1920년대[편집]

초대 회장 : 주앙 비아나 세일러

구단의 첫 홈 경기장으로 구아비로투바 경마 경기장(포르투갈어: Hipódromo do Guabirotuba)이 채택되었다. 이 후 관중들을 효과적으로 모으기 위해 관중석이 개선되었으며, 프라두 지 구아비로투바(포르투갈어: Prado de Guabirotuba)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10년 6월 12일 구단의 역사적인 첫 공식 경기가 펼쳐졌으며, 상대는 이전에도 대결한 바 있던 클루비 지 풋볼 지 치루 폰타그로센시로, 구단 명칭이 폰타그로사 FC로 변경되어 재회하였다. 정식 축구단으로 창단 이후 치러진 대결에서는 코리치바의 5-3 승리로 끝이 났다.

1915년 코리치바는 쿠리치바 시의 축구 대회인 캄페오나투 다 시다지(포르투갈어: Campeonato da Cidade)에 참가하였으며, 같은 해 파라나 주 리그인 (포르투갈어: Campeonato Paranaense)에도 참가하였다. 해당 시즌 코리치바는 두 대회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하였다. 1916년 캄페오나투 파라나엔시에서 스파르타누를 상대로 7골을 퍼부으며 승리를 따냈다. 그 해의 코리치바의 스타 선수인 마샴봄바가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기도 하였다. 1917년 구단의 새로운 홈 경기장 파르키 다 그라시오사(포르투갈어: Parque da Graciosa)가 개장하였다.

1921년 8월 15일 브라질 대표팀의 주축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던 상파울루주의 축구팀, 셀레상 파울리스타를 1-0으로 꺾었다. 이 경기 이후 브라질 축구계에 파라나 주의 대표적인 축구팀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924년 6월 8일 코리치바가 아틀레치쿠 파라나엔시를 만나 6-3 대승을 거두었고, 1926년 11월 7일에는 13-1이라는 스코어로 아틀레치쿠 파라나엔시를 대파하였다. 이는 파라나 주 역사상 가장 큰 점수차로 승리한 경기로 남아있다. 이 경기들로 인해 코리치바와 아틀레치쿠 파라나엔시의 라이벌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캄피오니시무 : 1930년대 ~ 1940년대[편집]

1930년 11월 23일 코리치바는 토르네이우 이니시우에서 재회한 아틀레치쿠 파라나엔시를 7-4로 대파하고 우승을 차지하였다. 같은 해 캄페오나투 파라나엔시와 캄페오나투 다 시다지에서도 우승을 차지하였다.

1930년대에는 인종 차별 문제가 브라질 전역에서 들끓던 때이다. 이 시기에 브라질 축구단들은 흑인물라토 등 유색 인종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쿠리치바 지역은 주로 독일계, 폴란드계, 우크라이나계 이민자들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고, 애초에 유색 인종의 숫자가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모아시르 곤사우비스가 선수 겸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구단 최초의 유색 인종 선수로 등록되었다.

1932년 11월 19일 벨포트 두아르치가 개장하였다. 이 경기장에서의 첫 경기는 캄페오나투 카리오카의 챔피언 아메리카-RJ였으며, 코리치바가 4-2로 승리를 거두었다. 1941년 1월 23일 구단은 역사상 최초로 외국 구단과 경기를 가졌으며, 상대는 아르헨티나힘나시아 라플라타였다. 1947년 파라나 주가 주관하는 모든 대회(유소년, 청소년, 아마추어, 프로)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캄페오니시무(포르투갈어: Campeoníssimo, 슈퍼 챔피언)이라는 별칭을 부여받았다.

황금기와 유럽 투어 : 1950년대 ~ 1970년대[편집]

1950년대의 코리치바는 성공적인 행보를 지속적으로 쌓고 있던 팀이었다. 1951년, 1952년, 1954년, 1956년, 1957년, 1959년 총 여섯 차례 동안 캄페오나투 파라나엔시의 챔피언에 올라섰다. 1960년 캄페오나투 파라나엔시에서 또 다시 우승을 차지하다. 같은 해 코파 두 브라지우에서 결승전까지 올라 그레미우와 맞대결을 펼쳤으나, 경기는 무승부로 종료되었다. 승자를 가리지 못한 양 팀은 동전 뒤집기로 승자를 결정했으며, 동전의 운명에 의해 코리치바가 패배한 것으로 처리되었다.

1960년대 코리치바는 해외 팀들과 홈에서 맞대결을 펼쳤으며, 8월 6일 스페인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상대로 3-2 승리, 12월 12일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1-0 승리를 거두었다. 1968년에는 이탈리아SSC 나폴리와 맞붙었다. 같은 해 8년 간의 트로피 공백을 깨고 캄페오나투 파라나엔시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1969년에는 구단 역사상 첫 해외 투어를 나서게 되었고, 참가 대회는 스페인에서 열린 III 토르네오 시우다드 데 무르시아였다. 또한 프랑스에서 열린 쿠프 드 피에르 콜롱에도 참여하였으며, 상대팀은 스페인발렌시아 CF, 독일보루시아 도르트문트, 프랑스FC 지롱댕 드 보르도, 네덜란드페예노르트, 오스트리아FK 아우스트리아 빈, 불가리아PFC 레프스키 소피아, 벨기에RSC 안데르레흐트였다. 코리치바는 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 벨포트 두아르치의 확장 공사를 위한 예산 확보를 목적으로, 에반젤리누 회장은 스타 선수들을 영입하여 팬들을 모으는 전략을 펼쳤다. 이 시기에 구단은 유럽 투어를 다시 한차례 떠났으며, 프랑스, 유고슬라비아, 알제리, 루마니아, 포르투갈의 축구팀들과 대결을 펼쳤다.

1971년은 코리치바의 황금기가 시작된 시점으로, 6년 연속 캄페오나투 파라나엔시 우승을 차지한 시발점이기도 했다. 1972년 구단은 세번째 유럽 투어를 떠났으며, 터키에서 열리는 토너먼트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 대회에서 터키 축구 국가대표팀모로코 축구 국가대표팀 그리고 페네르바흐체 SK와 맞붙었으며, 무패로 우승을 차지하고 귀국하였다. 같은 해 홈 경기장에서 포르투갈SL 벤피카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 콩고 축구 국가대표팀과 친선 경기를 가지기도 했다. 1973년 6월 18일에는 파라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을 홈에서 만나 대결을 펼쳤으며, 1-0 승리로 경기가 종료되었다.

1977년 벨포트 두아르치 경기장의 명칭이 마조르 안토니우 쿠투 페헤이라로 교체되었다. 1979년 캄페오나투 파라나엔시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1970년대 안에서만 여덟번째 트로피를 들어올렸고, 같은해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이 A에서는 3위를 기록하였다.

위기의 봉착 : 1980년대 ~ 1990년대[편집]

네이 프랑쿠 감독

1980년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이 A에서 제스포르치바페호비아리우 AC를 모두 7-1로 꺾고 최종 4위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재정적인 위기를 맞이한 코리치바는 1985년까지 아무런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하였다.

1985년 에니우 안드라지의 지도 하에,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이 A 타이틀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였다. 상대는 방구 AC로, CR 바스쿠 다 가마, CR 플라멩구, 플루미넨시 FC, 보타포구 FR의 서포터들이 방구를 응원하기 위해 마라카낭 경기장에 들어섰고, 9만 1천명의 관중들이 운집하여 방구를 응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불리한 여건을 이겨내고 코리치바가 최종 우승을 차지하였다. 1986년 코리치바는 파라나 주 축구팀 최초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참가하였으며, 조별 예선에서 2위로 탈락하였다. 1989년에는 캄페오나투 파라나엔시에서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같은 해 6월 18일 쿠투 페헤이라에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1-0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1980년대의 영광스러운 나날들을 뒤로 한채, 코리치바 FC는 1990년대를 재정적 위기와 함께 시작하였다. 하지만 코리치바는 1991년 코파 두 브라지우 4강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반면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이 B에서 2년간 머물렀던 코리치바는 1992년에 승격에 성공하였으나, 곧바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1995년 캄페오나투 파라나엔시에서 라이벌 파라나 클루비와 결승전에서 격돌하였으나, 패배하고 준우승에 머물렀다. 1996년에는 결승전에조차 도달하지 못하였다. 1999년이 되어서야 9년의 공백을 깨고 캄페오나투 파라나엔시 트로피를 들어올릴 수 있었다.

쉽지않은 부활 : 2000년대 ~ 현재[편집]

2001년 코리치바 FC는 코파 술미나스, 코파 두 브라지우, 캄페오나투 파라나엔시에서 모두 4강전에 진출하여 탈락하였다. 2003년 캄페오나투 파라나엔시에서 무패 우승을 달성하였고,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이 A에서 5위를 차지하며,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그러나 2004년에 주리그에서 다시 우승하였지만, 2005년 전국 리그에서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두고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이 B로 재차 강등되었다. 2007년 11월 3일 4경기를 남겨 둔 채 승격을 확정지었으며, 해당 시즌 세리이 B 타이틀까지 거머쥐었다. 하지만 2009 시즌을 버티지 못하고 세리이 B로 다시 강등되었으며, 2010 시즌에 세리이 B에서 다시 승격하는 한편, 그 다음 시즌에 바로 강등을 당하여 세리이 A와 세리이 B를 왔다 갔다 하는 클럽이 되었다.

수상[편집]

전국[편집]

주 (州)[편집]

  • 캄페오나투 파라나엔시
    • 우승 (38회) : 1916, 1927, 1931, 1933, 1935, 1939, 1941, 1942, 1946, 1947, 1951, 1952, 1954, 1956, 1957, 1959, 1960, 1968, 1969, 1971, 1972, 1973, 1974, 1975, 1976, 1978, 1979, 1986, 1989, 1999, 2003, 2004, 2008, 2010, 2011, 2012, 2013, 2017
  • 타사 시다지 지 쿠리치바
    • 우승 (2회) : 1976, 1978

각주[편집]

  1. “BBC Sport – Almería 1–4 Real Madrid”. 《bbc.co.uk》. BBC. 2014년 12월 13일에 확인함. 
  2. “Fritz did for Paraná what Charles Miller did for Brazil – he introduced the ball and the exciting game”. 《gazetadopovo.com.br》. 2014년 12월 27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