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원 (187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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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원
趙仁元
대한민국 임정 내무부
대한독립단 충청도 지단 서무국장
임기 1919년 5월 2일 ~ 1920년 5월 13일
대통령 이승만 임정 대통령
이동녕 임정 대통령 권한대행
안창호 임정 대통령 권한대행
이승만 임정 대통령
총리 이승만 임정 국무총리
이동녕 임정 임시 총리 권한대행
이동녕 임정 임시 총리 서리
이동녕 임정 국무총리
안창호 임정 임시 총리 권한대행
이동휘 임정 국무총리
장관 안창호 임정 내무총장
이동녕 임정 내무총장 직무대리
이동녕 임정 내무총장
이동녕 임정 내무부장
차관 신익희 임정 내무차장
현순 임정 내무차장
이규채 임정 내무차장

대한민국 임정 군무부
대한독립단 충청도 지단 서무국장
임기 1920년 5월 14일 ~ 1921년 8월 18일
대통령 이승만 임정 대통령
총리 이동휘 임정 국무총리
이동녕 임정 임시 총리 서리
이동녕 임정 총리 권한대행
신규식 임정 임시 총리 권한대행
노백린 임정 국무총리
장관 김희선 임정 군무총장 직무대행 서리
김희선 임정 군무총장 직무대리
이동휘 임정 군무총장
김희선 임정 군무총장 직무대행 서리
이동휘 임정 군무총장 직무대리
김희선 임정 군무총장 직무대리
이동휘 임정 군무부장
김희선 임정 군무총장 직무대리
노백린 임정 군무부장
윤기섭 임정 군무부장 직무대리
노백린 임정 군무부장
차관 김희선 임정 군무차장 직무대리
김희선 임정 군무차장 임시 서리
김희선 임정 군무차장
김희선 임정 군무부 차장
윤기섭 임정 군무부 차장

신상정보
출생일 1875년 4월 19일(1875-04-19)
출생지 조선 충청도 예산 봉산면 시동리
거주지 대한제국 충청남도 예산 봉산면 시동리
사망일 1950년 12월 21일(1950-12-21)(75세)
사망지 대한민국 충청남도 예산 삽교면 삽교리
경력 백파정 총재(白坡亭 總裁)
정당 무소속
부모 조종호(부), 분성 배씨 부인(모)
형제자매 형 1명, 누이동생 1명, 남동생 1명
배우자 동래 정씨 부인
자녀 2남 2녀
친인척
조병희(배다른 조카)
  • 조병희(배다른 조카)
    조현익(친조부)
    봉화 정씨 부인(친조모)
    전주 이씨 부인(계조모)
    조창진(증조부)
    전의 이씨 부인(증조모)
    조정주(고조부)
    조엽(열조부)
    조종옥(동복 친백부)
    조종식(동복 친숙부)
    조종순(이복 숙부)
웹사이트 [1] - 유공 공적조서
상훈 1977년 건국포장 추서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조인원(趙仁元, 1875년 4월 19일(1875-04-19) ~ 1950년 12월 21일(1950-12-21))은 대한제국 민본주의(民本主義) 성향 독립 운동가 겸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대 정치인이었다.

생애[편집]

일생[편집]

충청도 예산 봉산면 시동리(忠淸道 禮山 鳳山面 侍洞里)의 부농가(富農家)에서 출생하였으며 아명(兒名)은 조형기(趙衡機)이고 1878년(4세 시절)에 이름조인원(趙寅元)으로 개명(改名)을 하였으며 1880년(6세 시절)에 이름조인원(趙仁元)으로 마지막 재차 개명(改名)을 한 그의 (號)는 야운(冶雲)·시동(侍洞)·봉산(鳳山)이고 1896년 당시(22세 때)부터 충청도 예산 지역에 소재한 서당(書堂)의 예하 훈장(訓長)을 지냈으며 그의 아버지 조종호(趙鍾灝)는 1907년 당시부터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적극 참여하여 대한제국 국채 보상 운동 본부 충청남도 지부 덕산지소장(德山支所長)으로 활약하였는데, 그는 일찍이 아버지의 그러한 영향을 받아 서당 예하 훈장 5년차 시절이던 1901년 당시(27세 시절)에 서당 예하 훈장을 차라리 그만둔 이후 대한제국 국권 회복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1919년 5월 2일 당시에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 예하 파견원 직책인 이영식(李英植)과 연결되어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의 충청도 지단(支團)을 조직하는 것에 참가하고 지단 총수 직책에 서병익(徐丙益), 지단 예하 부총수 김석주(金錫周), 그리고 그는 서무국장 직책으로 임직하여 각종 독립 운동 관계 문건을 배포하는 것에 주력하였다.

그 후 1920년 5월 1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예하 직책으로 이직되었으며 1920년 12월 20일 이후부터 "대한인(大韓人)은 차라리 납세(納稅)를 하지 말라"는 내용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예하 군정서(軍政署)의 명의로 된 선전문(宣傳文)과 선언문(宣言文)을 충청남도 예산 삽교면 삽교리(揷橋面 揷橋里)에 소재한 간이역 게시판과 충청남도 아산 송악면 역촌리(松岳面 驛村里)에 소재한 간이역 게시판에 각기각기로 부착(배포)을 하는 등의 나름 상당히도 안정성 있는 활성적인 실무 활약을 하다가 결국 이듬해(8개월 후)인 1921년 8월 18일, 왜경(일경)에 체포되었다.

그는 결국 1921년 9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실형(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경상북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4년차 복역 중 1925년 4월 17일(금요일), 특별사면(特別赦免)으로써 석방되어 경상북도 봉화 명호면(삼동리)에 기거하였다.

1943년 경상북도 봉화 명호면(삼동리)에서 백파정(白坡亭)을 창건(創建)하며 백파정 총재로 기거하다가 1945년 8월 15일, 경상북도 봉화 명호면(삼동리)에서 8·15(광복)를 목도하였으며 1949년 4월 14일, 충청남도 예산 삽교면(삽교리)으로 귀거하였고 1950년 12월 21일, 충청남도 예산 삽교면(삽교리)에서 폐병(폐질환)으로 인하여 향년 76세로 하세(병사)하였다.

사후[편집]

그의 사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고자 1977년 8월 15일 건국포장(서훈)이, 1991년 3월 1일 건국훈장 애족장(서훈)이 각각 추서되었으며 또다른 한편으로는 1950년 12월 21일, 하세 후 충청남도 아산 송악면(역촌리 선산 묘소)에 안장되었다가 2008년 5월 19일 국립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제3-832호 묘소에 이장되었다.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