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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요시다 내각 (제3차 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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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요시다 제3차 개조내각
내각총리대신제49대 요시다 시게루
성립연월일1951년 12월 26일
종료연월일1952년 10월 30일
내각각료명단 (총리대신 관저)

제3차 요시다 제3차 개조내각(일본어: 第3次吉田第3次改造内閣)은 요시다 시게루가 제49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되어, 1951년 12월 26일부터 1952년 10월 30일까지 존재한 일본의 내각이다.

제3차 요시다 내각 제2차 개조내각개조한 내각이다.

재직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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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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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미일 안전 보장 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은 연합국에 의한 점령 체제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국제 사회에 복귀를 다했다. 일본내에서는 점령 체제의 종언에 따르고 요시다 내각의 퇴진과 요시다의 총리직 사임도 관측되고 있었다. 그러나 요시다 본인은 퇴진과 사임에 대해서는 일절 부인했고 정권을 계속 이끌겠다고 다짐했다. 그것은 요시다 자신이 오랫동안 ‘원맨 재상’으로서의 점령 체제하를 극복해 왔다고 하는 자부심이나 왕성한 권세욕은 물론이고 그 이상으로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 및 미일 안보 조약의 발효와 새로운 체제의 정비(미일 행정 협정의 교섭 작업, 국제 사회 복귀에 따르는 외교 정책 입안, 점진적 방위 체제 정비, 공산주의 억제를 위한 노동운동 규제 등)의 실현을 위해서 정권 유지가 없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판단 때문이었다.

같은 해 12월 19일에 요시다는 다음해인 1952년은 과거 6년을 통한 중요한 해라고 생각하면서 1953년 1월 22일까지 정권을 맡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1951년 12월 25일에는 갑작스럽게 내각 개조를 단행하면서 성립한 것이 ‘제3차 요시다 내각 제3차 개조내각’이다(각료의 인증은 26일). 당연히 요시다는 마스다 가네시치 간사장 외에도 자유당 수뇌들에게 사전에 상의할 일도 없이 원맨쇼를 발휘했다.

법무총재로 기용된 기무라 도쿠타로우익 성향을 가진 검사 출신의 정치가이며 그를 기용한 반공 입법 추진이 예상됐다. 제3차 요시다 내각 제2차 개조내각의 관방장관인 오카자키 가쓰오를 국무대신(자위력 점증 담당)으로 기용한 것은 외교관 출신의 오카자키가 미일 행정 협정 교섭을 담당시키기 위해 그 후 요시다는 자신이 겸무하고 있던 외무대신을 오카자키로 기용했다. 오하시 다케오에게는 경찰예비대 담당의 국무대신으로서 방위 체제의 검토에 들어가게 했다.

당 총무회장인 히로카와 고젠을 농림상으로 기용한 것은 자유당 내에서 마스다 가네시치 간사장과의 ‘컵의 싸움’이 격화되어 강화를 목전에 두고 있는 국민민주당도 가세하여 항쟁이 확대되었기 때문에 당내의 땅을 고르는 것이 목적이었다. 또, 당내 융화에서는 야마자키 다케시국무대신으로 기용하고 있다. 더욱이 ‘요시다 학교’의 멤버인 이케다 하야토 대장상, 하시모토 료고 후생상, 사토 에이사쿠 우정상 겸 전기통신상, 스토 히데오 경제안정본부 총무장관의 유임, 호리 시게루내각관방장관으로 기용하는 등 공직 추방이 해제된 하토야마 이치로 일파에 대한 요시다파에 의한 정권 굳히기가 실시됐다.

이번 내각 개조를 하토야마파의 간부인 고노 이치로는 “터무니 없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 것이다”라고 말했다.

각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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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무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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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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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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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역대 내각       
전임 내각
 제3차 요시다 내각 (제2차 개조) 
 제3차 요시다 제3차 개조내각 
 1951년 12월 26일 ~ 1952년 10월 30일 
후임 내각
 제4차 요시다 내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