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신흥고등학교

전주신흥고등학교
全州新興高等學校
Jeonju Shinheung High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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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훈 지(智), 인(仁), 용(勇)
개교 1900년
설립형태 사립
교장 임희종
국가 대한민국 대한민국
위치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서원로 399 (중화산동1가)
학생 수 832 명 (2021년 5월 1일 기준)
교직원 수 86 명 (2021년 5월 1일 기준)
상징 교목: 은행나무, 교화: 무궁화
학교법인 호남기독학원
관할관청 전라북도교육청
웹사이트 http://school.jbedu.kr/jsh

전주신흥고등학교의 위치

전주신흥고등학교(全州新興高等學校)는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중화산동1가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학교 연혁[편집]

학교 동문[편집]

참고 자료[편집]

각주[편집]

  1. 최초의 신흥인 김창국, 전주신흥학교총동문회. 김창국은 1897년 7월 17일 전주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5명 중 1인이며, '가을의 기도'라는 시를 만든 김현승(金顯承) 시인은 김창국의 차남
  2. 최초의 신흥인 김창국, 전주신흥학교총동문회. 김창국은 1897년 7월 17일 전주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5명 중 1인이며, '가을의 기도'라는 시를 만든 김현승(金顯承) 시인은 김창국의 차남
  3. 독립에대한염원…누구도막을수없어 [커뮤니티] 3·13만세운동 재현행사,[새전북신문].
  4. 지역 인사들과 함께 신흥학교 학생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박태련, 김신극 등 전주 지도자들은 군산에서 4일과 5일 독립만세 시위가 감행됐다는 소식에 듣고 준비하고 있었다. 천도교와 박태련 신간회 총무집에서 필요한 태극기를 인쇄하기로 했었다.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방에서 시위가 계속되자 일본경찰은 신흥학교와 기전학교를 비롯한 전주시내 학교에 강제 방학조치를 취했다. 이에 최종삼 등 신흥학교 학생 5명은 밤을 이용해 신흥학교 지하실에서 태극기 등 인쇄물을 만들었다. 준비를 마친 이들은 13일 장터로 모이기 시작했고, 채소가마니로 위장한 태극기를 장터로 실어 나르고 거사 직전 시장 입구인 완산동과 전주교 건너편에서 군중들에게 은밀히 배부했다. 낮 12시20분께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학생 및 천도교도 등은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남문 밖 시장, 제2보통학교(현 완산초등학교)에서 모여 인쇄물을 뿌리며 시가지로 구보로 행진했다. 시위는 오후 11시까지 서너차례 계속됐다. 또 다음날 오후 3시에도 군중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이후 고형진, 남궁현, 김병학, 김점쇠, 이기곤, 김경신 등 신흥학교 학생들은 시위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모두 실형 1년을 언도 받았다. 이외 신흥학교 학생 3명은 일제의 고문에 옥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시위를 지도한 전주서문교회 김인전 목사는 이후 중국 상해로 거처를 옮겨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현재 신흥학교 교문 옆에 만세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5. “구체화되어가는 야구심판협회”. 동아일보. 1923년 6월 18일. 
  6. 하태홍이 투수, 안용남이 유격수로 출전하였고 6:4로 패배하였다.
  7.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시작된지 3달 후인 1930년 1월 25일 신흥학교 학생들은 학생운동을 벌였다. 교우회 문예부장 박문수(후의 이름은 박철웅), 운동부장 이재영(후의 이름은 이철), 그리고 문예부의 문예계와 서무부의 사교계를 맡았던 함수만, 문예부 도서계와 서무부 기록계를 맡았던 원용덕 등이 중심이 되어 12월 2일 개교 기념 행사 후 거사할 예정이었으나 연기되었다. 이 후 12월 12일에 다시 거사하려 하였으나 학교 당국이 사태를 눈치 채고 조기 방학에 들어감으로 무산되었다. 개학(1월 25일) 이 후 재차 거사를 할 계획이었지만 학교에서는 개학 이후에도 학생들에게 등교하지 말라고 했다. 이에 간부들은 기숙사에 모여 있던 학생들을 규합하여 1월 25일 거사 하기로 결정하였다. 학생들은 빛이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해놓고 태극기와 전단을 붓으로 그려가며, 거사를 준비했다. 1월 25일 아침 8시 30분 간부들은 기숙사에 있던 학생들을 모아 태극기와 전단지를 나누어 주고 다가교 쪽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을 규합하여 80여명을 모았다. 9시 30분 결의문을 낭독하고 전단을 살포하면서 "자주독립만세! 학생만세! 同感만세! (광주학생들의 운동에 同感한다는 뜻)" 등을 외치며 다가교를 건너 시내로 진출했다. 시위학생들은 중앙동으로 진출하였고, 출동한 일본경찰들은 총을 쏘며 학생들을 연행했다. 이 날 경찰에 연행된 학생 총수는 36명이었다. 검거된 학생에게 최고 29일, 최하 15일 구류처분을 즉결하여 동일 오후 4시경에 전주 형무소로 넘겨졌다. 주동자의 한사람인 함수만은 감옥을 나온 후 후유증으로 예수병원에 입원을 하였고, 1930년 5월 19일 예수병원에서 분사하고 말았다. 해방 후 함수만에게는 공적이 인정되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 표창)이 수여되었다.
  8. 1930년대 들어 일본 고유 신앙 신도의 행사인 신사참배는 일본이 군국주의 색채를 강하게 나타내면서 식민지 조선에도 강요되었다.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회에 의해 세워진 신흥학교는 기독교의 유일신론에 위배되는 신사참배를 수용할 수 없었고, 신흥학교의 설립 주체인 미국 남장로교회 해외선교부는 신사참배에 대해 1937년 2월 2일 총무인 풀톤(C. Darby Fulton) 목사를 파견하여 조사 보고하도록 하였다. 일본 태생의 풀톤 목사는 일제의 신도가 단순한 정치적 의식이 아닌 종교적 의미를 가진 것임을 잘 알고 있었고, 한 달여의 조사 끝에 1937년 2월 말경 전주에서 미국 남장로교의 풀톤 선언(Fulton Declaration)이 발표되었다. 이는 학교를 폐쇄할지언정 신사참배를 수용할 수 없다는 내용의 강경한 신사참배 반대 성명이었다. 풀톤 선언에 따라 남장로교 선교회가 경영하고 있는 10개의 중등학교는 1937년부터 신입생을 받지 않았고, 당국이 재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않는 한 나머지 학생들에 대한 교육은 계속해 나가기로 하였다. 하지만 중일전쟁(1937년 7월 7일) 발발 후 매달 6일을 애국일로 정해 전국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9월 4일 전라도의 모든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사전협의회가 열렸다. 9월 6일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학생들은 일본 경찰에 의해 다가공원에 있는 신사로 인솔되었다. 참배 구호 후 일본 순사와 관리만 참배를 하였고, 학생들은 참배를 거부했다. 재차 참배 구호가 내려졌지만 신흥학교 학생들은 퇴장하였고, 기전학교 학생들은 자리에 주저 앉아 울어버렸다. 신사참배는 무산되었고, 조선총독부는 학교를 폐교하려 했다. 그러나 이에 앞서 신흥학교 자진 폐교 청원을 내고 9월 22일 문을 닫았다. 폐교 후 전체 학생 246명 가운데 197명은 고창고보로 전학을 했고 나머지 49명은 전학을 위한 학비 150원이 없어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였다. 학생들 외에도 고창고보로 5명의 교사가 전근되었는데 김태훈, 김교문, 박준영, 최주남, 김병수 교사였다. 신흥학교에서 사용하던 책상과 걸상의 일부도 고창고보로 옮겨졌으며, 모든 서류는 도청 학부부에 보관되었고, 건물은 후에 일본인들의 저금 관리국수련소로 사용되었다.
  9. 지역 학교 중심으로 확산된 '복음의 물결', 전남도민일보, 2015년 5월 11일, "신사참배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근본 문제와 관계가 됩니다. 즉 유일신론이냐 다신론이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일반 기독교 신자이거나 교파의 지도적인 인물을 막론하고 정부가 신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사참배 의식이 기도라든지 신령을 부르는 것 등의 종교적 요소를 다분히 내포하고 있으며, 누가 보더라도 종교적인 성질을 띠고 있다는 인상을 씻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10. 한국 장로교 전통 단절 정체성 상실의 시대, 문화와신학, 2012년 8월호, 기독교 교리를 수정하지 않고는 우리 교육 사업을 계속할 수 없을 것 같은 최근의 사태 발전을 고려하여, 우리는 마지못해 우리 한국 선교부에 적절한 절차로 우리 학교를 폐쇄할 조치를 취할 것을 지시한다. ('풀턴 선언', 제4항)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