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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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잘했어요' 도장

도장(圖章)은 개인이나 단체이름을 새겨 찍도록 된 도구이다. 공사(公私)의 문서에 찍어 그 책임과 권위를 증명하는 물건인데, 신장(信章), (印), 인장(印章)이라고도 한다. 국가를 대표하는 도장은 국새(國璽), 임금의 도장은 옥새(玉璽)라고 한다. 서예나 그림에, 자신의 작품임을 인증하기 위하여 찍는 도장은 낙관(落款)이라고 한다.

도장의 역사[편집]

최초의 도장은 기원전 50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 출현하였는데, 점토판을 이용하여 스탬프처럼 찍는 형태였다.

중국의 도장[편집]

전통 시대 중국에서는 도장을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명칭 용례(用例) 용도
성명인(姓名印) [李小狼] 또는 [李小狼印] 개인의 이름을 표시하는 도장. 가장 일반적
표자인(表字印) [字矗昊] 또는 [矗昊] 개인의 字를 표시하는 도장
신첩인(臣妾印) [臣小明](남), [妾美櫻](여) 신하, 비빈(妃嬪), 궁녀 등이 황제에게 문서를 올릴 때 사용한 도장
서간인(書簡印) [如佩信印] 편지를 보낼 때 사용
총인(總印) [大英伯明皇龍正之章] 이름 및 출신지를 표기한 도장
회문인(迴文印) [徐永裕印] 이름을 표기하되, 문자를 반시계 방향으로 배열한 것

한국의 도장[편집]

한국의 도장은 위서에 따르면 환웅환인에게 받은 천부인(天符印) 3과 중 하나인 인(印)이 최초이다. 본격적으로 한국에 도장이 소개된 것은 기원전 2세기 무렵으로 보인다. 부여의 역대 왕들이 '濊王之印'(예왕지인)이라는 옥새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편집]

진고구려솔선한백장(晉高句麗率善韓佰長)이라는 관인 등 여러 점의 고구려 인장이 유몰로 남아있다.

신라[편집]

문무왕 때 관인을 주조하고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안압지에서 목인(木印), 석인(石印), 설봉산성에서는 봉인(封印)이 출토되었다.

백제[편집]

이름과 간지(干支)를 새겨 찍은 인문이 남아있으며, 양각원인(陽刻圓印) , 양각방인(陽刻方印), 음각방인(白文方印) , 음각원인(陰刻圓印) 등이 있다.

고려[편집]

요나라, 금나라에서 금인(金印)을 받았으며, 원나라에게서 부마국왕선명정동행중서성(駙馬國王宣命征東行中書省)을 받았다. 1370년에는 명나라에서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을 받았다. 고려국왕지인은 고려의 공민왕(1330~1374)이 사용을 하였다. 고려국왕지인은 이후 이성계명나라에 다시 반납하였다. 고려는 자체적으로 주조한 청동인을 사용하였다.

한국의 인장 갤러리[편집]

현재의 도장[편집]

현재에는 필요에 따라 누구나 하나쯤은 다 가지고 있다. 재료는 주로 나무, 이나 , 상아, 플라스틱등으로 만든다.

도장 문화가 있는 나라[편집]

서양의 도장[편집]

서양은 도장문화가 없으며 모든 문서는 서명을 한다. 개인도장은 없으며 직인의 경우 비슷한 것이 있다. 모든 관공서는 도장을 사용하지 않으며 서명을 하고 계약서나 문서도 날인(도장을 찍는것) 하지 않으며 서명한다.

법적 효력[편집]

인영의 동일성만으로 곧바로 민사소송법 제358조가 적용되지는 아니하나, 인영의 동일성이 인정되면 특별한 반증이 없는 한 그 문서상의 인영은 인장 소유자의 의사에 의하여 현출되었다는 것으로 사실상 추정되고(법률상 추정과 구분하기 위하여 ‘추인’이라는 표현을 씀), 날인사실이 추정되면 민사소송법 제358조가 적용됨. 즉 두 단계의 추정이 작용함. 다른 증거 등에 의하여 명의인 외의 자가 날인했다고 밝혀진 경우에는 1단계의 추정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므로 민사소송법 제358조를 적용할 수 없다[1].

같이 보기[편집]

관련 자료[편집]

각주[편집]

  1. 대법원 1989. 4. 25. 선고 88다카6815 판결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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