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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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周) 제후국
월(越)
월나라
월왕구천검의 금문(𫑛)
국성미성(羋姓) 혹은 사성(姒姓)
작위자작(子爵)
윤상(允常)이 즉위후에 칭왕
지역불명
수도회계(會稽, 저장성 사오싱 시)
낭야(琅琊, 장쑤성 롄윈강 시)
오(吳, 장쑤성 쑤저우 시)
분봉자 소강(夏少康)
시조무여(無餘)
존속기간? ~ 기원전 306년
주요 민족백월
멸망원인초나라 위왕의 원정으로 멸망
출전사기》〈월왕구천세가〉
오월춘추
월절서

월나라(越)는 중국 춘추 전국 시대의 나라이다. 무여(無余)가 주나라 왕실로부터 책봉받았으며, 구천 때 전성기를 누렸다.

국호[편집]

戉자의 변천
상대 갑골문
서주시기의 금문
설문해자》에서

죽서기년》 고본에서는 우월于粤로, 금본에서는 우월于越로 표시한다. 하휴는 《춘추공양전》에 주해를 달면서 월나라 사람들은 스스로 어월於越이라 부르는 반면 중원의 화하족은 越이라 불렀다고 전한다.[1] 이들은 중원의 화하족들과는 그 습속이 달라 사이로 분류된다. 《춘추좌씨전》, 《국어》, 《사기》에서는 모두 越로 표시하며, 《월절서》에서는 大越이라 쓴다. 이전에는 于越이라는 표기는 제나라노나라 등 외국에서 부르는 통칭으로 여겨졌었는데 상하이 박물관이 소장 중인 월나라의 청동기에서 스스로 우월于越이라 적은 사실이 발견되면서 스스로도 于越이라는 표기를 사용했음이 알려졌다.[2]:114-115:9-15

상나라갑골문에서 월나라의 민족을 묘사할 때나 월나라에서 제작된 청동기의 절대다수에서는 戉로 등장한다. 뤄샹린은 戉은 부월을 나타내는 글자로 해석했다. 웨이쥐시엔은 戉은 고대 저장성 지역에서만 사용된 무기인 까닭에 이 지역에 량주 문화 말기부터 거주하던 민족을 나타내는 표현이 되었다고 설명한다.[3]:5-6 쟁기자귀를 설명한다고 보는 시각도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평평한 석제 부월을 나타낸다고 본다.[2]:116-120

기원[편집]

미성설(羋姓說)[편집]

사성설(姒姓說)[편집]

오, 월 스스로는 황제 후손을 주장하였다. 현재는 오는 주나라 희성, 월은 하나라 사성으로 정의 된다. 사마천은 사서에서 월나라 국성은 사(姒)씨로서 하왕조에서 나왔다고 한다. 하나라 시조 우 (하나라)의 무덤은 월나라 영역 저장성 사오싱에 있는데 실제 우의 무덤인지 고증되지는 않았고, 중원으로 비정되는 허난성과는 지역적 차이가 너무 크다. 월나라 왕성은 고(顧)씨인데 중국에서 "구"로 발음되므로 구씨이다. 중국의 발음 체계는 고대와 현재가 차이가 있는데 베트남에서도 한국과 사실상 마찬가지로 고(顧)씨다.

팽성제계씨설(彭姓諸稽氏說)[편집]

민족[편집]

월은 고대 남방 민족의 통칭이다. 월나라에서 초나라가 건국되어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월나라·초나라를 바탕으로 한나라가 건국되면서 중국어는 더욱 더 남방 즉 동남아시아 북부의 타이어파 언어와 유사해졌으며 성조가 많아지게 되었다. 유전자 조사 결과 현재 북방 중국인과는 차이가 크며, 더 이질적인 DNA로 조사되었다. 초나라 출신 유방이 한나라를 건국하면서 월나라에 있던 동남아시아 북부와 가까웠던 초나라, 한나라의 중국 한족들은 중국어에 성조라는 특징이 생기게 된다. 현재 남중국인(Southern Chinese)와 북중국(Northern Chinese)는 유전적으로 매우 다르며 북중국인과 한국인 그리고 일본인의 유전자 차이성보다 북중국인(북경, 허베이 등 중국 북부)과 남중국인(후난성, 장쑤성, 푸젠성, 저장성 등 중국 남부)의 유전자의 차이성이 훨씬 크다. 그 이유는 북방 이민족이 중국의 화북지방을 지속적으로 정복하여 월나라, 초나라를 바탕으로 한 한나라 한족들을 남쪽으로 몰아내 정착하였고 끝에는 빈번히 남중국까지 정복하였기 때문이다. 남중국(South China)의 경우 한나라 때부터 현재까지 이민족에 정복당하기 이외에는 항상 한족의 영토였다. 또한 북방 이민족은 유수의 한족 가문들을 남중국(South China)까지 몰아냈고 남중국은 한족들이 이민족을 대항하는 본거지라고 말해도 부족하지 않다. 그런데 북중국인의 유전자는 남중국인과 매우 차이가 크다는 이유는 북방 이민족이 북방 중국 즉 화북지역을 차지하여 한나라의 한족을 남중국으로 몰아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4][5]

지리[편집]

월나라의 위치는 오늘날 저장성 사오싱 시를 중심으로 하여 광둥성, 장시성, 푸젠성 등의 중국 동남부와 베트남 북부에 이르는 지역이었다.[6] 기원전 473년에 오나라를 멸망시켰고, 그 후 초나라에 멸망당한다. 범려구천을 보좌할 때 가장 세력이 강력했으며, 후에 점점 쇠퇴의 길을 걸었다. 기원전 306년 구천의 6대손인 무강 때 초나라에 멸망했다.

중심지인 저장 성 사오싱 시에 우임금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저장성유방의 출신지이며, 진나라 반군의 군사 기지였다. 초한쟁패기 서초가 재건된 지역이며, 전류가 건국한 오월이 있었던 지역이다. 이 지역은 사람들은 한국, 일본과 교역을 많이 하였다. 백제 시대 문헌에 월나라 성씨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흥망성쇠[편집]

오나라의 부차에게 패배하여 수모를 겪은 월나라는 오자서가 버티고 있던 오나라를 반간계이간계 등의 책략으로 멸망시켜, 안정기에 접어들지만, 당시 월나라를 지탱한 두 공신 범려문종의 실각으로, 점차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한편 구천왕의 시기심을 잘 알고 있는 범려는, 그를 피해 제나라로 잠적하나, 문종구천왕의 질투심으로 숙청당한 이후, 나라는 조금씩 쇠퇴하기 시작하여, 기원전 464년구천왕이 승하하면서, 월나라는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멸망[편집]

기원전 306년, 구천왕의 6대손인 무강왕의 시대에 초나라 위왕의 원정으로 초나라에 패했다. 무강왕은 초나라의 추격을 받다가 포로로 잡혀 처형되었다.

월나라 세력은 멸망 이후 일부는 초나라에 흡수되었다. 한나라 건국 한나라에게 귀속되어 민(閩), 동월(東越) 등이 제후국이 되어 해양 세력으로 발전한다. 일본 후쿠이켄에 월국이 존재하나 이 월나라와는 관련이 없다.

역대 군주[편집]

대수 이름 재위 기간 재위 햇수 출신과 관계 사료 출처
1 무여
(無餘)
하나라 소강의 서자(庶子) 사기 월세가(史記 越世家)
2 ~ 9대 군주 미상
11 무임
(無壬)
오월춘추(吳越春秋)
12 무역
(無䁺)
오월춘추
13 ~ 32대 군주 미상
33 부담
(夫譚)
사기 월세가
34 윤상
(允常)
부담의 아들 사기 월세가
35 구천
(勾踐)
기원전 496년 ~ 기원전 464년 33년 윤상의 아들 사기 월세가
전국사(戰國史)
36 녹영
(鹿郢)
기원전 463년 ~ 기원전 458년 6년 구천의 아들 사기 월세가
전국사
37 불수
(不壽)
기원전 457년 ~ 기원전 448년 10년 녹영의 아들 사기 월세가
전국사
38
(翁)
기원전 447년 ~ 기원전 411년 37년 불수의 아들. 사기 월세가
전국사
39
(翳)
기원전 410년 ~ 기원전 375년 36년 월왕 옹(주구)의 아들 사기 월세가
전국사
40 착지
(錯枝)
기원전 374년 ~ 기원전 373년 2년 월왕 옹의 손자 사기 월세가
전국사
41 무여
(無余)
기원전 372년 ~ 기원전 361년 12년 착지의 친척 사기 월세가
전국사
42 무전
(無顓)
기원전 360년 ~ 기원전 343년 18년 사기 월세가
전국사
43 무강
(無彊)
기원전 342년 ~ 기원전 306년 37년 무전의 동생 사기 월세가
전국사


각주[편집]

  1. 《春秋》定公五年:「於越入吳。」 《公羊傳》:「於越者,未能以其名通也。越者,能以其名通也。」 何休疏:「越人自名『於越』,君子名之曰『越』。治國有狀、能與中國通者,以中國之辭言之曰『越』;治國無狀、不能與中國通者,以其俗辭言之,因其俗可以見善惡,故云爾。」
  2. 孟文镛 (2010). 《越国史稿》 1판. 北京: 中国社会科学出版社. 715쪽. ISBN 9787500480624. OCLC 639157035. 
  3. 吴越史地协会编 (1937). 《吴越文化论丛》. 上海: 江苏研究所. 388쪽. 
  4. Wang Y, Lu D, Chung YJ, Xu S (2018년 4월 6일). “Genetic structure, divergence and admixture of Han Chinese, Japanese and Korean populations”. 《Hereditas》 155 (1): 19. doi:10.1186/s41065-018-0057-5. PMC 5889524. PMID 29636655. [tp://blogs.biomedcentral.com/on-biology/2018/04/10/common-ancestor-of-han-chinese-japanese-and-koreans-dated-to-3000-3600-years-ago/ 요약문] – blogs.biomedcentral.com. 
  5. 중국의 한족(漢族)은 한 핏줄이 아닌 다종족(多種族)의 문화적 형성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중국과학원의 연구 조사팀이 남북 각 지역 한족의 혈액을 종합적으로 조사한 결과다. 북경과기보(北京科技報)는 8일 중국과학원의 발육생물학연구소 위안이다(袁義達) 연구원의 최근 저서 '중국 성씨:집단 유전과 인구 분포(中國姓氏:群體遺傳和人口分布)'를 소개하면서 "중국 남부와 북부 한족 사이에는 유전자 구조상 차이가 존재함이 밝혀졌다. 이 차이는 남북 한족과 인근 소수민족 간의 차이보다도 크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소개했다. 신문은 연구 결과를 인용하면서 "생물 유전자학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중국의 한족은 단지 문화적인 공동체일 뿐 혈연적인 연대는 없는 집단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고 전했다. 또 지금까지 한족 사이의 혈통이 남부 양쯔강(揚子江)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갈라진다는 속설이 내려왔으나 실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남북 간 한족 차이는 푸젠(福建)성 우이산(武夷山)과 후난(湖南), 광둥(廣東)을 가르는 난링(南嶺)산맥을 기점으로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조사 보고서는 1918년에 처음 중국인 혈액에 대한 조사가 진행된 뒤 만들어진 305건의 문헌자료(조사대상 사람 수는 90만9900명)를 대상으로 혈액 특성의 지역적 분포를 다시 분석한 것이다. 주로 혈액형과 혈액 속의 효소 또는 단백질의 분포가 지역적으로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에 초점을 두었다.
  6. http://100.naver.com/100.nhn?docid=120759[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